1년 4개월만에 대표팀으로 돌아온 '거미손' 이운재는 사우디 관중이 쏜 녹색 불빛의 레이저 빔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이근호는 첫 골을 뽑아낸 후 쌍둥이 외손자를 본 허정무 감독에게 달려가 동료들과 함께 두 손으로 아기를 어르는 퍼포먼스를
펼쳐보였다. 19년만에 사우디 무승징크스를 깨며 시원한 승전보를 알린 사우디전의 키워드는 '레이저'와 '요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져있다. 레이저빔 사건은 이미 유럽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데 이어 아시아까지
번졌다는 것과 함께 한국 축구 역시 향후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감독을 박장대소케 만든 요람 골뒤풀이에는 박지성의
새로운 리더십이 녹아있다. 그가 제안한 이 뒤풀이를 통해 허정무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는 '하나의 팀'이라는 오작교가 놓였기 때문이다.
◇신종 훌리거니즘의 상징 '레이저'
만일 레이저빔을 맞은 이운재가
침침한 눈에 신경쓰다 골을 내주고 패했다면 어땠을까. 한국 선수들은 주심에게 몰려가 항의했겠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경기를 진행해야
했을 것이다. 레이저 빔을 직접 보지 못한 주심이 판정을 번복할 리는 만무하다. 대한축구협회는 국제축구연맹(FIFA)과
아시아축구연맹(AFC)에 제소할테지만 경기 결과가 뒤집어지는 않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가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거액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이번 사우디전 레이저빔 사건은
자칫 경기 결과를 뒤바꿀 수도 있던 심각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선수 본인에게는 망막 손실이나 시력 감퇴 또는 실명위기까지 처할
수 있다. 이운재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후반 초반 기성용이 내준 파울로 프리킥을 막으려는데 난데없이 녹색 불빛이 눈을 스쳤다. 몇 초동안 눈이 흐릿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막아낸 후에도 세 차례나 더 레이저빔이 내 눈을 겨냥했다. 관중석을 향해 그만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주심에게 항의하고 싶어도 경기를 중단시킬 수가 없었다. 특히 나는 필드 플레이어가 아니어서 주심에게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저빔 사건은 지난 2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올랭피크 리옹과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원정경기에 나선 호날두는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겨냥한 레이저빔에 고통스러워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슛하려던
순간 갑자기 녹색 불빛이 번쩍하자 그는 쉬운 기회에서도 골을 넣지 못했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TV에 노출됐고, 맨유 구단은 UEFA에 진상 조사를 의뢰했다. 결국 UEFA는 '반스포츠적 행위'로
규정하며 리옹 구단에 5000스위스 프랑(약 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약간의 벌금형으로 끝낸 UEFA의 결정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벌금형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며 경기도중 주심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고 더욱 강력한 제재방안을
강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맨유의 폴 스콜스는 2005-2006시즌 도중 레이저빔을 맞고 실명위기에 처해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원래 눈이 약한
스콜스에게는 선수 생명을 앗을 수도 있던 심각한 테러였던 것이다. 특히 시력이 좋지 않아 컨택트렌즈를 끼는 선수들이나 어린 시절
녹내장 수술 여파로 고글을 쓰고 경기에 나서는 네덜란드의 에드가 다비즈같은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이미 아시아는 물론 국내에서도 레이저빔 사건이 심심치 않게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 9월 8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바레인과
월드컵 예선을 치르던 일본의 나카무라 순스케와 엔도 야스히토 역시 녹색 레이저 광선을 맞아 고생해야했다. 선제골을 넣은
나카무라는 "프리킥과 페널티킥을 찰 때 레이저가 내 눈을 겨냥했고 후반에도 내내 계속됐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지난 10월 9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삼성의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레이저빔이 화제가 됐었다. 한 롯데팬이
삼성의 양준혁과 투수 정현욱을 향해 레이저를 쏘았다. 참다못한 선동렬 삼성 감독은 "일본도 몇년 전부터 레이저 때문에 경기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해당 팬은 즉시 퇴장당해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받았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점차 확산되고 있는 레이저 사건은 국내 축구장에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무례하고 수준낮은 사우디 팬들을 욕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이런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대한축구협회는 물론 K리그를 관장하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역시 신종 축구
테러로 꼽히는 레이저빔에 대한 철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요람 골뒤풀이로 하나된 허정무호
골은 넣어야 맛이고, 골뒤풀이는 화려해야 멋이다. 골뒤풀이는 선수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점차
스토리와 집단 예술로 승화되고 있다. 그 시초는 1994년 미국월드컵을 대표하는 브라질의 베베투의 '요람 골뒤풀이'였다. 당시
아들을 얻은 기쁨에 그는 대표팀 동료들과 두 팔로 아기를 어르는 집단 퍼포먼스를 펼쳐보였다.
개인행위에 머물던 골뒤풀이에 '약속'이라는 테마를 접목시킨 것이다. 2006독일월드컵 호주전에서 골을 뽑아낸 브라질대표팀
후배 아드리아누는 전날 아들을 얻은 기쁨에 대선배의 골뒤풀이를 재연했다. 마치 영화에서 특정한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기존
영화의 장면을 모방하는 오마주(hommage·존경을 뜻하는 불어)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19년만에 사우디를 깬 한국 대표 선수들도 베베투의 고전을 모방했다. 허감독의 맏딸 재영씨가 건강한 남자 쌍둥이를 출산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골을 뽑아낸 이근호 옆으로 주장 박지성, 박주영, 오범석, 기성용 등이 두 손을 어르기 시작했다.
허감독은 선제골이라는 짜릿함과 함께 선수들의 깜짝 선물에 마치 춤을 추듯 기뻐하며 함박 웃음을 터트렸다. 매사 부담에
시달리던 허감독이 이토록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지가 얼마만일까? 이번 골뒤풀이는 각본과 감독 박지성, 주연 이근호, 조연
대표팀 동료들로 꾸며진 유쾌한 이벤트였다.
이근호는 "(박)지성이 형이 경기 전 골을 넣으면 이 뒤풀이를 하자고 당부했다. 감독님이 할아버지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골을 넣은 후 다함께 축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허감독은 "선수들이 어떻게 알았는 지 미리 준비를 한 것 같다"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지난 2006독일월드컵을 앞두고 한 전자업체 TV 모델로 나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골뒤풀이를 펼쳐보였던 박지성을 떠올렸다.
이 전자업체는 박지성에게 '독일월드컵에서 골을 넣으면 꼭 '록 뒤풀이'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전 세계를 타고 흐를 박지성의
록 뒤풀이의 파급효과는 폭발적인 인지도 향상과 함께 매출 증대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전에서 동점골을 뽑아낸 박지성은 이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극적인 동점골이다보니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그쳤다. 2년이 흘러 대표팀 주장이 된 그에게서 동료들과 미리 뒤풀이를 논의할 만큼 여유로운 새로운 박지성을 느꼈다.
박지성의 리더십을 다시 생각했다. 지난달 주장 완장을 찬 그는 쌍방향 리더십으로 대표팀 분위기를 일신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허감독과 코칭스태프에게 의견을 개진해 훈련장소를 바꾼데 이어 훈련 스케쥴을 미리 알려달라며 선수들의 편의를 도왔다. 경기 당일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는 그룹 원더걸스의 '노바디' 등 신나는 댄스음악으로 후배들의 긴장을 풀었다.
"경기장 안팎으로 즐겁게 경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그의 약속은 리야드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이근호가 골을 뽑아내자 후배들을 이끌고 허감독에게 달려갔고, 이근호 오른편에 서서 요람 뒤풀이를 지휘했다.
사우디전 전날 후배들을 모아두고 "우리는 여기에 놀러온 것이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자"며 분위기를 다잡은 박지성은 요람
골뒤풀이를 통해 허감독을 무섭고 어렵게 여기던 후배들을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았다. 8년 전 대표팀 막내로
부끄럼 많고 수줍기만 하던 박지성을 바라보는 허정무 감독의 눈빛에는 고맙고, 기특하고, 이쁘고,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무언가가
잔뜩 묻어났다.
첫댓글 이번엔 개념글임에도 불구하고 ㅊㅇㅊ라는 네임밸류 하나때문에 외면당하고 있군...;;;
개념글이긴한데... 너무 개인적 주관감상이 많이 들어가서 ...... 옛날에는 좋은글 많이 썼는데 요즘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