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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르네상스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장욱진
수도권의 유서 깊은 대도시
용인은 알면 알수록 깊이와 향기가 있는 지역이다.
2022년 현재 이 도시는 반도체를 특화된 기반으로 하는 한국 실리콘밸리를 꿈꾼다.
이른바 용의 르네상스다.
도시 경제융성의 추구이다.
도시의 삶과 경제의 높이를 밀어 올리고 있는 한편으로, 서울 면적과 맞먹는 넓은 지역의 풍부한 시민자원. 문화자원. 자연자원.
역사자원을 바탕으로 도시 삶과 환경을 혁신적으로 리디자인하는 한국의 피렌체를 지향한다.
이는 인의 르네상스다.
사람과 사람 즉 시민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시 비전이다.
이를 합쳐서 용인르네상스라고 명명하여, 혁신 대도시 비전으로 삼고 있다.
이 담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시 안에 이미 내재하는 용인 문화의 가치와 자원들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용인의 얼굴들을 주목하고자 한다.
장욱진(1917~1990)은 한국 근대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꼽히지만, 그 이상이다.
그는 서구의 미적 추구를 넘어선 한국적 미학과 서정, 특유의 심플한 감수성으로 인간 근원을 건드리는 독창적인 경지를 열어젖힌 세계적.예술혼이다.
그를 도인, 기인, 야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는 자연과 인간과 가족을 몹시도 사랑했던 천진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73년을 살면서 그가 내놓을 수많은 작품은, 이 땅의 산과 집과 사람과 호랑이, 까치, 나무 같은 꾸밈없는 이미지들이 자그마한
화폭에 인상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동화 같은 그림들이다.
그는 1986년 봄에서 1990년 겨울까지 5년간 용인에서 살았다.
화가로서 가장 원숙했을 시기다.
그가 평생 그린 작품이 720점 정도 되는데, 그 중의 3분의 1인 220여 점이 용인 시절에 창작되었다.
장욱진다운, 절정의 그림이 쏟아진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마북은 장욱진의 화혼이 완성되는 의미심장한 예술 성지다.
끝없는 창작의 신명을 느낀 나머지, '마치 그림 그리는 기계가 된 것 같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단순하고 환상적이면서도 관념적인 표현과 구도, 색감, 형상들이 '용인 장욱진의 결정체'처럼 빚어졌다.
용인은 이미 르네상스의 다빈치'를 용인 안에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하다.
장욱진의 마지막 메카는 용인 마북동이었다
마북동 장욱진 고택을 찾아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장욱진이 자미작 지상에 있던 자취가 남아 있다.
마북동은 외 마북동일까.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오래전 상마곡 마을에 마운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북쪽 마을이라 마북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절이 있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원래 이 마을은 마꼴로 불렀다.
1914년 일본인들이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마곡과 북리를 합쳐 그 앞글자를 따서 마북이라고 했다.
이런 과정으로 생겨난 마북리는 마남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마북을 착각하는 바람에 '마남'이란 말이 만들어졌으ㅡㄹ 가능성은 있다.
마꼴이안 이름은 '막골'에서 왔으며 '막힌 골짜기'의 의미였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장욱진이 지나가다가 '한옥 좋네'라며, 살게 된 용인
지난 8월 18일 102세로 별세한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 여사(1920~2022)는 생전에, 1986년 명륜동에서 왜 용인 마북으로 이사를 왔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지나가다가 그 양반(장욱진)이 이 한옥이 좋다고 해서 그냥 왔지요.
아무 연고도 없어요.
그땐 지금처럼 어수선하지 않았어요.
전망이 훤하게 트여 있어서 앞산을 진달래산이라고 불렀지요.'
장욱진은 역마살이 있었는지 6년마다 이사를 했다.
덕소에서 십여 년 지내다 수안보에서 6년, 명륜동으로 이사 간 뒤 6년만인 1986년 용인으로 왔다.
그리고는 6년을 못 채우고 1990년 생을 마감했다.
한옥에서 3년을 살았고 위쪽에 양옥을 직접 설계해서 2년을 살았다.
몹시 추웠던 12월 27일 부인과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갑자기 천식이 도져서 숨을 거뒀다.
유언은 없었고, 평소에 '죽으면 수안보에 뿌려달라'라고 한 말이 전부였다.
그곳은 병사한 막내아들이 뿌려진 곳이다.
한옥은 189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민가로 지어진 집이라 솟을대문도 없다.
'관자득재'라는 택호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전각과 서예로 유명했던 안광석(청사, 국보급 서각가, 1917~2004)이 새긴 것이다.
보아라, 스스로 얻으라는 집이다.
원두막 관어당의 추억
이 고택의 왼쪽을 돌면 기역(ㄱ)자 집이 나온다.
고택을 살포시 감싸 안는 구조다.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원두막이 하나 나온다.
장욱진이 명륜동에 있던 원드막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곳이다.
현판은 명륜동에 있던 것을 가져와 걸었다.
관어당
원래는 연못 옆에 있었기에 이런 이름이 어울렸는데, 이젠 높직한 자리에 그냥 앉은 원두막이라 좀 싱겁다.
이른은 일석 이희승(국문학자 1896~1989)이 지었고, 글씨는 장욱진이 쓴 것이다.
관자는 눈과 귀를 함께 붙여서 만들었다.
보는 것만 보는 게 아니고 듣는 것도 보는 것이라는 뜻이리라.
고기 어는 아예 생선 한 마리를 가져왔다.
당은 지붕을 예쁘게도 얹었다.
오른쪽 아래쪽에 있는 낙관은 이름의 햇살 치밀 욱자를 쓴 것인데, 왼쪽에 새 한 마리가 오른쪽 해를 향해 날아가는 듯한 그림이 되었다.
원두막에서 오른쪽 비탈로 틀면 중세 유럽 양식의 이틍집이 나타난다.
서양식 건물이라 하여 양관이라 부른다.
단아하고 심플하지만, 한옥에서 건너온 것 치고는 좀 낯설다.
은둔자의 꿈 같은 것이 여기에 들어서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공간이다,
건물에는 창문을 묘하게 막아놓았고, 문이 없는 방이 이채롭다.
장욱진에게 집은 사람이자 세계였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 장욱진에게는 집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었던 듯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를 학생들을 가르킬 때 그는 화백이나 교수란 말 말고, 화가(그림 그리는 집)로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그림 한채였는지 모른다.
그에게 집은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스스로 살 집을 고르고 짓는 것도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욱진은 집을 짓는 그동안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만큼 집짓기에 열의를 지니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집이 주요한 소재이자 테마다.
4.19혁명 무렵이었던지라 학생 시위가 잦았다.
장욱진 주위에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당국에서 그를 시위 주동으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문득 교수직을 내려놓고 떠난다.
모처럼 누린 안정감을 의 집을 버릭 나온 셈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덕소에서 보였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 하나 그것이 그의 '집'이었다.
죽는 말까지 그릴 것
그 덕소를 지나. 명륜동을 지나, 수안보를 지나, 다시 명륜동을 지나, 불쑥 들어온 곳이 용인이었다.
용인은 창작 절정기의 장욱진 작품이 쏟아지는 메카가 되었다.
마지막 '까치'의 영혼이 비상하던 곳이 용인의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욱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줄일 수도 없는 거고, 기능이 없으면 죽어버리는 게 좋지.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
그 기능을 완료한 것일까.
어느 날 그는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듯, 관어당의 낙관에 있는 새가 해를 향해 떠나듯,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렸다.
부인 이순경은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어요'
죽기 하루 전 장욱진은 깊숙한 곳에 종이 뭉치를 꺼내 먹그림을 가려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태워 버렸다.
불쑥, 죽으면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림과 방을 깨끗이 정리 해놓고 떠났다.
마치 집을 떠나듯 그렇게, 장욱진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 그의 유골을 그렇게 뿌릴 수가 없었기에 고향마을에 비를 세우고 유골을 모셨다.
한국적 미학과 순수한 꿈을 담은 거장의 향기
거장 장욱진의 삶과 작품
장욱진은 1918년 1월 8일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지주 가문의 둘째 아들인 부친은 화가였다.
서화와 골동품에 대한 안목도 높았다.
아이들에게도 그림을그리게 했다.
1924년 경성사범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8세떄인 1926년 3학년 시절 히로시마 출신의 일본인 미술 교사가 장욱진의 그림을 보더니 전일본소학생미전(히로시마고등사범주최)에 출품하게 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1등 상을 받는다.
상품으로 유화물감을 받아믐데, 이후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경성제2고보를 거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채육특기생으로 편입학했다.
특히 높이뚜기는 한때 비공인 신기록을 보유했을 정도였다.
1938년 4학년 떄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 '공기놀이'를 출품해 최고상에 당선됐다.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했고, 23세 때인 1941년 귀국해서 역사학자 이병도의 장녀인 이순경(1920~2022)과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서 국제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다.
이 무렵 해방을 맞는다.
1945년부터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며, 1947년엔 신사실파를 결성해 모더니스트 미술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 화파에는 김호나기, 이중섭, 유영국, 백영수 등이 함께했다.
1949년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독',' 까치', '원두막', '마을'과 같은 작품을 출품했다.
'독'은 최근 경매가 7억 원에 낙팔되었는데 장 화백 작품 중 최고가다.
1950년 32세 때 한국전쟁이 났고 이듬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고향인 연기군에 졸아와서 그린 그림이 유명해진 '자화상'이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956년 모기장이 화면을 뒤덮고 등잔과 물그릇, 요강이 보이는 파격적인 작품 '모기장'을 내놓았고, 1960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963년 45세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 집을 지어 거처를 옮긴다.
아내 이순경은 명륜동에서 서점을 운영했고,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덕소로 왔다.
1970년 그린 '진진묘'는 새벽에 몌불드리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진진묘는 이순경의 법명이었다.
서울 옥션 경매에서 5억6천만 원에 낙찰된 그 그림이다.
비공
1977년 여름, 통도사 극락암에 가서 하루를 묵었다.
암자에 있던 경봉스님이 만났다.
이때 경봉이 장욱진에게 비공이란 법명을 건넨다.
(장비공거사작작) 장 비공거사가 까치되어 짖는구나
(무안무인관자재)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그 스스로 있음을 보노라
(비공비색견여래)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니 여래를 보는 듯
경봉스님에게 자신을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 소개했던 장욱진의 말을 위트있게 표현하며 법명을 건낸 것이다.
자신을 그린 듯한 마지막 작품 '밤과 노인'
1980년 장욱진 아내와 함께 수안보로 거처를 옮긴 후 1985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다시 명륜동으로 졸아왔지만, 대학가의 시위 때문에 피루탄이 끊이질 않았다.
1986년 그의 나이 68세에 숨 쉴 곳을 찾아 나섰다가 용인 구성면 마북리의 집을 발견하며 용인으로 이사를 한다.
3쳥쯤 되는 작업실,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그림을 끝없이 그렸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회화에 있어서 회화성은 30호 이내여야 한다.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진다.
또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
한 면을 지배하지 못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세대 1974년 6월호)
1990년 12월 27일. 72세,
그가 그해에 그린 '밤과 노인'은 맑은 밤의 허공을 산책하는 듯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마북리에서 '그는, 어느 달밤 자신의 아름다운 유채 이탈의 충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놓았다.
불세출의 천재 화가는 떠났고, 그림이 남아 마치 영상처럼 한 시대의 광휘와 열광을 증거한다.
장욱진의 작품 세계
그의 그림은 심플하다.
작은 화폭, 단순한 형태의 나무, 나무 위의 집, 아이와 가족, 강아지, 송아지, 새 동화처럼 직관적으로 와닿는 그림 속에는
이 땅에서 살아온 인간이 본능적으로 꿈꾸는 자그마한 세계가 들어 있었다.
그 셰계는 스스로 조형적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지닌 우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우화는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따뜻하고 정갈한 한국적 정취가 화폭에 배어있다.
그는 같은 대상과 일상을 반복해 그린 것을, '히화적 압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반복해서 그리면 더 압축된 게 나와요,
결국 철어놓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정직한 게예요.
자꾸 반복할수록 그림이 좋은 거예요'
1972년 그린 '가족도'는 손바닥 크기만 하다.
초록나무 두 그루, 황토색 집, 그리고 가족 넷, 지붕 위로 날아가는 새
1973년에 그린 '가족', 오른쪽에 집 한 채, 왼쪽에 나무 한 그루, 정자 한 채, 해와 산, 새들, 이걸 뭐라 할까.
사람이 저마다 마음 속에 넣고 사는 우주랄까.
옹기종기 모인, 익숙하고 그리운 것들, 이상세계란 무엇인가.
현실 세계가 작은 마음 거울에 비쳐 아른거리는 것들이 아닌가.
1951년 전쟁 중 에 그린 '자화상'은 부산에 피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그린 것이다.
멋진 연미복 차림에 콧수염이 있는 사네가 황금 드판을 외길을 걷는다.
전쟁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 사람은 자화상이라 불렀다.
일종의 전생 승리랄까.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그가 이 작품을 말하며 한 이야기다. 용인소식 편집팀
장욱진 아내에게 바친 그림
1970년 중반 백성욱(1897~1981, 동국대 전 총장)은 금강경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여기에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과 김강유(김영사 회장), 이고아옥이 함께 공부를 했다.
백성욱은 1977년에 장욱진과 이순경 부부에게 법당을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순경은 몹시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욱진은 그림을 자주 시주했다.
장욱진은 아내를 위해 '진진묘'라는 그림을 두 점그렸다.
1970년과 1973년작이다.
진진묘는 이순경의 법명이다.
진진묘는 무슨 뜻일까.
법명으로 받은 것이니 굳이 뜻을 밝힐 칠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묘는 택멸 혹은 열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3계 (육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났기에 온갖 근심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중환 무의 수행이 바로 묘이기도 환다.
묘는 선을 뜻하기도 한다.
묘행의 반대는 악행이다.
밝은 달과 같이 환한 꺠닫음을 묘월삼매라고 한다.
어렵게 풀 것 있는가
참, 참, 묘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이나 진리라고 부른다면, 그 부처님의 진리는 참으로 묘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수행을 하면서, 문득 꺠달아가는 수행의 과정들을 의미한다면, '참으로 묘하고 팜으로 묘하다'라는 의미도 짚인다.
저토록 깊은 불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내가, 장욱진에게도 참으로 참으로 묘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장욱진이 아내를 위해 쓴 '옹작여시관'의 의미
고택 양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 장욱진의 필체로 씌여 걸려 있었다.
'옹작여시관'이라 쓴 이 서액에도 아내에 대한 마음이 묻어있다.
일제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웅작여시관
일체 세상 일들이
꿈같고 물무늬 같아서
이슬퍼럼 사라지고 변갯불처럼 흩어지는 것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와 같음을 살피는 것
장욱진이 금강경의 사구게인 웅작여시관을 쓴 것은 아내 이순경의 금강경 모임을 지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옹작여시관은 그 모임의 스승이었던 백성욱 박사가 일생을 통해 전한 금강경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꿈같고 물무늬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 것, 그중에 '잠깐' 아닌 것이 있는가.
이와 같은 실상을 잘 살피는 것, 아내의 꺠닫음과 남편 장욱진의 사랑이 함께 스며들어있는 글씨 하나,
용인 장욱진 고택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자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