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50회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존재이다. 내가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만
큼 나도 그녀를 안아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기댈만한 존재가 못되고 있
다. 지금 그녀는 힘들지가 않다. 그녀가 힘들면 나는 그녀를 위해 뭘 해 줄수 있
는가? 현실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아직 생각해 본 것이 없다.
화요일날 점심을 먹고 학교로 내려 갔다. 아버지 차 훔쳐 타고 은정이 누나를
데리고 올 생각으로 내려 갔었다. 누나는 실험실에 있을 것이고 내가 머물만한
공간은 내 자취방 아니면 정희 누나의 약국 뿐이었다. 내 자취방은 썰렁하다.
"약장사 잘 되고 있어요?"
"야, 그 좋은 말 놔두고 약장사가 뭐니? 방학인데 어쩐 일이야?"
"은정이 누나 데리러 왔어요. 누나 안 심심해요?"
"흠, 그래 잘왔어. 놀다 갈거지?"
"응. 뭐 좀 물어 볼 것도 있구요."
"방학이라 많이 한가해. 학교 앞은 학생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방학이
라 이번 달은 영..."
"허허. 누나 외롭지 않아요?"
"왜?"
"이 약국을 혼자 경영하며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또 혼자라 외롭기도 할 것 같
애."
"지금은 약국에만 신경 쓸거야."
"힘들면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옛 애인 생각나지 않아요?"
"그런 건 니가 알 필요가 없단다."
"누나는 여전히 날 어린애 취급하네요.?
"나는 널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너 어릴 때 모습이 뇌리에 박혀있어. 아
마 그것 때문일거야."
"누나, 나 말고 연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또 묻는구나?"
"은정이 누나에게 아무래도 차일 것 같애."
"왜, 싸웠니?"
"아니, 은정이 누나에게 내 속마음이 다 읽혀 지는 것 같아요. 뻔히 보인다는거
죠. 뻔히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이 오래 가겠어요? 아니면 기대고 싶은 마
음이 생기겠어요?"
"후후, 넌 필요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내가 생각을 안하게 생겼어요? 누나가 갑자기 결혼 얘기를 했어요. 내 나이만
생각했지 누나 나이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누나는 얼마 안 남았어요. 쩝, 누나
가 대학원을 졸업하면 결혼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난 그때도 철없는 학생일텐데
현실 문제를 생각하면 내가 결혼 상대자로 보이겠어요? 그때 차이면 나는 은정
이 누나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 것 같아요. 그럴바에야 예전처럼 그냥 누나 동생
하고 지내는 게 나아요.."
"현재에 충실 해. 참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한다. 헤어진다는 생각을 왜 하니?친
구사이였다가 연인사이는 되어도 연인사이였다가 친구사이 되기는 힘들어."
"그래, 은정이 누나가 승주형하고 친구 사이랬어요. 그게 가능해? 둘이가 다시
가까이 있게 되면 그것도 또 문제야. 헤어져 버리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어."
"왜 그리 생각이 많니?"
"은정이 누나는 좀 어렵다니까. 누나도 연하 사귀어 봐."
"네 말대로 연하에게 감정이 생기면 아무래도 힘들 것도 같아. 난 곁에 누군가
있으면 그에게 의지하려는 버릇이 좀 있어. 그것 때문에 철규씨랑 헤어졌을거
야."
"에?"
"은정이가 그러더라. 철규씨와 나 사이는 너무 밋밋해 보인다고. 그건 아무래
도 서로 무관심해 보였다는 말일수 있거든. 그에게 기대고 싶은데 그가 내게 무
관심하게 보이면 서운한 마음 하나가 생겼어. 그게 쌓이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
지더라. 그래서 포기했지. 연하는 그것보다 문제가 더 클 것 같애. 스스로 그 기
대고 싶은 마음을 치유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 같거든. 널 보면 그게 느껴져."
"왜 또 날 걸고 넘어져?"
"넌 나와 은정이에게 배려하는 게 많았어. 부탁하지 않아도 우릴 보살피려고 했
던 게 많아. 남자 다웠지. 그것 때문에 은정이가 너에게 감정이 생겼을거야. 근
데 너, 니가 배려하고 베풀었던 것 보다 더 많이 응석을 부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많이 어려 보여. 또, 넌 가정환경이 좋잖아. 너네 집이 좀 살만하
고 어려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넌 너무 밝아. 그래서 많이 여려보여. 낙천적이
어서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도 없어 보여.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하면 더 없
이 좋지만 연인으로 생각하기엔 모자라는부분이 너무 많아."
마음이 아프다. 저렇게 싸잡아 말하니까, 그것이 맞는 말 같으니까 가슴이 너
무 아프다.
"씨이. 전엔 은정이 누나하고 연인 사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날 부축였잖아.
근데 지금와서 그런말 하는 의도가 뭐야."
"후후, 이건 내가 생각하는 것일 뿐이야. 너 맏이지?"
"응."
"너 겉으로 보면 맏이 같지 않아. 하자만 너 나름대로 마음에 짐이 된 게 많았
겠지?"
"그럼요.."
"그 짐이 나중엔 상당히 큰 힘이 돼."
"누나는 은정이 누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네?"
"나하고 은정이하고는 틀려. 맏이는 보통 누나 하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며?"
"맞아요."
"은정인 무남독녀야. 예전부터 편한 동생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거든. 걔는
오빠나 언니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어."
"그래서요?"
"내가 알기로 은정이는 기대고 싶은 마음보다 감싸고 싶은 마음이 큰 애야. 니
가 응석 부리는 걸 좋아할거야. 혼자 자라서 고집이 세고 독립심도 있지만 또 혼
자 살아서 많이 여리거든. 응석을 받아주면 그 여린 마음 때문에 기분 좋을거
고, 외로움도 가실거야."
"쉽게 말해요 좀."
"넌 은정이가 마음에 딱 들어 할 타입이야. 장남도 고집이 세지만 혼자 자란애
하고는 경우가 틀려. 맏이는 아주 큰 일이 아니고는 자기가 양보하는 편이지. 그
래도 둘 다 고집이 있어서 자주 다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서 남자가 연하라
는 장점이 있어. 서로 조금씩 양보하려고 할 걸. 네 낙천적인 성격을 약간 독선
적이기도 한 은정이가 보완해 줄 수 있어. 은정이가 속으론 많이 여리다고 했잖
아. 니가 어리기 때문에 걔 여린 마음이 많이 바뀔 거야. 넌 여린 구석이 많지
만 대범한 구석도 있어. 동생을 원하는 사람과 누나를 원하는 사람이 만났으니
까 여리고 대범한 게 조화를 이룰 것 같애. 맏이는 또 조금의 리더쉽은 다 가지
고 있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대처 능력은 맏이, 특히 장남이 가장 많이 가
지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 때문에 혹시 은정이가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너
에게 기댈 수 있을거야."
"누나 심리학 배웠수?"
"아니, 가정생활이란 교양 들었었다."
"그런것도 가르쳐 줘요?"
"배운 거 대충 내가 정리한거다."
"그럼 현실 문제는?"
"걔는 현실문제에 대해 너보다 더 개념이 없어. 걔 얼마나 귀하게 자란 앤데.
걔는 현실 문제에 대해 별 생각도 없을 뿐더러 힘들 것이라 생각도 안해. 너 한
번 생각해 봐라. 자기 아빠가 엄청 큰 약국 가지고 있지, 자기 벌써 약사 자격
증 따 놓았지. 엄마가 또 병원하지. 걔가 현실에 대해 뭐 걱정할 게 있겠니? 걔
는 잘난 남자 만나면 바보 돼. 아예 현실에 대한 생각이 없어질거야. 그냥 살아
도 살만할테니까. 그런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못 이겨내."
"무슨 말이여 씨."
"걔는 좀 바보 같은 애를 만나야 현실에 대해 생각할거야. 걔도 널 배우자로 생
각하면 좀 답답할거다. 학생에다가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 놈
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하겠니. 걔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다 주고 싶어하는
애야. 그 좋아하는 사람이 바보 온달 같으면 장군 만들려고 할거야. 그럴려면 자
기가 똑똑해야 겠지? 너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거고 어려움이 닥쳐
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길거야."
"지금 나 바보라는 소리지?"
"응."
"내가 왜 바본대?"
"야, 군대도 안 갔다 오고 사회 진출하려면 2년을 더 학생 신분으로 보내야 하
는 녀석을, 거기다가 2살이나 어린 녀석을 결혼 문제가 닥치면 배우자로 생각해
야 하는데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겠니? 왠만하면 다 포기해. 당장 모셔야 할 부
모님 계시고 생활비 걱정해야 되야하고, 빨리 기반 마련해서 잘 살고 싶은 사람
이라면 지금의 널 절대 배우자로 생각 못하지. 은정이니까 그런 생각 할 수 있는
거야. 걔 복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있
는 배경이 있으니까. 걔 진짜 사랑한다면 붕어빵 장사가 뭐야, 거지하고도 결혼
할 생각을 할 애야. 지가 먹여 살릴 생각하며 똑똑한 사람 만들려고 하겠지. 그
래, 은정인 갖추어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 보다 채워야 할 공간이 많은 배우자를
만나는게 훨씬 나을거야."
"그래요? 하하."
"다른 연상인 여자와 연하인 남자 사이는 몰라도 너네 둘이는 잘 어울려."
"그럼 내가 두살 연하인 거는 제쳐두고 승주 형이 돌아 와 날 밀어내면 어떡해
요?"
"니가 알아서 해야지. 하지만 염두해 둘게 있어. 그건 절대 미덕이 아니다?"
"그게 뭔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떠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잊겠다. 이런 거 말이지. 은정
이가 승주하고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피하거나 둘을 맺어주려고 하지는 마."
"우쒸,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은정이와 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은정이도 나에게 많이 물으러 오거든. 둘이
하는 얘기가 비슷해. 둘이 하는 얘기 들어보고 종합해서 따로 얘기하는 부분만
얘기해 주면 되는데."
"은정이 누나가 내 얘기를 많이 해요?"
"너 만큼은 해."
"왜 그렇지?"
"니가 불안해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걔도 불안한거야."
"누나가 얘기 해 주었구나."
"대충 걔도 느끼지 않겠니? 그래서 니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 얘기해 주
었어."
"은정이 누나하고 연인 사이 된 것이 마냥 기분이 좋았거든요. 별 생각없이 좋
았는데 갑자기 누나가 결혼 얘기를 하잖아. 그 것 때문에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
꾸 어렵게 느껴지는 게 떠오르잖아."
"흠, 참 좋아 보인다. 서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건 좋은거야. 너네 둘이
는 밋밋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너,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초보라서 그렇죠 뭐."
"이겨 내."
오후 다섯시에 누나 삐삐를 받고 약대 앞으로 갔다. 언제 한 번 꼭 날을 잡고
말리라. 배씨 성을 가진 저 박사과정 새끼가 아무래도 누나에게 찝적 되는 것 같
다. 왜 같이 나오냐. 그 사람이 차에서 내린 날 보더니 인사를 해 준다. 웃어 주
는 모습이 날 비웃는 것 같다. 누나는 내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차에 올라 탔지
만 난 한참을 배군을 째려 보았다. 그가 돌아서자 마자 알밤을 까주었다. 자꾸
누나에게 치근덕 되면 못으로 지 차를 긁어 버려야지. 그래도 안되면 백미러나
유리창을 깨 버려야지. 그래도 안되면 날 잡는다.
"누나!"
"왜?"
"그 다른 사람들은 잘 떼어내더만 저 사람은 왜 못 떼어 내는데? 누나, 저 사람
이 좋아요?"
"나도 저 선배에게는 졌어. 아무리 쌀쌀 맞게 굴어도 허허 웃고, 모진말 해도
아주 태연해. 완전 능구렁이야.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적응이 되었나봐. 싫지는
않아."
"우쒸."
"걱정마. 저 사람 백명을 갖다줘도 철수 너하고 안 바꿀테니까."
"정말?"
"너 진짜 어린애 같다."
"어린애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없지. 갑니다?"
"그래, 갑시다."
"자취방 안 갔다 가도 되요?"
"뭐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대충 정리하고 나왔어."
"저녁은 서울가서 먹어요? 오늘은 내가 사줄게."
"그래라."
해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지지 않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곤했을까? 누나
는 서울에 들어설 무렵부터 조용해 지더니 청담동에 도착했을 때는 고개를 내 쪽
으로 기울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신호등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을 때 내
어깨에 기대고 말았다. 흠, 내게 기댄 누나의 모습이 좋다.
누나가 좀 더 자라고 쓸데 없이 워커힐 쪽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다시 청담동
쪽으로 돌아 왔다.
"어?"
"인제 일어 났어요?"
"아직도 여기야?"
"밥 어디서 먹을거야?"
"여긴 별로 먹을 데가 없잖아."
"뭐 먹고 싶은데?"
"너 사주고 싶은 거 사줘."
"굶읍시다."
"나하고 장난치고 싶어 죽겠지?"
"국밥 먹을래요? 곰탕 잘하는데 있던데."
"곰탕 먹을까?"
"그럽시다."
누나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뭐 때문에 웃었는지 모른다. 밥 먹
다 말고 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얼굴에 아무것도 묻은 게 없었는데 그
냥 실없이 웃었다. 내일 승헌이 새끼가 저런 누나의 모습에 기가 죽을 것이다.
푸하하.
"안녕."
아침 8시에 누나 집 앞으로 갔다. 아버지 차를 또 하루 더 빌렸다. 누나는 먹
을 걸 잔뜩 들고 있었다.
"그 병원이 있는 곳이 여기서 머니?"
"한시간 반 정도 걸릴거야. 근데 그 싸가지고 온 게 뭐야?"
"이거? 김밥하고 수육, 음료수. 그리고 떡도 좀 샀어."
"어제 나하고 헤어진 다음 산거야?"
"응."
"승헌이가 좋아하겠네."
"걔 수술하고 나서 많이 아프겠다."
"좀 불쌍해 보이긴 했어요."
"친구한테 잘해 좀."
"우리는 서로 구박하며 우정을 쌓아요."
"어휴, 누가 공돌이 아니랄까봐."
"근데 이거 승헌이 때문에 준비한 거 치고는 너무 과하다. 승헌이가 잘생겨서
그러는거지?"
"너 요즘 질투 많이 한다?"
"이 정도면 양호하지요 뭘."
"네 친구에게 널 잘 보이려고 그런다."
"걔한테 내가 잘 보여서 뭐 하게?"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야."
"하하. 누나 그런 말은 우리 나이에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데."
"에구, 출발이나 해."
"그러지요."
벽제 가는 길은 구파발을 넘어서자 좋은 주위 풍경을 누나에게 선사했다. 누나
는 율전하고는 분위기 틀린 그 길을 따라 소풍가는 기분을 냈다. 창을 열고 밖으
로 고개를 내 밀어 마냥 웃었다. 저 여자도 그러고 보면 온실 속 화초같고 고운
집의 소녀같은 여리고 밝은 모습이 대부분인 사람이다. 군부대가 많은 곳이라 간
혹 못보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야 탱크다!"
"저게 어떻게 땡크냐?"
이상하게 생긴 장갑차 같았는데 포 달렸다고 누나는 탱크라고 우겼다.
"탱크 맞잖아."
"탱크는 포가 더 길지."
"너 군대 갔다 왔어?"
"아니."
"근데 니가 어떻게 알아? 저건 탱크야."
"그래 탱크다."
벽제 군 병원 앞에 도착했다. 면회 신청을 하는데 그 문 앞에 서 있던 군인 하
나가 자꾸 누나를 쳐다 보았다. 너 보다 나이 많으니까 관심 끄라. 이제 일병인
새끼가...
병원 안 매점에서 승헌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많은 남자들이 누나를 쳐
다 본다. 그 시선이 느껴졌다. 누나는 신기한 듯 주위만 살필 뿐이다. 저 여자
가 예뻐서 쳐다보는거야, 아니면 어쩌다 찾아 오는 여자라 쳐다 보는거야? 불쌍
한 놈들... 조금 가엾다. 다들 귀한 자식들인데 어디 한군데 다쳐서 병원 복을
입고 있는 나 또래의 군인들이 겉 모습만 보면 좀 많이 안되어 보인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누나를 흘깃 쳐다 보며 밝은 모습이다.
한 놈이 아주 이상한 걸음걸이로 딸딸이를 끌며 걸어 나온다. 저번 보다 더 초
라하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승헌이가 아픈 모습으로 걸어 나오지만 내가 반가웠
는지 웃음을 띄우고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쪽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다 누
나를 보았다. 꿈쩍 놀라는 승헌이. 새꺄, 오늘 내 확인시켜 주마.
연하가 어때서 51회
벽제란 곳은 철수 때문에 처음 가 보는 곳입니다. 서울 위쪽은 거의 가보지 못했
었는데, 벽제 가는 길은 율전 내려오는 길의 풍경과는 달랐습니다. 군부대들이
많이 보였고, 헌병들이 지키고 있는 초소들도 보였어요. 승주가 군에 있을 때도
면회를 가지 않았었는데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승헌이란 애를 면회하러 갑니다.
철수 때문에...
군 병원 앞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역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슨 죄
수 수용소도 아닌데 입구 분위기는 꼭 교도소 같은 모습이었어요. 조금 겁이나
철수의 팔을 잡았지요.
면회 하는 곳은 80년대 남자 고등학교의 매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까까머리
군인들이, 군인들이라 하기에는 몰골이 영 시원찮네요, 뭘 사먹으러 오고 또 면
회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러 오곤 했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잘 구분이 안되는 사
람들도 많았습니다. 근데 승헌이라는 애는 아픈 애라는 게 표가 나더군요. 저 모
습 쟤 부모님이 보시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겠어요. 참 잘 생겼던 앤데 입고 있
는 옷이라던지 신고 있는 슬리퍼라던지, 그리고 세수를 안했는지 얼굴에 때도 끼
여 있었어요. 무엇보다 걸음걸이가 제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아픈 곳 때문에 간
혹 인상을 찌푸리지만 친구가 왔다고 얼굴은 밝네요.
호호 저 지금 시선을 많이 받고 있어요. 여기 여자가 저 뿐이거든요. 하긴 여자
가 나 혼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제일 많은 시선을 받겠지요. 이 말을 철수에게 하
면 상당히 닭살 일어나는 표정을 지을겁니다. 나 혼자만 생각해야지요.
승헌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했습니다. 승헌이는 나에게 꾸벅 인
사는 했지만 철수를 잡아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등을 보입니다. 저들 끼리 할 말
이 있나 봅니다. 철수 친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나 풀어 놓아야 겠습니다.
"너, 나이 많은 여자 왜 데리고 왜 왔어?"
뭐야 저 녀석. 여기 여자가 나 하나 뿐이니까 승헌이가 말한 나이 많은 여자는
분명 나일 겁니다. 누가 철수 친구 아니랄까봐. 저 녀석도 그렇게 나에게 친절
한 아부를 하지는 않네요.
"너 저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거 안 믿었잖아."
철수는 여전히 남들에게 나를 얘기할 때 저 여자, 이 여자라고 하나 봅니다. 두
고 보자. 뇬이라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여기 병원이기에 망정이지 부대였으면 난리났다."
"왜?"
"내가 일병 사호봉 때 쯤 우리 누나 세명이 모두 날 면회 왔었던 적이 있거든.
고참님들 보다 나이 많다고, 나이 많은 여자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그렇게 말했는
데도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바람에 내가 좀 곤욕을 치뤘지."
"다 들려 승헌씨."
승헌이가 날 멀뚱히 쳐다 보네요. 어쭈, 날 무시하고 다시 철수와 얘기 합니
다.
"내 목소리가 좀 크냐?"
"응."
"내가 포병이라 가는 귀가 먹었어. 하여튼, 군 면회 갈 때는 혼자 가라. 그리
고 나이 많은 여자와 붙어 다니면 일찍 늙는다고 내 누누히 말했건만..."
이 번엔 철수가 나를 빼꼼히 쳐다 봅니다.
"누나 이 번에도 들었죠?"
"응, 네 친구 손 좀 봐야겠다."
승헌이가 머쩍은 듯 날 보며 씩 웃습니다. 저 녀석 예전부터 날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애교스럽지 않았어요. 내 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였지요.
"누나 빨리 얘한테 얘기해줘요."
"뭘?"
"누나가 내 애인이라는 거."
"후후. 승헌씨?"
철수와 승헌이가 돌아 앉아 나와 마주 보았습니다. 승헌이는 한동안 무뚝뚝한
표정이었어요. 음식을 쳐다 보더니 그제야 승헌이가 내게 밝은 모습입니다.
"절 면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반말해도 되지?"
"그러세요. 뭐 존댓말 해 줄거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태도가 영 삐딱하네요.
"내가 철수랑 사귄다는 거 안 믿었다며?"
"네."
"후후, 나이 많은 여자가 연하 사귀면 안됀다는 법 없지?"
"그렇지요. 이거 제가 먹어도 되요?"
"너 먹으라고 싸 온거야."
"고맙습니다. 그래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시군요. 철수야 이런 건 배워야 돼."
철수는 대답 없이 나와 승헌이만 번갈아 쳐다 봅니다. 이런 건 배워야 돼? 그
럼 다른 것들은 배울 게 없다는거야 뭐야.
"예전부터 나와 철수가 친한 거 봤지?"
"네."
"연인 사이 같지 않던?"
"아니요."
"뭐?"
"철수가 매번 당하는 것 같던데요."
"당해?"
"우리 누나가 저한테 하는 거랑 비슷했어요. 우리 누나도 자기가 좋을 땐 저한
테 엄청 잘해주거든요. 근데 자기가 기분 나쁘면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자기 기분
대로만 행동해요. 나는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좀 이기적인거 같아
요. 자기 편한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이 녀석 말이 내게 조금 가시가 되네요. 나도 철수에게 그런 적이 많은 것 같
긴 해요. 흠, 철수가 고맙네요. 삐친 적은 있지만 내 기분 맞추어 주려고 노력
해 준 모습이 많이 떠올려 지거든요.
"야, 저 번에 내가 면회와서 먹을 거 못 사준것까지 이 번에 다 만회한거다? 내
가 누나에게 부탁해 이렇게 맛있는 거 준비한거야."
철수가 그 말을 하며 내게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 그런 척 해 주마.
"누나 진짜 철수 애인이에요."
"응."
"장난으로 그러는 거 아니죠?"
"그래."
"근데 왜 장난처럼 대답해요?"
"응?"
"수줍게 고개 숙이며 대답해야죠. 너무 당당하니까 오히려 장난스럽잖아요."
유유상종이라더니 완전 철수 말투 그대로네요.
"그래야 되니?"
"그럼요. 그리고 아무리 연하지만 철수는 아직 높임말 쓰는데 누나는 반말 하네
요. 그리고 내가 남자 친구의 친군데 누나는 날 후배로만 대하네요."
"야, 임마."
철수가 중간에 끼어 들었지만 승헌이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누나 만약에 철수 가지고 논 것이라면 저 가만히 안 있습니다. 누나 소문 별
로 안좋았어요. 그래서 나도 누나를 좋게 보진 않았어요. 이왕 사귀기로 했다면
누나 마음이 진심이었으면 좋겠어요. 철수가 누나에게 하는 것을 보면 얘는 분
명 짐심이에요."
철수가 약간 어이 없다는 듯 승헌이를 꼬아 보고 있습니다. 나도 뭔가 한 방 맞
은 기분입니다. 그냥 기분 좋게 승헌이에게서 철수 얘기랑 군대 얘기를 들으며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질까 하고 찾아 왔는데 승헌이가 처음부터 가시 있는 말
을 내 뱉는 바람에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흠, 겉으로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철수 좋아하는 거 진심이야. 친구
로서 철수를 아끼는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염려하지 않
아도 돼. 호, 그런말을 하는 거 보니까 철수를 제법 좋아하나 보네?"
철수가 대화 분위기 무겁게 느껴졌는지 웃으며 장난스런 말을 뱉었습니다. 철수
가 조금 난처했을 만도 합니다.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내게 조금 미안한 마음
도 들었을 것이고 자기를 위하며 이런 말을 한 친구에게 고마움도 들었을테니 말
입니다.
"이 자식 내게 매일 구박만 하더니..."
대화는 점차 밝아졌습니다. 승헌이라는 애도 철수처럼 밝았습니다. 꾸밈이 없었
고 생각하는게 참 소박하더군요. 자기 누나들에 대해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을 많
이 했지만 누나들을 아끼고 상당히 좋아하고 있는게 보였어요. 철수가 하는 말투
에도 저런 심리가 포함이 되어 있겠지요. 내게 툭툭 내 뱉는 말들에는 분명 저
런 마음이 들어 있을 겁니다.
"너도 철수처럼 미팅 나가면 항상 깨지는 편이었어?"
"나는 철수보다는 나은 편이지요. 저는 그래도 간혹 애프터를 신청하면 상대가
날 만나주기는 했어요."
"후후, 그 뒤로는?"
"철수와 똑 같았지요 뭐."
"왜? 너 참 잘생겼는데?"
철수가 가소롭다는 듯 승헌이를 쳐다 보며 말을 받습니다.
"누나 얘가 얼마나 썰렁한 줄 모르죠? 얘 미팅 나가면 하는 말이 네, 아니요,
그것 뿐이에요."
"그래도 그런 말만 하는 나는 싸가지 없다는 말은 안들었다. 철수 얘, 자기는
친한 척한다고 내 뱉는 말들이 엄청 퉁명스럽고 톡톡 쏘거든요. 같이 나간 우리
가 들어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처음 보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요.
근데 얘는 그걸 모르나 봐요. 오죽하면 한 번은 어떤 여학생이 얘 면전에서 싸가
지 없다는 말을 뱉었었어요."
"나에게도 참 퉁명스럽게 말을 해. 에구 불쌍한 박철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미팅 나가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평소처럼만 해
도 상당히 인기 있을 것 같은데..."
철수의 얼굴이 찌푸둥합니다.
"누나 이 새끼는 말이죠? 내가 유일하게 나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앤데도 불
구하고 여자 앞에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샌님이에요. 완전 바보야. 얘가 애
프터 신청하고 나와 같이 어떤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걔가 얼마나 답답했으
면 그렇게 싸가지 없는 나하고만 얘기를 나누었겠어요. 얘는 또 여자 보는 눈이
낮아서 조금 예쁘다 싶으면 저런 애가 감히 나를 마음에 두겠냐는 생각을 해요.
에고 불쌍한 놈."
둘이서 제 살 까먹기를 하네요.
"나한테는 얘기 잘 하는데?"
"얘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에겐 말을 또 잘해요. 아무래도 누나들 영향
인 듯."
"후후."
둘 다 참 순진한 청년들이네요. 어려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력적이기도 합니
다.
"나는 그래도 군 입대하기 전에 여자 친구 있었다?"
"나도 있잖아 임마."
"넌 나이 많은 여자잖아."
"그래도 예쁘잖아."
"의정이도 예뻤어."
"뭐가 예뻐 임마."
"나이 많은 여자하고 노는게."
"사자머리 하고 놀았던 게."
이것들이 진짜. 날 앞에 앉혀 놓고 나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
은 말만 하네요.
오후가 깊어 집에 갈 차비를 했어요. 이 곳에 남겨지는 승헌이가 좀 가엾게 느
껴 집니다.
"나 아무래도 다음 달은 사회에 나갈 일이 많겠다."
"왜?"
"여기서 퇴원하면 병원에서 휴가를 줘. 그리고 또 병장 된다고 휴가 받잖아.
둘 다 9박 10일짜리니까 다음 달은 사회에서 날 자주 보게 될거다."
"그럼 승헌이 나오면 철수와 같이 나도 한번 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헤헤. 그러면 좋지요. 제 여자친구도 한 번 보여줄게요."
"그래. 몸조리 잘 해."
"오늘 와 주셔서 고마워요."
"철수에게 고맙다고 해."
철수가 나와 승헌이에게서 멀어 졌다 뒤돌아 보았습니다. 뒤돌아 가는 승헌이
의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내게 잠깐 기다리라더니 승헌이에게 뛰어 갔습니다.
우정이라도 확인하려고 저러나 생각했습니다.
"너 수술했지? 어디야?"
"배 아래."
"아프냐?"
"응."
"잘 들어가."
"퍽!"
"으...억! 나쁜 새끼."
"다음에 보자."
철수 저거 나쁜 놈이네요. 헤어짐이 아쉬워 승헌이에게 간 줄 알았더니 승헌이
수술한 곳을 장난스럽게 가볍웠지만 한 대 쥐어 박았습니다.
"왜 그래 너?"
"날 구박했잖아요. 그리고 누나에게도 좋지 않은 말 했고."
"후후, 아니야 걔가 했던 말 생각해 볼 문제야. 널 많이 아끼나 봐."
"대학와서 사귄 몇 안되는 친구 중 하나에요. 제일 친한 두 명중의 한 명이기
도 하구요."
"너도 쟤를 많이 아끼니?"
"뭘 아껴. 쟤 좀 불쌍해."
"왜?"
"내 눈엔 상당히 잘난 놈인데 쟤는 전혀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흠, 후후."
"왜 웃어?"
"너도 마찬가지야."
"뭐가?"
"너도 잘난 구석이 참 많은데 그걸 인식 못하잖아."
"나는 너무 잘난 척해서 탈이지."
"그런데 왜 내가 너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거니?"
"에?"
오늘은 기분이 좋네요. 그냥 기분이 좋았어요.
"학교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야, 집으로 갈래."
"내일 내려가게?"
"내일도 그냥 집에 있을까 봐."
"연구실 나가야 되지 않아요?"
"하루 쯤 더 빠진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내일 우리 귀여운 철수하고 데이트나 할
까?"
"우쒸. 귀엽다 그러지 말고 멋있다고 해 줘 봐요."
"내겐 멋있는 것보다 귀여운 게 더 좋은데?"
"나는 멋있는게 좋아."
"어휴, 그러니까 더 귀엽네?"
"나 또 삐친다?"
"흐흐."
"그렇게 웃지 마요."
얘기하다 보니까 어느새 차는 우리 집 앞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가 있을 곳으로 데려다 주는 사이. 저녁은 어둡습니다. 늦
게까지 밝았는데 지금은 해가 빌딩 아래 어느 지하로 숨어 버렸습니다.
"내일 집에 있을거면 연락해요."
"그럴게. 근처에 가서 차라도 한 잔하고 갈래?"
"차를 가지고 나와서 안돼요. 갖다 놓아야죠."
"흠, 그래 나 들어가 볼게."
"네. 내일 봐요."
"참, 헤어지는게 아쉬우니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냥 내리기 아쉬웠어요. 내 말이 조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철수가 막 대하기
어려워 지면 곤란한데... 내 말이 조금 틀려졌습니다. 그걸 철수도 아네요.
"싶은데? 말투가 좀 달라졌네요. 누나가 뽀뽀 해줄게. 이게 맞잖아. 누나라는
말도 안쓰고, 끝이 싶은데?"
"하지 말까?"
"그래 그게 정상이지."
"어휴, 이런 말하면 분위기 좀 잡아라."
"움."
입술을 내민 폼이 영 장난스럽습니다. 짧은 입맞춤만 해주고 그냥 웃으며 차에
서 떨어졌습니다. 철수가 차를 돌릴 때까지 집으로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철수
도 차를 돌리고 나서 바로 떠나지 않고 창문을 내려 이제 진짜 간다는 말을 해
주네요.
"잘 들어 가요."
"그래 조심해서 가."
"누나 나 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에?""
"그냥 사랑해요. 이렇게 말을 던져야 그것과 같은 답을 듣는거야."
"후후, 잘 자요."
철수는 언제 쯤 자연스럽게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할까요. 방금 내게 말한 질문
은 이미 자기의 마음이 그렇다는 답을 가지고 있지만 받는 입장에선 많은 아쉬움
이 있지요.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고백했으니까...
밤에 거실에서 수희랑 비디오 한 편을 보았다. 이제 일학년인데 수희는 학교 생
활에 많이 바빠했다. 오붓한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었다. 오늘 나란히 앉아 이렇
게 비디오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아직도 약사 분쟁 그거 계속 하냐?"
"그건 약대생들이 하는거지. 우리는 그저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는 것 뿐이야."
"쩝, 너네 그러다 또 집단 유급 사태 나고 하는 거 아냐?"
"몰라."
"네 친구 은정이와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러지는 않냐?"
"걔하고 만났을 때는 가급적 그 얘기는 안해. 그 얘기하면 분명 말다툼이 생길
테니까."
"한약 조제 문제 그거 중요한거니?"
"그럼, 우리는 그걸 6년을 배워. 약대생들은 4년 중에 겨우 일년을 배울 뿐이
야. 그러면서 약사들은 자기들 챙길건 다 챙기잖아. 뺏어와야 돼."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뭐. 너 겨우 한한기 학교 다니더니 말은 완전히 한의대
생이다?"
"비디오나 봐."
아무리 친동생이지만 그리고 얘도 이제 성인이지만 둘어서 같이 보기에 비디오
내용이 남사스럽다. 수희는 뚜러지게 비디오만 쳐다 보고 있다.
한 남자가 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여자의 팔을 잡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여자
를 벽에 밀어 붙였다. 남자와 여자가 눈싸움을 하더니 여자가 눈을 떨구고 고개
를 숙여 버린다. 남자가 다른 한손으로 여자의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마주치게
한다.
"하겠지?"
"그렇겠지?"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훔치고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거부하
지 않고 남자가 하는대로 이끌린다.
"수희야 저런게 실제에서도 통할까?"
"마음이 맞으면. 분위기가 있잖아."
"진짜로?"
"남자의 눈빛이 강렬했어."
그래? 누나에게 한 번 써 먹어 봐야 겠다.
"너 뽀뽀 해 봤냐?"
"그런 걸 왜 물어? 아직은 못해 봤어."
"그래 니 나이가 아직 어리지."
"이거 왜 이래. 내 또래 애들 중에 남자들 하고 자 본애도 수두룩 해."
"이게 말하는 것 좀 봐. 너 그런 애들 본 받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는다."
"알았어. 근데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오빠가 어떻게 알거야."
"조신하게 살어?"
"그럴거야. 근데 오빠는 뽀뽀 해 봤어?"
그럼,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오빠는 애인도 있단다 얘야.
"왜? 해 봤을 거 같니, 아닌 거 같니?"
"못해 봤을 거 같애."
"이게 오빠를 무시하네?"
"후후, 해 봤어?"
쉽게 말하지 못했다. 얘 친구가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했다.
은정이라는 애가 어느 정도 내게 마음이 있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노코멘트."
"히, 못해봤으니까 그러는 거지?"
"비디오 봐."
저거 한 번 써 먹어야지.
승헌이 면회 간 다음 날 은정이 누나와 점심 때부터 같이 놀았다. 누나 백화점
에 쇼핑 하는데도 따라 가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여자 쇼핑하는데는 함부로 따
라 다니지 말아야 겠다.
"이거 나한테 잘 어울리니?"
누나 옷 살 마음은 없었는데 괜히 마네킨 보고
"저거 누나 입으면 잘 어울리겠다."
라는 말 잘못 했다가 장장 세시간을 누나 옷 집에서 옷 입어 보는 거 봐야 했
다.
"정말?"
"응. 다음에 옷 사러 가면 저런 풍으로 한 벌 사요."
"그래, 오늘 너도 같이 나왔는데 옷이나 한 벌 살까?"
누나 백화점에서 옷 고르지 못했다. 저거 동네까지 가서 여러 옷집들 돌아 다녔
다. 누나는 상당히 고급 의류점을 꺼리낌 없이 들어 가 옷을 사지 않고 당당하
게 나왔다.
"누나 돈 있어요? 아까 그 옷은 백만원도 넘던데."
"나도 저런 비싼 옷은 사 입기 힘들어."
"그럼?"
"그냥 입어 보는 거지 뭐."
"제법 당당하네요?"
"입어 봤다고 다 사야 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안 그런데."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 내가 너 졸업 사진 찍을 때, 너 입고 있는 정장을 보
고 느꼈어. 내가 같이 가는건데..."
"왜 안 어울리던가요?"
"너 점원이 사라는대로 샀지?"
"응."
"쯧, 다음에 살 때는 날 불러."
"그건 그렇고 누나 진짜 옷 살거야?"
"응. 몇 군데만 더 돌아 다녀 보자."
"몇 군데? 아까 그 마네킨이 입은 옷 사면 되잖아요. 그것 때문에 옷 사입고 싶
었던 거 아냐?"
"나는 마네킨이 아니란다."
"나는 왜 데리고 다니는데?"
"잘 어울리는지 봐줘야지?"
"잘 어울린댔잖아요."
"후후, 나 못됐지?"
"에?"
"결국은 내 맘에 들어하는 걸 살거면서 널 데리고 다니는 게 밉지?"
"그건 아니에요."
"여자 심리라는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막 자랑하고 싶거든.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예쁘다 생각되면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해. 누나가 그런 심리로 널 데리고 다니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쳇, 뭘 그렇게 다 가르쳐 주냐. 누나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기분 좋아
요. 근데."
"근데 뭘?"
"너무 힘들어."
"아휴, 나도 알아. 남자들 여자 쇼핑하는 데 그래서 잘 안 따라 가려고 하는
거."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게 따라 다닐게요."
"다음에는 아니라는 거니?"
"다음은 그때 생각하지 뭐."
그래서 장장 세시간을 누나 옷 한 벌 사러 다니는 파트너 역할을 했다.
날 데리고 다녔던 게 미안했던지 누나가 저녁을 사 주었다. 그때 누나에게 전화
가 왔었다. 연구실인가 보다.
"내일은 갈게요."
아무래도 배군인 거 같다. 교수님까지 들먹거리며 누나를 연구실에 나오라고 협
박하는 거 같다.
"그럼 오늘 내려 갈게요. 내일 아침 일찍 등교하면 되잖아."
누나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진짜 오늘 내려 가게요?"
"내일 아침 일찍 내려 가지 뭐."
"오늘 같이 내려 갈래요?"
"너도 내려가게?"
"내 보금자리가 거기 있는데 못 갈것도 없지."
"니가 간다면 오늘 내려가도 돼."
"그러지요 뭐. 잠깐 핸드폰 좀 줘 봐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내려가게?"
"뭐 필요한게 있나? 거기도 짐 많이 있어요."
"너 짐 싸갖고 올라 왔잖아."
"핸드폰 줘 봐요."
"에, 컴퓨터로 작업할게 있어서 학교 내려 가봐야 겠어요."
"너 놀려고 내려가는거지?"
"프로그래밍 할게 있어요."
"내일 아침에 가면 되잖아."
"친구가 연락이 왔는데 내일 오전 중으로 제출해야 할 프로그램이 있는데 제 도
움을 필요로 해서요. 제 컴퓨터에 그 프로그램 소스가 깔려 있거든요."
"나 그렇게 말해도 잘 몰라 임마."
"아버지도 컴퓨터 좀 배우세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후후, 아휴 난 컴퓨터 화면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워."
"그건 모니터 화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언제 올라 올건데?"
"내일 올라 올게요. 그게 안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라 그럼."
"네. 오늘 편히 주무십시오."
전화를 끊자 누나가 날 보며 배시시 웃는다.
"너 거짓말 잘한다?"
"누나에게 배웠어."
"나에게? 내가 언제 그랬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물어 봐요."
"나도 그랬나?"
어제 비디오에서 본 거 오늘 써 먹을까? 그래 볼까? 하하.
연하가 어때서 52회
전철 안에서 못 볼 것 봤다. 수원으로 가는 전철 안, 금정역을 지나면 사방은
가는 빛들을 몇 개 머금었을 뿐 깜깜해 온다. 그런 창 밖이 참 정겹다. 그런데
마주 앉은 년,놈들이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서로 거의 부둥켜 안고 있다.
"누나 저런 거 좋아 보여요?"
"좋아하면 저럴 수 있겠다, 이해는 가지만 좀 그렇다 그지?"
"그렇죠? 이런 게 차라리 괜찮지 않아요?"
"뭘?"
"손 한 번 줘 봐요."
누나의 왼 손을 내 오른 손으로 꼭 잡았다. 누나가 피식 웃었다. 누나 손을 잡
고 나는 마주 앉은 놈,년 중 놈을 째려 보았다. 근데 년이 날 째려 보는 바람에
눈 싸움에서 질 것 같았다.
"너 그렇게 째려보다 쟤들이 시비걸면 어떡할래?"
누나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귓속말을 했다.
"그렇게 귓속말 하지 마요. 그러면 쟤들이 더 기분나빠 해. 누나도 빨리 째려
봐요."
"뭘?"
"저 자식이 날 째려 보고 있잖아요. 누나는 여자를 째려봐요."
"야, 너 23살 맞어?"
"에이씨, 졌다."
찬 바람이 분다. 어디서 불어 오는 바람일까? 한 여름에 부는 찬 바람은 마음
을 시원하게 했다. 정희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약국 문은 닫혀 있었다. 자취방
가는 길 앞의 내 키보다 작은 옥수수가 바람에 흩날렸다.
"올 해도 서리 합시다."
"올 해는 반반으로 나눠."
"안 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네?"
"후후."
누나 방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누나가 방 문을 따며 내게 묻는다.
"내가 네 방 갈까? 니가 내 방 올래?"
"그런 말 크게 하지 마."
"왜?"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 해."
"체에, 니가 흑심만 품지 않아 봐.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저 여자는 자주 내 마음 속 품었던 생각을 콕 찍어 내
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 방에 뭐 놀게 있나? 나중에 누나 방 갈게요."
"그래, 그럼 한 10분쯤 후에 내 방으로 와."
"아, 아니다. 누나가 내 방으로 와라. 올 때 차 한잔 끓여서 와요."
"왜 마음이 바뀌었냐?"
"응."
누나는 내가 방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세수까지 다하고 난 다음 삼십 분
을 더 놀았는데도 오지 않았다. 차 끓이느라?
누나는 젖은 머리칼에 괴물같은 얼굴을 하고 후다닥 내 방으로 뛰어 왔다.
"뭐여? 얼굴에 뭘 바른거야?"
"여름은 습기가 많잖니. 전에도 이런 거 많이 발랐었어."
"괴물이잖아."
"넌 내 얼굴 알잖아."
"으쒸."
누나가 내 침대 위에 인형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뭐여 저
폼은, 지가 무슨 공주인 줄 아나. 자네가 암만 공주같은 포즈 취해봐라 내 방이
이렇게 썰렁한대. 하기야 백설 공주는 난쟁이 집에 살았지? 나는 책상 앞에 앉
아 누나만 쳐다 보고 있다.
"누나."
보조개도 없는게, 입을 오무리더니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
를 보여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누나가 손 가락 하나를 펼쳐 보여준다.
"일분?"
고개를 흔든다.
"10분?"
누나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들어와서는 말했잖아. 말 좀 해."
주먹을 쥐어 보여 주는 게 자꾸 말시키지 말라는 뜻 같다. 확 덮쳐 버려? 그래
도 지가 말 안하나 볼까?
누나를 강렬한 눈 빛으로 쳐다 보았다. 누나는 눈을 껌벅거리기만 할 뿐 별다
른 변화가 없다. 나 일어서면서도 누나를 강렬한 눈으로 계속 쳐다 보았다. 무표
정이던 누나 얼굴에 약간 변화가 왔다. 눈을 더 자주 껌벅 거렸다. 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누나 앞으로 갔다. 너 뭐하는거야, 이런 말 할 줄 알았다. 누나는 아
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누나 앞으로 다가 갔다. 누나가 날 올려
다 보았다.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멋있게 씨익 웃어 주었다. 누나가 눈 깜박임을
멈추고 큰 눈으로 날 올려다 본다. 그래, 저 눈빛 영화에서 여배우가 보여준 눈
빛이다. 됐다, 오늘 누나를 한 번 껴안아 보자. 두들겨 맞을까?
누나가 갑자기 일어 섰다. 떡 내 앞에 서더니 비켜 달라고 하는 폼이다. 내 속셈
을 알아차린 것일까? 비켜 줄 수 없었다. 누나가 한 발짝 옆으로 옮겼다.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나도 옆으로 옮겨가 누나를 가로 막았다. 누나가 날 노려 본다.
눈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누나 한 손을 잡았다. 누나가 뭐하는 짓이냐는 표
정을 보인다. 솔직히 그 표정인지는 모르겠는데 누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
다. 벽에다 밀어 부쳤다.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내 뛰는 가슴이 점점 누
나 가슴으로 가고 있다. 강렬한 눈 빛으로 내 입술을 누나의 입술 쪽으로 가져가
고 있다.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피식 피식 거리더니 소리 나지는 않지만 아주 웃
기다는 듯 웃었다.
"팩 하고 웃으면 안된다 말이야. 나 지금 씻으러 가야 돼. 비켜."
뭐여, 고개를 떨구고 비켜 주었다. 잡았던 손도 그냥 풀려 버렸다. 내가 지금
했던 짓이 누나에게는 코메디로 보였나 보다. 슬프다, 내가 아무리 연하라고 이
런 모욕을 주다니... 내가 흑심을 품고 이런 짓을 했는데 누나는 피식 웃고는
지 방으로 간 것도 아니고 내 방 욕실로 갔다. 그리고선 한 다는 말이 이랬다.
"박철수."
"왜요?"
"내 방 가서 수건 좀 갖다 줘."
"내 수건 써요 그냥."
"이게 수건이냐 걸레지."
"우쒸, 그래 난 걸레로 얼굴 닦는다. 수건 욕실에 있어요?"
"그래."
누나는 방 문을 잠그지 않고 내 방으로 왔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좀 조심성
이 없어 보인다. 챙겨 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팍팍 생긴다. 누나 방 욕실에 가서
수건을 찾았다. 뭐여, 이거. 누나는 내 방으로 오기 전에 샤워를 했었나 보다.
이런 칠칠 맞지 못한... 아무리 자기 혼자 산다고 속 옷을 이렇게 아무데나 벗
어 놔도 되남? 세탁기 위에 벗어 놓은 저 것은 어디를 가리는 옷인고? 나는 저
런 거 안차고 다니는데... 쿠헤헤, 팬티도 있네.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수건을 갖다 주고 누나를 째려 보며 콧 방귀를 뀌었다.
"속 옷을 벗었으면 세탁기에 넣던지 좀 해라. 다 큰 여자가 칠칠맞게..."
누나가 입을 벌리더니 약간 부끄러운 표정이다. 날 째려 보는 듯 하더니 바로
표정이 싹 바뀐다.
"너 보기만 하고 그냥 왔지?"
"응."
"세탁기에 좀 넣어 놓고 오지."
이건 절대 날 애인 취급하는 게 아니다. 아주 어린 애 취급하는 것이라고 밖에
는 생각할 수 없다. 고개를 푹 떨구고 방으로 나왔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
냐. 내가 아무리 자기하고 친하지만 조심스러움이나 수줍어 하는 게 있어야 되
지 않나? 나에게 감정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누나가 얼굴
을 닦으며 나왔다. 누나가 말이 없다. 왜? 내가 말이 없었으니까.
"누나 방 가."
"왜 또 삐친 표정이야?"
"내가 아까 이상한 행동 했잖아. 그게 그렇게 웃기던가요?"
"응."
"우쒸."
"그거 혹시 날 유혹하려고 했던 그런..."
"그래."
"그런 건 너답지 않잖아. 너 표정에 아니다라는게 다 보여."
"그건 그렇다 치고 나에게는 수줍음 같은 거 없어요? 일부러 속 옷 봤다고 말했
으면 좀 부끄러워 할 줄도 알아라."
누나의 얼굴이 홍조 빛이다.
"그,그래. 네가 일부러 날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어. 그런데 부끄
러운 표정 짓고 아무말 못해 봐, 더 이상하지. 그냥 네가 아무말 하지 않았고 내
가 욕실에 갔을 때 벗어 논 속 옷을 봤다면 많이 부끄러웠을거야."
"잘났어, 아주 잘났어."
"그래, 나 잘난 거 이제 알았니?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나 언제 누나 한 번 이겨 봐요?"
"뭣하러 이겨?"
하긴 져 주면서 기분이 더 좋다면 이길 필요가 없다. 가까운 사이일 수록 져 주
는 경우가 많다. 음, 내 넓은 아량으로 져 주마. 그래도 사나이로 태어나서 아녀
자에게 항상 지기만 해서야 되겠나.
"이리 와 봐요?"
"아까 처럼 이상한 짓 하려고?"
"내가 팔 목 잡아 줄테니 팔 씨름 한 번 해."
"뭐어?"
"이이잉."
가소롭군.
"힘 좀 더 써 봐요."
"두 손으로 하면 안돼?"
"해 봐."
"이이잉."
"아자!"
내 힘 한 번으로 누나는 몸까지 디비졌다. 누나와 침대 위에 밥상 깔고 마주 보
며 팔씨름 한 판 했다. 그래 영화 보고 어설프게 했던 행동 보다는 이런 게 훨
씬 낫다.
"갑자기 힘을 주면 아프잖아."
"두 손으로 해도 못 이기냐? 앞으로 까불지 마요."
"잼있다."
"왜? 한 판 더할래요?"
"그게 잼있다는 게 아니고 너하고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말이야."
"우쒸."
"왜 또?"
내가 좋은 이유가 재미있다는 것 뿐인가? 나와 같이 있다는 이유가...
연하가 어때서 53회
간혹 아무생각없이, 저 여자가 나와 친하지 않는 미지의 여자라고 느껴질 때 누
나는 참 아름답고 잡념이 스며 들지 않는 고운 대상으로 보여 진다.
오늘 아침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누나는 그런 모습이다. 들판에 피어 있는 장
미처럼 오랫동안 바라 볼 수 있는 아름다움. 나만의 꽃이라 생각하며 꺾어 화병
에 꼿아 놓은 장미 보다 더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아름다움. 화병에 꼿아 놓은
장미는 나만의 것이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곧 시들 것을 걱정해야한다.
서울로 돌아 가야 하는 아침, 누나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생각에 누나를
약대까지 배웅했었다. 나는 약대 건물 안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고 누나는 조금
떨어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대로 놓아 두고 조금 떨어져 바라만 볼 수 있는 사랑
은 참 아름다울 것 같다. 나는 행복하다. 이 행복한 시간들을 잃기 싫기에 작은
일에도 점점 신경을 쓰게 된다. 질투심이 생기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한 바라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누나에게 자주, 삐쳤니, 라는 소리를 듣
는다. 자주 삐치는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나 보다.
들판에 있는 장미를 누군가 손을 댈까 봐, 싫은 바람이 불어 와 꽃 잎을 다치
게 할까 봐 그 꽃을 꺾어 화병에 꼿아 두는 순간부터 이별의 아픔은 시작되는 것
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냐고?
나 지금 삐치고 기분이 나쁘다. 나 지금 못마땅하다. 내가 졸라 싫어하는 녀석
에게 저런 다정한 모습으로 이야기 나누는 누나에게 삐쳤다. 누나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을 때 배군이란 작자가 살금 살금 다가와 누나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 보는 누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뭔 저런 새끼가 다 있나. 근처에 내
가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날 신경쓰지 않고 누나
에게 친한 척 이다. 실실 웃으며 이틀 결석한 사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게 주려고 뽑았던 커피를 뺏어가 버렸다. 누나는 왜 화를 내지 않고 그런 행동
에 같이 웃는 걸까. 누나가 내 여자라는 생각 때문에 졸라 기분 나쁘다. 나는
내 장미에게 누군가 관심을 두는 것이 싫다.
배군은 누나에게는 빨리 들어 오라는 말을 남기고 내게는 머쩍한 손 인사를 해
주고 떠났다. 친한 척 하지 마 새꺄. 뒤돌아 선 배군의 등을 보고 조까,라는 뜻
의 알밤을 까 주었다. 누나가 다시 커피 한 잔을 뽑더니 내게 건네 준다. 그리
고 내 행동이 우스운지 웃는다. 연상이기 때문에 저 표정에 의심이 간다.
"후후, 배선배에게 너무 악감정 갖지 마. 저 사람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다
저러니까."
"그 말을 왜 하는데요?"
"너 아까 배선배가 내게 친한 척 하니까 삐칠려고 했잖아."
기분이 팍 나빠진다. 누나의 말투와 표정이 날 아주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다.
화난 투로 답을 했다.
"왜 자꾸 내게 삐친다는 말을 해요? 내가 그렇게 자주 삐쳐요?"
"장난삼아 한 말이야. 왜 그래?"
"그 삐친다는 말 하지마요?"
"화났어?"
"안 났어요. 배군이 연구실 안에서도 아까처럼 그래요?"
"뭐? 내 볼 찌른 거?"
"그런 식으로 친한 척 하냐구요?"
"응. 자주."
"씨."
"뭐 내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별 신경 안
쓰이던데? 선배가 후배에게 친한 척 하는거라고 생각 해."
"저 사람은 좀 심해."
"그래, 그런 부분도 많이 있지."
"많은 게 아니고 대부분이라니까. 내가 있는데도 자주 그랬지?"
"너 승주가 없으니까 배선배에게 질투 하는구나?"
그 말에 누나를 째려 보았다. 누나가 요즘은 내 변한 말투와 눈 빛에 겁을 먹
는 경우가 있지만 금방 도로 아미타불이다. 지금도 내 표정에 신경을 쓰고 아무
말 못했지만.
"나 이만 가 볼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그래. 잘 가."
자꾸 엉덩이 치면 애인이고 선배고 상관없이 성희롱으로 고소해 버릴거다.
"씨이..."
"예쁘니까 치는 거야. 나중에 전화 해."
누나가 손을 흔들어 주고 연구실로 들어 가 버렸다. 배군 때문에 좀 불안하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내일은 누나가 서울로 오겠구나.
철수와 같이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독자로 커 왔기 때문에 내
방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빠, 엄마가 바쁠때면 그 혼자 있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외로웠지요. 나는 오랫동안 동생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
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자기 동생하고 싸웠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
려 그게 부러웠어요. 가족이기에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감싸
고 위해 주는 마음이 생겨 버리는 동생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지요. 잘 따
를 때도 있으나 심술도 부리며, 나를 위하며 헤아릴 줄도 알지만 투정도 부리는
그런 동생 하나 갖기를 꿈 꾸었지요. 철수는 내 그런 꿈 속 동생의 모습과 가장
잘 맞는 녀석이었어요. 그 마음 때문에 연인 사이가 된 지금도 철수를 보면 꿈
속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내 행동들을 표현하게 됩니다. 철수는 요즘도 여전히
내가 꿈 꾸어 온 동생의 모습과 잘 맞습니다. 날 위하는 마음이 많고 투정도 부
리며, 내가 부탁하는 것에 빈 말을 잘 하지만 대부분 들어 주려고 하는 편이지
요. 그렇지만 항상 동생으로만 대할 수는 없겠지요. 나도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철수는 두 살 연하의 핸디캡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
다. 그는 내가 동생처럼 대하면, 거기에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모
른 채 자주 삐치는 모습을 보이지요. 흐음, 내 마음을 알까요? 그래도 싫은 게
있나 봅니다. 나도 태도를 조금씩 고쳐 나가야 겠습니다. 그는 장남이지요. 동생
으로 지내 본 경험이 없을 겁니다.
"여보세요?"
"어, 철수 네가 바로 받네?"
"어떻게 삐삐를 치지 않고 전화를 다 했어요?"
"이제 너네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에 적응이 됐거든."
"누나 나 지금 뭐하고 있는 지 모르지?"
"뭐 하는데?"
"흑흑, 나 혼자 집 봐요."
"응?"
"우리 부모님 계 모임에서 부부 동반으로 어디 놀러 가는데 따라 가셨어요. 이
틀 정도 안 들어 오실거야. 분명히 우리 엄마가 내 동생보고 나 밥 챙겨주고 나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아 주라고 했거든요."
"쿠쿠, 그래서?"
"여자들은 믿을 게 못돼."
"뭐야?"
"내 동생이 내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르죠? 나는 그래서 믿었어. 얘가 저녁
은 차려 줄거다. 근데 이 기집애가 그냥 배신을 때리고 아무말 없이 도망을 가
버렸네."
"그래서 저녁을 안 먹은거야?"
"점심도 굴머써. 점심 굶고 자고 일어나니까 깜깜하고 아무도 없는데 저녁을 어
떻게 먹나."
"차려 먹지 그랬어?"
"집에 와서까지 내가 챙겨 먹어야 돼?"
"후후, 누가 아들 아니랄까봐. 내가 가서 차려 줄까?"
"누나가 뭘 차려 줘. 근데 지금 어디에요?"
"율전, 지금 전철 타려고 가고 있는 중이야."
"이제 올라 오는 거야?"
"집에 도착하면 10정도 되겠다."
"누나 밥 사줄래요?"
"그때까지 굶을려고?"
"그게 아니고 음 잠깐만, 그래 신림에서 만나자."
"응?"
"어짜피 누나 전철 내려서 버스나 택시 타야 되잖아. 신림 정도면 누나가 거기
까지 오는 시간이랑 내가 여기서 거기 시간이나 비슷할거야. 내가 누나 집까지
태워 줄테니까 밥 사줘요."
"허허, 그래 고맙다."
"사 주는 사람이 고마워 해서는 안돼지."
신림 역에서 철수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렸어요. 삐삐를 쳐도 전화가 오지 않더군
요. 차가 막히나? 기다리면서 포장마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떡볶이 한 접시
를 사 먹었습니다. 철수는 10시 가까이 되어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차창을 내리
더군요.
"너 뭐야?"
"타요."
"밥 안 먹을거야?"
"미안해서 못 얻어 먹겠어. 일단 타요."
"여기서 순대 볶음 사먹자."
"많이 기다렸죠? 근데 별로 화를 내지 않네?"
"차 막히던?"
"흠..."
그냥 웃지요? 저 표정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 녀석의 복장은 집에서
별 지체 않고 바로 나온 모습입니다. 그가 문을 열어 주길래 탔지요.
녀석에게 이런 면이 있었단 말인가? 그냥 웃어 준 그가 제법 어른스러웠습니
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반대 차선의 교통 상황을 보았습니다. 엄청 막히더군요.
날 데리러 오던 그가 상당히 짜증이 났을 법 한데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서 변명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 삐돌이가...?
"너 밥 안 먹을거야?"
"집에 가면 소희가 와 있겠죠 뭐."
"내가 너네 집 가서 차려 줄까?"
"누나가 우리집에 왜 오나."
"못 갈건 뭐야?"
"우리집은 누나 집보다 보수적이야."
"나중에 그럼 너네 아버님 계실 때 한 번 간다?"
"와요."
"그럼 뭐 사먹고 가자."
"됐어요."
오늘 철수에게 좀 감명을 받았기에 그냥 보낼 수 없었지요.
"너 여기 주차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어."
"왜?"
"샌드위치 만들어서 우유하고 가져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누나 샌드위치 만들 줄 알아요?"
"그것도 못 만드는 사람 있니?"
"나."
"치이."
"누나는 저녁 먹었어요?"
"응. 아까 너 기다리면서 포장마차에서 이것 저것 줏어 먹었어."
"누나도 배신녀네. 나는 누나 생각하며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쌔가 빠지게 고생
했는데, 차 졸라 막히대. 무단횡단 오징어 장수의 유혹을 뿌리치며 누나와 저녁
먹을 생각만 했는데, 그 한 시간 가까이 늦었다고 오뎅을 먹었단 말이야?"
"오뎅이란 말은 안했다? 떡볶이 사 먹었어."
그래, 넌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해야 너 답지. 오늘 감명 받은 거 취소. 그래도
해 줄건 해 주어야지요.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요."
옆에서 녀석이 샌드위치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빼꼼히 쳐다 보는 내가 머쩍
게 느껴졌는지 씩 웃네요. 지금 모습은 연인이라기 보다 데리고 살고 싶은 동생
같습니다. 내가 데리고 살까?
"배가 많이 고팠구나?"
"응."
"우유도 마셔가며 천천히 먹어."
"샌드위치를 제법 맛있게 만드네?"
"그래, 샌드위치는 내가 평생이라도 만들어 줄 수 있다."
"평생?"
연하가 어때서 54회
집에 오니까 수희가 친구를 데리고 와 있었다. 조금 껄끄럽다.
"안녕, 오빠."
"어, 오랜만이다."
작은 은정이가 왔다. 허, 몇 달만에 다시 봤는데 더 숙녀티가 났다. 대학 생활
일년의 차이가 제법 큰가 보다. 수희는 은정이에 비해 많이 어려 보인다. 누나하
고 난 이년 차인데...
우리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수희따라 자러 왔나 보다. 둘이 노는 데
나도 끼워 주었다.
남자들 무리에서 여자 하나는 공주 된다. 하지만 여자들 무리에서 남자 하나는
바보 아니면 노리개감 밖에는 되지 않는다. 둘이서 날 엄청 놀렸다. 내가 간혹
바보 같은 우스개 소리를 하면 작은 은정이가 날 때렸다. 자기는 재밌다고, 애
교 부린다고 때리지만 맞는 나로서는 상당히 아팠다. 내가 속이 좁아 그런지 몰
라도 한 대 더 때리면 싸울려고 마음 먹었었다.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 중심적이고 모두들 약간은 이기적인가 보다. 둘이가 참
친하게 보였다. 내가 왜 그 얘기를 했을까.
"너네 둘 약대생하고 한의대생인데 참 친하다? 그 약사들이 주장하는 게 옳냐,
아니면 한의사 측에서 주장하는게 타당한거냐?"
그렇게 친하게 보였던 둘이가 입싸움하다가 서로 삐쳤다. 저들 저러다가 우정
에 금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2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 은정이 고년이 집
에 간다고 내게 투정을 부렸다. 뭐여? 나보고 태워 달라고? 니가 내 애인이냐 뭐
냐, 나는 나이 어린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어랏,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은정이 누나 저 아버지가 약사고 우리 아버지는 한의사다. 뭔가 문제가 될 것
도 같다.
어제 괜히 저들 둘을 싸움 붙였나 보다. 둘이 토라져 얼굴도 마주 보지 않는
다. 어린 티를 내는구만. 나 귀한 아들인데, 여동생하고 걔 친구 아침 밥까지 차
려 주었다.
"오빠 고마워요."
"네 오빠야?"
"뭔 상관이야."
여자 둘이 있을 땐 둘이 종종 싸우게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각자 참 많이
오버하며 내게 친한 척 했다. 아니다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음, 나 잘난
놈이다. 다 내가 잘 났기 때문에 저 둘이가 내게 친한 척 하는거다.
"수희야 니가 참아라."
은정이가 조금 더 오버하길래 은정이 편을 들어 주었다. 은정이가 수희를 대하
는 태도가 참 귀엽다. 내게 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은정이 쟤가 맘에 들지만
내게는 쟤 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은정이가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맘으로 좋아하는 것. 여자를 바라볼 때 그 것의
차이를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 어쩌면 그냥 좋아하는 마음으로 연인을 사귀다 후
다닥 결혼해 버리는 게 편할 수도 있겠다.
누나와 영화 한 편 보고 차 한잔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 도중에 핸드폰이 울렸고 저 여자가 전화 끊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졸라 반가운 표정이다. 승주 그 새끼 저 집 졸라 돈 많은가 보다. 캐나다에서 여
기로 그것도 헨드폰에다 국제 전화를 때렸다. 아, 열 받는다. 예전엔 안 그랬는
데 내가 속이 좁아졌나? 누나의 저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새끼, 잠이 안 오
면 동네 한바퀴 뛰고 오지 왜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다 전화를 했을까. 승주
는 아직 누나를 사랑하고 있나 보다. 바보 같은 놈 그러면 붙잡아야지. 아니다
붙잡았으면 저 여자가 나와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승주를 미워하지
는 않지만 누나와 친한 척 하는 건 싫다.
승주가 한달 뒤에 온댄다. 돌아오면 은정이 누나는 나와 애인 사이니 신사답게
물러 나라고 그래야 겠다.
"한달 뒤에 온대요?"
"응."
"거기서 눌러 살아도 되는데..."
"치, 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뭐?"
"승주는 내가 너하고 사귀는 거 알아. 예민한 반응 보이지 마."
"내가 그렇게 보여요?"
"응."
"내가 표정 관리를 잘 못하나? 표가 잘 나나 봐요?"
"흠, 그게 좋은거야. 아직 때가 덜 묻었다는 증거거든."
"그래요?"
"띠리리."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 번에 배군이다. 아까 승주에게 전화가 왔을 때와 다른
느낌으로 기분이 나빴다. 새끼 왜 저러냐. 그 새끼는 졸라 싫다.
"왜 전화 했대요?"
"그냥 안부 전화."
"진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요?"
"응."
"누나에게 마음이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잘 모르겠어. 그런 거 같다고 생각 되다가 다른 여학생에게 하는 거 보면 외국
에서 산 탓에 사교적일 뿐이다라고 느껴져."
"여학생에게만 친한 척 해요?"
"헤헤, 응."
"나보다 몇 살 많지?"
"다섯 살."
"후배가 선배 패면 안돼겠죠?"
"응. 그냥 그러려니 해."
"나 누나하고 연인 사이 되고 난 뒤 점점 속이 좁아지는 거 같애."
"불안해서 그런거야. 나 너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불안 해 하지
마."
"그래서 그런가?"
"그래."
나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율전 내려가 있을 것이다. 승헌이가 휴가를 받아 목요
일 쯤 학교 찾아 온다고 했다. 내 방에서 남자 재우는 거 싫지만 동엽이도 없고
승헌이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 사자머리가 보고 싶은가 보다. 지가
힘들다고 사자머리하고 연인 사이였다가 친구 사이로 바꿔 버렸지만 그렇게 생각
한다고 마음까지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걔하고 놀다가 집에 가기 힘드니
까 내 방 신세를 좀 지자고 부탁했다. 그래 내 방에서 차 한잔까지 대접해 줄
수 있다. 나도 학교 내려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누나 나 이번 주에는 율전 내려가 있을거야."
"왜? 누나 보고 싶어서?"
"내 친구 때문에, 하지만 누나 보고 싶어서 내려 가는 것도 맞아요."
"흠, 너 많이 솔직해 졌다?"
"그럼. 참, 정희 누나는 잘 지내고 있나? 누나 요즘 정희 누나 잘 안 만나죠?"
"응. 요즘 개 선 본 남자 만나고 다녀."
"응? 나이가 몇인데 벌써 선을 봤어?"
"선봐서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사귀면 되고, 그러다 더 좋아지면 결혼하는 거
지. 맞선 보는 거, 그거 꼭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 아니다. 올해 좋은 사람 만나
서 내년에 시집가게 되면 딱 좋은 나이에 시집 가는거야."
"그런가? 예전 사귀던 그 사람은 완전히 잊혀진거야?"
"정희가 생각보다 매정한 구석이 있어. 헤어졌다고 말한 후로 철규씨 얘기 한
번도 안했어."
"그래요? 못 잊어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런 거 같지는 않아. 저 번에 선 본 남자가 맘에 드나 봐. 그 사람하고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군지 한 번 봐야 겠네. 누나는 선 안 봐요?"
"야아!"
"아, 맞다. 누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구나. 누나도 사람 매정하게 잘 잊지?"
"사람마다 틀려. 잘 잊혀 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흠, 대충 내 알지.
"수요일날 내려 갈테니 손 발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응? 손 발을 왜 씻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승헌이가 내 방에서 잘테니까 내 방 잠옷 입은채로 찾
아오고 그러지 마요."
"알았어."
승헌이는 상병 계급을 달고 아주 불쌍한 몰골로 잠시 사회로 나왔다.
"나, 이 번 휴가 받고 들어 가잖아. 그럼 다시 일주일 뒤에 병장, 들어 나 봤
나? 병장. 그거 달고 또 나올거야."
새끼가 어깨의 계급장을 툭툭 치며 과시를 했다. 아직도 배가 아픈지 걸음걸이
가 어색했다.
"나는 오늘 율전 내려 갈거다."
"그래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어라. 오늘은 집에 가야지."
"집에 바로 들어가지 날 왜 불렀냐?"
"내 모습이 괜찮냐? 아, 저 번주에 너 면회오고 난 다음 날 우리 엄마하고 작
은 누나하고 면회 왔었는데 날 보더니 엄마가 막 우시잖아. 작은 누나도 눈물을
글썽 거렸어. 지금 그때하고 비교해서 괜찮아 보이냐?"
"응."
"나 갈게."
"꼴랑 그거 물어 보려고 이 더운 날, 날 불렀냐?"
"응."
"더런 새끼."
연하가 어때서 55회
하, 많이 덥다. 해가 기운 늦은 오후인데 학교 앞 아스팔트가 끓는다. 내 자취
방으로 바로 가기가 싫다. 학교 오면 갈 데 많다.
"정희씨, 안녕."
"야, 후후. 너 왜 왔어?"
"나? 반기지는 못할 망정 왜 왔냐구? 섧다 진짜."
"반가우니까 그러는거지."
"헤헤, 내가 그 마음 알죠. 더워요 반가운 사람인데 시원한 냉커피라도 한 잔
타 주면 안될까?"
"냉커피?"
"응. 얼음 동동 띄운 커피 말이지."
애인 아니라도 괜찮네. 친하니까 자연스럽게 들어 와서 자연스럽게 곁에 가 앉
을 수 있고 또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방학인데 여기 내려 온 걸 보면 은정이가 불렀나 보다?"
"학교가 여기있기 때문에 왔다니까. 누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은정이가 그러던?"
"응. 진짜 선 봤어요?"
"그래 선 봤다."
"좋겠다. 언제 결혼 할거야?"
"아직 생각없어."
"누나."
"왜?"
"그 결혼하면 부케 이렇게 던지잖아."
우아한 제스쳐를 보여 주었다. 누나가 커피 타다가 몹쓸 인상을 지었다.
"응."
"그거 내가 받으면 안될까?"
"야, 내가 언제 갈 지 니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남자인 주제에... 너 장가 가
고 싶니?"
"내 나이가 누나처럼 많은 줄 알아요? 난 한창 때야."
"오호 그러니? 그럼 은정이는?"
"선 보면 가는 거 아닌가?"
"아니야. 자, 커피 다 탔어. 마셔."
누나가 약국에 제법 신경을 썼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에어콘을 다 설치해
놓았다. 여기 좋네. 더우면 종종 찾아 와야 겠다.
"누나는 방학인데 어디 놀러 안가요?"
"내가 학생이니?"
"후후, 그러보니까 누나는 벌써 사회 생활 2년차다. 적은 나이가 아니네."
"그래."
"그럼 은정이 누나도..."
"걔는 학생이잖아. 나하고 상황이 틀리지. 너 걔도 선 볼까봐 걱정 되지?"
"에이씨, 애인이 이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하하, 둘이 참 재밌단 말이야. 너 걔하고 나하고 같이 있을 때 나와 너무 친
한 척 하지마."
"왜?"
"걔 삐쳐. 나보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냥 철수가 우리 철수로 바뀌면 내게 삐
친거니까 그렇게 알아."
"무슨 말이야?"
"그런게 있어. 최근에는 셋이 같이 있었던 적이 드물지? 오늘 셋이서 놀아 볼
까? 히히."
"그럴까? 참, 누나 약장사는 잘 되요?"
"씨, 너 자꾸 약장사라고 그럴래?"
"에구, 내가 여기 들어 온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아무도... 저기 파리 떠
었다."
밤에, 그러니까 깜깜한 밤에 은정이 누나 방에서 재밌게 놀았다. 어떻게 놀았냐
고? 가볍게 맥주 한 캔 뜯어 먹고 은정이 누나 놀리며 놀았다. 그 때문에 내가
삐쳤다. 내가 왜 자꾸 삐치는지 모르겠다.
정희 누나가 오버하며 내게 친한 척 했었다. 은정이 누나가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 들였는데 어느 순간 내 호칭을 종종 우리 철수로 바꾸더니 뽀로통 해졌다.
"우리 철수는 나 보러 온 거지?"
닭살 돋을 뻔 했다. 뭐여.
"너 은정이 만나기 전에는 나 좋아 했었지?"
이, 여자들이 진짜. 남자, 공대생인 우리도 이딴 식으로 놀지는 않는다.
"응."
"뭐야?"
은정이 누나의 저 민감은 대사와 표정.
"정희 누나 때문에 누나 만났고, 정희 누나는 누나보다 십 몇 년을 더 일찍 만
났는데 뭘, 누나가 이 세상에 있는 지 그것조차 알지 못했을 때 정희 누나는 내
사랑이였지 암. 정희 누나 나 사춘기때 누나 많이 그리었소."
"그래, 철수 착하다. 내가 니 마음을 조금만 알았어도..."
정희 누나가 살포시 등을 두들겨 주었다.
"퍽, 퍽!"
은정이 누나는 졸라 아프게 내 등을 때렸다. 야이, 장난은 장난처럼 해야지.
"왜 때려 씨."
"내 맘이다."
씨, 나도 몇 대 패 놓고 내 맘이다 그래볼까? 은정이 누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
았다. 잘못 때리면 죽을 것 같다. 때릴 데가 없어 참았다. 야, 김정희씨, 오버하
는 것 까진 이해하는데 팔짱은 이제 그만 빼라.
"에, 지금은 은정이 누나하고 여,연인 사이지만 먼저 좋아한 사람은 정희 누나
가 맞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러엄. 내가 연하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래, 내가 양보할테니 너네 둘이 사귀어라."
"쓰으... 나도 연하를 사귀어 볼까?"
"정희씨?"
"어, 왜? 철수씨."
은정이 누나 표정이 참 재밌게 변했다.
"야, 너네 둘이 얘 방 가서 놀아."
"누나 질투하는 거야?"
저거 나를 잘 알고 태연할 줄 알았더니 이런 장난에 반응을 보인다 말여? 호
호. 이 때까진 좋았다.
"따르릉."
승주 그 새끼한테 전화가 왔고 누나가 정희누나와 내게 당한 것 때문인지 모르
겠지만 엄청 친한 척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야심한 밤에 승주는 나와 같이 있는
줄 모른 채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분명 역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화 통화가 길
어 질 수록 나는 삐쳐갔다. 나는 아직 누나 상대가 안되나 보다. 누나는 삐친
척 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는데 나는 얼굴이 굳어지며 진짜 삐쳐 갔다. 저
번 주 토요일날 전화하고선 또 전화를? 국제 전화를 무슨 동네 전화로 생각하
나.
전화를 끊고 은정이 누나가 날 보며 배시시 웃었다.
"씨이..."
"어! 너 질투하는거니?"
"승주가 며칠마다 한 번씩 전화해요?"
"승주가 니 친구니? 형이라 그래. 요즘은 매일 하는 것 같네. 나 너보다 승주
를 훨씬 이전에 알았고 좋아 했었다? 인정할 건 해야지."
"그래 승주하고 둘이 살아라. 정희 누나 진짜 우리 둘이 살래요?"
"아니, 난 연하에게 관심 없어."
지가 먼저 시작하고선 배신을 때리다니... 하여튼 누나에게 삐쳤다. 예전처럼
가볍지가 않다. 누나에게 삐칠 때 내 생각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점점 무거워지
고 그런 게 하나 둘씩 쌓여 가고 있다.
"잘 자요. 나 내일 아침에 밥 얻어 먹으러 올테니 밥 해 놔요."
"싫어."
"씨..."
"그래 몇 시에 올래?"
"일어나면."
"헨드폰 가져가. 내가 모닝 콜 해 줄게."
"승주에게 전화 오면 어떡할려구?"
"쓰, 승주에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누나도 정희 누나에게 신경 썼잖아."
"넌 틀리다는 게 표정에 나타나."
"내일 봐요 그럼."
"그 승헌이는 내일부터 자러 올거니?"
"응, 한 이틀 정도만 재워 달래요."
"그래, 내일 내가 걔하고 같이 있으면 저녁 사줄게."
"걔 사자 머리 만나고 늦게 올텐데."
"그럼 오면 피자라도 한 판 사먹지 뭐."
"그래요. 잘 자요."
"응."
아침에 뭔 요상한게 울려 일어 났다. 헨드폰 울리는 소리였구나.
"여보세요?"
"일어 났니?"
"누구세요?"
"나다."
"목소리가 좀 틀리네. 헨드폰이라 그런가?"
"세수하고 내 방으로 와."
그 괜찮네.
저 여자 아무래도 할 줄 아는 음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스프에 밥 말아 먹게
될 줄이야.
"너 오늘 뭐 할거야?"
"도서관 가서 공부 해야죠."
누나의 표정이 이상하다. 돌을 씹은 것처럼...
"진짜?"
"진짜 공부할거야."
"언제까지?"
"승헌이 올 때까지."
"걔가 언제 오는데?"
"아침에 온댔으니까 곧 오겠지. 으으으..."
"왜?"
"삐삐 왔다 헤."
"승헌이니?"
삐삐를 꺼내 보니까 이상한 숫자가 적혀 있다. 이 새끼 자기 군발이 인 걸 이딴
식으로 표현하나? 아무래도 지 군번인거 같다. 이제 출발한다는 뜻이겠지?
"누나는 오늘도 계속 연구실에 있을거야?"
"응."
"방학인데 안 놀아요?"
"뭐 놀만한게 있나?"
"정희 누나하고 우리 셋이서 어디 바다라도 놀러 갈래요? 텐트 치고 놀 수 있
는 곳이나 민박할 수 있는 곳 말이지."
"그럴까? 근데 정희가 갈려고 할까?"
"안간다면 우리 둘이라도..."
"하하, 둘이 가서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려구?"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흠,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오늘 공부 열심히 해라. 내가 오후에 도서관 가
본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철수를 보게 될 겁니다."
내가 도서관에서 도착해서 신문을 보고 난 뒤 자리에 앉아 책을 펴서 공부를 하
려는 순간 삐삐가 요동쳤다.
확인하러 나갔다가 도서관 현관에서 승헌이를 만났다.
"어?"
"심심한데 당구장이나 가자."
"잠깐만 음성 확인하고."
"새꺄 내가 쳤어."
"응. 사자머리 안 만나냐?"
"나중 오후에. 너 요즘은 당구 얼마 치냐?"
"150."
"야, 많이 늘었네."
"200 놓고도 간혹 쳐."
"한 판 치자. 쿠션으로 칠래?"
"그래 죽빵으로 치자."
군발이 새끼는 사회에 있던 모든 것을 퇴보시키며 사나 보다. 당구는 일방적으
로 내 우세였다. 당구비를 제외하더라도 난 돈을 벌어가며 당구를 치고 있다.
저 새끼 이렇게 돈을 잃으면 나중 사자머리 만날 때 계속 얻어 먹어야 될텐데...
"너 돈은 있냐?"
"하하, 우리 누나들이 용돈 줬다. 나 돈 많어 임마."
"걸음걸이가 많이 나아 진 거 같다?"
"응."
"오늘 몇 시쯤 올거야?"
"늦게 까지 있진 않을거다."
"되도록 10시 이전에 들어 와라. 누나가 피자 사준다더라."
"나이 많은 여자하고 놀지 말라니까 쓰."
"나하고 애인 사이라니까."
"그 누나 눈이 참 높을 줄 알았더니 어떻게 너와 그렇게 됐냐? 혹시 일 저질렀
냐?"
"생각하는 거 봐라? 우린 순수하게 만났다."
"후후, 나 이제 그만 가봐야 겠다. 밤에 보자."
"그려. 이 돈은 내가 잘 쓰마."
당구장을 나오자 마자 전화를 걸었다. 멀어지는 승헌이를 보면서 말이다.
"누나, 눈먼 돈 생겼어. 밥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