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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뜸하면 멀어진다는데 자식도 예외일 수 없나 보다. 절 경내를 걷다가 손을 잡자 아이는 차마 내 손을 뿌리치진 못하고 쑥스러워한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마주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그만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던 거다. 그럭저럭 무심하게 세월을 보냈던 거다. 나한전엔 쌀쌀한 날씨에도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수험생에게 신통한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서 그런지 법당 밖에도 자식을 걱정하는 줄이 이어져 있다. 자리가 나지 않자 불자들은 발만 동동 구른다. 촛불이 타들어가듯 기도하는 사람들의 속도 타들어간다. 칠장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이가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던 2005년도였다. 그해 가을 불공을 드리려는 아내를 따라오고부터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 아내는 무릎이 좋지 않은데도 어렵게 108배를 꼭 채웠다. 그런 정성에 복을 주셨는지 큰애는 물론 작은애도 무난하게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나한전 불단에 너도나도 사탕 봉지를 올리는 게 의아했다. 그 이유는 박문수 어사의 과거 시험에 얽힌 설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박문수가 32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를 못하고 여러 차례 낙방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1723년에 증광시(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를 보러 가는 아들에게 조청으로 만든 유과를 손에 들려주면서 말한다.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니 꼭 들러 가야 한다.” 박문수는 어머니의 당부대로 그곳에 묵으며 정성껏 기도를 올렸고 신통하게도그날 밤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 과거에 나올 시제 여덟 줄 중 일곱 줄을 알려주어 무난히 장원급제했다. 삶에 지쳐 머리가 뒤숭숭할 때마다 찾는 그곳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칠장사. 고려 때 고승혜소국사가 현종 5년(1014년) 때 절을 크게 증수했고, 조선 시대 인조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불운한 죽음을 애도하며 복을 비는 절로 삼아 그 이후로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이곳에서열 살 때까지 활쏘기하며 자랐다 하고 의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촬영지이기도 하다. 세도가들도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장지(葬地)로 쓰기위해 여러 번 절을 불태웠지만, 그런 시련과 역사의 비운을 뒤로하고 여태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건재한 걸 보면 대단한 절이 아닐 수 없다. 칠장사에 가면 굳이 절 안에까지 차를 몰고 갈 필요가 없다. 절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일주문과 연결된 오붓한 길에서부터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선 채 구경꾼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내가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에도 자박자박 소리를 내던 그 은행잎의 저음에 매료되어 자리를 뜨지 못했었다. 동자승이 까치발을 하고 바지랑대로 노랗게 익어가는 감을 따는 풍경이 그려지는 칠장사. 아이의 대학 입시 때문에 인연이 되었지만 육신이 고단하거나 삶에 지쳐 머리가 뒤숭숭할 때마다 그곳을 다녀간다. 어느 절이건 가면 오기 바쁘고, 가더라도 그저 내 가족 건강하고 돈 많이 벌어 앞날 승승장구하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전부인데, 칠장사에 오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진다. 여느 절과 같이 탑, 불상, 범종, 법당 등 갖춘 것도 별다르지 않은데 괜스레 마음이 끌린다. 박문수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설화로 인해 2년 전부터 전국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이 열리는데, 나 또한 글을 쓰는 작가이다 보니 반갑고 기쁜 마음에 정감이 일어 그런지는 모르겠다. 비 내리면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 내리면 양팔 벌려 눈송이를 노래하는 시인 몇 있었으면 좋겠다. 속내를 드러내면 맘 풀어주고, 어딘가 불편하다 말하면 단박에 달려와 손을 어루만져줄 친구 한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벌써 장정이 돼 나를 감쌀 줄 아는 아들에게 다행히 오늘은 아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풀어내며 천년고찰의 품에 안겨 있다. 지나고 보면 어린 시절 누구나 개구쟁이로 보내는데 아이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컸었나 보다. 그런 철부지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다그치기만 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꽤 공부를 하던 놈이 6학년에 올라가자 성적이 처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며 동네를 나돌아치고 학원 끝나고 오는 길엔 으레 PC방을 들락거렸다. 그런 일로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벌써 장정이 돼 나를 감쌀 줄 아는 병풍 역할을 하니 대견하기만 하다. 아이가 얼굴에 검정 칠을 해가며 구두를 닦던 일이며,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을 사서는 식지 않게 하려고 점퍼 속에 넣고 단숨에 달려와 초인종을 눌렀을 때의 그 거친 숨결을 어찌 잊으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미술 숙제를 하는데 누가 종가(宗家)장손 아니랄까 봐 제사 지내는 모습을 그리던 손길도 생생하다. 줄곧 시험을 잘 보다가 수능을 앞두고 본 마지막 평가에서 점수가 떨어지자 죽을 맛이었다고 했는데, 그 살 떨리는 불안감을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제 얼마 안 있어 아들은 사회인으로 우뚝 선다. 여리고 여린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산업 전선의 일원이 되고 가족을 거두는 지아비가 된다. 칠장사 주지 지강 스님이 들려주신 법문의 이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은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없는 무생물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것에 눈멀면 되레 눌려죽을 수도 있으니 나누고 베풀며 돈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살아가라고. 안과 밖은 다르지 않은 법, 사람을 대할 때도 태도를 고르게 하라고. 지나 보면 나쁜 사람 없으니 단점만 보지 말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내고 칭찬해야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또한,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몰고 가면 위험하니 중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출출하던 터에 절에 모인 사람들과 점심 공양을 같이 했다. 국화 향 나는 차도 마시고 아이의 얼굴에 어린 미소까지 덤으로 얻었다. 아이나 나나, 같이 오지 못한 가족이나 절에 모인 사람도, 대한민국은 물론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과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 모두 날마다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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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드님께 마음에 담을 추억을 하셨군요 늘 행복한 나날이시길 두손모읍니다...
칠장사 카페회원을 대표해서 이 카페지기가 인사올려도 될런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이세상 모든사람들이 날마다 좋은날 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모습에서 아름다운 미소가 느껴집니다..좋은추억 예쁘게 이어가시길..요^^*
감사합니다 ..월간 불광지에서 글을 읽던중 칠장사 답사글이 있길래 모셔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