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아카데미상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미국의 사단법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협회(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 Science)가 수여하는 상이다. 심사 위원들은 미국 내에서 영화업에 종사하고 있는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 위원들이다. 5천여명의 아카데미 위원들은, 올해 처음 위원이 된 12살의 다코타 패닝 같은 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 중장년층들이다. 그들의 성향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카데미의 선택은 철저하게 미국 내 영화산업의 지형도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을 하던 아프카니스탄에서도, 낮에는 총 들고 미군들과 싸우지만 밤에는 극장에 가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이 현실일 정도로 미국 영화는 세계 영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은 비록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상이지만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진행된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삶은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문명의 진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사진이 발명되고 전화와 증기기관차 등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영화는 산업혁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세기 후반, 그때까지의 발전된 과학 테크놀로지가 총 결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매체였다.
1820년대에 사진이 출현한 이후, 정지된 사진을 빠르게 이어 붙여서 움직이는 사진 즉 활동사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누가 영화를 발명했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미국의 에디슨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었고 서로의 시행착오가 뒤섞이면서 지금과 같은 영화 형태가 등장했다. 그래서 영화는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찍은 1분정도의 필름을 파리의 지하 카페에서 처음 상영한 날을 영화발생일로 삼고 있다. 영화를 만든 제작자와 연출자가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돈을 내고 입장한 관객들이 있는, 현대적 개념의 영화가 처음 등장한 날이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것은 1927년이다. 미국 최초의 장편영화는 1915년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D.W.그리피스가 만든 [국가의 탄생]이다. 이후 미국 영화 산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다. 1920년대에는 메이저 영화사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확립해 가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산업 종사자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노조가 결성되자 사용자들도 어떤 단체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은 MGM(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영화사의 사장인 루이스 메이어였다.
1927년 루이스 메이어의 집에서 열린 영화 제작자들의 파티에서 협회의 필요성을 공식 제기했고 그해 여름, 36명이 참석한 영화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첫 회합이 열렸다. 설립 취지를 담은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개의 분과로 구성된 조직이 만들어졌다. 초대 회장은 더글사스 패어뱅크스경(Douglas Fairbanks)이었다. 지금의 로버트 레메(Robert Rehme) 회장은 1997년부터 협회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고 있다.
제 1회 아카데미상은 1927년 8월 1일부터 1928년 7월 31일까지 1년동안 미국 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의 5개 위원회 20명의 심사위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작 10편을 추렸고 그중에서 다시 3편을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각 분과를 대표하는 1명씩 총 5명의 중앙심사위원회가 이 중에서 최종 수상자와 수상작을 선정해서 1929년 5월 16일 헐리우드의 루즈벨트 호텔 블로섬 룸에서 시상식을 거행했다. 작품상, 예술적이며 독특한 영화상, 극영화 감독상, 코미디 감독상, 남녀 배우, 촬영, 미술, 기술효과, 각본, 각색, 자막 등 12개 부분의 수상작과 수상자가 총 2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을 받았다. 제 2회 때는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미술감독상, 남녀 배우상 등 7개 부문으로 축소되었다. 1941년 다큐멘타리 부문이 신설되었고 1947년에 외국어 영화상 부문이 추가되었다.
1932년에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1백여명으로 늘어났고 1933년부터는 전년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개봉된 영화를 대상으로 후보작을 결정하는 조정이 이루어졌다. 지금 아카데미 위원회는 5천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다. 배우 조합이나 감독협회, 촬영감독협회같은 헐리우드의 직능별 단체에서 실적이 있는 사람들이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된다. 평론가나 신문기자 극장업자 단순한 영화팬들은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각 부문 5배수의 노미네이션 작품과 후보가 결정된다. 아카데미에 노미네이션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영광이 된다. 최종 선정은 노미네이션된 후보들 중에서 현역에서 활동하는 약 400명 내외의 회원들의 무기명 투표로 결정한다.
아카데미 후보작의 범위는 정확하게는 전년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로스엔젤레스 지역의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연속 상영된 70미리 및 35밀리 장편, 단편 영화다. 따라서 16밀리 영화와 비디오 상영작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관계가 있는 외국어 영화상은 세계영화제작자 연맹에 가입된 나라에서 한 편씩 출품할 수 있으며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로 제작되어야 하고 제작, 연출, 극본 중 최소한 두 분야가 같은 국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초기의 15년 동안은 헐리우드의 호텔에서 개최되었지만 16회부터는 극장 산업을 진흥시킨다는 이유로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16-18회는 Grauman's Chinese Theater, 19-20회는 Los Angeles Shrine Auditorium, 21회 멜로즈 에비뉴 극장, 22-31회 RKO Pantages Theater) 1969년부터 시상식은 L.A 뮤직센터와 Shrine Auditorium에서 번갈아가며 개최되고 있다.
아카데미상이 처음으로 생방송 중계된 것은 1953년 3월 19일이었다. NBC-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기 시작한 아카데미상은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1961년부터 1970년까지는 ABC-TV에서,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다시 NBC-TV에서, 그리고 1976년 ABC-TV에서는 2008년까지 방송하기로 장기계약을 체결하였다.
수상자의 명단은 엠바고가 찍혀서 언론사들에 사전 공개되었다. 즉 시상식 이전까지 절대 발표해서는 안된다는 언론과의 밀약이었다. 그러나 1940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즈가 엠바고를 깨고 수상자를 사전에 공개함으로써 시상식은 긴장감이 사라진 맥빠진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이후부터 지금 사용되고 있는 봉인된 봉투가 등장하였다.
시상식의 형태는 초기에는 할리우드의 호텔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디너 파티 같은 연회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1943년부터는 시상식 형태로 진행되었다. 1회 시상식은 총 250석의 호텔 룸에 10 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초청장이 없으면 입장할 수 없다.
아카데미상의 인터넷 사이트 주소는 www.oscar.dom이다. 아카데미상을 친근하게 오스카상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3가지 설이 있다. 아카데미 트로피는 벌거벗은 남자가 필름 통 위에 서 있는 조각상으로 되어 있다. 오스카는 조각상 남자의 별칭이다. 초창기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조각상 남자의 뒷모습이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해먼 오스카 넬슨과 뒷모습이 똑같다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 할리우드의 칼럼니스트인 시드니 스콜스키가 아카데미상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오스카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기사를 쓴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 세 번째 가장 유력한 설은 아카데미 사서 출신에서 감독으로 변신했던 마가렛 해릿 여사가 트로피를 보고 우리 오스카 아저씨와 똑같네요라고 말했고 이것을 한 신문기자가 듣고 다음날 기사에 오스카상이라고 쓰면서 사람들 이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스카상을 받은 역대 수상자 중 진짜 이름이 오스카인 사람도 있었던 뮤지컬 작곡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그 사람인데, 오스카는 두 번이나 오스카상을 받았다.
오스카 트로피는 아카데미상 초창기의 시상 부문이었던 감독 배우 기술 제작 각본 등을 상징한 5개의 필름 롤 위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는 1928년 당시 MGM의 미술감독인 세드릭 기본즈였다. 그도 자신이 미술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로 총 11번의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다. 24K 트로피의 제작비는 하나에 350달러고 구리 주석 안티몬의 합금인 브래태니엄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34.5cm 무게는 3.4kg이다.
1929년 이후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고 있는 아카데미상은 그러나 시상이 연기된 적은 3번 있다. 1938년 시상식 직전에 있었던 대홍수로 일주일동안 연기되었고 1968년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사건으로, 1981년에는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각각 연기되었다.
2007년의 경우 총 24개 부문에 걸쳐 시상이 이루어졌는데 이중에서 빅5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각본상이다. 이중 각본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개를 차지하는 것을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아카데미 역사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영화는 4편뿐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5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9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80년) [양들의 침묵](1992년)이 그것인데 이중에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만 각본상을 못 받았고 다른 세 편은 각본상까지 휩쓸어서 빅5를 모두 휩쓴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가장 많은 부문에서 상을 받은 영화는 [벤허](1959년)와 [타이타닉](1997년)이다. [벤허]는 1925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를 리메이크 한 것인데, 리메이크 작품은 아카데미상을 받기 힘들다는 설이 깨졌다. 올해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디파티드]도 홍콩 영화 [무간도]의 리메이크작이다. [벤허]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미술상 작곡상 편집상 음향상 의상상 특수효과상 각색상 등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각색상만 제외하고 11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러나 여우주연상 수상은 놓쳤기 때문에 그랜드 슬램 달성은 실패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40년)도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9개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클라크 케이블은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로버트 도네에게 남우주연상을 뱄김으로써 그랜드 슬램을 놓쳤다. 1940년도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아카데미 경합이 있었던 해로 기록된다. 그해 작품상 후보에 올라온 영화들은 하나같이 영화사에 남는 걸작들이었다. 빅커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 프랑크 카프카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윌리엄 와일러의 [폭풍의 언덕], 존 포드의 [역마차]가 경합을 벌였다.
가장 많이 오스카상을 수상한 사람은 월트 디즈니다. 그는 64번 후보에 올랐고 그중에서 26개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심지어 1966년 사망한 후에도 1969년 오스카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 영화사가 기억하는 최고의 감독들, 알프레드 히치코크나 역대 최고의 영화에 올라가 있는 [시민 케인]의 오슨 웰스, 혹은 스탠리 큐브릭 같은 감독들이 감독상을 받지 못한 것은 오스카상이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염려를 증명해주는 단서들이다. 또 리차드 버튼은 1953년부터 1978년까지 7차례, 피터 오툴은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역시 7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대부]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말론 브란도는 미국의 인디언 정책에 항의하면서 수상을 거부하고 시상식에 불참했다. 수상 거부와는 달리 [패튼 대전차군단]의 조지 C 스코트는 [집에서 하키 경기나 보지]라며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73년 시상식에서 찰튼 해스턴은 타이어가 펑크 나서 수상 차례가 되었지만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고 대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와서 시간을 끌고 있다가 뒤늦게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황당한 사건은 알몸 납입 사건이 일어난 1974년의 46회 시상식이다. 사회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니븐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소개하러 나온 순간 갑자기 한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이른바 로버트 오팔 알몸 사건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니븐은 재치있게 [이런 일은 항상 있게 마련이지요. 재미 있습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옷을 벗고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보작 발표를 해야 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너무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제대로 발표를 하지도 못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일주일 전 준비해 둔 트로피가 도난당한 사건도 있었다. 2000년도 시상식을 앞두고 트로피를 도난당한 주최측은 황급히 다시 트로피를 만들었다. 도난당한 트로피들은 시상식 며칠 전 LA 한인 타운의 한 레스토랑 옆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아카데미는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원로 영화인들에게 매년 공로상을 수여하는데, 1972년 아카데미 공로상은 찰리 채플린에게 수여되었다. 찰리 채플린은 1952년 민주당 매커시 의원이 사회 각 분야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매커시 선풍이 있었고 찰리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국외 추방되었었다. 20년만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온 찰리 채플린이 무대에 등장하자 모든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고 찰리 채플린의 수상소감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반면에 1999년 아카데미 공로상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워터 프론트]의 엘리아 카잔 감독에게 수여되었는데 마틴 스코세즈와 로버트 드니로의 부축을 받으며 90세 노인인 그가 무대로 등장하자 참석자들 중 절반은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쳤지만, 절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박수도 치지 않았다. 매커시즘이 몰아칠 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것으로 의심되는 동료 영화인들을 밀고하면 봐주겠다는 관계당국의 협박에 굴복한 것으로 알려진 엘리아 카잔의 과거 전력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1999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인생은 아름다워]의 이탈리아 배우이며 감독인 로베르토 베니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의자에서 깡충 뛰어 팔걸이 위로 올라갔고 의자 등받이 몇 개를 밟고 뛰어가다가 무대로 올라와서 [모두에게 키스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수상에 감격한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1988년 후보작 발표자로 나온 에디 머피는 미국 영화계의 흑인에 대한 차별을 노골적으로 제기했다. [흑인에게 20년 주기로 상을 주는 아카데미에서 내가 상을 받으려면 2004년이나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드림걸스]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가장 유력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20여년전의 그의 발언이 그의 수상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아카데미가 달라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 것은 수상 결과 때문이다. 흑인들의 수상이 에디 머피의 바난과는 다르게 자주 이어지고 있다.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모 역으로 해티 맥다니엘이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1963년 [들백합]으로 시드니 포이티에가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 이후 흑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던 아카데미는 1983년 [사관과 신사]로 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에디 머피가 2004년에나 자신의 수상이 가능하다는 발언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1989년 덴젤 워싱턴이 [글로리]로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그는 2001년 [트레이닝 데이]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또 1990년 우피 골드버그는 [사랑과 연혼]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1996년 [제리 맥과이어]로 쿠바 구딩 주니어는 남우조연상을, 할 베리는 2001년 [몬스터 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라스트 킹]으로 포레스트 훠태이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가장 넘기 힘든 벽으로 생각되었던 남녀주연상이 흑인들에게 빈번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제 아카데미에서 인종차별적 시선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한국계 이민 2세인 로리 리(Roy Lee)가 홍콩영화 [무간도]를 보고 리메이크를 기획해서 [디파티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올해 아카데미상은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섯 편이 지명되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는 단 한 번도 우리 영화가 노미네이트 되지 못했지만, [시월애][조폭마누라][달마야 놀자][올드보이] 등 한국 영화의 원작 판권을 할리우드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나 봉준호 감독의 [괴물]처럼 미국 시장에서 개봉되는 한국 영화의 반응이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인을 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아카데미다.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 위원들은 철저하게 미국적 시각을 반영해서 수상자를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시장에서 갖고 있는 역할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일 뿐, 마치 아카데미가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식의 관심은 절대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미국 영화가 영화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할리우드가 영화산업의 가장 역동적 현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할리우드만큼 치열하게 탐구하고 있는 곳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