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마피아 이야기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브린디시에 있는 한 직업학교에서 5월 19일 오전 7시 50분경 폭발물이 터져 등교 중이던 여학생 1명이 숨지고 8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되었다.(2명은 중태) 폭발물은 배낭 가방에 담긴 채 학교 정문 담 옆에 놓여 있었다.
이 학교명은 “Francesca Morvillo Falcone - 프란체스카 모르빌로 팔코네”로 20년 전 마피아 근절을 주도하다 마피아 조직원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죠반니 팔코네 검사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모르빌로 검사 이름을 따라 설립되었다.
이번 사건이 마피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떻든 마피아의 관련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1992년 5월23일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던 도로엔 마피아 조직원이 설치한 350㎏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장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죠반니 팔코네 검사였다.
죠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1939- 1992) 검사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마피아 기소 전문가였다.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의 검찰청 체사레 테라노바 판사가 살해당한 후 팔코네는 그곳 수사부를 담당하였다.
1980년 5월 거대 마약 밀수 조직의 수사가 있었다. 엄청난 물량의 마약이 시칠리아에서 뉴욕의 범죄조직으로 이송되었는데 가에타노 코스타 판사가 마피아 53명을 구속 기소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해 8월 6일에 살해되었다.
팔코네는 이 수사에서 "돈 추적"을 따라가는 혁신적인 수사 테크닉을 선보였다. 그는 롯코 킨니치 판사가 조직한 팔레르모의 반 마피아 연합(마피아 근절 판검사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1983년 7월에 칸니치 판사가 또다시 살해되었다. 그 후 반 마피아 연합은 안토니오 카폰네토가 이끌었는데 이때 팔코네는 1986년 2월 10일에 시작하여 1987년 12월 16일에 끝난 공판의 핵심 주역으로 474명의 마피아 중, 부재중인 119명을 포함하여 360명을 구속하여 중대유죄판결을 받게 하였다.
이에 마피아의 보복 음모가 진행되었고 결국 조직된 암살단에 의해 팔코네는 1992년 5월 23일 팔레르모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다 그의 아내 Francesca Morvillo 검사와 3명의 경찰관이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일정은 모든 것이 극비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된 것은 마피아가 검찰 내부까지 침투되어 있는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 것이였다.
"경악, 팔코네 살해" - 당시 신문 1면
350Kg의 다이너마이트로 날아간 도로
당시 참상
함께 희생당한 팔코네 검사의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검사
그런데 2달이 지나지 않아 또 다시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가 살해 되었다. 그는 장모님 댁으로 들어가던 도중 차량에 장치된 폭발물에 의해 희생이 되었다.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는 팔코네 검사와 같은 길을 걸었다. 어려서부터 팔레르모의 빈민 구역에서 자랐고, 반 마피아 치안 검사로서의 길을 걸었고,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반 마피아 연합에서는 그들을 기념하고자, "Medaglia d'oro al valor civile" (용감한 시민을 위한 금메달)이 1992년 제정되었다.
타임지는 2006년 11월 13일판에 이 두 검사를 지난 60년간의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 차량 폭발 살해 현장
팔코네 검사와 보르셀로네 검사
마피아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마피아하면 이탈리아 대명사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발생된 조직이다. 그러나 마피아가 어떻게 생겨
났는지 그 기원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단지 중세 이후 시칠리아가 무법상태에 있을 때 외부세력들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소규모
사병조직 '마피에'(mafie)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 남부는 지금도 그렇지만 19세기 당시도 빈민들이 많았다. 시칠리아 지역은 더욱 그랬다. 그들
은 힘겨운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모으고 함께
나누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었다.
아마도 이것의 주체가 마피아 집단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면 지금도 마피아 계보는 패밀리(가족)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공동체 집단의 목적과 의도는 매우 건전했으며 매우 만족할 정도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공동
체가 커지며 세력이 생기고 조직이 생기자 실제 사업 전선에 뛰어들게 되는데 초기엔 상권 보호 대가로
강탈을 일삼았고 나중 마약, 청부살인, 인신매매, 무기판매등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해 나가던 마피아가 결정타를 맞은 것은 뭇솔리니 파시스트
독재 정권 시대였다. 무솔리니는 수천 명의 마피아 단원 혐의자들을 체포·재판하고 장기간 복역시킴으로
써 마피아를 거의 근절시켰다.
이때가 소위 마피아의 박해 시기였다. 마피아들은 뭇솔리니의 강력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흩
어지게 되었다. 이로 뭇솔리니 시대엔 진작 이탈리아엔 마피아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각 나라로 흩어진 마피아가 나라마다 재조직되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간 마피아가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범죄집단으로 성장했다.
이들 마피아들은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어 오늘날 독자적인
각 나라 마피아 조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뭇솔리니가 본의 아니게 또 한가지 악의 유산으로 남긴 것이
“마피아의 전세계화”였다.
뭇솔리니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이탈리아에선 다시금 마피아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마피아의 세력은 밀수, 마약, 인신매매, 청부살인, 무기판매,·상업, 제조업,·건설업 등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마약제조와 밀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고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이윤은 마피아 내부의 여러 계파 간에 강한 경쟁의 불씨가 되어 살인과 방화가 끝없이 발생되었다
강탈로 시작된 마피아의 자본은 나중 합법적인 기업과 금융과 상권에 투자하게 되었다. 이로 지역의 금
융과 상권이 마피아의 손에 흡수되어 갔고 나중엔 지역 정부 세력과 결탁으로 이어지고 나중엔 정계에
도 손을 뻗게 되었다.
과거 마피아 조직은 무력으로 돈을 갈취해 가는 조직이었으나 나중엔 돈을 빌려주고 탈세와 청탁, 수혜
혜택을 도와주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가는 상부상조의 형식을 이어나갔다. 이것은 결국 정부와 정치 세
력의 결탁 없이는 이루기 힘든 일이다.
1992년 수차례에 걸려 가장 오래 수상을 역임한 안드레오티가 마피아 연류 문제로 법정에 선 것이나, 최신식 전자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철통 감옥을 3명의 마피아 보스가 탈출한 사건등은 고위층과 관련된 극단적인 예인 것이다.
1992년 두 검사의 죽음 앞에 정부는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란 말이 참으로 무색하다는 것은 이태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전쟁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마피아는 근절 할 수 없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간이 손상을 당했을 경우 손상당한 부분만 잘라서 해결되지 않
듯, 구석구석 병든 간을 다 제거하다 보면 간 전체를 상실하듯, 만약에 마피아 전체를 제거한다면 이태
리 자체 존재가 불가능 하다. 이는 이태리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마피아와 과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마피아는 분명한 암과 같은 악의 세력지만 제거 대상이 될 수 없는 공존대상이란 것이다. 악의 제거의 문제가 아니라 악과 선의 조화가 문제인 것이다.
이탈리아하면 무시무시한 마피아가 떠오르고 길거리에서 수시로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은 연상한다. 그
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마피아는 시민들을 위협하고 갈취해 가는 그런 조폭들이 아니다. 러시아 마피아처럼 상권 보호 목적으로 돈을 갈취해 가는 시대도 지나갔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거대한 범죄 조직임엔 틀림없으나 직접적으로는 일반 시민들과는 먼 관계인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