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있는 얼굴의 치열이 가지런했다.
나훈아는 남들 보다 보이는 이의 갯수가 더 많았다.
얼굴이 커서도 아니고 입이 커서도 아니었다.
작은 이들이 하나하나 빈틈없이 정열되어 있었다.
저 이빨로 무언가를 꽉 물면 절대로 놓칠 수 없을 게다.
저 이빨을 꼭 다물어 무언가를 앙 다짐하면 빈틈 하나 없이 다부지게 마칠 것이다.
그런 느낌...
순간 참 지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
공연 내내 그 지독한 느낌은 떠나지 않았다.
김선아(삼순이)가 나와 어설픈 노래 한 곡 하고 들어갔지만 그보다 키가 크지 않았다.
다행히 무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관계로 무대 전체를 관망할 수 있었다.
망원경까지 챙겨 갔으니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나훈아가 그리 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금까지 무엇이 그를 그리 크게 보이게 했을까?
조용필을 작은 거인이라 했는가?
조용필 또한 거인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혼신을 다 하여 노래를 한다.
조용필에게서는 남도창을 닮은 恨스런 소리가 나온다.
조용필은 폭포 속으로 들어가 그런 소리를 연마했단다.
조용필은 그의 작은 몸, 작은 입에서도 가슴을 뜯는 듯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나훈아는 조용필의 소리와 다르다.
나훈아의 소리는 恨의 소리가 아니다.
나훈아는 조용필 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소리를 낸다.
나훈아의 노래를 트롯트라고 부르지 말라한다.
나훈아는 우리 노래를 ‘아리랑’이라 불러달라 한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수, 아리수.....’ 오늘 부른 신곡에서와 같이 그는 아리랑을 찾고 있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던 ‘아리랑’은 최근에야 그 뜻이 어렴풋이 알려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시원점인 바이칼 인근의 에벵키 족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아리랑과 쓰리랑...’
우리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에서 아리랑(ALIRANG)은 '맞이하다'는 뜻을, 쓰리랑(SERERENG)은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어느 때 쓰는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맞이하고(ALIRANG)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SERERENG)는 그 후렴구를 이제껏 바이칼을 떠난 6,000년 동안 우리는 뜻도 모르고 부르고 있었지 않은가?
유목으로만 땅을 옮겨 다니며 죽는 자리가 무덤이었던 내 선조들.
그들은 영혼만을 통하여 자손들과 대화를 하기 위하여 아리랑, 쓰리랑을 만들었던거다.
아! 나훈아는 줄기차게 그걸 찾아 떠나고 있었던 거다.
놓치지 않고 찾아 나선 나훈아의 소리를 한갓 트롯트 정도 치부해 버리고 말 것인가?
아니다.
그건 다른 장르다.
그걸 나훈아는 아리랑이라 불러 달라 했다.
그의 지독한 ‘내 피의 근원지 찾아 나서기’를 하는 몸짓이었다.
그렇게 놓치지 않고 찾아 나서서 꼭 노래로 불러야만 하는 나훈아.
그래서 더욱 그는 지독한 것이다.
땀이 범벅이었다.
옷이 다 젖을 정도로 열정을 다 하였다.
무대에 서면 어느 가수가 그런 열정을 안 가질 수 있겠는가? 싶지만 나훈아의 땀은 다르다.
그의 땀 속에서 피를 뱉어 내고 있었다.
간간이 섞어내는 부산 사투리의 멘트로 사람을 웃길 줄 아는 그지만 노래로 불러내는 땀은 웃을 일이 아니었다.
쥐어짜는 목소리가 아닌 피를 섞어 땀으로 소리로 만들어 내는 듯한 느낌..
전율이 올 정도로 그의 소리는 듣는 이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신곡 ‘홍시’를 노래했다.
작사 작곡했단다.
그 가사를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왜 엄마의 젖가슴에 집착하는 걸까?
남들 다 잊어버린 엄마의 젖가슴을 이제사 노래하는 나이 60의 어린 아이...
쪼르르 엄마 품으로 달려와 엄마 젖가슴부터 헤집던 그 옛날을 이젠 잊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아리랑 찾는 그의 얼과 닿아 있었던 거다.
정말로 집요하고 철저히 찾아 나서서 하나하나 근원을 찾아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고 있었던 거다.
초 대형의 무대...
오토바이 몇 십대가 지나다닐 만큼의 너른 무대를 그 작은 몸 하나로도 꽉 채우는 그의 능력은 기적 같았다.
무대를 기획했던 이
무대를 만들었던 이.
무대를 빛나게 했던 이
무대를 움직이게 했던 이.
무대의 한 부분이었던 모든 이들...
더욱 그 무대의 부분이었기를 간절히 바랐던 많은 이들..
그들은 모두 다 함께 나훈아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용병이었다.
말 타고 등장한 장수로서의 나훈아는 결코 연대장이나 사단장 급이 아니었다.
대 군단을 이끌고 사하라를 초토화 시켰던 롬멜의 그것을 능가하는 위용이었다.
그렇다.
그 자리를 메운 4,000의 관중들, 자리가 없어 다리 난간에 까지 서서 멀리 구경했던 모든 이들의 절대적인 대장이었고 이 공연을 보지 못해 원망했던 수없이 많은 이들의 절대적인 장수였다.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박수를 치고 장단을 맞추고 그의 질문에 어린 애같이 “예!‘하고 대답을 목청껏 질러대는 이들 모두가 이젠 초로를 넘은 사람들이었다.
‘오빠!’ 하고 튀는 목소리를 내었던 50대의 여자.
내 앞자리에 숨어서 소주 한 잔 했던 70대 노인의 춤사위.
어떻게 여자란 여자들 모두 해병대 박수로 일색했던 짧은 두 시간.
MBC는 일부러 그런 사람들에게만 표를 나누어 주었던가?
MBC는 어찌 흥을 아는 사람만 골라서 그 곳에 집합시켰을까?
아니었다.
그건 나훈아의 능력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젊은 사람들도 저절로 따라야만 하는 그런 감흥이었다.
나훈아는 엄청난 거인이었다.
마지막 무대
땅 밑에서 솟아 나온 대형의 거북선을 타고 객석의 가운데까지 나왔다.
3층 높이는 됨직한 높은 자리에서 마치 이순신이 그러했듯 거북선 타고 대군을 독려하는 모습으로 열창을 했던 나훈아.
바로 그 옆이 내 자리여서 참으로, 참으로 가깝게 다가섰던 나훈아.
40년을 나훈아를 그리며 살아왔었는데,
오늘 나훈아를 그리 가까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러나 나훈아는 너무 높았다.
내가 본 나훈아는 너무 거인이었다.
오늘의 나훈아는 ‘사랑’을 부르던 감미로운 나훈아가 아니었다.
오늘의 나훈아는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의 서러운 나훈아가 아니었다.
나훈아는 오늘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오늘의 나훈아는 내 민족, 만년의 피를 찾아나서는 선봉장이었다.
-- A 석이라 가운데 통로 앞쪽으로 어찌 어찌 자리 잘 잡아 참으로 구경 잘 했습니다.
한강 다리 건너서 마누라 하고 맥주 한잔하고 늦게 왔습니다.
오늘 밤 ... 잠이 잘 올라나?
첫댓글 나훈아의 뮤직비디오 보쎴나요. 함 보세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나훈아, 트로트 가수 겸 작곡가로서 100년만에 한번 나올 정도의 불세출의 가수라던데,,,,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