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언제까지 살지에 대한 궁금증이 가끔 들 때도 있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뭔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궁리를 하던 차에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정했다.
마음속에 육도 벼슬을 해도 말하지 않으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 있어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 끝에 “나는 당신한테 죽을 때까지 화를 내지 않기로 했소” 하였더니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며 의아해한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참 오래 살아왔네요. 그래서 감사한 생각이 들어 물론 화낼 일도 없지만 그래도 혹여 불끈하는 그 성질이 나올까 봐 참아서 당신을 편안하게 해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하니 천만다행이라고 한다.
부부가 살면서 서로를 칭찬하는 일은 별로 없다.
늘 일상이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거기니까 굳이 감사하거나 칭찬하거나 고맙다고 말하면서 살지 않는데 늙은 탓인지 요즘은 아침을 챙겨주는 아내가 감사하고 늘 내 곁에 있어 든든해 은근히 기대고 싶은 아내가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얘기가 아닌데 일부러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자주 표현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남에 용기를 얻어 이런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쉽지 않다.
불끈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는 일도 그렇게 잘 표현하지 않는 말들을 입 밖에 내는 것이 쑥스럽지만 의도적으로 하다 보니 뇌에서 당연히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신기하다.
진작 감사할 걸 그랬네 하고 길게 한숨을 내며 후회하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안도한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뇌가 멍청해서 일부러 웃으면 내가 진짜 좋아서 웃는 줄 안다고 하더니 입버릇처럼 내뱉는 감사의 인사가 언제부터인지 진심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뇌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린 너무 쉽거나 흔하면 고맙거나 감사함을 모른다.
늘 마시는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당장 죽는데도 감사한 느낌 없이 무진장 쓰고 있고 아내 역시도 늘 함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없이 그냥 존재하는 사람으로만 느끼면 산다는 얘기다.
내가 철이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이를 먹어감으로써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들이 채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찬일지언정 함께 먹기 위해 식단을 준비하여 내놓은 아침상을 맞이하면 아내가 고생하여 나를 위해 차렸으니 자연스럽게 감사하다는 말이 떠오르고 먹고 나면 맛이 있든 없든 잘 먹었다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낯빛은 밝고 맑아진다.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남편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다.
늙어가면서 알 수 있듯이 부부란 오래 함께 먼 길을 걷는 동반자이다.
흔히 사랑이 필요한 사이가 부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래 살아보면 사랑도 미움도 함께 존속해 다양한 감정들이 삭여들어가는 삭인 배추김치 같은 느낌이 든다.
배추김치는 싱싱할 때와 익었을 때 맛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이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저런 맛에 순응하면서 즐겨 찾듯이 부부도 다양한 맛을 지녔기에 때론 달콤함도 쓴맛도 동시에 간직하면서 먼 길 가는 동행인이 아닐까 싶다.
화를 안 내겠다는 다짐만으로 많은 변화를 느낀다.
일단은 화낼 일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좋은 마음으로 보면 좋게 보이고 미워하면 미운 짓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니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와닿고 웃을 일이 많아진다.
우린 살면서 서로의 감정이 존중받기를 원하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못난 욕심인 줄을 모르면서 당연하다고 우기며 살아왔지 싶다.
오래 살다 보면 감정은 물론 무디어진다.
좋고 싫은 감정의 변화도 없어지고 그러려니 하고 수긍하는 쪽으로 변하지만, 아예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보니 스스로가 안온하고 편안함을 느껴 좋다.
생각의 차이라는 것이 무의미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 감정조절이 안 돼서 표출하는 어리석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듯이 정답이 없듯이 내 감정은 나의 판단이고 상대방의 감정은 상대방의 표현이었으니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 역시 정답은 없는데 서로 자신의 감정이 옳다고 우기면서 화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요즘은 독서에 재미가 붙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으면서 내 삶을 반추해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대한 회한도 존재하고 또 어떻게 살 것인가에 고민도 해보지만, 결론은 과거와 미래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보장성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론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저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예전에는 옳다고 느꼈지만, 요즘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어 내일 내가 온전히 살아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보장도 없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신은 내일까지 아무 탈 없이 무탈하게 살아남아 당신이 원하는 음식을 맛있게 드실 수 있다고 보장받은 사람은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데 굳이 지금, 이 순간 행하여 즐거워하면 될 것을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지난 시간 잘못을 후회한들 되돌아가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없으므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후회를 하면서 현재를 안타까움으로 채울 필요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책 속에서 배운 지혜는 간단하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부자의 정의를 돈과 같은 재산이 많은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재산은 교환가치를 지니는 자기 소유의 모든 돈과 사물이다.
그렇다면 흔히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판단하면 교환가치를 지니는 자기 소유의 모든 돈과 사물을 가진 자를 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사람들은 부자라는 용어를 대입시키는 것을 주저하는 시대가 요즘이다.
교환가치를 가진 돈과 사물을 많이 가졌지만, 마음이 공허한 자를 우린 부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욕심이 그 사람의 인품인 세대는 벌써 사라졌고 자기만족이 얼마나 존재하느냐가 관건으로 대두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 가졌지만 허덕이는 인간이 존재하고, 적지만 풍부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전자를 부자라는 용어에 대입시키지 않고 후자를 부자라는 용어에 적합하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사전적 의미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가진 것에 만족하여 풍족함을 느끼는 사람을 부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부자가 된다.
가난보다는 부자가 낫다는 것은 세상 사람 누구든지 안다.
그러나 어떤 삶이 부자인지를 몰라 허둥대는 인간들이 생각보다는 많다는 사실이다.
흔히 채워 즐거운 것이 있고 버려 즐거운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채우고 버리는 것 또한 인간의 마음이 결정하여 행하듯 많고 적음도 내 속에 내 맘대로 정할 수 있으니 물리적인 계산이 그렇게 썩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많이 가졌지만, 마음이 옹색한 사람은 부자는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 평수는 종지 만큼도 되지 않는데 그곳에 무엇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자주 되뇐다.
세계적인 부자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이유를 보면 어렴풋이 부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 맘대로 산다.
한 번도 눈치 보지 않고 살아온 세상이 없기에 남은 삶은 내 맘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의 생각과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아주 소중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고, 늘 감사하고 고맙게 느끼면서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누구와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마음속에 새겨넣어 살겠다는 얘기다.
맘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던가?
사는 게 참 쉬운데 먼다고 어렵게 궁리하면서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과거였으니 묻혔고 현재는 내가 추구하고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 가는 게 바르다고 히득거린다는 얘기다.
나는 누군가의 부속물이 아니다.
온전히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생각이 내 것이 됨으로써 번뇌도 없고 갈등도 없고 사랑도 미움도 없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감을 느낀다.
늘어진 가죽, 이 또한 내게 소중한 보물이고 깊게 팬 주름도 내 삶을 흔적이니 굳이 싫다고 짜증 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월이 가는 대로 인생도 흘러가고 마지막 순간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초연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은 비빔국수에 열무김치를 넣어 비벼 먹어야겠다. 이것이 현재고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