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사망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로 추앙받았던 소련 태생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1989년 11월 5일 뉴욕의 자택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심장마비였다.
마치 3개의 손이 연주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정확한 터치와 격정적 연주기교로 88개의 건반으로 오케스트라의 마력을 만들어내는 `피아노 음악의 전설`로 불리던 그는 1904년 키예프에서 출생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6세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 17세때 데뷔연주를 한 그는 19세때부터 연주회를 열어 혁명으로 몰락한 가족을 부양했다.
21세 되던 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망명, 그후 60여년간 세계를 누비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호로비츠 생전의 마지막 공식연주는 1987년 봄 베를린, 함부르크, 암스테르담에서 있었고, 1986년에는 61년간 떠나 있던 고국 소련에서 감동적인 무대를 열어 `고국연주`의 소원을 이루었다.
[1980년] 한국-바누아트 국교 수립
바누아투는 한국과 1980년 11월 5일에, 북한과는 1981년 10월 1일에 수교하였다. 1995년 카를롯 콜만 총리가 방한 하였다. 1997년 현재 대(對)한국 수출은 223만 9,000달러, 수입은 289만 1,000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원목과 패각이고, 수입품은 타이어와 어류 등이다. /naver
[1958년] 이승만대통령 월남방문
월남은 약 1천여 년동안 실제로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으나 19세기 말부터 80년동안 불란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불란서가 독일에 항복을 하고 월남에서 물러서자 일본군이 이 틈을 타서 1940년 가을에 월남을 점령했다가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일본군이 물러갔다.
1945년 9월2일 호지명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불란서가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와 베트남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베트남은 불란서군을 몰아내기 위해 격렬한 항쟁이 시작됐다.
1949년 말경 중공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완전 지배하게 되자, 미국은 공산팽창의 도미노현상을 염려하여 불란서에 36억불의 군사원조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란서군은 마지막 요새인 '디엔 비엔 푸'가 무너지자 1954년 7월20일 제네바회담을 개최하여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떄 소련과 중공의 뒷받침을 하고 있던 월맹은 17도선 이북에서, 자유 진영인 미국의 뒷받침을 받고 있던 월남은 17도선 이남에서 각각 이질적인 정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월남은 세계강대국의 주변정세로 인하여 그어진 이 17도선은 마치 한국의 38도선 처럼 세계조류의 이념분쟁으로 동족상잔의 쓰라린 비극을 치룬 약소국가의 뼈야픈 역사를 낳게 하였다.
1955년10월26일 월남공화국이 수립되고, '고 딘 디엠'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다음 날인 27일 한국은 월남공화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1956년에는 공사 외교관계, 1957년에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자유우방으로 두터운 친선관계를 갖게 되었다. 1957년9월28일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하였고, 1958년11월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답방을 하여 두 나라의 유대를 굳건히 한 바 있었다. /Google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 가입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 FAO)는 1943년 5월 미국의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식량농업회의를 모체로 하여, 1945년 10월 캐나다 퀘벡에서 소집된 제1회 총회에서 34개국의 헌장서명으로 발족했다. 모든 사람의 영양기준 및 생활향상, 식량과 농산물의 생산 및 분배 능률증진, 개발도상국 농민의 생활상태 개선, 이를 통한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활동은 세계농업발전 전망에 관한 연구와 각종 기술원조 계획을 이행하고, 식량농업·임산물·어업 등에 관한 통계연감 발행하며, 식량의 부족과 잉여에 관해 세계적 규모로서 조정한다. 이를 위해 국제연합과 더불어 식량이 풍부한 지역의 과잉식량을 모아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에 분배하는 WFP(World Food Program:세계식량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관련 정보를 수집·분석·확산하며 정책과 기획에 관해 정부에 자문하고, 정부와 전문가들이 만나서 식량과 농업문제를 논의하는 중립적인 장을 제공한다.
회원국은 2002년 현재 183개국이며, 한국은 1949년에 가입했다. 1953년에 'FAO와 대한민국 간의 기술원조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동시에 'FAO 국제식물보호협정'에 가입했다. 본부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naver
[1937년] 조선중앙일보 폐간
←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가운데)과 김동성 편집국장(왼쪽)이 조선일보를 방문 방응모 사장과 자리를 함께 했다.
1926년 11월에 중외일보가 창간되면서 조선일보ㆍ동아일보가 주도해 온 민간지 신문시장에 3파전이 형성됐다. 중외일보는 1931년 11월에 문패를 중앙일보로 바꾸고 1933년 2월에는 소유권을 여운형 손으로 넘겼다. 여운형은 중국에서 동명의 중앙일보가 발행되는데다 민족적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제호에 ‘조선’을 덧붙인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꿔 신문을 발간했다. 1934년 7월에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재했으나 빗발치는 독자의 혹평으로 연재를 중단시켜야 했고, 1936년에는 동아일보보다 먼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어 곤욕을 치렀다. 3명의 기자가 구속되고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휴간중 발행허가효력이 상실돼 1937년 11월 5일 자동폐간됐다./조선
[1916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아름다운 여성과 지내는 한 시간은 1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냐는 질문에대한 아인슈타인의 대답이다.
1916년 11월 5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을 발표했다. 이는 1905년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을 확장하여 일반화한 것으로, 중력(重力)을 관성력(慣性力)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일정한 가속도를 가진 관측자들에게도 상대성원리가 성립하고, 물리법칙이 좌표계의 변환에 대하여 불변(不變)인 형식을 가지도록 체계화한 이론이다. 즉 시간 ·공간이 각각 관측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1919년 5월 29일 전세계 과학자들과 언론은 아프리카 기니만의 프린시페 섬에서 날아든 소식 하나에 들끓었다. 영국 런던 왕립학회의 일식 관측팀이 태양의 표면을 지나는 별빛이 뉴턴 물리학에 의한 계산보다 두배 더 휘어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며 의심을 받아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진실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이보다 3년전인 1916년 이날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과학학술지인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우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인 리만기하학에 의해서만 분석가능한 휜 공간" 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아인슈타인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로 태양 표면을 지나는 별빛이 휘는 정도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인슈타인은 하루 아침에 새로운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상대성이론은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현대인의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 놓았다. 공간과 시간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운동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
[1912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당선
윌슨(Wilson, Woodrow, 1856~1924)은 버지니아주(州) 출생, 프린스턴대학교 ·버지니아대학교에 이어 존스홉킨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188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8년 코네티컷주의 웨슬리언대학교, 1890년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1902년 이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어 대학개혁에 힘썼다. 1910년 미국민주당에서 뉴저지 주지사후보로 추천받아 1911년 당선,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1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 신자유주의(New Freedom)라고 하는 혁신정책을 내걸고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윌슨의 정책은 대자본에 반대하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언더우드관세법안(Underwood Tariff:관세를 인하시킨 조치) ·연방준비법안(Federal Reserve Act:개인금융기관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대규모 통화개혁법안) ·클레이턴 반(反)트러스트법안 등을 통과시킨 것은 임기 중에 거둔 특기할 만한 실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주의를 내세웠고, 191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재선되었다. 대전 개시와 함께 미국의 무역과 생산은 활발해지고,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도 밀접하게 되어, 미국 자본주의는 전쟁에서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감행하면서 상선과 여객선이 침몰당하자 미국 항구 내에 화물이 적체되기 시작하였고, 인명피해도 늘어났다. 또한 멕시코가 애리조나 ·텍사스에 대한 재정복을 꾀한다는 소문은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윌슨도 이런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대항할 것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전쟁을 끝내게 하는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슬로건으로 전쟁에 이데올로기성을 부여하고, 1918년 1월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파리평화회의에서는 지도적인 지위에 서서 국제연맹 창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 상원은 국제연맹규약을 포함한 베르사유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고, 윌슨 자신은 이 무렵 건강이 나빠져서 1921년 3월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였다. 191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naver
[1912년] 출판인 정진숙(鄭鎭肅) 출생
1912. 11. 5 경기 화성~.
1935년 보성전문학교를 2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6년 조흥은행의 전신인 동일은행에 입사했다가, 1945년 12월 민병도와 함께 을유문화사를 창립, 전무이사에 취임하며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52년 을유문화사 사장에 취임하여 〈조선문화총서〉·〈박물관총서〉·〈대학총서〉 등의 총서류와 〈큰사전〉·〈한국학 대백과사전〉 등의 사전류를 발간함으로써 기초학문 출판의 확대에 기여했고, 〈을유문고〉를 발행하여 8·15해방 이후 문고판 서적의 확산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1956년 검인정교과서 사장, 1961년 국정교과서 사장, 1961~74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1970년 독서신문사 회장, 1985년 문예진흥후원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93년 현재 출판금고 이사장(1972~)으로 재임중이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저서로 자서전 〈출판인 정진숙〉이 있다./브리태니커
[1913년] 비비안 리 인도에서 출생
← 비비안 리와 그의 연인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
1913년 11월 5일, 비비안 리가 인도에서 태어났다. 영국으로 돌아와 배우의 꿈을 키우던 19세 때 변호사 허버트 홀만과 결혼, 아이까지 가졌으나 당대 최고의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결혼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아직 풋내기 배우였을 때 비비안ㆍ올리비에는 함께 영화ㆍ연극에 출연하며 사랑을 키웠다. 둘 다 가정이 있었으나 둘은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임을 깨닫고 동거에 들어갔다. 올리비에가 영화 ‘폭풍의 언덕’을 촬영하기 위해 헐리우드로 떠나자 비비안도 그를 쫓아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사랑을 불태웠다. 그무렵 비비안도 우연히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캐스팅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며 최고의 배우로 발돋움한다. 1940년 8월, 둘은 3년간의 동거생활을 접고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몇 년간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비비안이 무리한 영화촬영으로 조울증에 빠지고 결핵까지 걸리면서 둘의 관계에도 서서히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더욱 불안정해졌고 폭음까지 일삼았다. 처음에는 아내를 위해 헌신하던 올리비에도 잦은 병치레에 지쳐 30세나 연하인 여배우 조안 플로라이트에게 마음을 돌리면서 결국 비비안을 떠나갔다. 실의에 빠진 비비안을 마지막 연인 잭 메리발이 보살폈으나 견딜수 없는 고독과 만성 폐결핵으로 결국 1967년에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는 생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세 남자가 함께했다./조선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대마도서 순국
← 기우는 국운을 매섭고 잦은 상소로 건지려 했던 최익현 선생
조선말기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이 1906년 11월 5일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했다.
1855년 철종 6년에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의 관직을 두루거쳤다. 1868년 흥선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873년 동부승지로 올라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 후 군부에게 잘못을 지적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1875년 풀려났다. 하지만 최익현은 일본과의 통상을 문제삼아 조약체결에 관한 5조의 척사소를 올려 또 다시 흑산도로 유배됐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격렬하게 반대하는 등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상소문을 올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해 대마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단식으로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됐다. 저서로 `면암집`이 있다./조선
[1904년] 대금 명인 한주환(韓周煥) 출생
1904. 11. 5 전남 화순~1963. 5. 3.
어린시절 한수동에게 대금 풍류를, 전용선에게 삼현을 배우고 1920년대에 광주에서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 8·15해방 이전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했고 1959년부터는 임춘앵창극단의 악사로 활약하는 한편, 박종기를 이은 대금산조의 명인으로 부상했다. 그는 박종기로부터 물려받은 대금산조의 골격을 새롭게 변주시켜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남겼고 이를 이생강·서용석 등에게 전수시킴으로서 대금산조의 중시조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었다./브리태니커
[1903년] 독립운동가 박시창(朴始昌) 출생
1903. 11. 5 경기 시흥~1986. 6. 7.
본관은 밀양. 박은식(朴殷植)의 양자이다. 1918년 3월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한 뒤 양부인 박은식과 함께 노령·연해주 등지를 거쳐 중국 본토로 망명했다. 1925년 난징[南京]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중퇴하고, 우창[武昌]의 중국 황푸 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우한 분교[武漢分校]에 입교하여 군사 교육과 훈련을 받던 중 1924년 7월 중국 제1차 북벌전투에 참가했다. 9월 같은 학교 한인학생인 진공목(陳公木)·진갑수(陳甲壽) 등을 규합하고 중국 군대에서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白得林)·홍의균(洪義均)등과 같이 우한 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했다. 그후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29년 3월 장시 성[江西省]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으로 대일전에 참여했고, 1941년중국위륭군대학(中國威隆軍大學) 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연마했다.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에 편입되어 고급참모로 활약했으며,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참모부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강제 징집된 일본군 내의 한국 사병들의 귀국알선에 노력했다. 1946년 7월 귀국한 뒤 12월 국군에입대해 연대장·사단장·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1959년 6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1976년 5월 제5대 광복회장이 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88년] 독립운동가 이규갑(李奎甲) 출생
← 이규갑
1888. 11. 5 충남 아산~1970. 3. 20.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 아버지는 도희(道熙)이다.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와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를 지냈다. 1907년 홍주의진에 참가해 운량관(運糧官)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에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지하단체인 신조선당(新朝鮮黨)을 조직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같은 해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같은 해 4월 10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상임위원회 청원위원이 되었다.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국채발행조례(國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국내에서 안재홍(安在鴻)·조병옥(趙炳玉)·홍명희(洪命熹) 등이 조직한 신간회(新幹會) 경동지회위원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최고위원, 순국선열유가족조사위원장, 충국열사기념사업회장, 대한기독교반공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738년] 허셜(Sir William (Frederick) Herschel) 출생
← 허셜, L. Abbott이 1785년에 그린 유화(부분)
1738년 11월 5일 태어남 / 1822년 8월 25일 죽음 "하늘은 나무가 무성한 서로 다른 화단에 각양각색의 열매가 열린 풍성한 정원을 닮아 보인다." - 윌리엄 허셜
허셜은 항성천문학의 기초를 세우고 항성진화론을 발전시킨 독일 태생 영국의 천문학자이다. 1781년 천왕성을 발견했다. 청년 시절에는 음악교사, 연주자,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했다. 처음엔 망원경 제작기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천체연구가가 되었다. 집요하고 정열적인 연구가였던 그는 좀더 먼 천체를 관찰하기 위해 튼튼하고 성능 좋은 망원경을 직접 만들어냈다. 그의 망원경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쓰는 망원경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또한 그는 배율이 6,450배나 되는 강력한 접안 렌즈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1781년 3번째이자 가장 완전했던 전천(全天)관측을 하는 동안 천왕성을 발견했다. 젖빛 덩어리로 여겨졌던 성운에서 별을 관측해내고 성운구조론을 정리했으며, 쌍성이 공간에 제멋대로 흩어진 별들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서로 상대방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을 관측했다. 우주공간에서의 태양계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했고 1800년 적외선 발견을 발표했으며 태양계의 행성과 다른 구성요소들에 대해서도 연구했다./브리태니커
[1688년] 영국 명예혁명
1688년 11월 5일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피를 흘리지 않고 통치자가 바뀐 혁명이었기에 명예혁명이라고 불리우게 됐다.
1685년, 가톨릭의 부활을 원한 가톨릭교도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교도가 아닌 사람의 공직 취임을 금지한 법률인 심사율을 무시하고 가톨릭교도를 관리로 뽑아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제임스2세에 대한 반감이 국민들 사이에 고조되고 있던 중,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왕자가 없었던 제임스2세가 왕위를 그리스도교도인 장녀 메리에게 계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왕자가 탄생하자 그리스도교들의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후 영국의회 토리당과 휘그당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처가 영국의 자유와 권리 수호를 위해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윌리엄군은 국내귀족과 지방호족들, 왕의 둘째딸 앤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했다. 결국 제임스2세는 영국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윌리엄과 메리는 권리선언을 승인한 후 공동 왕위에 올랐다.
이 혁명은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싸움이 끝나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게 한 시민혁명이었다./조선
[1605년] 영국서 화약음모사건 발발, ‘가이포크스데이’라 불림
1605년 11월 5일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의회를 폭파하고 제임스 1세와 왕비 및 그 큰아들을 시해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었다. 음모의 주모자인 로버트 케이츠비와 공모자들(토머스 윈터, 토머스 퍼시, 존 라이트, 가이 포크스)은 열렬한 가톨릭교도로서 제임스 1세가 더이상의 종교적 관용을 베풀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시해를 모의했다. 1605년 봄 음모자들은 웨스트민스터 궁 바로 아래의 지하저장실을 임대하고 최소한 20통의 화약을 숨긴 후 의회가 열릴 때까지 흩어져 지냈다. 그런데 가담자인 프랜시스 트레섬은 처남 몬티글 경에게 11월 5일 의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몬티글 경은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려 음모가 발각되었다. 11월 4~5일 밤 포크스가 체포되고 고문 끝에 가담자들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케이츠비와 퍼시를 비롯한 2명의 공모자들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 가담자들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사건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고 국교기피자법이 엄격히 시행되었다. 1606년 1월 의회는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라는 공식적인 감사절로 정했고 오늘날에도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년 ‘제28회 한국 고고학 전국대회’ 개최
2005년 원로 동양화가 박원수씨 별세
2005년 제1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2002년 ‘국민통합21’ 창당, 정몽준의원을 대통령후보와 당대표로 추대
2000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보도
1998년 조치훈 명인, 세계최연소-세계최단기로 1,000승 달성
1998년 국제천문연맹,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씨가 국내서 첫 발견한 소행성 공식 인정
1997년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 사망
1996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재선
1996년 민속학자 김두하 옹 별세
1995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재 창설
1993년 유럽통합군 창설
1991년 필리핀, 태풍 ‘셀마’로 4천여명 사망. 실종
1991년 고당 조만식선생 국립묘지에 안장
1991년 영국 언론재벌 총수 맥스웰 사망
1986년 김대중씨,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권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
1984년 다니엘 오르테, 니카라과 대통령선거 당선
1982년 자원관리법안 국회제출
1981년 정부, 제2제철 광양만에 건설키로 확정
1980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공포
1979년 이란, 대(對)미 우호조약 파기 선언
1978년 한국-투발루 국교 수립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의 로마서 개막
1973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로머 사망
1970년 춘천호(의암댐)서 나룻배 전복
1966년 휴 헤프너의 `플레이 보이`왕국 공개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고
1961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발족
1960년 미국 슬랩스틱 희극의 아버지 마크 세넷 사망
1956년 유엔, 중동경찰군제 창설 결의
1951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 파견
1945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
1944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사망. 혈관봉합술 발달 공로로 1912년 노벨의학상 수상
1940년 에콰도르 대통령 롤도스 아길레라 출생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최초로 대통령에 3선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16년 폴란드 독립선언
1915년 불교중앙학교 설치 인가. 뒤에 혜화전문 동국대학으로 발전
1914년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사망
1914년 영국-프랑스, 對터어키 선전포고. 키프러스 합병 선언
1914년 독일군, 1차 대전 중에 일어난 아프리카 최초의 `탕가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승
1913년 러시아-중국, 외몽고협정
1911년 이탈리아, 트리폴리를 합병
1911년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경성섬유 창립
1904년 전독립협회원, 고종 밀지 휴대하고 미국으로
1879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사망
1854년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폴 사바티에 출생
1750년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