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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여 년 전에 저의 작은 형이 ‘투다리’라는 닭 꼬치 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을 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거의 항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는 매우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도와주다보니 가게가 매우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쾌쾌한 냄새는 둘째 치고, 이제야 밝히는데, 주방 여기저기로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형은 그것들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죽였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미식거립니다.
한 번은 쥐를 잡으려고 약을 천정에 올려놓았는데 고양이만한 쥐가 그 약을 먹고 비틀거리다가 한 여자 손님이 소변을 보고 있는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앞에서 손님을 쳐다보며 눈싸움을 하다가 시간이 꽤 흘러 쓰러져 죽었습니다. 손님은 나오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그 쥐와 눈싸움을 해야 했던 입니다.
저는 가게를 좀 더 깨끗하게 하자고 했지만 형은 너무 깨끗해지면 손님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게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손님을 포함해서 많은 손님들이 이 지저분한 가게를 계속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하나 완전한 사람이 없고 그 부족함 때문에 완전한 사람 주위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편한 것입니다.
어차피 술을 마시고 조금은 망가지는 사람들이기에, 너무 깨끗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형은 가게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고해성사를 볼 때 매우 무서운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미사 빠진 것 때문에 그렇게 야단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분은 고해 중간에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고, 대죄가 어떤 것들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저는 다시는 그 분께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부님들이 대부분 좀 무서운 분들 같아서 청년 때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학 가서 저의 지도 신부님을 만나고는 ‘사제가 저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너무 겸손하고 가난하시고 농담도 잘 하셔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팬티가 보이도록 다 뜯어진 바지를 입고 오셔서 저희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옷을 입으시면서도 꼼꼼히 살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부족한 면이 저희가 편하게 그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성으로나 학적으로나 굉장히 뛰어나고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편하시면서도 배울 것이 많아서 그런지 저를 포함해 너무 많은 학생들이 그 분께 논문을 쓰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시나이 산에 거하시는 줄은 모두가 알았지만 그 주위의 불과 구름, 천둥과 번개 때문에 무서워 감히 범접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로지 모세만 시나이 산에 올라가 그 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조차도 그 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께 어떻게 다가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피조물의 옷을 입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분께 몰려들고 또 하혈병이 걸린 여인까지 겁 없이 그 분의 옷을 만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혈병이 걸린 여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안 되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왜 예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될 제자 셋만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들어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또 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밖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예수님을 또다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가다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같이 다니면서 그 분께 말 걸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와 죄를 용서받고 병을 고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에 무리가 되는 것들은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로서 가끔은 신자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선교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편한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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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하신 것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라진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저런 모든 것들, 지혜와 기적의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서로 반문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예수님이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새로움을 가져다 주기가 힘듦을 복음은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하고 수월하게 해주는 유용한 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익숙함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익숙해져 버려 그 대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놓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처럼.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에서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해져 내 마음 안에 어쩌면 죽어 있을 그 대상을 다시 살려 그 안에서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음은 결국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분의 활동은 모든 것들을 선으로 인도하시어 평화와 자유라는 생명을 주신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라고.
예수회, 김병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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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구 신부님
믿는 것과 아는 것, 어느 것이 먼저일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 감히 예수님께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러셨을까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신 것은 그들이 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로 들어서 믿지 못했다면 직접 눈으로 본 것은 믿어야 하는데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그들을 보시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주님을 알고 있는가? 믿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믿을 수 있는 우리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알아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알 수 있는 우리 신앙의 신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이철구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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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마테오) 신부
고등학교 때, 저를 개신교 교회로 데려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경구절을 여기저기서 인용하며 가톨릭은 이단이고 마리아교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 성서를 한 번 더 펼쳐보게 된 것이 지금은 고맙게 생각되지만,
그때는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은 나에게 언제부터 성당에 다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성당에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해 그들처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 구교우 집안이다, 또 태중교우다 하는 것은 한편 자랑거리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튼튼하다는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늘 가까이 하고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거나 신앙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버리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사람과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 지혜와 기적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낱 고향사람 예수일 뿐이었으며,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기적은 오히려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향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과 나는 동향사람이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한편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하지만, 고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구교우 집안의 태중교우라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가진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큰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과 같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라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대구대교구 이종민(마테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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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고향을 찾아가신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저 사람은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하며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론을 통하여 예수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해 드림으로써 그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로 그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한, 유다, 시몬이고 그의 누이들은 다 결혼을 하여 고향에 함께 살고 있으며, 예수 자신도 아버지 직업을 이어받아 목수 노릇을 하며 살았던 것을 예수의 고향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삼십년 간을 고향 나자렛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았기에 조그마한 마을 나자렛에서는 어릴 때의 예수와 청년 때의 예수를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기억을 종합하면 예수는 크게 촉망받은 젊은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예수를 장래성이 있는 젊은이로 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저 성실하고 착한 보통의 젊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고향을 떠난 지 1년 후에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탈바꿈하여 고향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회당에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의 지혜와 예수의 기적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예수의 가르침을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대한 출처에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기에 저 사람의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고 묻게된 것입니다.
몇 가지 대답을 생각해보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느님의 지혜를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았다고 우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답도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따라오는 우리의 생각은 예수는 크게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를 감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하느님 아들은 당연히 하느님의 아들로 처신하여야 하고,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아들인 우리 인간들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고향 나자렛에서 평범하고 착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는 예수께 세례 때처럼 성령의 비둘기 모양으로 찾아와 예수께 하느님의 지혜를 부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겁에 질려서 뿔뿔이 도망쳐 갔던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여 발현하신 예수를 체함하고는 용감한 복음의 선포자로 갑자기 둔갑한 것처럼 예수님도 고향을 떠나서 일년 동안 어떤 중대한 사건을 체험하고서 출현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갖추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역시 일리는 있지만 결국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은 하느님의 길을 가야하고 선택되지 못한 우리들은 우리 인간의 길을 걸으면 된다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예수의 그 지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왔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의 그 지혜는 예수의 고뇌와 갈등, 번민과 회의, 좌절과 희망, 그리고 믿음과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는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때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기에 그 모든 지혜를 하느님께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는 해석이나, 우연한 기회에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는 다면 그것은 너무나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깨닫는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으셨습니다.
고뇌와 번민, 기도와 묵상의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주 예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회의와 믿음의 방법으로 하는님은 예수께 하느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의 그 방법을 예수만큼 노력하여 기울인다면 하느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행한 것을 우리는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의 차이도 아니고 선택의 차이도 아니고 바로 노력의 차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지혜와 기적을 잘 믿지 않으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또 예수의 지혜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시며 인간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지, 그저 우연히 또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태어나면서 선천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가 가진 지혜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사용한 그 방법을 우리도 사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강론을 맺을까 합니다.
부산교구 김상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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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영국의 한 청년이 속도가 매우 느린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닷새나 걸리는 여행길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이 증기선을 타기 위해 모든 비용을 썼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고 건빵이나 치즈를 먹으면서 한 끼 한 끼를 버텼습니다.
하지만 체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식당 앞을 지날 때 보이는 맛있는 음식을 보자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식당으로 들어가서 한 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 식당 주인에게 돈이 없어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식비를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손님, 당신의 배표 가운데에는 식사 대금이 이미 치러져 있습니다.”
배표에 이미 닷새 동안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돈을 내야지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착각과 고정관념 때문에 그는 그냥 건빵과 치즈로 연명하면서 고생을 했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도 이런 착각과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지요.
예수님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 가족상황 등을 훤히 알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이미 ‘예수는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 내 앞에 놀라운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자신들이 알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끼워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곁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은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착각으로 오히려 예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자기 자신에 맞추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마치 색안경을 착용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색안경이란 다름 아닌 이기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약간의 손해나 어려움이 예상되면 너무도 쉽게 거부하고, 쉽고 편한 것만을 찾으려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참된 신앙인지를 말입니다. 전자의 경우가 계속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굶어 죽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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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신부님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성경적 근거는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단어(마르 6,3; 루카 8,19)입니다.
학자들이 그동안 이 구절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일부 개신교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의 친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에 대한 의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4세기경부터 등장했습니다.
4세기의 유명한 성경학자 성 예로니모는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들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성모님의 동정성을 옹호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상당히 넓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같은 동족을 뜻하기도 하고
(마태 5,22-24), 이복형제를 뜻하거나(마르 6,17-18),
더 넓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가족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마르 3,34-35).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교회 공동체에 편지를 쓸 적마다 그들을 ‘형제 여러분’이라 불렀습니다(로마 1,13; 1코린 1,10 등).
그것은 그들이 친형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믿음 안에서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청주교구 이중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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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신부님
난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나처럼 잠을 자는 동안에 적어도 서너 차례 정도는 잠에서 깨어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의 경우 한 번 잠이 들면 아침 자명종이 울릴 때까지 중간에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느냐에 상관없이 잠을 자는 동안 적어도 서너 차례는 깨어나 몇 시인지 확인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다녀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냥 멍하니 누워있기도 한다.
물론 어떤 날은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정말 이른 시간에 침대를 박차고 나오기도 한다. 중국에 오기 전 수면 내시경을 할 때 신경안정제를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주사 맞고도 잠에 빠져들지 않아서 결국은 맨 정신에 ‘욱, 욱’ 거리면서 내시경 검사를 했어야 할 정도니 잠 잘 자는 복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셈이다.
며칠 전에도 새벽 4시가 조금 지나 잠에서 깨어났다. 몇 차례 뒤척일수록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총총해 지는 것이 다시 잠에 빠져들 낌새는 그때부터 이미 아니었다.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시면 다시 잘 수 있을까?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걸어와서 불을 켰을 때 나는 자지러지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밤 설거지를 마치고 식기가 잘 마르도록 싱크대 옆에 엎어놓았었는데 그 식기들 위에서 손톱 크기의 바퀴벌레 서너 마리가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그릇을 엎어놓은 곳이 보온밥통 옆이라 따뜻해서 모두 모여든 모양이었다. 어떤 놈은 아예 내 숟가락이 마치 제 집 인양 폭 파인 곳에 배를 깔고 움직일 생각도 없이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근 두 달 가까이 바퀴벌레 박멸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어느 날부터인지 눈에 띄지 않아서 나는 그 놈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가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터라서 내 놀라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저 놈들 놀이터로 쓰이고 낮에는 내 입으로 들고나는 수저며 그릇으로 쓰이고 있었다니...... 서둘러 주방용 티슈를 몇 칸 끊어서 생포 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나만큼이나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그 놈들 중에 겨우 한 마리만을 잡을 수 있었다.
주방용 티슈 속에서 바동거리는 그 놈을 꾹 눌러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혼잣말로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새벽에 물을 끓여서 식기들을 한참동안 담가 놓았다. 숟가락을 꺼내서 세제를 둠뿍 발라 빡빡 소리가 나게 닦고 있는데 그 동안 이 숟가락이 내 입 속을 들락거렸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렇게 약간 신경질이 난 채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바퀴벌레만큼이나 내 신경을 다시 확 곤두세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개의 베개! 시장에서 구입했던 침구 한 세트에 들어있던 베개 두 개!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하나는 머리에 베고 다른 하나는 껴안든지 혹은 다리를 올리든지 하는 용도로 써왔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새벽에 내 눈에 들어온 두 개의 베개는 내 신경에 몹시 거슬렸다. 화가 났다는 게, 아니,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다는 것이 좀 더 직접적이고 솔직한 표현일까?
옆으로 누워서 자는 습관이 있는 내게 그 동안 꽤 유용하게 쓰였던 베개 하나가 머리에 베는 다른 베개 하나와는 저 만치 떨어진 채 덩그마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소름이 끼칠 만큼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해져 가던 베개 두 개가 놓여 있는 침대가 어느 한 새벽 갑자기 이토록 낯설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그 날 새벽 베개 하나를 옷장 속에 내동댕이치듯 처박아 두면서 혼잣말로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뒤로 한참 동안을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기도할 맘도 일어나지 않았고 음악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그대로 멍청하게 앉아 있는 일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여는 순간 바로 옆 건물에서 세상을 다 깨우는 듯 시끄러운 폭음이 들려왔다. 화약이 터지면서 내는 요란스런 폭음은 그 후로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폭음은 어제 저녁 장례식을 치른 어느 집에서 새벽이 오기 전 시신을 화장터로 운구하면서 온갖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화약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폭죽 소리를 듣게 되자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또 한 분이 차안此岸의 소풍을 마치고 먼 길을 떠나가는구나. 이 캄캄한 새벽에 떠나는 길은 참 외롭겠다. 그렇게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한 외로운 영혼의 아이러니가 놀랍도록 빠르게 내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맞다. 누구 하나 피해가지 못하고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하는 저 낯선 여행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우리들 인생이 어떻게 외로움을 비켜갈 수 있을까. 외로움은 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런 우리들 존재의 상태일진대 나는 어찌하여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물며 하느님과 세상과 사람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이 생을 살면서 이미 최후의 여행길을 떠난 사람이 어찌하여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가?
내가 외로운 것은 아직 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길을 떠났으되 여전히 뭉게구름과 같은 환상 속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혼자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 묶여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한참 동안 들려오던 화약 터지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오늘 미사의 지향은 저기 먼 길을 떠나는 이름 모를 중국 노인을 위하여, 이미 떠나온 여행길에 더욱 정진하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구도자들을 위하여.
미사를 마쳤을 때 어느 새 여명은 창문까지 닿아 있었고 나는 옷장 속에 처박아 놓은 베개를 다시 꺼내어 가만히 침대에 올려놓았다. 내가 품고 자던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님의 베개’였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한 구도자와 함께 매일 밤을 보내시는 나의 님을 위한 베개!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