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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
▣ 왕에 대한 거절-21-27장에 대한 보충 자료-
▣ 개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본 장들은 왕이 거절당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범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십자가로 이끌어 갈 마지막 대결에서 원수들을 만난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1. 세가지 표적/ 21장1-22절
왕의 출현/ 21장 1-11절
-이스라엘의 영적인 소경 상태
성전의 정화/21장 12-16절
-이스라엘의 내적인 부패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21장 17-22절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외적 상태
2. 세 가지 비유/21장 23절-22장 14절
두 아들의 비유/ 21장 23-32절
-성부에 대한 거절
포도원의 비유/21장 33-46절
-성자에 대한 거절
혼인 잔치의 비유/ 22장 1-14절
-성령에 대한 거절
3. 세 가지 질문/ 22장 15-46절
가이사에게 바침 / 22장 15-22절
-헤롯당의 정치적인 질문
부활/ 22장 23-33절
-사두개인들의 교리적인 질문
큰 계명/ 22장 34-46절
-바리새인들의 법적인 질문4. 세 가지 강론/23장 1절-26장 46절
바리새인들에 대한 정죄 / 23장
장래의 왕국에 대한 설명 / 24-25장
십자가를 위한 제자들의 준비 / 26장 1-46절
5. 세 가지 재판/ 26장 47절-27장 66절
가야바와 공회 앞에서 / 26장 47-75절
아침에 공회 앞에서/ 27장 1-10절
빌라도 앞에서 /27장 11-66절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인도함
▣ 고난 주간에 대한 해설
물론 이 개요는 사건들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대강 훑어 보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의 사역의 마지막 주간의 사건들이 전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복음서들을 읽으면 사건의 결말을 조화있게 알 수 있다. 고난주간에 대한 전통적인 연표는 다음과 같다.
-일요일/ 예루살렘 입성
-월요일/ 성전의 정화, 무화과나무를 저주함
-화요일/ 지도자들과의 대립, 비유로 강론함, 바리새인에 대해 정죄함, 왕국에 대한 강론(마 24-25 장)
-수요일/ 말씀이나 행하심에 대한 기록이 없음, 휴식하신 날
-목요일/ 최후의 만찬, 다락방에서의 강론
-금요일/ 체포되어 재판받음, 십자가에 못박히고 장사됨
-토요일/ 무덤에 머물러 있음
-일요일/ 부활
▣ 전통적 연표에 대한 고찰
그런데, 이름난 성경 학자들 중에 이러한 전통적인 연표가 성경으로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흥미로서도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각 날들에 대한 기록은 로마 카톨릭적인 관점이며, 이 전통적인 연표는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무덤에 머무른 기간-그리스도는 “밤낮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실 것과(마 12:40), “삼 일만에“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막 8:31/막 9:31/막 10:34 /마 27:63/요 2:19). 또한 “제 삼일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6:21/마 17:23 /마 20:19/눅 9:22/눅 13:32 /눅 18:33/ 눅 24:46/행 10:40/고전 15:4). 마태복음 27장 63-64절에는 이러한 언급들이 연합되어 있다.
“밤낮 사흘“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하루 중의 일부를 포함할 수 있는 통속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흘이라는 기간은 금요일의 세 시간과 토요일의 하루, 일요일의 일부로서 설명된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금요일 오후 3시에 장사되었다면 무덤에서 단지 하룻밤을 지내신 것이 된다. 우리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는다면, “밤낮 사흘“은 “사흘의 일부“가 아닌 온전한 삼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사건 발생일에 대한 논란-전통적인 견해에 있어서 또다른 분규점은 그리스도의 운명 시각으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 6시 사이에 20여가지의 사건이 발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사건들은 요한복음 19장 31-42절, 마가복음 15장 42-47절, 누가복음 23장 50-56절, 마태복음 27장 57-66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혼란은 “안식일“이라는 단어에 있다. 요한복음 19장 31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다음 날이 레위기 23장 6-7절에 언급된 “큰 안식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큰 안식일“이란 유월절 안식일로서, 매주일마다 지키는 안식일(토요일)이 아니었다. 매주의 안식일은 “큰 날“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 달의 10일에 양을 선택해서(출 12:3-8) 14일에 죽였고, 15일은 무교절 또는 유월절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달의 14일, 곧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셨음을 알고 있다. 만약 그가 밤낮 사흘이 지난 후에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다면, 그의 부활의 날(주의 첫날, 일요일)은 그 달의 18일이 된다. 다시 일요일에서 삼일을 돌이켜 계산해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 주간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유대인들은 전날 해질 무렵부터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날짜(요일) 사건
9일(목-금) 베다니에 오심-유월절 6일 전(요 12:1)
10일(금-토) 승리의 입성-“...그 이튿날에는...“(요 12:12-19)11일(토-일) 성전을 정결케하심,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막 11:12-18)
12일(일-월) 비유, 질의, 감람산에서의 강론(마 21:23-/마 24:1-/마 25:1-36)
13일(월-화) 유월절 준비-“...이틀을 지나면...“(마 26:2)
14일(화-수) 다락방의 일, 겟세마네, 체포됨, 재판받음, 십자가에 못박힘.
15일(수-목) 무덤에 머무심, 유월절 안식일-“큰날“(요 19:31)
16일(목-금) -유월절 안식일이 지난 후 여인들이 향료를 가져옴(막 16:1)
-막 16:2은 그들이 주일 아침에 두번째 방문한 일을 말함
17일(금-토) 매주일의 정규적인 안식일, 모든 사람이 안식함.
18일(토-일) 그 저녁의 해진 후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주일 아침에 빈 무덤이 발견됨.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는 삼 일 밤낮을 무덤에 계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일은 형제들을 분리시킬 만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전통의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마 21:1-22
▣ 승리의 입성-마태복음 21장-
이제 우리는 왕에 대한 거절이란 표제를 단 부분으로 이동한다(21-27장). 21장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분명한 세 가지의 표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세 가지 비유들이 나온다. 이 비유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에 의해 형성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적의를 더욱 확대시켰다.
1. 이스라엘에 관한 세 가지 표적(21:1-22)
왕의 출현(1-11절)-이 구절은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이다. 그런데 마태가 스가랴서를 인용하면서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란 구절을 빼놓은 것에 유의하자.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흰 말을 타고 계시록 19장 11-21절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공의와 구원(승리)을 가지고 오시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17-18절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음을 시사한다. 군중들은 찬양하며 시편 118편 25절을 인용하였다. 나중에(42절) 그리스도는 지도자들을 논박하며 똑같은 시편을 인용하셨다. 이 성읍은 주님을 왕이 아니라 선지자로 불렀음에 유의하자. 며칠 후이면 이 동일한 군중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칠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고난의 날“(눅 19:41-44)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왕을 거절하였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눈먼 것을 본다.
성전을 정결케 하심(12-16절)-이스라엘의 내적인 타락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사역 초기에 정결케 하셨으나, 그 정결함이 지속되지 못했다(요 2:1-). 유대인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사야 56장 7절을 인용하시며 성전을 “나의 집“이라고 불러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는다. 예레미야 7장 11절도 여기서 언급된다. 후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이는 왕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뜻 없이 공허한 성전을 지니고 있었다.
지도자들이 비난하자 그리스도는 메시야적 시편인 시편 82편(히 2:5-9 참조)을 인용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이 땅을 지배하시게 될 때를 지적하신다.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17-22절)-마태복음 24장 32-33절과 누가복음 13장 6-10절은 그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무는 잎은 무성했으나 열매가 없었는데, 이스라엘이 외적으로는 “종교적으로 보이나“ 열매가 없는 것을 상징한다.
누가복음 13장 6-10절에는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맺도록 3년이라는 기간을 주셨다는 암시가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열매를 맺는 데 실패했다. 그리스도는 이 기적을 믿음에 대한 교훈으로 삼으시며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심판을 가져올 것임을 암시하신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많은 모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너희 저주받은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잎사귀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표적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소경의 상태이며 내적으로 부패했음을, 외부적으로는 열매가 없음을 나타내셨다."
마 21:23-/마 22:1-14
2. 이스라엘에 관한 세 가지 비유(21:23-22:14)
21장 23절부터 23장 39절까지에서 그리스도는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전에 계신다. 24장 1절에서 주님은 성전을 떠나셨고,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셨다. “이가봇“(영광이 떠나갔다/ 삼상 4:19-22)이란 말이 이제 성전에 대한 말이 되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하였고 주님은 세례(침례)요한의 문제로 몰아가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 왜냐하면 그들은 요한이 진리를 말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계시하신 바를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새로운 진리를 결코 제시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요한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예수께로부터 대답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두 아들(21:28-32)-여기서는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아들인 이스라엘을 보게 된다. 포도원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사 5:1-7/시 80:8-16). 세례(침례)요한을 거절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죄인들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갔다!
포도원과 농부(21:33-46)-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행하셨으며 이 민족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 민족은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열매 맺기를 거절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을 처리하도록 선지자들과 종들을 보내셨는데 이스라엘은 그들을 잘못 취급하였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주님을 죽였다! 그들은 “포도원 밖에 버리기“까지 하였다(히 13:11-13).
유대인들은 41절에서 스스로 판결을 내렸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이 분명하다. 주님은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빼앗아 가셨으며 예루살렘을 파괴하셨고, 이 축복들을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져가셨다.
그리스도는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하시며 자신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이사야 28장 16절에 언급되어 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사도행전 4장 11절에서 “너희 건축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로마서 9장 33절과 베드로전서 2장 4-8절은 모두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거치는 돌이 되었으나 교회에는 기초석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겸손하게 “이 돌에 떨어지는“ 죄인들은 부서질 것이다(그리스도께서 반석이신 것을 보려면 본 서의 스가랴서 부분을 참조하라).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것과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본다. 다음의 비유에서는(22:1-14) 주님이 이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데도 성령(하나님의 사자)께 저항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혼인 잔치(22:1-14)-이 비유를 얼마 후에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에 관한 축복된 진리로 보지는 말자. 이 비유의 사상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으로 복됨을 즐기도록 손님들(이스라엘)을 초청하지만 그 민족이 초청을 거절한다는 내용이다.
초청이 여러 번 있었음에 유의하자. 3절은 아마도 복음시대 동안의 사도들이 초청하는 것을 뜻할 것이며 4-6절은 왕국이 다시금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을 때인 사도행전 처음 몇 장의 초청임을 시사한다.
이스라엘은 성령께 저항했으며(행 7:51-52), 이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포함하여 이 민족의 붕괴를 가져오게 했다(7절). 왕은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었고,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함으로써 그들이 결정한 바를 드러내어 인을 쳤다.
이 비유가 끝나는 구절은(11-14절) 손님들이 영접을 받기 위해서는 왕이 주시는 옷(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왕은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다 초청하였으며 그들이 영접을 받을 수 있도록 옷을 주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의의 선물에 대한 말이다(고후 5:20).
이 비유는 천국(Kingdom of heaven)을 상징하고 있다(2절). 천국은 참과 거짓이 섞여 있다. 이것이 하늘(낙원)의 한 장면이라고 갖다 붙이지는 말자.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아무도 하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서는 쫓겨나는 일도 없다. 이 구절들은 초청에 응하면서도 주님을 모셔들이지 않고 거짓된 고백을 하는 일을 피하라는 경고이다.
이 세 가지 비유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역사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았다(포도원과 무화과나무).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두 아들의 비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포도원의 비유), 성령을 거역하였다(혼인 잔치의 비유). 이방인의 수가 충분히 차기까지(롬 11:25-) 그리스도의 축복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제쳐졌다."
마 22:15-22
▣ 비판자들에 대한 대답-마태복음 22장-
앞 부분에서 14절까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에 올무를 씌우려고“ 예수께 물은 질문들을 다룬다.
1. 조공에 대한 질문(22:15-22)
이 질문은 헤롯당원이 물은 것으로서, 이들은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종교 집단이었다. 신약 성경에는 이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나오지 않으나, 로마에 대하여 헤롯과 결탁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통치를 미워하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는 처지였으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이 두 적수들이 서로 연합하였다.
조공에 대한 질문은 “까다로운“ 것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로마에 바치는 조공을 반대한다면 주님은 반역자요 정부에 대한 위험 인물로서 체포될 것이었다. 대신, 가이사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에 우호적이라면 로마 통치자들을 업신여기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까다로운 질문에 응하여, 그리스도의 대답은 참된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들의 나라 양쪽에 의무가 있음을 보여 준다. 디. 엘. 무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치게 경건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법에 순종해야 하고 지도자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이사가 자기의 형상을 동전에 새긴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인간에 새기셨다(창 1:26-27). 죄는 이 형상을 망쳐 놓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잃어 버렸던 그 형상을 다시 찾게 되었다(엡 4:24/골 3:10). 누가복음 15장 8-10절에 나오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으며, 참된 형상을 되찾으려면 우선 발견되어야 한다는 암시이다."
마 22:23-33
2. 부활에 관한 질문(22:23-33)
사두개인들은 교리적인 문제로 돌입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원수지간인데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려고 다시 연합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내세의 결혼에 대하여 가상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형의 대를 잇기 위하여 과부된 형수와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다(창 38:8/신 25:5-10).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인간의 결혼은 내세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게 될 것이며 성별이 없고, 인간의 율법으로 통치를 받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천사들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결혼 문제에 있어서 그들과 같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천사들과 같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언제나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는 출애굽기 3장 6절과 15-16절을 참고하여 성경으로부터 비판자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는... 의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말은 이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은 비록 육신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실제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죽음 후에도 영혼이 존속함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임을 가르치신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이들을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키기에 충분하다!"
마 22:34-46
3. 큰 계명에 관한 질문(22:34-46)
이제 바리새인들은 공개적으로 구약 율법에 대한 법적인 질문을 가져왔다(“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는 3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적들을 어떻게 침묵시켰는지를 보여 주며 문자적으로는 “망을 씌우다“란 뜻이다).
율법 학자들은 계명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큰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끊임없이 논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명들을 “무거운“ 계명과 “가벼운“ 계명으로 나누었으며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분리하였다(오늘날의 종교적인 단체들과도 같아 보인다). 결국, 의식법 중 가장 작은 세부 사항이 하나님의 큰 도덕법 만큼 구속력이 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어려운 신학적인 항목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다시 구약 성경에 호소하시며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 구약 율법을 종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8-10절에서 이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소한 죄“와 “도덕적인 죄“ 또는 그밖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이러한 죄들의 인공적인 구분을 피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확인하신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참된 마음의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요 8:42).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으로부터 외부로 흘러 나갈 것이다(롬 5:5).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현대주의 설교자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피상적이고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헤롯당원, 사두개인, 바리새인을 침묵시키시고 이제 그리스도는 친히 질문하신다(22:41-42).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하여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시편 110편 1절을 언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 시편을 다윗이 썼으며 그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였음과(43절),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신 데에 유의하자.
예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는 의미로서 「주」라고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다. 물론 그 대답은 마태복음 1-2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하나님이시나, 하나님이신 인간으로서 육신을 입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만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했다면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굳어서 진리를 거절하였고, 주님을 침묵시킬 보다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돌이켰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였으며(요 8:44), 거짓말을 하려다가 실패하자 이제는 그를 죽이려 한다.
시편 110편 전체를 읽으면 이 시가 그리스도께서 적들을 정복하실 것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되심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장 32-36절에서 이 시편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또한 히브리서 10장 12-13절에서도 인용된다. 유대인들에게 왕으로서 거절당하신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을 향하시게 될 것이며 그들의 대제사장이 되실 것이었다.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주님은 그의 원수들로 발등상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 사이에 주님은 심판과 승리의 날이 오기까지 인내로 기다리신다(바라고 기대하신다/ 히 10:13).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하다. 이 사람들은 진리에 저항하였고 자신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종말을 고한다.
원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답하라.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며, 능력이 있다.신자됨의 표지는 사랑이다(요 13:35).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하찮은 율법이나 규율을 육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표지를 삼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