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은 '부민관 폭파의거' 66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해 24일 옛 부민관 건물인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청사 입구 대로변 계단 아래 그날의 의거를 전하는 표지석만 외로이 서 있을 뿐, 그날의 주역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고, 세상 사람들은 제 사느라 무심할 뿐이니 그날의 쾌거를 기억하는 자 과연 그 몇이나 되리오?
'부민관 폭파의거' 66주년, 생각나는 독립운동가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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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폭파의거' 세 주역 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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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조선청년 셋이 서울 관수동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막 귀국한 조문기와 유만수, 강윤국. 셋은 의기투합해 '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조문기가 우연히 집 장독대에서 발견한 <조선독립소요사>에 실린 '대한애국청년당'에서 따온 것인데, 약칭으로 '애청'이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째 모임에서 이들은 거사계획을 세웠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친일거두 3명, 총독부 인사 셋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는데, 처단 1순위로 박춘금(朴春琴)이 거론되었습니다. 그 외 화신 재벌 박흥식, 친일경찰 김태석도 거론되었는데, 거사에 쓰일 무기로는 다이너마이트와 권총으로 결정했습니다.
친일 반역도들의 거동을 살피던 중 박춘금이 포착되었습니다. 시내 명월관에서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구미가 당기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잘만 하면 박춘금은 물론 이성근, 김동환, 고원훈, 김사연, 손영목 등 대의당에 참여한 친일 거두들을 일망타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7월 21일자 신문 1면에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주최 대의당, 일시는 7월 24일 저녁 7시, 장소는 부민관. 이날 모임에서 '애청'은 첫 거사로 아시아분격대회를 분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거사 72시간을 남겨두고 시한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다이너마이트는 유만수가 수색 변전소 작업장에서 입수한 것이었습니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시한폭탄을 만든 건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거사 당일, 부민관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세 사람은 인파를 뚫고 행사장으로 잠입해 관중석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친일경찰 출신으로 당시 <매일신보> 사장으로 있던 이성근이 사회자로 나섰는데, 무대 위는 참으로 군침 도는 자리였습니다. 한 쪽에는 아베 총독을 비롯해 정무총감, 군사령관 등 침략원흉들이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엔 박춘금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에서 온 친일괴수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저 놈들을 한 방에 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순간 세 사람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가지고온 폭탄이 손으로 던지는 폭탄이 아니라는 게 몹시도 안타까웠습니다. 단상의 인물들에게 넋이 나가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 아차 싶었습니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닥친 계획이라 시한폭탄 만드는 데 정신이 팔려 현지답사도 못한 것입니다. 셋은 얼른 대회장을 빠져 나와 폭탄 설치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박춘금의 등장을 알리는 마이크 소리가 복도로 흘러나왔습니다. 셋은 행사장 옆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문 안쪽에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는데 거길 폭탄 설치장소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나는 계단 밑에, 다른 하나는 무대 밑에 설치했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들이 폭탄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행사 관계자로 무대 관리를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폭탄 두 개를 설치한 셋은 행사장을 유유히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길 건너 시청 앞에 서서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심지는 3분 후에 폭발하도록 설치해 두었습니다. 드디어 약정된 9시 9분 50초. 셋은 카운트다운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는데 바로 그 순간 "꽝! … 콰꽝!" 두 차례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길 건너 부민관에서 아비규환의 비명이 터졌습니다. 화약 연기와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습니다. 대회는 쑥대밭이 되었고, 단상의 참가자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성공이다! 완벽한 성공이다! 하늘이 도와 셋은 첫 시도한 거사를 성공시켰습니다. 이것이 소위 '부민관 폭파의거'의 전말입니다.
광복절이 오면 숨기 바빴던 독립운동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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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폭파의거 기념표석 앞에 선 조문기 선생 (출처-조문기 선생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에서) |
ⓒ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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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범인' 검거에 나섰습니다. 범인 검거에 5만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내걸렸는데, 당시 쌀 한 섬에 100원이었으니 그 값을 알 만합니다. 이 일로 요시찰 대상자를 비롯해 6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됐으며, 일경의 고문에 못이겨 '내가 범인이다'고 자백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유만수는 이를 가슴 아파하는 조문기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문기, 좋은 세상이 오면 찾아가 사과를 하자구!"
(* 이 사건은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1945년 11월 13일 <자유신문>에 '복면 벗은 세 청년용사, 부민관폭탄사건 진상은 이렇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세 청년용사'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 활동했던 이가 조문기(趙文紀)입니다. 2008년 2월 5일 타계하신 '진정한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이 바로 그 분입니다. 90년대 중반 광복회 취재를 하다가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회 내부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용이 기사화되면서 결국 선생은 광복회를 떠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생전에 독립유공자 잔칫날이랄 수 있는 광복절이면 어디론가 숨곤 했는데요, 그 이유는 세상을 보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선생은 서훈도 신청하지 않다가 사위가 대신 신청을 해서 뒤늦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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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기 선생 빈소의 영정 사진(2008.2.6, 필자 촬영) |
ⓒ 정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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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평소 우리사회가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는데요, 특히 독립유공자들이 그 일에 큰 힘을 보태지 못한 것을 '죄'라며 늘 자책하셨습니다. 요즘도 광복회의 위상이나 역할을 두고 따가운 지적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조 선생 같은 분이 광복회를 맡아 이끌었다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선생이 남긴 '독립운동가의 죄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하는데요, 우리가 알았던 조문기 선생님은 바로 이런 분이셨습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그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삼가 선생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