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gart에 의하면 殷商과 西周시기까지 1인층단수대명사 余이고 我는 1인칭복수였다고 한다. 吾는 西周이후 등장하여 주로 목적어로만 사용되었다. 이들 상고 재구음은 余는 la,我는 ngar?,吾는 nga, 2인칭은 汝로서 nja?로 재구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3인칭 其와 伊는 각각 kɯ와 klil로 재구된다. 西周이후 余la와我는 공존하다가 我로 수렴되었다고 한다.
코레의 /나/와 /너/ 그리고 /그/와 殷商의 余la,汝nja?, 其kɯ는 차용관계인가 동원관계인가?
소위 秦韓집단의 1인칭 대명사 阿qa로 나와 있는데 Sagart에 의하면 장면어의 1인칭 단수는 원래 ka였다고 한다. 이렇듯 장면어와 상고중국어는 1인칭단수에서 차이가 났었는데 장면어는 이후 nga를 중국어로부터 차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히말라야 인근의 장면어계에서도 또 대부분의 장면어계에서도 대부분 nga로 알려져 있기에 여전히 설왕설래되고 있다. nga,ka,qa는 일종의 방언적 현상으로 볼 수 있기에 자칭 秦韓계 위만계집단이었던 秦韓집단의 1인칭 대명사 阿qa를 보면 위만계 집단은 분명 중국계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余la는 장면어계통이 아닌 殷商 지배 족단의 1인칭 단수 대명사였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티베트어의 2인칭은 rang, 3인칭은 khong이어서 중국어의 余la, 汝nja?, 其kɯ는 장면어와는 계통이 다른 殷商 지배 족단의 대명사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코레어가 중국어로부터 차용하였다면 l은 어두에 서지 않기에 na로 반영하였다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余la가 1인칭 단수로 쓰이고 있을 때로서 西周이전 시기에 차용하였다는 것이 되고 이는 그 시기에는 코레족이 중국 북방에 거주했음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증거가 된다 할 수 있다. 만약 차용관계가 아니고 동원관계라면 la와 na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殷商족단이 na에서 la로 개신한 것일까? 아니면 예맥족단내에 알타이어화가 진행된 결과일까? 본인은 홍산남파에서 殷商이 분리된 이후 청동기시대에 C3*의 남하에 따라 예맥족단의 알타이어화가 진행되었다고 추정한다. 즉 la에서 na로 바뀐 것이다. 차용인지 동원인지 앞으로의 연구를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예맥족단이 BC7세기 이전 중국 북방에 거주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어란 이렇듯 어느 시기에는 창신이 일어나고 이어 그 집단이 성세하면 그 창신은 널리 사용하게 된다. 소위 신라어 역시 그 기층이 韓倭어계였기에 오늘날 떠들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倭語계 단어가 많이 상용되었을 것이다. 본인은 삼국사기 지리지 권37자료에서 소위 훈독자료는 대부분 신라인의 훈으로 작성되었다고 추정한다. 도대체 북방의 고구려어가 일본어 수사와 같다는 설정은 역사적으로나 인구유전학적으로나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나 있을 수 없는 설정인데 오직 한가지 백제에 의한 언어전변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이론 체계.. 국어학에서 이런 황당이론이 버젓이 몇십년을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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