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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됐으며 동대문사단을 움직이는 일인자로 자리매김한다. |
사진(하)은 사형집행 당시의 실제 임화수 (본명 : 권중각)
아래 사진은 그의 절친한 친구 곽영주 의 사형집행 직전의 모습
제1공화국 '부(副)부통령' 곽영주
'이 땅의 황국신민들' -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헌병 하사관으로 해방을 맞이 |
1924 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곽영주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2 년을 마친 후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일제 시대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인이 출세할 수 있는 좁은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는 조선 청년들의 출세 욕구를 이용하여 일본군에 지원하도록 유도했다. 일제는 만주침략 때 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 때문에 조선인을 징집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청년들을 지원병 형태로 일본을 위한 전쟁에 이용하기로 하고, 육군 특별지원명령을 공포하여 1938~1943 년 까지 약 1 만 8 천 명 가량의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에 지원시켰다(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4 년 부터는 지원병 제도가 징병 제도로 바뀐다). 헐벗은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아랑곳없이 단지 자신만의 출세를 위해 일본군에 지원한 자들 가운데 곽영주도 있었다. 곽영주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일본의 군대에서 헌병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사실상 당시 조선인 지원병들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일본측의 교묘한 술책과 유혹, 그리고 전시하 극도의 궁핍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일본의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원병 모두가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된 경우가 아닌 이상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일제의 전쟁에 참여한 것은 이미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당시 일제에 의해 극도로 억압받던 전시 체제하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주로 일본군의 말단직 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할 엄청난 죄과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영주를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곽영주가 식민지 시대의 반민족적 행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죄악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이다.
월권을 행사한 안하무인의 대통령 경호책임자
해방이 되자 곽영주는 수도경찰학교에 입교, 그곳을 수료한 후 1947 년 3 월 수도경찰청 순경에 임명되어 같은 해 9 월 경사로 승진하여 공무대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그 직후인 1947 년 10 월 경무대(당시 하지 미군사령관 관사) 경비경찰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948 년 정부수립 후에는 경무대 경찰 경호계에서 줄곧 근무하면서 경위(1950 년), 경감(1952 년), 총경(1954 년), 경무관(1957 년)으로 승진하였다.
이승만의 초대 경호책임자는 김장흥(金長興)이었다. 김장흥은 미군정기에 서울 중부경찰서 외근주임으로 계급은 경위였는데, 이승만의 거처였던 돈암장 경비책으로 배속된 이래 줄곧 이승만의 호위를 담당했다.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경무대로 들어가고 나서도 그는 계속해서 경호실 책임을 맡았다. 김장흥은 약 4 백여 명의 경무대 경찰서 서원들을 지휘 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대통령의 경호만을 전담하는 경호계(警護係)를 별도로 두었다. 이에 따라 경무대 경찰서는 경무대 일대의 경비 임무를 총괄하고, 경호계는 이승만의 집무실과 침실 및 대통령 행차시의 호위 경비를 직접 담당하는 셈이 되었다. 이 경호계 인원은 20~30 명 정도였는데, 여기에 곽영주가 경사 계급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곽영주는 사격술이 뛰어나 경무대 경찰서의 사격 대회에서 여러 번 일등을 차지하여 '명사수 곽 경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행차시에는 호위차에 우뚝 서서 총을 비스듬히 세운 인상적인 풍모를 돋보였다고 한다. 늘씬한 체격에 미남형인 그는 경호계원 가운데서도 멋쟁이로 통하였고 윗사람에 대한 매끄러운 매너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눈에도 들었다. 그러나 김장흥과 그 후임인 김국진(金國振)이 경호실장으로 있을 동안 아직은 곽영주가 나설 계제가 되지는 못했다.
곽영주의 출세는 한마디로 정치적 비리의 산물이었다. 그 정치 비리의 서곡은 1956 년 5 월 5 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 직후부터 펼쳐졌다. 문제가 된 것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의 낙선이었다. 이에 책임을 지고 내무장관 김형근(金亨根)이 사임했고, 치안국장 김장흥은 강원도지사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경무대 경찰서장 김국진도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에 곽영주가 발탁되었다. 곽영주는 이렇게 이기붕의 낙선 후유증인 인사 파동에 편승하여 대통령 경호책임자로 기용된 것이다. 곽영주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데에는 당시 '폭력계의 대부' 이정재(李丁載)의 보이지 않는 도움도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 차장이라는 감투를 얻어쓴 이정재는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경무대 경감으로 있는 동향후배 곽영주와 결의형제를 맺었다. 이정재는 곽영주를 키우기로 작정하고 박마리아에게 곽영주를 인상적으로 심어 놓았으며, 박마리아는 이승만 부부에게 곽영주의 칭찬을 거듭 되뇌었다.
사실 1955 년 무렵까지 대통령 경호실은 권세와는 무관하게 음지에서 묵묵히 소임만 다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대통령 경호관이라고 해서 장관이나 국회의원에게 까지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그러한 횡포는 당시로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곽영주가 경무대 경찰서의 실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돌변하고 만다. 경무대 비서실에서 경리를 담당했던 김상래(金相來) 비서관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자유당 말기 김국진 씨 후임으로 경무대 경찰서장이 된 곽영주 씨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서장이 된 후에 얼마 안 되어 경무관으로 승진했는데 그때부터 세도를 부리며 천하를 호령했다. 그래서 주위의 핀잔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안하무인격이었다.(「副부통령 곽영주, 동카포테 이정재」, 159쪽)
경무대 경호책임자라면 글자 그대로 경무대라는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잘 경비하고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위해 호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다. 경호책임자의 행정적 신분은 경찰관이므로 경찰관 신분으로서의 직책 수행에 그쳐야만 한다. 대통령의 정치적. 행정적 업무를 보좌하는 직분은 경호관이 아니라 비서관들이 수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곽영주는 자신의 업무 범위를 넘어 권세를 마구 휘둘렀다. 그는 대통령의 건강과 경호 문제를 구실로 경무대 비서관 가운데서도 박찬일(朴贊一)만을 이승만과 만나게 하여 여타의 비서관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경무대 주변에서 '박찬일 부통령' '곽영주 부부통령'이라는 은어가 나돈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곽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종로 영보빌딩을 차지하는 등 축재에도 손을 뻗쳤다는 얘기가 이승만의 귀에 들어가 이 때문에 꾸지람을 듣게 되자, 그는 프란체스카의 비서인 이무기(李無忌)가 밀고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심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체포된 이후 검찰측이 제출한 공소사실을 보면 곽영주가 민간기업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피고인은 하등의 증서도 받지 않고 세무당국에 신고할 의사없이 허무인 명의로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부정한 행위로써 세금을 포탈할 것을 결의하고, 1959 년 4 월 3 일에 금 1 천만 환, 동월 23 일에 금 3 천만 환, 합계 금 4 천만 환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50 번지 소재 한국금속제련주식회사 사장 김승호(金承昊)에게 월 5 본 이자를 수취하기로 약정하고, 원금으로 동 금액을 제공한 후 동년 5 월경 부터 1960 년 3 월경 까지의 사이에 금 2 천 2 백만 환의 이자를 수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 취득액에 대한 영업세금 52 만 4 천 환, 소득세 610 만 1 천 환, 교육세 183 만 1 천 환, 계 893 만 6 천 환의 국세를 납부치 않고 포탈하고......"(《한국혁명재판사》 제1집, 79쪽)
정치깡패를 교사하고 비호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로 정부 여당을 성토하는 정치강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인 1957 년 5 월 24 일, 경찰은 적어도 5 만여 명의 청중이 모일 것으로 추계하였다. 이미 자유당의 사병이 되어 버린 경찰은 이 추계 정보를 알릴 만한 곳에는 모두 보고하였다. 곽영주와 이정재 사이에도 전화 통화가 오갔다. 전화를 통해 대통령 경호실장은 야당강연회 봉쇄를 암시했고, 이정재는 심복인 유지광(柳志光)을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다음날인 25 일 토요일 오후 수만의 인파로 뒤덮인 장충단공원.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조병옥(趙炳玉)이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4,50 명의 괴한들이 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강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지만, 경비 경찰은 사태를 방관하며 괴한들이 유유히 사라질 때 까지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괴한들의 신분이 이정재가 거느린 깡패집단의 하나인 화랑동지회 회원이라는 것은 신문기자들에 의해 곧 드러났다. 습격조 두목인 유지광은 일단 숨어 버렸으며 곽영주는 치하의 전화를 걸였다.
그러부터 3 여년 뒤인 1960 년 3 월 15 일, 정·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었다. 민심 으로부터 멀어질 대로 멀어진 이승만 정권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는 도저히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금권과 강권을 총동원한 부정 선거를 획책하였다. 물론 온갖 불법과 부정을 자행한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이 이긴 것으로 선거 결과는 나타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쟁의 물결은 이후 정권 타도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고려대생 시위를 정치깡패들이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다.
1960 년 4 월 18 일 오후. 고려대 학생시위대 6 백여 명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하며 3·15 부정 선거를 성토한 후, 저녁 7 시경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위대가 경찰 백차의 길 안내를 받으며 천일 백화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로 무장한 1 백여 명의 괴한들이 달려들면서 이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10 여 명의 고려대생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대 뒤를 따르던 소년들도 20 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이들을 취재하던 기자, 보도원 10 여 명 까지 부상을 입는 등 제2의 치안 병력인 정치깡패의 존재가 또다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폭행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경찰은 이날 밤 조무래기 몇 명을 연행했다. 부하들의 연행사실에 대해 유지광 으로부터 보고 받은 이정재와 임화수(林和秀)는 곽영주에게 석방을 부탁했고 이에 곽영주는 동대문 경찰서장을 전화통에 불러 협박 하면서 호통을 쳤다.
"이 개놈의 새끼, 누가 깡패를 잡아 넣으라고 했어. 시경국장도 모가지를 뗀다"(《한국혁명재판사》 제1집, 79쪽)
"그들은 애국적인 반공청년단원이야. 화랑동지회 회원이란 말이다. 훈장은 못 줄망정 체포하다니 당신 정말 정신나갔어? 당장 석방해!"(《4월 혁명 자료집-혁명재판》, 173쪽)
곽영주의 이 같은 말 한마디에 연행됐던 폭력깡패들이 일단 풀려난 것은 물론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대한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辛道煥))은 당시 국회의장 이기붕의 비호 아래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3·15 부정 선거에 가담하기도 했다. 훗날 경찰은 이 습격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데모대를 습격한 깡패들은 경무대 경호관 곽영주 지도하에 있는 임화수, 이정재, 유지광 등 정치 세력과 결탁한 정치깡패들 이었음이 뒤에 판명 되었으며 18 일의 고대 데모와 깡패들의 테러는 혁명의 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자극하여 줌으로써 전 서울의 대학생들은 익일(다음날) 총궐기하여 4 월 혁명의 노도를 이루게 되었다(《한국경찰사》 2, 하권. 1245쪽).
'피의 화요일'의 서막을 연 발포 명령자
다음날인 4 월 19 일.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분노는 마침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고려대생 습격 사건을 계기로 서울 시내 10 여 개 대학생들은 4 월 19 일을 총궐기의 날로 정하고 경찰의 저지선이 놓인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갔다. 서울대 문리대의 4·19 선언문은 대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 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천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어설픈 것임을 교시한다"(《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 혁명》 2, 17~18쪽).
시내 도처에 집결하기 시작한 학생 시위대는 정오를 전후하여 국회 앞과 세종로를 중심으로 '3·15 선거를 다시하라' '역적을 몰아내자'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다' '기성층은 각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중앙청 정문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동국대생 한 명이 쓰러지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파도는 경무대를 항하여 밀려갔다.
여기서 곽영주의 최후의 만용이 연출되었다. 혁명재판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곽영주는 경무대로 달려온 국무위원들과 장성들의 신중론을 뿌리치고 오히려 핀잔을 주면서 권총을 빼들고 경비 현장에 달려나가 시위대에 실탄 총격을 가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경무대 저지선과 간격이 10m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무대를 지키던 경찰의 실탄 사격이 가해졌다. 경무대의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시위대를 뒤쫓은 경찰은 사정없이 이들을 구타하면서 끌어갔다. 이날 경무대 앞의 시위 희생자는 사망 21 명, 부상 172 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피의 화요일'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의 교훈은 곽영주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하자 여론은 이승만 정권하의 범죄자들을 엄벌에 처하라고 들끓었다. 5 월 3 일 최인규(崔仁圭)의 구속에 이어 4 일에는 이강학(李康學), 5 일에는 한희석(韓熙錫)ㅡ 6 일에는 최병환(崔炳煥), 7 일에는 곽영주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곽영주는 이승만에게 인사를 하고 5 월 9 일 마침내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갔으며 발포 명령 혐의 등으로 6 월 1 일 정식 구속되었다. 쇠고랑을 찬 자들의 법정 태도는 각양각색이었지만 대부분 무죄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곽영주도 자신은 결코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발포 명령자는 경찰책임자급 이라고 하며 살아날 구멍을 찾았다.
"사실 나에 대한 많은 것들이 잘못 전해져 나는 나쁜 놈이 돼 버렸다. 그러나 발포 명령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곽영주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1960 년 8 월 29 일 대법정에서 이루어진 검찰측 논고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 곽영주는, 4 월 19 일 오후 1 시 30 분경, 3·15 부정 선거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면회를 요청하려는 서울대학교 및 각대학 의거 학생들이 경무대 어구로 이르자, 돌연 경무대 경찰서원들로 하여금 최루탄을 발사하고 소방수를 살수케 하는 등 갖은 폭력적인 만행을 했으며, 마침내 의거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넘어 경무대 경내로 밀려들자, 곽영주는 경무대 서원들에게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려 의거 학생들에게 실탄 사격을 가함으로써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생 김치호 외 6 명의 학생을 살해케 한 자로서 그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요컨대, 독재의 아성 앞에서 평화적 의거민을 다수 살해한 곽의 범죄는 극형에 처함이 마땅한 것이다"(《4월 혁명 자료집-혁명재판》, 244쪽).
당시 서울지검 부장검사인 장병철(張秉哲)은 발포 명령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엄단을 요구하면서 "발포 경찰관은 합법적인 정부 기관이므로 그 총기 사용이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에 해당할지는 몰라도 살인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재판은 혁명적 성격을 띤 것이므로 이를 배격해야 한다.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학생들에게 잔인하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에게는 정당방위나 긴급 피난을 논할 여지가 없다"고 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한 달 반 뒤인 10 월 8 일 서울지법 형사1부에서 선고공판이 열렸다. 세칭 '10·8 판결'로 불려지는 이날 판결은 일련의 사태를 몰고오는 시발점이 됐으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재판부는 판결이유 낭독에 이어 피고인 48 명에 대한 선고에 들어갔다. 발포 명령 사건의 유충렬(柳忠烈) 피고인(전 서울시경국장)에게 사형이, 백남규(白南圭) 피고인(전 서울시경 경비과장)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10·8 판결에서 무기징역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은 이들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 재판부는 징역 8 월에서 5 년을 각각 선고하거나 무죄를 선고했다. 살인·권리행사방해·조세범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이 구형된 곽영주도 살인과 조세범처벌 위반 혐의가 무죄로 인정되어 징역 3 년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피고인 가족들의 기쁨과 환희와는 달리, 선고형량이 예상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전국은 다시 한 번 들끓기 시작했다. "법원 판결은 법 해석과 형량에서 심히 부당하다 [서울지검 김동호(金東鎬) 차장검사]", "이번 판결은 독립 정신과 혁명 정신을 모독한 것이다. 혁명을 완수해야 할 이 마당에서 법관이 원흉들을 비호한 듯한 인상을 국민에게 준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다. 원흉들을 미온적으로 처단한다면 제2의 이승만과 제 3, 제 4의 불법자들이 다시 대두하는 것을 무슨 방법으로 막겠느냐(유도회·광복동지회 등 4 개 사회 단체 대표)" "사법부의 이번 판결 이야말로 이 민족 이 국가를 반역한 행위" 등 사법부를 비난하는 성명이 각계에서 연일 쏟아져 나왔다. 비판은 성명서에 그치지 않고 시위로 연결되었다. "망국 역적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 "혁명에 역행하는 사법부는 물러가라" "원흉 모두를 사형시켜라"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해 3·15 부정 원흉을 처벌하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거리에 물결쳤다.
이러한 시위는 10 월 9 일 극에 달했다. 9 일 오전 전국 4 월 혁명 상이동지회원과 민주당 서울 중구 지구당원 340 여 명은 "제2공화국아, 살인원흉이 무죄라면 독재 총부리에 병신된 우리가 유죄란 말이냐"라고 외치면서 서울 을지로 청계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적십자 병원과 수도의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던 4·19 부상자 2 백여 명은 목발을 집고 "4 월의 피는 통곡한다. 잃어버린 팔 다리 이어다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이런 가운데 10 월 11 일 오전 부상학생 50 여 명이 극회 본회의장으로 밀고 들어온 세칭 '의사당 난입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결국 국회는 여론의 힘에 밀려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 사건 임시처리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고, 10 월 13 일에 공포, 시행되기에 이른다. 이 임시처리법은 10·8 판결로 석방된 피고인들을 재수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임시처리법으로 모든 혁명재판을 중지시킨 국회는 특별법 제정 절차를 밟기 시작, 11 월 23 일 헌법개정안을 가결시키고(29 일 공포), '부정 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부정축재 처리법안'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 등 4 개 특별법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1961 년 1 월 4 일 피고인 48 명을 특별재판 해당자 32 명과 일반법원 관련자로 나누어 처리하게 되었다. 여기서 임화수, 유지광 등과 더불어 곽영주는 특별재판소와 일반법원 양쪽에서 다스릴 자로 분류되었다. 특별검찰부는 같은 해 4 월 8 일 홍진기 등 6 명의 발포 사건 공소장을 변경하였다. 2 개월간의 수사 결과 새로운 사실로서 4·19 발포에 앞서 홍진기(洪璡基), 조인구(趙寅九), 곽영주 등 세 명의 피고가 발포 모의를 했다는 증거를 잡기에 이르러 공소장을 변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5·16 군부 쿠데타의 발발로 2 회 공판을 끝으로 이 공판은 미결로 남고 말았다. 이제 곽영주에 대한 처리 결과는 5·16 군부 쿠데타 이후의 혁명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독재권력 하수인의 허무한 종말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뒤의 혁명재판 에서도 곽영주는 의형제인 이정재와 더불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61 년 12 월 21 일 곽영주는 서대문교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그의 나이 37 살 이었다.
"곽영주는 '정치깡패의 비호자' '경무대 앞 발포 명령자'이자, '대통령 측근에 있음을 기화로 본래의 포악성과 교활함을 발로하여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격으로 정부의 인사 및 제반 처사에 있어 모략중상하고 대사를 오결(誤決)토록 간언(奸言)을 하여 거액의 축재를 한 자"(《한국혁명재판사》 제1집, 78쪽)'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곽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등에 업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극우 단체와 정치깡패들과 손을 맞잡고 폭력을 교사·비호하고 국민들의 정치 권리, 생존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반민족적·반민주적인 인물이다. 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이나 개인적 성향 뿐 아니라 역사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삶의 방향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곽영주에게 해방은 반민족적인 친일행위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찰의 신분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하고 민족을 위해 복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지팡이가 되기는커녕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국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곽영주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서의 반민족적·반민주적 경찰들은 4·19혁명의 무산과 5·16군부 쿠데타로 척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권력의 주변에 인적으로 또는 부정적 유산과 관행의 형태로 잔존해 있다. 그것은 진보적 민주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탄압, 고문과 같은 야만적 행위, 국가보안법의 유지, 그리고 경찰·정보 기구의 재생산 등의 모습으로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유산은 물리적인 억압과 사실의 왜곡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국민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어 왔다. 망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이 글은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곽영주 사형의 가장 확실한 이유★
곽영주 사형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박정희와의 원한 관계이고 부수적으로는 곽영주의 출세와 권력을 얻게 돼는 과정이 인맥과 학벌로써가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곽영주에 대한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 배려였기 떄문에 훗날 군사 재판에서 홍진기등과 재판을 받을 떄 처음엔 홍진기씨에게만 사형이 선고돼었는데 홍진기씨는 명문법대출신이고 인맥이 좋았기 떄문에 쿠데타로 권력을 얻게된 박정희한테는 곽영주를 제거하는 것만이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 정치 깡패를 배후한 사람을 사형시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을겁니다..곽영주씨가 발포명령건으로 사형을 받을만큼의 사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없었지만 시대적 정치적으로 사형을 당하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아래는 실록 박정희에 실린 일화이니 참고하세요^^
해가 바뀌어 1958년 3월에 있은 군 고위급의 정기진급인사에서 박정희는 드디어 소장으로 진급한다. 이 진급이 있기까지에는 1차적으로 7사단을 예하 에 두고 있던 송요찬1군사령관과 사령부내 미 군사고문관의 추천없이는 어려 웠다. 진급을 방해하려 했다면 피복창고화재사건 하나만 들고 나오면 족했 다. 그럼에도 송요찬은 실책을 눈감아주었을뿐 아니라, 추천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또 다른 가닥에선 백선엽육참총장과 장도영참모차장의 지지와 내락이 없고 선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종찬육대총장의 줄기찬 지원이 없었더라 면 막판의 정치적 고비에서 애통하게 무위로 끝날 공산이 절대적이었다. 당 초 이종찬중장을 위원장으로한 진급심사위원회는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한 투표에서 찬성 18표, 반대2표, 기권2표로 박정희를 진급시키자는데 압도적인 찬성을 한 바 있었다. 박정희의 역량이나 군경력, 거기다가 최근의 육대졸업 성적으로 보아 절대다수의 찬성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상적인 경우 이로써 진급이 결정된 것인데 엉뚱한 곳에서 제동이 걸려왔 다.
호랑이 탈을 쓰고 위세를 뽐내는 여우격이었던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郭 永周)경무관으로부터 온 제동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최종 제가가 있기 하루 전 이종찬육대총장은 곽영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총장님이십니까? 내일 대통령각하께 장성진급심사결과에 대한 결제를 올 려야겠는데 그중 박장군에 대해서 몇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어 전화를 걸었습 니다"
"무엇이 의심된다는 겁니까?"
"첫째 박장군의 사상관계입니다. 박장군이 과거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도 천거했습니까?"
"간접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박장군이 파면되었다가 복직하게 된 데는 나라에 중대한 공헌이 있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고, 또 그후 정부가 그 를 두차례나 사단장으로 보냈던 것도 신임을 회복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 까? 특히 6·25전란중에도 공산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는데 이제와서 새삼 그 문제를 운운하면 정부의 처사 자체를 부정하는, 앞뒤 안맞는 일이 되지 않습 니까?"
이종찬의 논리정연한 반문에 머쓱해진 곽영주는 슬그머니 다음 문제를 꺼 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원주에서 있은 여자관계의 소문은 알고 계십니까?"
"여자관계요? 글쎄 처음 듣는 얘기요. 나는 공식적인 인사고과 외엔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모르오"
실제로 이종찬은 몰랐다. 만35세에 만혼할 정도로 여자문제엔 자신부터 무 관심했던 이종찬이었으므로 남의 여자관계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지 않았고 들을 기회도 없어 모를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를 둘러싼 원주시절의 여자관 계란 전혀 근거없이 떠도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과장이 많았다. 5사단장으 로 있던 1955년 7월부터 1년여간 박정희는 가족과 떨어져 적적하게 있다보니 저녁의 술자리라면 빠지지 않았다. 한번은 18년전 문경시절의 동료교사였던 조익영(趙翊永) 대구명덕(明德)학교교장이 5사단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1956년 초였는데 박정희의 심상과 2년 선배인 권영록(權寧祿·뒷날 포항시교 육감)교장과 함께 강원도 교육환경시찰차 들른 길이었다.
모처럼의 반가운 해후여서 박정희는 그날 저녁 참모장 장태명(張泰明)대령 과 함께 원주시내에 있는 단골집인 `평양집'으로 두 사람을 모셨다. 조교장 의 눈에는 박정희가 말수가 적으면서도 술을 잘하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햇 병아리 교사시절과 달라진 것은 재미있는 농담을 곧잘 하는 것과, 제법 능숙 하게 놀줄을 아는 것이었다. 특히 비사교적이지 싶었던 것과는 달리, 바쁜 군무가운데서 언제 배웠는지 기생을 붙들고 댄스를 여간 잘 추는데 조익영은 적잖이 놀랐다.
"아이구 박장군. 미처 몰라봤더니 대단한 한량이시군. 바쁘실 양반이 서양 춤은 언제 배웠소? 나도 좀 배웠으면 싶었으나 당채…"
조익영은 늘 푼수없이 평생을 교단에서 지내오느라 그 시절의 유행인 서양 춤을 못배워본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진심으로 부러운 심정에서 물어보 았다.
"망중한(忙中閑)이요, 정중동(靜中動) 아닙니까? 사람이 마음을 먹으면 뭘 못배우겠습니까만, 저도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술김에 어울리다보니 남의 여자 발밟는 재미로 그럭저럭 흉내만 낼뿐입니다. 어이 김양아. 자네도 저 어른 한번 붙들고 돌아봐라"
박정희의 호쾌한 대답에 조교장은 `사람 참 많이 변했군'하고 생각했을 따 름이었다
교사시절의 선배들을 맞아 보여준 박정희의 능숙한 접대분위기 조성과 춤솜씨만으로 그의 '여자문제'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군동료들의 증언이 있듯, 평소 말수가 적고 찬바람이 이는 박정희였지만 일단 주석에 어울리면 활달해지고 유머가 넘치며 춤과 노래로 곧잘 좌중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 역시 박정희였다.
따라서 '술과 여자'는 당연히 함께 따르는 일로 인식되던 그 무렵의 음주문화로 보아 그가 잠시 한량기분에 젖어 접대여인들과 제법 깊숙이 어울렸을 것으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것들이 과장스레 소문이 나 '원주에서의 여자관계'로 곽영주의 귀에까지 들어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 뒷날인 7사단장시절의 이야기지만 육영수는 한달에 한번꼴로 인제로 와 남편을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의 '바람피운' 문제로 부부싸움을 벌이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장교의 아내가 그동안 있었던 박사단장의 행각을 고자질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고자질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육영수가 번번이 화를 낼 정도였고 보면 박정희의 객지생활은 바람피울 기회와는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그로서도 이 무렵은 사회적 지위 상승에다 다소간의 경제적 여유로 인해 과거 어느때보다도 느긋하게 '염문'을 뿌릴 수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다만 그 정도였을뿐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돌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종찬의 모른다는 전화대답에 곽영주도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세번째 질문으로 부정비리 소문 한 건을 들고 나왔다.
"그럼 이총장께선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 재직시절 후생사업차량 두대를 해먹은 사실은 알고 계 십니까?"
이 질문 역시 이종찬으론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곽영주가 진급청탁을 해오지 않은 박정희에 대해 단단히 삐친 끝에 물고 늘어지는구나 싶어 확실하게 진위를 밝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알아볼테니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 주시오"한뒤, 이세규 중령등 박정희와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말을 전해들은뒤 대답했다.
"알아보니 그것은 순전히 오해인 것 같습니다. 실은 박장군이 5사단장을 그만둘 때 그가 다른 장 성들에 비해 생활이 궁한 것을 딱하게 여긴 참모들이 그에게 차량 2대를 주려했지만 그는 그것을 받을 명분이 없다며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딴 것은 몰라도 박장군이 물욕에 청빈했다는 점은 내 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이종찬의 확신에 찬 대답에 곽영주는 더이상 따지기 쑥스러웠는지 전화를 끊었다. 박정희의 소장 진급에 따른 제동은 이종찬의 이런 성의있는 지원사격외에, 당시 국방장관이던 김정렬(金貞烈)의 측면지원이 주효했음인지 더이상 말썽없이 무난히 통과되었다. 소장으로 진급한 석달뒤인 1958년 6월, 그는 여세를 몰아 요직인 1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영전하기에 이른다.
뒷날 5.16직후에 있은 혁명재판에서 4.19당시 '경무대앞 발포사건'의 총책으로 지목된 곽영주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집행의 최종 결재권자는 당시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인 박정희였다. 박의장은 한때 자신의 승진문제를 두고 곽영주가 주제넘게 까탈을 부렸 음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몰랐는지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곽영주를 형장의 이 슬로 사라지게 하는 '최종재가'의 펜을 멈추지 않고 사인하고 말았다.
비록 죄목은 달랐으나 한번 사형 구형(求刑)까지 받아보았던 박정희였던만큼 '혁명적 상황'이긴 했지만 자신의 펜으로 사형확정재가를 내릴때는 손이 떨렸을 것이 분명했다. 만에 하나, 곽영주가 그의 전성시절 박정희의 진로에 훼방꾼이 되기보다 이종찬처럼 조력자였더라면 숙군시절 죽음직 전에서 살아나왔던 박정희처럼 곽영주도 사형만은 면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두사람 사이 에는 공생(共生)하고 친화(親和)할 연은 없었다. 또 인생관이나 사생관이 이질적인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곽영주도 박정희처럼 깊고 넓게, 평소 인맥에 투자했더라면, 혹은 그때 반대로 더욱 모질게 밀고가 박정희의 진급을 막았더라면 성미 마른 박정희가 그뒤 군에 계속 온 존할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5.16의 새벽을 과연 열 수 있었을까. 그랬으면 곽영주도 어쩌면 살아 남았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자리에 새긴 그이름 뚜렷이 남은 이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사람의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첫댓글 이런 귀한 사진과 정보를 어떻게 구해다 올렸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