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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사회의 교육문제와 불교
1. 머리말
우리에게 교육(敎育)은 우선 문젯거리로 다가온다.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과 공교육의 약화, 그로 인한 사교육 팽창 등이 우리 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먼저 떠오르는 문젯거리들이다. 그것에 더해 2000년대 들어와서 부각된 가정이나 지역 배경에 따른 교육격차 문제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비대면 원격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를 시작으로 혼자서 공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자기주도성에서 가정의 지원 정도에 따라 현저한 격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왜 교육이 문젯거리가 되어버린 것일까? 교육받아야만 하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교육은 숙명처럼 주어지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할 수 있게 되는 과정 자체로서 지니는 즐거움과 희열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나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끼는 고양된 감정이 곧 교육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자 보람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또 어떤 이유로 교육이 문젯거리로 바뀌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일까?
이런 물음들은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하는 포괄적인 성격의 답을 요구한다. 우선 역사적인 통찰이 요구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과 구조에 관한 관심도 필요하다. 더 나아가 각 개인이 관여하거나 관여되고 있는 교육의 국면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야 비로소 교육이 문제가 되어버린 과정과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교육이 문젯거리로 전락한 상황은 다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것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개인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개인적 차원은 보다 나은 자신과 삶을 위한 욕구와 함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차원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인정은 다시 타자의 시선을 불러오고, 그 시선은 타자 개개인과 함께 사회와 공동체의 것으로 나뉘어 다가온다. 물론 사회와 공동체의 시선이 타자들 개개인의 그것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타자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회 또는 공동체 차원의 시선이 존재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교육문제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의 문제인 셈이다. 이 명제는 사실 우리에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타자들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유교는 관계(關係)를 존재의 핵심 요소로 설정해왔고, 불교 또한 인연(因緣)을 통해서만 모든 존재자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이 우리에게 급속도로 밀려오면서 이런 생각들이 깨지기 시작했고, 21세기 초반에 이르자 개인을 중심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역전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 곳곳에서 공동체 또는 관계의 편린들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출몰하기는 하지만, 인간을 고립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 서구 근대적 인간관은 이제 우리 자신과 사회의 삶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문제로 넘어오면 개인으로서 인간관은 작은 범위의 가족만을 인정하는 데까지 확장되어 마치 가정의 중심 문제인 것처럼 다가온다. 자녀교육을 책임져야만 한다고 느끼는 부모와 가장의 부담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교육기회에의 접근이 달라지는 교육 불평등 현상, 그로 인한 젊은 세대의 결혼 및 출산 기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 가정은 자녀교육에 관한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책임을 떠맡는 곳이 되어버렸고, 그것은 다시 공교육 불신과 대입제도의 결함 등을 이유로 펼쳐지는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 팽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는 고통이다. 우선 부모와 자식의 고통이 있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도 교육에 관한 신뢰 지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사회적 고통과 마주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하면서도 복합적인 현상을 제대로 분석하여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2. 교육문제로 인한 고통의 직시
불교는 삶 속 고통을 중심에 두고 그 해소를 말하는 종교이자 철학, 윤리다. 고통[苦]은 몸과 마음의 불편함으로 출현한다. 몸과 마음이 어딘지 불편하기 시작하다가 점점 더 악화되어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또 호소한다. 원인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해소 또는 해결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점점 더 악화하거나 기껏해야 견딜 만한 고통으로 굳어지는 이른바 만성 통증이 된다. 우리 몸과 마음의 온전한 분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불교적 진리에 관한 검증이 뇌과학 등을 통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모든 고통은 마음의 것이자 곧 몸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서 어떤 쪽의 비중이 더 크냐에 따라 마음의 병이라거나 몸의 병이라는 정도의 구별은 가능하다.
우리 교육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할 때도 여러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 중심축은 교육문제로 인해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고통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성제(四聖諦)의 첫 번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 원인이 집착임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으면 곧 진리에 도달하여 온전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사성제를 통해 붓다가 강조하고자 했던 불교의 핵심 테제이다. 따라서 우리 교육문제를 불교적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도 그것이 가져다주고 있는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교육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은 어떤 것들일까? 교육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교육이 곧 교육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교육문제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교육문제로 인한 고통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학생이다. 형식적으로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는 긴 교육 기간 동안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지루함을 견뎌내야 하는 학생들의 고통은 쉽게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다. 그것에 더해 학생들 대부분이 대학입학으로 귀결되는 각자도생의 정점을 향해 내몰림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아 비교적 성공을 거둔 학생이나 실패한 학생 모두 ‘상처뿐인 영광’이거나 ‘불필요하게 과장된 좌절감’을 지닌 채 사회로 내던져진다. 청소년 자살률이나 급속히 높아진 청소년 우울증 비율 같은 것들이 그런 고통의 심각함을 내보이는 조각들이다.
또 다른 풍경은 ‘학교에서 자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도 다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아예 학교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학원 공부를 하느라 밤을 밝힌 아이들이다.
현재의 교실 질서는 계속 잠자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고, 또 자면 질책하는 이중의 피해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한 반에도 몇 명씩 엎드려 자고 있는 오늘날 중 · 고등학교 교실에서 우리가 깨워야 할 것은 아이들이 아니고, 잠자고 있는 관행이다. 이 관행적 질서는 학생들의 일부를 ‘내부로의 망명’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사회학적 관점에서 우리 교실을 들여다보는 성열관의 눈에 비친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그중에서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업성취가 높은 아이들 중에서 교사의 수업에 대한 신뢰를 잃고 학원에 의존하면서 일종의 저항으로 수업 시간에 잠을 자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다. 이런 저항은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기도 해서 잠을 깨우는 교사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로 전개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었다는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이 우리 교실에서도 나타난 지 꽤 오래되었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저항과 포기는 그 자체로 고통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견디는 시간만큼 괴로운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고통은 교사들과 학부모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교실에서 몸부림치는 아이들과 마주해야 하는 교사의 고통은 허공에 대고 떠드는 것 같다는 좌절 섞인 고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학교 급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입시에 종속된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교사들은 인터넷 유명 강사들과의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기도 하는데, 그나마 입시에서 소홀히 다루어지는 교과 담당 교사들은 아예 자신의 시간을 이른바 주요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으로 허용해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사로서 자부심이나 최소한의 보람을 느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의 사회적 지위와 인정은 낮지 않아 많은 사람이 원하는 직업군에 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기대를 하고 교직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좌절감을 키워주는 배경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학생과 교사들의 고통은 당연히 학부모들의 고통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땅에서 학부모로 살아내기’라는 과업은 참으로 무겁고 지난한 과제이다.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지만, 평생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주는 과업과 그러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인격과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준비를 해주는 일은 서로 긴장 또는 갈등 관계를 형성하면서 학부모들을 괴롭히고 있다. 안정된 밥벌이 수단을 확보하는 방법이 모호해지면서, 극히 제한된 직업군에 속할 수 있는 대학과 전문대학원 수준의 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갖추게 하는 데 집중하거나 아예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모아 물려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전자는 처음부터 보장된 게임일 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고, 후자는 혹시 그런 재산을 물려주었다고 해도 과연 자식들이 그 재산을 보전해가면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해낼 수 있을지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한계와 마주한다.
그러다 보니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은 아예 자식을 낳지 않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고, 그 선택의 비율이 젊은 층으로 갈수록 획기적으로 높아짐으로써 세계 최고 수준의 출산율 저하 현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현상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존폐의 기로로 내모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고, 그것은 곧 우리 사회 전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 저출산이 급속한 고령화와 만나게 되면서 연금 고갈과 같은 미래의 불안감 확산은 물론 현재의 고통을 가속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 가혹한 현실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정치권은 단기적이거나 임시변통의 대안만을 내놓음으로써 고통을 겪고 있는 학부모들을 조롱하는 듯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양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둔 우리에게 학부모는 곧 시민이기도 하다. 그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시민사회이고, 그 시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하는 국가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러다 보니 교육문제로 인한 학부모의 고통은 곧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수준의 고통이 된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스스로 학생 경험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중의 상당수가 학부모로서 경험도 갖게 되기 때문에 교육문제는 곧 사회문제이자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된다. ‘입시 지옥’과 같은 말이 상징하는 교육문제로 인한 극단적 고통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하는 거리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누구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교육을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직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교육문제로 인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의 고통이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의 고통을 경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교육의 세 주체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공교육 체제 자체가 우리 시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해소는 현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통해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고, 이것이 가능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3. 교육문제로 인한 고통의 원인들과 극복 방안
그럼 이제 교육문제로 인한 고통이 생기는 원인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이 원인들이 서로 얽혀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그 원인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그것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주목할 수 있다면 일정한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우선 교육이 교육문제로 전환되는 계기 또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교육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교육은 어쩌면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교육 자체가 삶의 과정을 이루면서 때로 큰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실제로 공자가 제시한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라는 명제를 통해 우리는 오래전부터 교육의 즐거움을 인식해왔다. 또한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흥미 또는 동기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들을 부여할 수 있으면 배우는 일에 즐거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오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공부의 즐거움은 유아기 시절 잠시 맛볼 수 있는 것이거나, 노년기에 특별한 목표 없이 공부 자체에 몰입할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유치원으로 시작하는 공교육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공부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학부모와 교사, 학생이 주고받아야 하는 ‘공부하라’는 말은 우리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된 지 오래다. 왜 교육이 이렇게 교육문제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맥락을 구별해가면서 접근할 필요와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맥락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공부라는 과제를 부여하는 사회 또는 공동체라는 차원이다. 당연히 이 두 차원과 맥락은 서로 겹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 사회구조 및 제도적 원인들
우리 사회에서 교육문제는 곧 사회문제다. 이 명제는 교육문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문제들과 연관되어 존재하고 또 부각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교육문제는 정치권이 가능하면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문제이고, 사교육비 감당 부담과 그로 인한 경제적 격차를 초래하는 경제문제이며 학벌로 인한 사회적 차별과 무시를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사회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대학입시 제도를 바꾸는 것만을 가지고는 교육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데도,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하는 정치권 사람들이 무모한 시도를 반복하면서 오히려 문제를 더 심화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지 오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앵무새처럼 대입제도 개선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기주도성 또는 학습자 주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의존적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더 나아가 이후에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만 공부하는 일은 최소한 교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주도력을 획득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교육의 의존성을 토대로 우리 인간들은 학교라는 제도와 함께 교사라는 역할을 지닌 사람의 존재를 제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교와 교사의 제도화는 우리의 경우도 그 역사가 깊지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화는 19세기 말 대한제국기에 이루어졌다. 전 국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고종황제의 선언을 바탕으로 전국의 면 단위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를 세우는 계획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지 세력에 의한 왜곡을 전제로 실행에 옮겨졌다.
일제 강점기는 다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억압통치기와 3 · 1운동 이후 역사 왜곡과 교육 장악을 통한 문화통치기로 나뉜다. 전국의 면 단위까지 황국신민학교(초등학교)가 만들어지고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학교가 전국의 네 군데(한성, 평양, 전주, 대구)로 나뉘어 설치된 것은 바로 문화통치기에 완료된 식민지 정책의 완결판이라고 할 만하다. 이 정책은 30년 이상의 장기적인 시도와 함께 박정희와 같이 적극적인 동조로 출셋길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존재성이 부각되면서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다. 군사쿠데타와 유신쿠데타를 반복하면서 20년 가까이 대통령직을 지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출신임과 동시에 일본 군관학교 출신이다. 그는 특히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본토에 있는 군관학교에 진학하고자 혈서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왜곡의 심화를 통해 21세기 초반 한국인들에게까지 일본에 대한 근원적인 열등감과 그것의 왜곡된 표출이라고 할 수 있는 턱없는 우월감이 내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문제를 낳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일본이 광복 이후 미 군정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미국으로 대체되어 ‘선진국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질적인 병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학계와 관료층을 중심으로 국가의 주도권을 의식적 ‧ 무의식적 차원의 친미파들이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때의 미국은 현실로 존재하는 국가와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상상의 아름다운 나라’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는 즉시 상상의 서유럽 등으로 바꿀 수 있는 전가의 보도 같은 상징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과 일본, 미국, 유럽 등을 아무런 비판적 검토 없이 쫓아가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우리 교육의 현실과 학교를 비교하는 풍토는, 단순한 교육계와 학계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 수준으로 고착되어 엄연히 작동하는 중이다.
상상의 선진국을 상정하는 무모한 비교는 최근 핀란드나 덴마크 같은 서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 노출되고 있는 문제들은 그 자체로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극복의 출발점은 당연히 우리 교육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인식과 비판이어야 한다. 그 인식과 비판이 가능하려면 먼저 오랜 관행과 제도 수준으로 굳어져버린 무모하고 불필요한 ‘선진국과의 비교’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비교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교를 통해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볼 수도 있고, 좀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으려면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왜곡된 감정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하는데, 우리의 현재 상황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비교 자체를 삼가는 일이 필요하다. 일단 우리 눈으로 우리 자신의 교육현실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 하고, 다행스럽게 학교 현장을 지키는 교사들의 문제의식과 연구역량이 강화되면서 의미 있게 참고할 만한 연구물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 교육현실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구조와 제도의 측면에 주목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경쟁구조와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이다. 이 구조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평가라는 제도로 고착되어 있고, 그 평가 중에서도 지필식 시험 점수에 대하여 과도한 신뢰가 주어지면서 이른바 ‘한국형 능력주의’라는 늪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학입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하루 동안 치르는 오지선다형 시험인 대입 수학능력시험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제도이자 사건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은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 자리를 내걸어야 하는 오답 시비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타당성과 신뢰도를 이미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권에서는 아예 이 시험 점수만으로 대학을 가게 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는 말이 서슴없이 또 잊을 만하면 등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는 정치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수능점수를 통해 평생에 걸친 이권을 보장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라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사회의 학벌 카르텔이 지닌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다른 차원의 분석을 필요로 하고, 두 번째 이유는 공정성에 대한 정의 재검토와 함께 우리 사회 전반의 평가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을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의 학벌 카르텔은 이른바 스카이(SKY)로 통칭되는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 출신들의 권력 및 이권 독점을 가리키는 용어다. 어느 사회든지 일정한 학벌 카르텔이 존재하지만, 우리의 경우 감내할 만한 수준을 넘어섰고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 존립 위기 현상 속에서 오히려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유념해야 하는 문제이다. 대학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급속히 줄어 대다수의 대학들이 존립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이른바 ‘일류대학’ 또는 ‘선호학과’에 대한 선호도와 경쟁률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예측은 합리적이다. 그런 이유로 대학입시 준비로 상징되는 우리 학생들의 고통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또한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험제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신뢰성 회복은 불신이 쌓인 시간만큼의 여유를 간직해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 시작은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이 지니는 본질에 관한 직시여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고자 하는 자원의 희소성에 기댄 경쟁의 정당성은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서로의 고통에 관한 공감과 협력에 대한 동일한 주목을 전제할 때라야 비로소 획득될 수 있다.
평등을 개인의 권리로 이해할 때 그 평등은 우리가 서로에게 짊어지고 있는 사회적 의무와 분리된 개념이 된다. ……평등의 권리는 개인 주체의 속성으로 출현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출현하는 권리이자 그 유대관계들을 위해 출현하는 권리다.
정치학자이자 윤리학자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미국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을 개인의 권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다소 충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오히려 개인 주체의 속성으로 출현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출현하는 권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를 비롯한 우리 전통의 인간관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를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인’을 중심 주체로 내걸고 그 개인의 독립된 자유와 권리, 평등을 주장하는 데 몰입해온 서구 학계에서 나온 주장이라서 충격적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모든 제도와 정책의 밑바탕에는 그 나름의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고, 그 인간관은 자연스럽게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계론을 포함한다. 그 관계론은 다시 사회구조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작동한다.
나) 관계론의 재정립을 통한 고통의 극복
그렇다면 21세기 초반 한반도 남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한국인들이 설정하고 있는 인간관과 관계론은 과연 무엇일까? 개인주의(individualism)라고 표현되는 인간관과 관계론에 주로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한편 불교와 유교의 연기론과 관계론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해 일관된 관점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해볼 수 있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와,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며 부당한 이익을 공유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런 진단을 정당화해주는 부분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주의의 권유’라는,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으로 인한 고통을 가져오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제도들은 모두 우리 자신이 만든 것들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 채 작동하는 인간관과 관계론이 자리하고, 따라서 고통의 극복은 그 인간관과 관계론의 재정립이어야 한다. 특히 교육을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원인인 과도한 경쟁체제와 그 경쟁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거의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과장된 의존은 우리 사회 전반의 평가에 관한 신뢰 회복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 평가의 신뢰성 회복은 그 배경에 다시 두 가지 과제를 지닌다. 하나는 시험성적에 근거한 과도하고도 영속적인 분배 체제의 극복이라는 과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서 경쟁이 지녀야 하는 적절한 기능과 역할에 대한 재인식의 과제이다. 후자는 인간관과 관계론의 재정립이라는 과제로 직결된다.
불교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의존할 때라야 비로소 그 존재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연기론(緣起論)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연기법은 불교 존재론의 근간을 이룬다.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고 따라서 심오하게 드러난다.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붓다가 설한 초기불교의 연기법은 생멸연기(生滅緣起), 즉 한 생명이 태어나서 살다가 늙어 죽어가는 과정에 담긴 연기의 법칙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중첩된 관계성을 설명하는 틀이기도 하다. 그 존재하는 것들에는 실재 생명을 갖고 존재하는 것들은 물론 무생물과 공기 같은 것들까지 포함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사회적 문제들이 포함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연기법을 토대로 사회문제들과 그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물론 사회문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을 시도해볼 수 있다.
우리 교육문제는 다양한 차원의 문제들이 서로 얽혀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이 얽힘의 차원을 크게 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사회구조와 개인들 사이의 관계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들 사이의 관계 차원이다. 당연히 이 두 차원은 엄격히 분리되지 않지만, 문제를 직시하기 위한 구분이라는 의미는 충분하다. 우리 교육문제는 사회구조가 빚어내고 있는 문제임과 동시에,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개개인들이 맺는 관계의 문제로 환원되기도 한다. 여기서 사회구조는 관계 맺는 방식을 결정짓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 일정한 고정성을 띠면서 사회구조로 전환되기도 한다.
우리 교육문제는 사회구조적으로 정착한 학벌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와 제도에서 비롯된다. 이런 분위기와 제도 속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학벌을 취득하고자 매진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좁은 범위의 가족을 토대로 전개됨으로써 교육격차를 통해 사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2021년 통계청 가계 동향 조사를 토대로 소득별 가구의 사교육비 지출 현황을 분석한 한 자료에 따르면, 상위소득 20%에 속하는 가정의 사교육비 지출은 월 87만2천 원인 반면 하위소득 20%에 속하는 가정의 사교육비 지출은 10만8천 원으로 8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부모의 교육 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이 격차는 훨씬 더 크게 벌어진다. 대학 졸업 부모를 둔 가정의 사교육비와 초등학교 졸업 부모를 둔 가정의 사교육비 차이는 무려 14배에 달한다.
이러한 학벌 중심의 교육관은 잘못된 관계론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무한경쟁을 유도할 뿐이라는 점에서 지속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고립성과 이기성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을 주체로 삼는 개인주의는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대안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그 존재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관계론적 인간관과 사회론이다. 필자는 이것을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存)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고, 연기적 독존은 각 개인의 삶이 지니는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그 바탕에 연기성을 깔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생존과 실존 차원의 존재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관과 관계론을 어떻게 우리 사회에 정착시킬 것인가이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실천 방안을 모색해봄으로써 그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는 있다. 첫째는 교육과정 차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 속에 이러한 관계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방안이다. 모든 교육과정은 그것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고, 교육 자체가 그런 인간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 헌법 차원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토대로 각 교육과정 개정기마다 시대 상황과 정권의 요구 등이 반영되는 하부 인간상을 설정한다. 이 인간상 속에 연기적 의존을 전제로 하는 상호의존성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로는 무한경쟁이 아닌 상호의존성을 토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 제시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와 교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불교계와 같은 종교계 구성원들이 일상을 통해 그런 모형을 제시할 수 있다면 실천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런 노력들이 모일 수 있는 연대의 추구이다. 뜻을 함께하는 시민사회 단체나 학부모 모임, 대안교육 모임 등이 각자의 노력과 함께 연대할 수 있게 되면 정치권의 변화는 물론 소비문화의 변혁을 통한 경제 질서의 재구성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다.
4. 맺음말
우리 교육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다. 현실 속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을 이유로 전자가 더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개인이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임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 해소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교육문제로 인한 고통은 개인적 고통임과 동시에 사회적 고통인 것이다.
여러 문제가 얽혀 있는 사회문제로서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정답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원인을 찾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고, 원인을 찾는 일 자체는 해소 또는 해결책을 찾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핵심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작은 글을 통해 원인을 인간관과 그것에 근거한 관계론에서 찾아보고자 했고, 그 인간관은 바로 ‘고립성과 이기성을 전제로 하는 개인’이라는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적 인간관이다. 이미 뇌과학과 같은 과학적 연구결과와도 배치되는 이 인간관은 이제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인간과 그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관계에의 주목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100여 년 이상의 시간을 축적하면서 우리의 외적 성공을 보장한 토대 중 하나가 되어주기도 한 이 인간관의 대체는 결코 쉬운 과제일 수 없다.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인이 벌이는 성장을 위한 무한경쟁은 이제 상당한 수준의 도덕성까지 담보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지속 불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상호의존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로서 인간에 주목하면서 펼쳐지는 교육은 그 자체로 교육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근원적 전환을 위한 소중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
박병기 bkpak15@knue.ac.kr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역임.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우리 시민교육의 새로운 좌표》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본지 편집위원.
첫댓글 저 옛날에 학교 선생질 몇년 한적 있는데요.
고3 수업이 제일 편했어요 ㅠㅋ
그 과목 선택 안한 애들은 엎어져 자거나 다른 공부하니까 조용히 시킬 필요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