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도 이제 끝이 보입니다. 한 해의 반을 보내는 것입니다. 거의 다 코로나19와 함께 하였습니다. 아마 금년 말에 가서도 톱 텐에 안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상을 특별함으로 바꾸고 별난 일을 일상으로 바꿔준 사건입니다. 일과 끝나고 들어가서 잠시 쉬다 나오는 집이 오히려 일터가 되는 일도 생겼습니다. 아이들까지 집에서 공부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상상이나 하던 미래를 앞당긴 듯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환경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얼추 익숙해지는 듯도 합니다.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이뤄내지 못할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깟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이렇게 당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 덕(?)에 미뤄두었던 작업을 기를 쓰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도록 이렇게 저렇게 돕는 손길들을 감동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마지막 전쟁 -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목회자이든 성도든 모두가 어렵게만 생각하는 성경입니다. 하지만 주신 은혜를 따라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했습니다. 관심 가지고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분량이 많은 듯해도 말 그대로 쉽게 빨리 갈 수 있습니다. 출판사는 ‘도서출판 들뫼’입니다. 다음 주에는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도 출고될 것입니다.
잠시 쉬어가는 더위도 장마 지나 더 화끈하게 오겠지요. 건강하게 즐겁게 코로나19도 이겨가며 이 여름을 지내기 바랍니다. 어차피 살아야 할 시간들이니까요. 복된 주말을 빕니다.
2020년 6월 27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6-21주일설교(산으로 도망하라니)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
함께 있으면 모르다가 떠나면 그 사람의 빈자리를 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전에는 당연했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듯이 말입니다. 아주 당연했던 것들이지만 상황이 변하여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이 크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저절로 나타나던 일상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게 되니 어느 날 함께 하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아쉬움이 커집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크게 중요한 사람도, 중요한 자리도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일이라고 해야 자질구레한 잔일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 잔일이 다른 큰일을 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찮은 사람도 하찮은 일도 아닙니다.
까짓것 다른 사람 쓰면 되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무 때라도 고용하면 됩니다. 물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소한 일들이라도 자기 마음에 맞게 해주려면 바로 그 사람에게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요하는 일이지요. 그의 일상을 지켜봐야 하고 거기에 맞추어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고용주는 당장 급한데 그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얼마나 기다려줘야 하지요?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다시 자기 마음에 합하도록 일해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또 기다린들 그만큼 따라줄지도 모릅니다. 전임자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시간들을 기다리느니 도로 잡아와서 다시 함께 일하는 편이 낫겠다, 판단했겠지요. 그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비서 한 사람 때문에 고용주가 그것도 대 스타가 직접 나서서 찾아옵니다. 그러잖아도 죄송해서 음성메시지를 남겼던 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고한 비서를 찾아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매기’의 잘못입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겨 정작 본 작업에 소홀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타의 체면을 구기게 만들었습니다.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대 스타이니 나름의 능력으로 위기상황을 넘기기는 하였지만 불쾌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장 해고했는데 지나고 나니 아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더구나 실수는 누구나 있는 법, 참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요.
진작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프로듀서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년 대스타 ‘그레이스’의 개인 비서입니다. 어느덧 3년, 이제는 그녀의 일상을 줄줄이 꿰차고 나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스타의 손과 발처럼 움직여줍니다. 개인 비서로써 흠잡을 곳 없다 하겠습니다. 그레이스가 불편함 없이 일정을 소화해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지만 자신의 꿈을 언제까지 묻어만 둘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날 조그만 마트에서 한 청년의 수작을 받습니다. 티격태격 마주하다가 이 청년이 마트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듣습니다. 어! 노래를 하는 청년이네!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괜찮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프로듀서라고 소개하고 본격 접근합니다. 음반 취입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데이비드’라는 이 청년 재능도 있고 사람도 괜찮습니다. 함께 하다 보니 좋아지게도 됩니다. 사업 파트너인지 연인인지 그렇게 엉기고 성겨서 나아갑니다. 함께 노래 음반 취입 작업도 합니다. 듀엣이 되어 함께 노래를 불러보기도 합니다. 잘 진행이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일이 두 가지가 되었습니다. 자연 그레이스의 비서라는 직에 소홀해집니다.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이스나 매니저도 매기가 뭔가 허술해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잖아도 매니저와는 평소에도 생각의 차이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입니다. 매니저는 안전 위주로 일하려 하고 매기는 진취적으로 일하려 합니다. 얼마든지 더 발전할 수 있는데 머뭇머뭇하는 것에 매기는 속이 탑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약점과 허약한 부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스타이지만 그레이스는 이미 나이가 중년을 지나고 있으니 스스로 한물간 스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이 히트작을 내놓는 것에 자신감이 없습니다. 소위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기는 특히 매니저에게 치이면서 ‘내가 무슨 프로듀서를!’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존감 하락입니다. 그런가 하면 데이비드는 이 많은 스타들을 비집고 내가 들어갈 자리나 있을까 싶어 이미 주눅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어떻게 역할을 해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음반이 하나 나오는데 어떤 노력이 들어가는가 보게 됩니다. 모든 일이 거저 되는 것이 없겠지만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장비도 잘 갖추고 있으니까요. 이것저것 모두 잘 아우러져서 멋진 음악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여 듣는 자들로 행복하게 해줍니다. 좀 억지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는 신나게 따라갑니다. 일단 노래가 즐거우니까요. 빵빵하게 들려옵니다. 영화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 The High Note)를 보았습니다.
<빌리 엘리어트>
전에는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구태여 구분이 없는 일도 많았지만 일반적인 구분이 있기는 했습니다. 좀 거칠거나 힘든 일은 남자가 하는 일이고 그렇지 않은 일들이 여자의 몫입니다. 운동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복싱을 여자가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은 없어졌습니다. 중장비를 여성이 다루는 것을 보며 놀란 적도 있습니다. 하기야 처음 버스 운전기사로 여성이 앉은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이지요. 요즘은 아무리 힘든 일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면 하는 거죠. 이제 남자가 간호사나 전업주부로 사는 경우도 생겼으니 세상일에 성적인 구별은 없습니다.
그들 세계에서 발레리나는 여자들이 하는 운동입니다. ‘빌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습하는 아이들 중에도 사내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힐끔힐끔 보면서 자꾸 관심이 쏠립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춤이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춤을 좋아합니다. 아무도 없으면 형의 레코드판을 틀고는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춤을 춥니다. 형에게 들키면 혼쭐이 납니다. 자기 것 건드렸다고 야단이지요. 그래도 눈치껏 즐깁니다. 음악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춤입니다. 그런데 사실 집안에서는 춤출 공간이 마땅치 않습니다. 이제 11살, 한껏 뛰어놀 때이기도 합니다. 방과 후에는 체육관으로 갑니다. 아빠가 권투를 시킨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그 수강료만은 어떻게든 만들어서 빌리가 권투를 하도록 만듭니다.
형과 아빠는 탄광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파업 중입니다. 사측과 대립하여 매일 시위에 나갑니다. 때로는 경찰과 대치합니다. 더구나 형 ‘토니’는 파업 주동자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제대로 지급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리는 권투를 해야 합니다. 아빠는 체육관장에게 특별히 부탁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을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아비의 바람이지요. 문제는 빌리가 잘 따라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체육관에 어느 날 발레 연습생들이 들어옵니다. 역시 경비 절약을 위해 체육관을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지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서로 아끼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링이 있는 쪽은 권투 연습을 하고 다른 한 쪽을 발레 연습생들이 사용합니다.
빌리의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갑니다. 눈이 가더니 결국 발이 갑니다. 그들 속에 섞입니다. 발레 지도 선생님이야 수강생 하나 추가되니 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하게 둡니다. 어설프더니 시간이 지나며 곧잘 따라옵니다. 문제는 수강료입니다. 권투 수강료가 발레 수강료로 바뀝니다. 체육관장이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빌리의 아빠를 만난 길에 사정 이야기를 해줍니다. 체육관으로 찾아온 아빠는 링 위에 있는 아들이 아니라 여자 아이들 속에 묻혀 팔다리를 벌리고 서있는 아들입니다. 내가 죽어라 하고 벌어서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강료를 주고 있는데 이 짓하라고 주는 거냐? 노발대발입니다. 그러나 빌리의 마음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가 있습니다.
발레 선생님도 빌리의 소질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몰래 개인교수를 해줍니다. 그리고 수도 런던에 있는 국립발레학교에 지원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선생님을 찾아와 모욕적인 언사까지 퍼부으며 빌리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결국 빌리도 포기하려 합니다. 체육관에 아빠와 빌리가 마주합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나있습니다. 아빠 앞에서 빌리가 자기가 배운 실력을 보여줍니다. 아빠가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꿉니다. 아들에게는 권투가 아니라 발레가 맞다는 것을 말이지요. 생각해봅니다. 아내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주었을까? 당연히 아들의 재능을 따라 가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다시 발레 선생님을 찾아가 사과하고 학교 입학을 추진하도록 합니다. 탄광촌 시골에서 수도 런던으로 유학을 가려 합니다. 일단 학교에 지원하고 오디션을 거쳐야 합니다. 아빠와 둘이서 런던으로 가서 참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레복을 입고 오락가락합니다. 둘러보며 조금은 주눅 듭니다. 떨립니다. 바르게 찾아온 것인가? 할 수 있을까? 일단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기 재능을 발휘합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 뭐라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좋은 이야기인지 비판인지 모릅니다. 그냥 떨립니다. 질문에 이렇다할만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막 나오려는데 한 심사위원이 질문합니다. 춤을 출 때 기분이 어떠냐고. 마치 감전된 듯 나를 잊습니다.
누가 인재인가요? 사람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뽑나요? 기관마다 단체마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력과 재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키우려는 것인지에 따라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전문인을 만들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장의 기술이나 실력과 재능보다는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봅니다. 그 긴 시간을 버티려면 일단 본인이 그것을 아주 좋아해야 합니다. 소위 미칠 만큼. 선택할 때는 바로 그 점을 찾아야 미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를 보았습니다. 2000년 작품이네요.
성경 마태복음 24 : 15 - 16 2020년 06월 21일
설교 : 산으로 도망하라니 김종우 목사
제가 60이 되기 전에 교회 모임을 따라 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동역자들 모임이니 좋아서 함께 한 것이지요. 서울에서 2 시간 정도 차로 가서 등반하였습니다. 이전에 제가 올라가본 산이라고 해야 남산 그리고 북한산 정도입니다. 가벼운 차림으로 야유회 가는 기분으로 갔습니다. 등산복도 아니고 배낭을 맨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야유회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평소 등산이나 조깅을 한 사람도 아닌데 산을 오르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조금 오르니 숨이 차기 시작합니다. 동료 목사님이 조금만 가면 된다고 계속 이끌고 갔습니다. 거반 다 왔다고, 조금만 가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계속 나아갑니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따라갔습니다. 죽을 맛입니다. 진짜 거반 죽게 되어 정상에 올라서서 저도 놀랐습니다. 정상에서 돌에 새겨진 높이를 보고 놀란 것이지요. 산 이름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유명산 862m. 그 후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성경에도 많은 산이 나옵니다. 산 같지도 않지만 에덴동산을 시작으로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던 아라랏 산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그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간 산이 있습니다. 나이 백세에 주신 아들을 하나님이 이제 제물로 받치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간 산입니다. 창 22 :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오랜 후 솔로몬이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합니다. 대하 3 : 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그곳은 그야말로 유서 깊은 곳이지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곳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 백성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산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돌판에 계명을 써주신 곳이지요. 지금도 성지순례 하는 사람이라면 꼭 올라보고 싶어 하는 산입니다. 바로 시내산입니다. 출 19 : 18 - 19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이제까지 구약성경에서 찾았지만 신약 시대 예수님과 관련한 산들이 있습니다. 먼저 습관적으로 다니신 산이 있지요. 눅 22 :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감람산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을 말씀해주십니다. 어디서요? 감람산에서. 마 2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장래의 일을 통해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올라가서 당신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주신 산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후세 사람들이 통상 ‘변화산’이라고 말하지요. 마 17 : 1 -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냥 높은 산이라고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비밀스런 산이 하나 있습니다. 마 24 : 15 - 16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아멘!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당부하신 것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산’으로 도망을 가라는 말씀이지요. 문제는 어느 산이냐 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인가 감람산인가, 이름을 가르쳐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무작정 산으로 가라니 도대체 세상에 산이 한두 개입니까? 어디로 가야 좋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왜 하필 이스라엘이냐? 세상에 좋은 나라가 얼마나 많으냐? 왜 하필 유대인이냐? 세상에 얼마나 많은 민족이 있는데. 그렇다면 산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왜 하필 거기에 있는 산이어야 하느냐? 세상에 좋은 산들, 유명한 산들이 얼마나 많은데. 과연 그런 산일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이 계시는 산이 있습니다. 시 2 :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아멘! 여기서 ‘나’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나의 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의 2절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나와 나의 왕은 바로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라고요? 시온산입니다. 그 산은 거룩한 산 곧 성산입니다. 시 99 : 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산, 시온산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사실 시온산은 예루살렘 근처의 작은 산을 말하기에 시온 또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로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봅니다. 사 52 : 1 - 2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여기서 보면 시온과 예루살렘을 번갈아서 사용합니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처소로 사용하지요.
마지막 때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야 할 곳도 시온 산입니다. 히 12 :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우리가 이른 곳이 ‘시온산’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에 그대로 되는 것을 계시록에서 확인합니다. 계 14 :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어린양이 어디 서있다고요? 시온 산입니다. 이미 옛날 구약의 선지자도 그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슥 8 :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시온은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의 산이고 바로 거룩한 산, 성산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날 산으로 도망하라 하신 것이 어느 산이겠습니까? 당연히 시온 산입니다.
육적으로 말하면 시온 산이 어디에 있다고요? 예루살렘 근교에 있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 곳, 거기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산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 비행기 타고 거기로 가야 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바라보는 거룩한 성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 아니지요. 하늘에 있는 성입니다.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즉 영계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영계에서 온다면 어디로 오겠습니까? 영계에서 영계로 온다면 말이 안 되지요. 우리가 있는 육계로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늘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렇습니다. 계 21 :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그럴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제 산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시온 산에 계시고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다고 합니다. 그 산이 정말 지금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예수님이 계시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산들이 그냥 산이 아닌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겔 36 : 1 - 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산들에게 말하고 예언할 수가 있습니까? 이 산들은 분명 산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람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산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니 ‘산들’이라고 하지요. 그 산을 ‘높은 곳’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그 산이 대적의 기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적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그는 곧 마귀, 사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 68 : 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아멘! 산들이 산을 시기한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요. 그러나 역시 산이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사람을 흙이라 하였습니다. 언제 그렇게 표현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져버렸을 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넣으니 살아있는 영 즉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이 부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생기는 하나님 말씀이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으니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말씀을 어기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그냥 흙만 남게 되지요. 창 3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 떠난 사람은 흙입니다. 그 흙이 모이면, 높이 쌓이면 뭐가 됩니까? 그게 산입니다.
처음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 아담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라고 동역자도 붙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 뱀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 되라고 유혹합니다. 결국 함께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에덴동산은 뱀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도 중간에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환난이나 핍박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혹을 앞세워 마귀가 우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마귀의 종으로 전락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4 : 10 - 13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집니다. 더구나 뱀 즉 사단의 사주를 받은 거짓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런 속에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겔 36장에서 보았듯이 처음에는 이스라엘 산들이었는데 대적 즉 마귀의 기업이 되어버린 산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변절된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배도한 것이지요. 처음 에덴동산이 그랬습니다. 뱀이 들어와서 자기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악한 자에게 속한 산도 있습니다. 렘 51 : 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온 세계를 멸망시킨 ‘멸망의 산’입니다. 물론 산이 산이 아니지요. 멸망자들이 모인 집합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위 마귀 집단이지요. 마지막 때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계 2 :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마귀 집단 곧 사단의 회입니다. 슥 4 :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 아멘! 스룹바벨은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남은 자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산이 그 앞에서 평지가 된답니다. 곧 예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지요. 사단의 무리는 예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마지막 때에는 최종적으로 멸망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저주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 23장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며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서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질타하십니다. 그들이 뱀들이니 사단의 무리입니다. 결국 마지막 때에는 지옥의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갈 산은 배도자들이 모인 곳도 아니요 멸망자 곧 사단의 무리가 모인 곳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가야할 산 마지막 때 예수님이 도망가라 하신 산은 시온산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모으십니다. 렘 3 :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데 그 수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백성이라기보다는 일꾼이고 하나님의 종일 것입니다. 그들이 먼저 시온으로 올 것이며 그러고 나서 백성이 모이는 것이 순서입니다. 계 7 :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먼저 십사만 사천이 있고 이 일 후에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어린양 앞으로 옵니다.
마지막 때 우리가 도망가야 할 산은 시온 산입니다. 그 곳에 어린양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슥 8 : 3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아멘! 진리가 있는 곳이 곧 우리의 구원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되지만 사람의 계명과 장로들의 유전이 전해진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듣고 설령 백독을 하여도 깨닫지 못하면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가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 2 : 2 - 3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많은 백성이 그곳으로 모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명하십니다. 사 16 : 1 “너희는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찌니라” 어디로 보내라고요? 시온 산으로 보내랍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당시 지도자들은 마땅히 백성을 예수님께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께 가는 백성을 막거나 핍박하였지요. 누가 그랬습니까?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즉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이 과거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 분명히 다시 온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그 날에는 어떻게 될까요?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자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렘 3 : 14 - 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아멘!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선포할 것입니다. 그는 과연 진리를 가진 자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목자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도망가야 할 곳은 시온 산입니다. 그곳에 어린양이신 주님이 서 계십니다. 그곳으로부터 율법 곧 하나님 말씀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곳이 진리의 성읍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들 곧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다시 오시면 누구를 먼저 질타하시겠습니까? 왜 심판하시겠습니까? 미 3 :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해주는 목자입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마 24 :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초림 때 유대교를 떠난 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