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 감상문 -이서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어렸을 적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뒤 자꾸 찾아 듣게 되는 곡이다. 주 멜로디를 연주하는 예스러운 아코디언 소리와 간드러지는 가수의 목소리, 노래 초반과 중간에 나오는 나레이션이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 노래는 1953년 발표된 곡으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 <봄날은 간다>와 동명의 곡이며 이 영화의 삽입곡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경위도 이 음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동명의 영화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 DVD를 빌려본 것이다.
우선 영화 <봄날은 간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와 젊은 시절 상처한 한 아버지(박인환), 고모(신신애)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겨울 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어느 날,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그 뒤로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리게 된다. 상우의 집에서 상우에게 결혼을 재촉하자 그는 자신에 집에 은수를 소개시켜 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한번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그 후 그들은 은수는 상우를 조금씩 밀어내고 둘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결국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은수에게 묻지만 그녀는 그저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과 그녀가 사는 강릉을 오간다.
영화의 주인공인 상우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다. 그로인해 영화에는 여러 소리가 등장한다. 대나무 숲 한 가운데에서 듣는 바람결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눈 오는 소리, 빗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인물들의 심리변화와 유대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곡의 노래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봄날은 간다>를 접하게 된 계기가 음악이라서인지 이 영화의 등장하는 음악에 유독 애착이 간다. 그래서 본격적인 영화 소개의 서두를 음악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봄날은 간다>의 음악은 조성우가 맡았다. 영화음악가 조성우는 우리 영화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려 한국 영화음악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과 영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탁월한 직관, 그리고 창작곡에 대한 남다른 고집으로 그는 영화계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조성우는 음악 전공자가 아닌 연세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영화와는 거리가 먼 전공이었던 그는 같은 과 동료인 허진호와 친해지게 되는데 둘은 평소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허진호 감독은 영화를, 그리고 그가 영화음악을 맡기로 하고 단편영화인 <고철을 위하여>를 제작하였다. 그 후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봄날은 간다>의 음악까지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장르의 관행이나 규범을 초월하지 않는다. 이번 영화에서도 편안하고 차분한, 감상적인 멜로디의 음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노래는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이다. 하나는 <봄날은 간다>라는 트로트이고 또 하나는 샹송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이다. 트로트는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상우의 할머니와 상우와의 연속성을 음악적으로 재현한다. 사실 할머니와 상우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는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비롯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상우는 가부장제의 흔들림에서 비롯한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연의 연대감을 은유적으로 들려주는 이 노래는 소시민적 막막함의 면면한 흐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노래 <사랑의 기쁨>은 주인공 상우가 겪는 연애의 과정을 상징한다. ‘소리를 따는’ 상우가 우연히 은수가 흥얼거리는 이 멜로디를 포착하기 위해 마이크의 방향을 바꾼다. 이 대목은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행위가 ‘사랑의 행위’로 바뀌는 것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허진호 감독은 예술과 노동,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의미의 이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이 장면에서부터 상우의 아픔이 시작된다. 상우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의미의 이동을 겪었으나 은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상우에게는 소리를 녹음하는 일이 그녀와의 함께 있기 위한 일인 것에 반해 그녀에게는 그저 단순한 일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은수가 상우에게 ‘이 일이 끝나면 뭐 할 거예요.’하고 묻는 장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별 생각 없이 정말 앞으로의 상우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묻는 은수의 담담한 대사가 상우에게는 그 말이 ‘우리의 사랑이 끝나가네요.’라는 뜻으로 와 닿은 것이다. 그래서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표정이 서글프게 변하였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멜로디는 그 다음부터 ‘사랑의 아픔’을 상징하는 역설적인 멜로디의 역할을 한다.
영화 속 상우와 은수는 끝내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말을 그리는 여타의 다른 멜로 영화와 차이점을 보인다. 이 점이 허진호 감독의 매력이기도 하다. 허진호 러브스토리는 관습적인 멜로드라마와는 판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애한다. 어떤 장르보다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을 목표로 기능적으로 조율되게 마련인 멜로드라마 내러티브의 전형은 그의 영화와 상극이다. 그나마 사랑은 주인공의 인생에 어떤 유형(有形)의 결실도 남기지 않는다. 결혼도 아이도 극단적 파멸도 뒤늦게 온 눈물겨운 고백도 그의 영화 속에는 없다. 다만 사랑이 '여기' 있었다는 기억만이 인물들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극적인 사건을 대신하여 <봄날은 간다>는 우리의 연애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결정적이었으나 대다수 멜로드라마 속에서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귀하게 다룸으로써, 실제 연인들을 웃기고 울리는 것은 사별이나 불치병, 배신, 동화 같은 프로포즈 등의 '이벤트'가 아님을 알고 있는 관객을 적잖이 감동시킨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봄날은 간다> 역시 사소한 스케치로 장면장면을 채워가지만 그것들은 그저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포개지고 응결되어 죽음과 사랑에 대한 하나의 신중한 '견해'로 결정을 맺었다. 영화는 처음 유지태와 이영애라는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는 영화 내적으로 꽤 많은 확실한 패를 소매 안에 숨기고 게임을 한다. 동시녹음 엔지니어라는 주인공의 직업, 세대를 가로지르는 삶의 교감을 대변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라는 인물 설정은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고 상우네 식구들이 사는 정겨운 변두리 한옥은 너무 명백하게 소멸과 향수의 정취를 낸다. 반면 두 연인이 부여안고 떨어지고 때로는 외로이 한쪽에 웅크리는 공간, 은수의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바닷가 조그마한 아파트는 멜로드라마의 공간으로서 참신함을 보여준다.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상우는 "뭔가 간절히 바라도 다 잊고 그러는" 쓸쓸한 섭리를 수긍한다. 그들은 모두 이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실망임을 안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짓는다. 영화는 화사한 봄날은 가고 이제 다시 태엽을 감아야 할 때를 그리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다음 영화가 어떤 생김새일지 몰라도 그는 언제나 인물과 사물에 대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고, 일상의 빛나는 순간들을 예쁘지만은 않게 잡아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앞으로 삶의 더딘 시간을 새기는 모래시계를 이리 저리 뒤집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떤 이는 채워지는 반족을 보며, 어떤 이는 비어가는 반쪽을 보며 미소 지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은수를 보내고 보리밭의 바람 속에서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던 상우처럼.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과 겨울을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번의 봄을 맞이할 것이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우리도 지나가는 봄날을 안타까워하며 지나간 봄날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살아가지 말고 인생에 있어서 계절의 변화가 하나의 통과 의례임을 깨닫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ㅠㅠ 분명히 오전에 올렸는데 왜 글이 없는거야... 다시 들어와서 확인 안했으면 큰일날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