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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알파 레터 12호 - 2023. 10. 보슬비 김이구 선생님을 기억하며 |
ⓒ 박용숙 |
김이구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6년이 되었습니다. 저희 SF플러스알파 구성원들은 지난 9월 23일에 김이구 선생님을 기억하는 몇 분과 함께 예산에 있는 선생님의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참석자들은 각자 김이구 선생님의 글 중에서 한 부분씩 준비해 와서 낭독하고 선생님에 대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 글과 이야기들을 여기에 모아 봅니다. |
◆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면 늘 생각나는 사람. 다른 분들에게는 김이구 선생님이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김이구 상무님이다. 1997년 입사할 때는 편집국장님이셨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 편집자였다. 시험문제를 출제한 사람도, 수습기간 내게 숙제를 내주고 검사하고 지도해준 분도 김이구 상무님이셨다. 밖에서는 아무리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이들도 보통 가정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듯이 회사 밖에서는 모두가 좋게 봐도 회사 내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김이구 상무님은 오히려 회사 내에서 더 좋은 분이었다. 물론 밖에서도 굉장히 좋은 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좋았다는 말이다. 김이구 상무님은 작가로, 평론가로도 활동하셨지만, 그보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안을 가진 기획자이자 편집자셨다. 내가 그나마 편집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김이구 선배님 등 뒤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9월 23일 SF플러스알파 식구들과 김이구 상무님을 뵈러 다녀왔다. 김이구 상무님 앞에서 김이구 상무님과 관련한 글을 간단하게 읽고 이야기하기로 해서 전날 나는 보슬비 카페에도 들어가 보고 상무님 페이스북도 다시 살펴보면서 뭔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나 나의 선택은 「편집자라는 모순된 자리에서」였다. 나는 초등학생 때 소심하고 숫기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 붙이기를 어려워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용건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입을 딱 봉하고 지냈다. ― 김이구의 동시동심 「얌전한 폭발 :박예분 「어떻게 말할까」」 중에서 〈김이구의 동시동심〉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쓴 글을 보고 너무나 이구스러워서 혼자 낄낄대던 대목이다. 이렇게 숫기 없는 분이지만 좋은 작가를 발견하면 그를 가만가만 끌어주신다. 김이구 상무님 덕분에 많은 신인 작가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자신이 모순된 존재라는, 모순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자들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한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란 것을 대부분 모르면서, 또는 가끔은 알면서 ‘그냥 그 일을 한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하고 있는 존재이니, 편집자라는 존재 자체가 내게는 모순이다 생각된다. (중략) 이처럼 편집자는 모순된 자리에 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다 해도, 건축에 관한 책도 다루고 인공지능에 관한 책도 다루고 나긋나긋한 에세이도 다루어야 한다.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다룰 수 없는 것을 다룰 때가 많다. ‘그래서’ 엉터리 책이 나오고, ‘그렇지만’ 좋은 책이 나온다. 이러한 모순된 존재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첫째 ‘최초의 독자로서 생생하게 읽는’ 자신의 체험을 갖고 이를 반영하는 것, 둘째 자신을 믿지 말고 언제나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 김이구, 「편집자라는 모순된 자리에서」 중에서 (매거진 온페이퍼 2016년 12월 26일) 편집자로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글을 읽는다.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물론 만나도 뭔가 확신의 말을 해주시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문장들 사이에 간간이 이어지는 말줄임표들이 내게 해답을 주었을 거라 확신한다. 김이구 상무님은 이름 그대로 글 쓰는 자이자 편집자로서 평생을 힘써 일하신 성실한 분이셨다. 그분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좋은 편집자가 될 수 있도록 더 힘써봐야겠다. 🖋️ 김태희 (어린이·청소년책 편집자) |
◆ 김이구 선생님의 잎새소설 모음집 『첫날밤의 고백』에 실린 「입을 바로 해라」라는 작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뉴스 시간이었다. 장관인지 총리인지가 무슨 특별담화 같은 걸 발표하는 모양이었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정책...... 국민 여러분의 절대적 신뢰와 협조가...... 밝은 내일을 기약......” 내 머릿속엔 무슨 말인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한쪽으로 치우친 그의 입이 자꾸만 눈을 자극했다. 찌그러진 입가의 주름살들이 흐늘흐늘하다 문득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일그러진 입이 점점 커지면서 빙빙 돌아가는 주름살들과 어우러져 얼굴 전체를 덮더니, 마침내는 텔레비전 화면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짜식아, 말은 삐뚤어져도 입은 바루 해라!” ― 김이구, 「입을 바로 해라」 중에서 위 작품은 김이구 선생님이 1979년에 썼지만 그동안 미발표 상태로 있다가 2002년에 나온 이 책에 처음 수록하셨다고 합니다. 만약 김이구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세상을 보고 역시 똑같은 얘기를 하실 것 같아 이 자리에 인용해 봅니다. 🖋️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 |
◆ 이런 바보 멍청이, 얼간이가 있나.’ 위화의 단편 「난 쥐새끼」를 읽다 보면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온다. “쥐새끼 같은 겁쟁이가 누구게?”하고 물으면 “나‘라고 대답하는 이 인간(양고)는 어려서부터 놀림감이 되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공장의 동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한다.(중략) 사실 양고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 속에서, 세상사 속에서 그는 모자란 바보이고 아둔한 얼간이이다. 그래서 당하고만 산다.(중략) 위화의 소설에는 이처럼 선량한 얼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별한 못난이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모두 얼마간씩 얼간이이다.(중략) 남들은 다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해도 시간을 지켜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 적은 봉급과 작은 집에도 만족하는 사람, 양고 같은 ’착한 얼간이‘들이 더 이상 얻어맞지 않고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건 누구인가? ― 김이구, 「‘착한 얼간이’들이 당하는 고통과 몽매함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 위화 소설집 『내게는 이름이 없다』」 (『우리 소설의 세상 읽기』(작가, 2013), 154~156쪽) 김이구 선생님의 글을 읽을 준비를 하던 중 선생님이 제 첫 평론집에 써주셨던 추천사가 문득 떠올라 읽어 보았습니다. 제 글의 장점과 제가 걸어온 길을 섬세하게 짚어주신, 당시에는 언뜻 과분한 칭찬으로만 여겼던 추천사를 이제 다시 읽으며 비로소 그 글이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쓰라고 일러주는 당부이자 응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글을 마음에 품고 이번에는 위에 인용한 선생님의 서평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평에서 선생님은 ‘착한 얼간이’인 위화의 소설 주인공을 주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간이라 놀리지만 사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얼간이의 길을 걸어가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러한 인물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도 직시합니다. 선생님이 착한 얼간이에게 마음을 주신 까닭은 어쩌면 선생님도 주인공과 동류의식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요? 착한 얼간이 같던 선생님이 선배 평론가로 제게 주신 추천사와 위의 서평을 읽으며 제가 어떤 글쓰기 실천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도 작품 속 얼간이들을 세상에 알리는, 글 쓰는 얼간이가 되겠다고 감히 다짐해 봅니다. 🖋️ 오세란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
◆ 나는 꽁트를 마지막에 꼭 극적 반전이 필요한 소극(笑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역시 ‘삶의 이야기’,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얻는,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그 나름의 깨달음을 담는 것을 최고로 친다.(중략) 청소년기에 처음 접했던 알퐁스 도데의 ‘꽁트’들은 그러한 내용을 담은 뛰어난 문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기준으로는 단편소설에 더 가까울 텐데, 「마지막 수업」 「아를르의 여인」 「스갱 아저씨의 염소」 「별」 등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또 김승옥 꽁트집 『위험한 얼굴』과 김소진의 『달팽이 사랑』을 기억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나 「역사(力士)」가 뛰어난 소설이듯이, 김소진의 「춘하 돌아오다」 「파애(破愛)」가 뛰어난 소설이듯이, 『위험한 얼굴』의 「시골 처녀」나 『달팽이 사랑』 속의 「꼽추의 사랑」 같은 작품들도 아주 뛰어난 소설이다. 브레히트의 소설들을 보면 분량이 원고지 열 장 이내의 짧은 것에서부터 긴 작품까지 들쭉날쭉한데, 거기엔 음미할 만한 인생과 작가의 깊은 시선이 들어 있으며(『상어가 사람이라면』), 카프카의 짧은 엽편들 또한 구체적이면서 모호한 세계에 대한 특유의 탐색을 유감없이 담아내고 있다(『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 ― 김이구, 『첫날밤의 고백』<작가의 말> 중에서 묘소에서 읽을 글로는 주저함 없이 소설집 『첫날밤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 책은 대체 무슨 책이냐고, 제목이 왜 그러냐고, 일부러 예의를 내버리며 장난처럼 질문했을 때 선생님은 활짝 웃으시며 재미있는 책이니 꼭 보라셨다. 선생님 같은 평론가도 본인 작품은 저렇게 함빡 애정하는구나, 그래도 되는구나, 느꼈다. 돌아가시고서야 책을 샀다. 이제야 책을 넘겨본다. <작가의 말>에는 “『학원』 투고질”이라 지칭하신 창작 활동의 시작점을 적어두셨다. 이 책에 수록된 꽁트를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창작하신 과정도 말씀하신다. 자전적 기록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선생님은 이 책을 꽁트집이나 엽편소설이 아닌 “귀여움이 넘치는 녹색언어-잎새소설”로 부르시며, 꽁트도 훌륭한 문학이라 평가하신다. 문학에 대한 시선이 이러하셨으니 긴 시간 오롯이 아동문학을 하실 수 있었겠구나, 이제야 뒤늦은 비밀을 깨닫는 듯하다. 이미 이때부터 선생님께는 흔히 남들이 규정해 온 거대하고, 어렵고, 심각한 작품만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었으니. 🖋️ 김유진(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동시인) |
◆ 눈 잘 자 박성우 아빠? 응! 엄마들은 왜 아가 재울 때 ‘코’ 잘 자, 해? 눈이 자니까 ‘눈’ 잘 자, 해야지! 코가 진짜 자면 큰일 나잖아, 그치? 아빠, 눈 잘 자. 엄마, 눈 잘 자. — 『우리 집 한 바퀴』(창비 2016) …(중략)… 알고 보면 시 쓰기는 쉬운 받아쓰기인데 쉽지가 않다. 청소년시집 『난 빨강』(창비 2010)에서 십대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썼던 박성우 시인이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창비, 2016)에서는 어린 딸아이의 목소리를 싱싱하게 받아썼다.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려면, 그대로 적으려면 내 마음을 열어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해야 한다. ― 김이구의 동시동심 「받아쓰기만 잘해도 시가 되네 : 박성우 「눈 잘 자」」 중에서 (한국일보 2016년 5월 28일) 언젠가 한 고등학생이 청소년소설을 읽고 ‘인물이 너무 청소년인 체 해서 몰입이 안 된다’는 감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소설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서 그 청소년의 말이 좀 더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창작 지도를 하면서 목소리 재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넘어서는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고민해 오던 문제의 단서를 김이구 선생님의 글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이 하는 목소리 받아쓰기는 마음으로 한다는 사실! 일방적인 기록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과 만나야 한다는 점! 잘 쓰기 위해서 먼저 잘 들어야 한다는 진실을 갈수록 마음을 닫고 흘려 듣는 학생들과 나누어야겠습니다. 🖋️ 최배은 (아동청소년문학 연구자) |
◆ “1호선, 13번 출구, 26동 7층”(약도)이라는 기호의 편리함과 삭막함이 우리 삶의 현주소일지라도 동시의 꿈은 그 너머를 본다. 아름드리 팽나무가 서 있는 곳을 보고 쭉 따라와. 제비꽃 애기똥풀 출렁출렁 파도치는 밭둑지나면 민들레꽃 양탄자가 보일 거야. 양탄자 눈을 비켜 걸어와. 연둣빛 손을 반짝반짝 흔들고 있는 찔레나무 울타리가 보일 때까지. 거기에서 분홍빛을 내려놓은 매화나무를 찾아봐. 그 집이 우리 앞집이야. 우리 집은 함박꽃이 함작 웃는 집이야. 네가 온다니까 꽃들이 뒤죽박죽 한꺼번에 마중 나왔지 뭐야. 튤립은 칼을 빼 들고 말이야. 참, 살구나무 아래 빨강 지붕은 해피 집이야. 살구꽃이 동글동글 꽃을 그리며 해피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을 거야. 잘 찾아올 수 있지? - 김미혜 「약도」 부분 민들레꽃이 양탄자처럼 펼쳐지고 살구꽃 비가 내리는 마을, 어쩌면 평범한 시골집의 모습일 수도 있는 이 풍경이 황홀경으로 다가온다. 김미혜의 동시는 이처럼 우리가 꿈꾸는 삶터를 찾아갈 수 있는 약도를 그려 보고 또 그려 보고 한 것이 아닐까. ― 김이구, 「꽃과 새의 이름을 부르며 생명을 보듬기」 중에서 (김미혜 『안 괜찮아, 야옹』(창비, 2015) 해설) 언젠가 김이구 선생님이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오른쪽에 ○층 건물이 보이는데 거기 1층 약국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걸음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난 골목으로 들어가서……’라는 식의 문자메시지로 모임 장소를 알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냥 식당 이름만 알려주셔도 되었을 텐데, 투덜대며 문자 지시대로 찾아갔었더랬죠. 김이구 선생님은 저에게 ‘글을 이렇게 써라’, ‘책을 이렇게 내라’는 식으로 직접적인 말씀을 해주신 적이 없고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는데요, 선생님이 알려주신 약도를 따라 약속 장소를 찾아가던 그 발걸음까지도 풍경이며 이야기였음을, 그 이야기들이 저에게 팽나무, 제비꽃, 보슬비가 되어 저를 적셔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약도’를 따라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 쓰겠습니다. 🖋️ 정재은 (SF동화작가) |
◆ 어떻게 말할까 박예분 …(중략)… 화나고 답답한데 저렇게 많은 말을 어떻게 다 하지 한마디면 될 걸 아휴, 꼴 보기 싫어! -『안녕, 햄스터』(청개구리 2015) 나는 초등학생 때 소심하고 숫기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 붙이기를 어려워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용건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입을 딱 봉하고 지냈다. (중략) 박예분의 동시 「어떻게 말할까」에서, 아이는 ‘감정을 차근차근 전달하는’ 말하기 방법을 배웠다. 어떤 ‘사실’로 인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바람(원하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흥분해서 주먹이 먼저 나가거나 톡 쏘아붙이지 말고!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 ‘나’를 놀린 녀석에게 배운 대로 말해 보려니 쉽지 않다. 삼 단계로 말해야 하니 해야 할 말도 참 많다. 그래서 “화나고 답답할” 때는 그냥 속에서 나오는 대로 한마디 해 버려야겠다는 것이다. “아휴, 꼴 보기 싫어!” 동시라서 차마 심한 표현을 못 썼을 수도 있지만, 꽤나 얌전한 폭발이다. 사실 살다 보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되는 순간들이 있다. 차분하게 조목조목 말해서 설득해야 할까, 싫다거나 좋다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어느 것이든 다 답인 상황보다 어느 것도 다 답이 아닌 상황이 많다.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서 돌아가신 게 명명백백한 백남기 씨를 검찰은 부검을 하겠다는데, 더 밝힐 것이 무엇이 있나?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 말하든, ‘하지 마, 유족이 싫다잖아!’ 한마디든 가슴으로 들었으면 한다. 정치나 공권력이 필부의 상식조차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 김이구의 동시동심 「얌전한 폭발 :박예분 「어떻게 말할까」」 중에서 (한국일보 2016년 10월 8일) 김이구 선생님을 잘 몰랐을 때에는 선생님 특유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 당황하곤 했어요. 뭔가 여쭸을 때 대답이 없으셔서 잊어버릴 즈음 불쑥 대답을 들려주시곤 했거든요. 전화 통화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긴 침묵이 이어질 때면 내가 뭔가 잘못 말씀드렸나, 혹시 언짢으신 걸까 싶어 마음 졸일 때면 느리지만 적확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 대답을 들려주셨지요. 나중엔 김이구 선생님의 속도에 맞춰 대답을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지기까지 했어요. 선생님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제는 영면하신 곳을 찾아 인사드리니 말 붙이기를 어려워하던 초등학생 김이구 선생님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아직 묻고 싶은 말도, 듣지 못한 대답도 너무 많지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답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토록 하 수상한 시절에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차분하면서도 냉철하게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들려주셨을 텐데,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안타깝습니다. 🖋️ 이퐁 (동화작가) |
◆ 동시는 다 쉽게 해독이 돼야 한다. 직관적으로 수용돼야 한다고 보는 관점은 낡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략…) “좀 더 넓은 세계, 혹은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와 새로운 접면을 이루”(「황금시대는 도래했는가」145면)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일상’을 버릴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새로운 언어에의 열망은 더 큰 세계와의 연관을 보면서 짭짜름한 삶의 소금기를 잡아내는 방법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 김이구, 「오늘의 우리 동시를 말한다: 난해함, 일상성, 동심주의의 문제」 중에서 (『창비어린이』 2015년 겨울호)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는 선생님의 절묘한 중심잡기. 쉬운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난해함 자체에 머무는 난해함은 경계하고, 새로운 언어를 향한 열망도 지금 여기에 발붙인 채 더 큰 세계를 끝없이 바라볼 때 가능하다는 지적은 단순히 동시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이 허방인 것 같아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듯해 멈춰버리고 싶을 때도 그저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일. 그것이 맞다고, 그게 옳다고 나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장한 일이라고. 더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다시, 오늘을 살자. 🖋️ 송수연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
◆ 손발 빌려주기 김현숙 노인들만 남은 동네 택배 대신 보내 주고 농협 돈 찾아 주고 아픈 할아버지 목욕시켜 주던 찬호 아저씨 교통사고로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다 영기 할아버지가 오줌 누이고 수동이 할머니가 밥 떠먹이고 민수 할아버지가 아기처럼 얼굴 씻긴다 동네 어르신들이 손발이 되었다 — 『특별한 숙제』(섬아이 2014) 뉴스를 보기가 겁난다.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다가 열아홉 살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고, 섬 학교의 여교사를 학부모들이 계획적으로 술을 먹여 성폭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전관 변호사와 현직 검사장의 비리는 파고 파도 끝이 없을 듯한데, 역시나 제 식구 감싸기인지 수사 소식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미담이 그리운 시절이다. 美談, 아름다운 이야기.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이야기 속 사람의 행동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까? 아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행동이 아픈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고 힘든 사람을 도와 힘들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 김이구의 동시동심 「미담이 그리운 시절 :김현숙 「손발 빌려주기」」 중에서 (한국일보 2016년 6월 11일) 이 시에 대한 김이구 선생님의 평을 보자마자,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슬펐다.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이다 하면서 세상이 휙휙 변해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 진짜 세상은 휙휙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변할 법도 하거늘. 오히려 더 퍽퍽해져 시원한 사이다를 달고 살고 싶어진다. 선생님이 계신다면 촌철살인 같은 말씀을 시원하게 날리실 것 같다. 그러나 진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는 아름다운 이야기, ‘미담’이었다. 선생님의 글귀 하나하나에 선생님의 평소 성품과 마음이 담겨있어 선생님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아는 선생님도 나눔과 돌봄을 늘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선생님은 ‘아름다운’ 분이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이 그리운 10월이다. 🖋️ 박용숙 (동화작가) |
◇ 보슬비 김이구 선생님은... 소설가이자 평론가, 출판기획자, 편집인이었던 보슬비 김이구 선생님은 195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8년 『문학의 시대』 4집을 통해 소설가로,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했으며,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소위원회 위원,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부회장, 계간 『창비어린이』 편집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평론집 『어린이문학을 보는 시각』『우리 소설의 세상 읽기』『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와 소설집 『사랑으로 만든 집』『첫날밤의 고백』, 동화집 『궁금해서 못 참아』, '창비 말놀이 그림책' 시리즈를 냈으며, 엮은 책으로 『박영근 전집』『한낙원 과학소설 선집』『권태응 전집』이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SF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으로 '과학기술창작문예'(2004-2006) 아동문학 부문 심사와 '한낙원 과학소설상'(2014-) 공모 제정, '어린이청소년SF 강독 모임'(2017-2018) 기획에 힘썼습니다. 올해로 보슬비 김이구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
첫댓글 제 동시 <손발 빌려주기>를 만나다니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