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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 써 봤네요. 어떤 그림쟁이의 얘기지요.
무지개 끄트머리에 서서
이성상
“권화백님, 대관료 입금시켜 주셔야죠?”
“아, 네 내일까지 정리 하겠습니다.”
여직원의 전화에 권영찬은 풀이 죽어 자신 없는 말로 그렇게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이 겨우 소품 하나 만 팔린 고로 맥이 풀리고 실은 돈이 없었다.
일주일 내내 이번 전시를 하면서 작가로서 전시장에 매일 나가 성실성도 보였고 딸 둘까지 동원, 안내와 도슨트로 작품 설명도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매년 시도하는 작품 전시지만 갈수록 자신의 출품작에 대한 갤러리들의 관심은 멀어지는 듯 작품 앞에선 고개만 끄덕일 뿐 도대체가 팔리지를 않았다.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이번 전시였다. 새로운 기법으로 시도된 대형 작품도 있었다. 친지와 지인 후배까지 초청장도 빠지지 않게 보냈었다. 이번만은 전시가 잘 될 것 같은 감으로 인사동으로 정했으나 예전 압구정동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이제 나이가 50을 갓 넘기게 되면서 전시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넘어 돈이 되어야 했다. 순 상업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아야 하는 명제도 있어서다.
항상 영찬의 적은 수입에 잘 참고 살던 아내도 이젠 잔소리꾼이 되어가고 그동안 누적된 화실 경비와 집안 생활비 또 시집 갈 나이의 두 딸 걱정도 이젠 큰 짐이 되고 있다. 아내가 따로 하는 학원도 힘만 들고 수입은 예전 같질 않아 학원을 넘기려고 해도 인수자가 나서질 않는다는 것이다. 경기가 없어서 라는 말은 이젠 하도 들어 실감도 없다. 그동안 비구상 쪽인 영찬의 작품에 대해 인정을 받은 듯도 해서 열심히 그려댔는데 착각인 듯 팔리지를 않는 것이었다.
전시 마지막 날, 영찬은 전시장 섭외를 도와준 대학후배 성식이와 인사동 골목집에서 마주 했었다. 그날따라 또 취하고 싶었고 잠시 잊고 싶었다. 소외된 마음을 안다는 듯 후배는 위로를 했지만 허탈했고 부끄러웠다.
“ 형! 기법을 조금 바꿔 봐. 인간들이 작품을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지 않아?”
“ ....... 그렇게 보이냐? 너가 보기에도 어렵냐?”
“ 그건 아닌데, 요즘 사람들 좀 단순하고 동화 같은 그림들 좋아 하잖아....”
“ 그런 머리가 잘 돌아 가면 내가 이 짓을 안 하지.”
“ 그림 값도 좀 비싼 것 같지 않아? 호당 10만원이면 쎈 거야.
“ 그럼 5만원하면 팔렸겠냐?
영찬은 아내한테서도 여러 번 그 점을 지적 받았었다. 10여 년전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바꾼후 Drip painting을 고집 해 오고 있다. 그것은 물감을 화폭에 분무기로 품거나 뿌리는 것으로 어떤 때는 물감을 들어서 붓기도 할 때도 있어 그럴 때는 물감 값도 무시 못 하게 많이 들어간다.
그림은 전체 분위기로 보면 봄철의 숲을 위에서 본 형상을 나타낸 것부터 바닷가 해변의 운무를 표현한 것 또 겨울의 설국묘사 같은 광경을 그라데이션화 해서 표현해 놓은 것들 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잘 어필 받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아주 작은 4호부터 200호가 넘는 대형 작품까지 공들여 뿌리고 갈고 문지르고 때론 긁기도 하면서 그걸 여러 번 반복, 나중엔 액자까지 직접 만들어 끼운다. 전시에 맞추려면 밤샘 작업도 하면서 한 점 한 점 완성해 놓을 때 보면 온몸이 땀 투성이 되기도 한다. 체력의 한계도 느끼며 삼겹살과 소주는 꼭 필요한 언제나 연인이 되곤 했다. 그렇게 제작해서 전시 해 놓은 것인데 안 팔린 것이다.
그 물감이라는 게 국산도 별로 없고 품질이 떨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착색이 선명하고 변색이 늦게 와서 질이 좋다는 이유로 외제를 선호 하는데 전업 작가들은 물론이요 요즘은 초보들도 많이들 외제만 쓰려고 한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마치 조각하는 작가들이 좋은 목재와 돌 또 브론즈라던가 새로운 소재를 끊임없이 찾고 서슴없이 돈을 쓰는 것과 비슷하게 재료는 좋은 것으로 쓰고 있다.
영찬의 화실은 파주에 있다. 허름한 농가를 또 못 면하고 임대해서 실내를 개조하고 시설을 바꿔 작업실을 만든 것이다. 주변에 숲이 좋은 야산이 있고 개천이 있고 저수지가 있다. 안쪽으로 민가가 10여호 옆으론 내가 흐르고 앞쪽엔 작은 30평의 텃밭이 있다. 이곳으로 옮긴지도 이제 3년, 동네 사람들과 안면도 익히고 누가 찾아오면 ‘털보화가’네는 그 위쪽에 있다고 친절하게 안내도 해 줬다는 소리를 듣고 지낸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작업실을 꼭 가지고 싶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화실만 가지면 뭔가 대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더 공부도 하고 연마해서 자신도 멋진 작품 만들어 내고 대가소리도 한 번 들어보며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순리대로 호락호락 쉽질 않았다. 장가도 좀 늦게 가고 싶었는데 덜컥 임신이 되는 바람에 28살에 대학 강사 직장 박봉으로 그만 식을 올리고 말았다. 처갓집 식구들 처형, 장인 으름장에 꼼짝 못하고 발목이 묶인 것이라고 영찬은 넑두리를 한다.
그동안 이 작업실을 네 번이나 옮겨 다녔다. 아내와 결혼 시기 처음엔 광명시에 자리를 잡았었다. 대학강사로 나가면서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해 화실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 농가를 개조해 만든 임대료가 싼 가옥이었는데 2년이 지나면서 난데없이 불이나 그림과 화구가 몸땅 타버리는 수난도 겪었다. 그 충격으로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기도 했지만 가장의 역할은 해야겠기에 털고 일어나 다시 행신동 LG마트옆 정식 건물에 화실을 차려 중고생 미술 지도까지 하며 지내기도 했었다. 한동안 입시생들이 몰려와 호황기도 있었지만 입시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또 곤란한 시절을 겪게 되고 결국 40평 임대료가 부담이 되어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일반인을 지도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강사로 나가기도 하면서 나중엔 결국 파주까지 가게 된 것이다.
결혼 전에 아내의 부친이 영찬을 한번 데리고 오라고 했다며 반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 당시 영찬은 처갓집을 별로 찾아뵙고 싶지가 않았었다. 결혼은 물론 한참 더 있다 할 생각이었고 이 여자를 딱이 신부 감으로 정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군대 갔다 와 복학 하고 2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자 진로 문제가 더 걱정스러운 때 였다. 그런데 그만 몇 번 만나 신체 접촉을 한 것이 여자가 턱 임신을 한 것이었다.
허락도 안 받고 혼전 임신까지 시켜 놨으니 여자쪽 부모님 뵐 면목도 안서고 해서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찾아 뵌 것이 그날로 그만 그 집 사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내 소개를 한 것인지 벌써 사위가 처가를 찾는 분위기로 영찬을 맞아 드렸다. 삼 남매중 둘째 딸인데 식구가 다 모였는지 거실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모여있다.
앉자마자 육군 중령이라는 장인 될 분이 질문 공세가 시작이 되었다.
“ 앉게.! 그래 집 부모님들은 다 안녕 하시고?”
“ 예.”
“ 서천에 계신다고? 농사를 그 연세에도 많이 지시나?” 그래 무슨 농사를 하시는데 ?
“ 아, 예 벼 농사 조금 하고 담배와 고추 그런 채소류지요.”
“ 그럼 졸업했으면 부모님 도와 드리러 내려가 살건가?”
“ 아닙니다. 형님 두 분이 근처에 살고 계셔서 전 서울서 자리를 잡아야지요.”
“ 무얼 하며 살고 싶으신가? 미대를 나왔으니 화가로서 그림만 그리며 사는 건가?”
“ 아닙니다. 아직은 대학에 남아 달라고 해서요.”
“ 그럼 교직에 있게 되는 건가?”
“ 당분간은 그렇게 지내면서 생각을 해 볼려구요”
“ 그래 아무튼 반갑네. 인사가 늦었지만 편히 앉아 뭘 좀 들게.”
“ 예. 감사 합니다.”
처가 쪽엔 경찰 공무원도 있어 K서의 강력계 반장이 작은 삼촌이라며 은근히 과시를 하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여자를 혼전 임신을 시켜 놓고 다른 맘 먹으면 혼날 거란다. 그것이 소위 ‘혼인 빙자 간음죄’가 되는 거라며 영찬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어 놓고 있었다. 이렇게 처갓집과의 예기치 못한 상견례를 치르고 정확히 11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과민하게 생각하지 않는 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간이 너무 많이 생각함으로써 무엇이든 크게 벌리고 만다는 말은 위안이 됐다. 불가해한 것은 오직 인간이다. 시작은 좀 모양새가 안 좋고 마음에 안 들지만 잘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렇게 처음 사귄 여자와의 급작스런 결혼이 영찬은 그 당시 못내 불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주변의 다른 여자는 다 빼앗기게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고 남이 되어 오로지 지금의 아내만 바라보고 살게 된다는 게 참으로 억울했다. 그것이 꼭 카사노바같은 프레이보이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 친구고 어느 누구라도 미혼일 땐 편하게 들이 대기라도 하며 부담없이 지냈는데 이젠 그러질 못하게 되고 보니 그것이 싹 바뀐 것이다. 기혼자의 비애라고 영찬은 그점을 못내 아쉬워하며 마치 다른 모든 것이 자신의 앞날까지 포함해 꽉 막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오래 지우지 못하고 지냈다.
결혼 준비가 안 돼 동거하다 시피 하면서 첫째를 낳고 몸조리를 한 후에 식을 올린 것이다. 마음을 바꿔 노력을 했지만 경제문제 등 여러 가지가 힘들게 했다. 2년만에 대학 강사직을 그만 두고 어디 일반직 취업을 하려했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파주 작업실로 가기 전 문화센터 유화반 지도교사로 나간 적도 있다. 행신동 학원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궁여지책으로 잠시만 하겠다고 나간 것이다. 그곳에서의 해프닝은 평생 영찬의 인생에 흠이 되고 아내에게 힘든 시절을 안겨 주었었다.
그 때가 영찬이 40대 중반시절이니까 그 아줌마는 50대 초반 같다. 매주 두 번을 보면서 학생과 교사로 자기 직분에 충실히 그리며 가르치길 6개월을 지냈을 무렵 같다. 영찬이 틈틈이 그림 그려 놓은걸 작품 전시 했을 때다. 전시장을 찾은 교육생 그 아줌마가 선뜻 그림 한 점을 사 주는 것이었다. 그림이 맘에 든다며 제법 큰 그림을 사겠다고 해서 30% 디씨까지 해서 주었다. 400만원쯤 되는 가격이었다. 고마웠다. 그래서 저녁을 같이 먹었고 그것이 자주 거듭되다 단 둘이 술도 마셨다. 그러다 그만 선을 넘고 말았다. 한번 넘은 선은 거침이 없었고 어쩌다간 불타는 주말이 되기도 했다. 돈도 얻어 썼다. 집안에 여유가 있는지 큰돈은 아니어도 매달 2.3백은 용돈이라며 찔러 주는걸 사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1년이 넘을 즈음 같은 반 눈치 빠른 다른 교육생의 일러바침으로 관계가 알려져 다시는 그곳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아내도 이 일을 알게 되어 대판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주제에 바람까지 피냐는데 할 말이 없었다. 어쩔 것인가. 잘못을 했으니 딸들 보는데서 아내에게 멋쩍게 사정도 하고 싹싹 빌기도 했다. 각서에 싸인에 복사까지 그걸 타임캡슐에 보관까지 해야 한다며 거드는 둘째 딸은 처음엔 심각하더니 나중엔 재밌다며 호들갑이었다. 여자만 셋이 있는 집안에서 영찬을 구원해 줄 아군은 없다. 딸들한테 당하는 수모도 겪으며 그렇게 인생 추락도 맛보며 지낸 것도 오래전 일이었다.
그 탓인지 한동안 재기를 꿈꾸지도 못한 채 파주 저수지에 앉아 낚시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영찬은 이때 낚시로 잡은 물고기와 소주가 유일한 위로였고 시름의 날을 보내면서 많이 아파했다. 삶의 의욕도 희망도 없어진 듯 몸도 마음도 앓는 환자가 되어 낯선 도시에 알 몸으로 서있는 느낌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시간이 갔다. 그림도 그려지질 않았고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게 귀찮아 지고 의미가 없었다. 이러다 사람은 자살도 하나보다 생각하니 눈물이 고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제대로 실감이 없다. 집에를 며칠 안 들어갔더니 아내가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 가지고 화실을 찾아왔다. 뉘엿뉘엿 해가 서산 마루에 짧게 걸릴때 우린 저수지 물가 옆에 먹다 남은 매운탕 재탕에 같이 소주를 마시다가 찾아 온 어둠과도 같이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무심히 세월만 갔던 40대 후반 이었다. 그때가 노무현 정권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구 영태가 죽었다고 문자가 왔다. 대학 동기이며 회회과를 같이 다닌 오랜 친구지만 최근엔 만나지 못하고 지냈었다. 영안실을 찾으니 과 동기들이 벌써 많이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망자 영태는 영정 사진속에서 활짝 웃으며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짜식들아 뭐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사냐? 나 먼저 간다!! ” 이렇게 큰소리치며 일어서서 손 흔드는 것 같다. 언제나 처럼 술자리에서 한참 마시다 먼저 일어나 손 흔들고 가던 그 모습이다.
아내와 딸 둘을 남겨 놓고 갔다. 영찬의 아이들보다 너댓 살은 어리다. 시집도 못 보내고 눈을 감다니 술값 미루듯이 애비 몫을 또 누구에게 미뤘는지 걱정도 없이 웃고 있다.
테이블에 앉으니, “야 영찬이 너도 운전 조심해 임마!” 상가 집 술이 제법 올랐는지 거칠게 한마디 하는 녀석을 보니 몇년 만에 보는 친구다. 영태가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차가 뒤집어져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140킬로를 밟았단다. 인생도 급하게 53세에 가버린 것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다들 취해서 서로 최근 근황을 묻고 그림을 때려 친 일부터 돈 털어 먹은 일, 다시 돌아 최근 미술계 일들을 얘기하다 다들 늦게 일어섰다.
“야, 임마 우리 간다!” “나도 조만간 갈 줄 몰라 마.” 취한 듯 현수가 영정을 보고 인사하듯 한마디 한다. “영찬이 넌 제네 둘 까지 맡아라. 니 딸 시집 다 보냈냐?” “형님 안 불른 걸 보면 못 보냈고만.ㅎㅎㅎ” 두 놈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지껄이다 멋쩍게 서있는 영태의 아내와 두 딸의 배웅을 받으며 상가를 나왔다.
사람이 죽을 때가 아닌 시기에 죽는 것 같이 생각되나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사람이 죽는 것은 그것이 그의 행복에서 필요한 때에 한한다고도 말 하는 이도 있다. 마치 사람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는 것이 그의 행복에서 필요한 때에 한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된다. 산다는 것은 희미한 세계에 대한 관계 같아서다.
또한 삶의 운동은 새로운 고도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기억나지만 우리 인생이 이럴땐 왠지 가엽고 허허롭기만 하다. 인간의 실체는 슬픈 컨셉으로 태어난 존재라고도 하지 않는가. 거리엔 초여름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상가에서 들은 소식 중에 이번 7월에 중국 베이징798 예술구에서 전시가 있다며 작품 출품해 보라는 권유를 생각했다. 내 그림이 아마 먹힐수 있을 것 같다는 덕중이의 멘트가 솔깃하게 다가왔다. 그래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이튿날부터 초청조건을 듣고 신청서와 작품내역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작품을 보내는 일, 숙소와 비행기 티켓 구매 등등의 일들을 같이 출품하는 윤군과 상의하면서 준비를 했고 작품들을 다시 손을 보면서 미리 보내려면 포장해서 운송까지 시간이 촉박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7월4일부터 2주간 “베이징 798예술제”가 열린다고 했다.
두 시간도 안 걸린 듯 이웃집 나들이 같은 비행 후 베이징 서두우공항에 내리니 날은 후끈 찌고 거리는 뿌옇다. 역시 악명 높은 잿빛 배기가스인지 황사가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이튿날 친구와 전시장을 찾아 도착한 작품을 챙겨 전시지시를 하고 잠시 기획자들과 미팅을 하고는 친구와 같이 베이징 덕을 먹었다. 이곳은 4년 전 아내와 같이 관광차 들려 오리구이를 먹었던 곳인데 별로 변하지 않고 맛도 그대로인데 가격만 배는 오른 듯 했다.
베이징 어느 지역이건 자동차 홍수 사람 홍수다. 4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보다 더 북적거리고 차는 더 많아 제대로 속도를 내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없어 보였다. 이 많은 인구와 차량 건물들이 과연 같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하루하루를 지낸 다는 게 잘 믿기질 않는다.
전시는 예상과는 달리 관객이 많지 않았다. 한여름 접어들은 더운 계절 탓도 있어서 인지 한국 일본 중국만의 삼국 전시여서인지 넓은 전시장 5관까지 있었는데 모두 한가했다. 2주간의 전시라 첫날과 2주의 마지막 날은 좀 붐비기도 했지만 단체 학생들과 일반인 관람객은 주로 오후 늦은 시간에 찾아 주었다.
중국사람들... 규모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인듯 하다. 이제 그들은 양적 팽창보다는 보편적 삶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게 됐는지 가치의 재창출이 이곳 문화기지란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길 기대도 해보고 싶다.
예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파고 드는 것 같다. 상업적이든 예술적이든.
베이징 동북부 조양구 798번지는 원래 뉴욕의 소호(SOHO)지역처럼 버려진 공장지대(군수기지 무기공장)였다고 한다. 2002년 공장 들이 철수하면서 남게 된, 60여만 평방미터에 흉물스럽게 방치된 빈 공간들을 9년 전부터 작업실이 필요한 예술가들이 찾아 들면서 이젠 그들의 작업공간으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화랑, 갤러리, 카페, 아트샆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의지구’ ‘문화명소’ 슬로건과 함께 베이징의 문화 아이콘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도 산업자본의 논리에 의해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예술가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 둘 씩 떠나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갤러리 패션샆 카페 레스토랑 호텔 편의시설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업 시설이 더 많이 늘어남을 지적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는 곳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곳 798 Art Zone에는 벨기에의 울렌스 미술센터와 미국의 페이스 갤러리등 300여개의 해외문화예술단체들이 입주해 있다. 매년 200만 명이 찾는 거대한 문화공간이니 만큼 오래 남아 주길 바랄뿐이다.
이번 전시에서 영찬은 또 그림을 팔지 못했었다. 친구의 작품은 소품 2점이 팔렸다. 다만 ‘페라리 자동차’ 현지 사장만이 유심히 영찬의 그림을 들여다 본 후 가격을 보곤 도슨트에게 명함을 주고 몇마디 질문이 있었고 다른 그림으로 발길을 옮겼었다. 또 고배를 마시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대학입시 같은 것에 낙방하는 기분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들인 공과 비용이 또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허탈하게 했다. 또 처제한테 오백을 빌려 간신히 충당한 것인데 빈손이라니, 아내와 처제 아이들 그리고 권유한 친구에게도 정말 면목이 안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이변이 생긴 것이다. 보따리 싸 가지고 서울로 돌아온 그 이튿날 전시장 운영위원으로 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림을 유심히 봤던 ‘페라리 사람’이 그림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작 3점이나 금액이 거의 2억이 다 되는 그림값으로 말이다. 대박이 난 것이다. 이제서야 영찬의 그림이 주인을 만난 것인가. 그림이 아직 그곳에 있고 돈은 통장으로 내일 들어 올 거라고 전화에서 알려준다.
이튿날 정말 돈이 들어와 통장에 찍혔다. 실감이 잘 안 나지만 그림이 팔린 것이다. 아내를 얼싸 안고 눈물을 다 흘리며 그날은 가족이 간만에 외식을 하고 들어 왔다. 꼭 그림을 팔아야 하기도 하는 절박한 이유도 있지만 안 팔리는 그림, 선택 못 받는 화가라는 따라다니는 굴레가 더 괴로웠었다. 털보 권영찬이가 중국 가서 대박을 쳤다고 그림쟁이들 사이에 알려지게도 됐다.
그림은 자신만의 표출이다. 이상과 혼을 담은 작품일지라도 작품은 의미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쉽게 표현도 되어야 할 것 같다. 예술은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감정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이어야 누구에게 어필 할 수 있고 사랑도 받을 것이다. 논리적 사상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하여 어떤 사상이 단순하고 간결하며 명료하면 명료할수록 그 사상을 전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간결하며 명료하다는 것은 예술형식의 최고 완성이며 그것은 탁월한 재능과 대단한 노력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본다.
요즘 권영찬은 하루하루가 즐겁고 왠지 살맛이 난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오래 쳐다보는 여유도 가져본다. 아는 분 청첩장을 받고 무수히 자란 털을 깎고 갈 것인가 그냥 갈 것인가 생각 중이다. 자신보다 윗사람이 부르면 깎고 가야한다. 털은 3일만 지나면 언제나 무성하지만 앞 이마는 점점 대머리 자리를 넓혀갔다. 어느새 머리통 중간지점까지 개간을 마친 듯 초토화 시켰다. 그곳에 나야 할 털이 아래로 죄다 모인 것인지 영찬은 못내 불만스럽다. 윗머리가 빠진 것은 잠자리에서 마누라가 하도 밀어내서 그렇게 다 빠진 게 아니냐고 친구 놈은 익살을 떤다. 또 한 녀석은 군대에서 대가리박기를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아버지 덕분인 것으로 유전 같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유전이면 영찬의 둘째딸도 큰 걱정을 한다. 자신도 요즘 머리가 조금 빠지는데 아빠처럼 되는 게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며 정말 그러면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이 딸이 요즘 시집간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일본에 공부하러가서 하라는 공부는 뒷전에 뒀는지 같은 과 일본 남학생과 사귀게 되어 그 아이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졸업반인데 임신이 되어 그쪽 부모들이 먼저 알게 되고 서둘러 식을 올리라고 한단다. 결혼하면 그곳 교토에 살면서 직장도 가질 계획이란다. 걱정과 우려를 하는 엄마 아빠의 심정은 자기가 다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터이니 걱정을 말란다.
졸업 전 결혼도 하기 전 임신은 영찬도 아내도 경험이 있어 할 말이 없다. 결혼 비용은 말도 꺼내기 전에 그쪽에서 다 부담을 한다고 하니 아무 걱정을 말라고 다행 아니냐고 의기양양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 결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부랴부랴 상견례를 하러 오사카로 아내와 같이 갔다. 참 그전에 신랑 될 ‘하라’군이 먼저 영찬네 집에 인사하러 왔었다. 직장도 결정이 되어 증권회사에 다닐거라고 했다. 그의 집안은 오래 동안 금융인으로 재직하다 은퇴를 한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다.
깨끗한 차림의 정장을 한 나이든 신랑부모가 호텔 로비까지 나와 영찬부부를 맞아 주었다. 신랑은 그 집안 막내로 3남매가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듯 했다.
일본말이라고는 ‘ 오갱끼 데스카?’ ‘스미마생!’ ‘와다시와 니혼고 와까리 마생!’정도만 아는 영찬으로서는 딸아이의 통역에 답변만 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예식은 3개월후 일본서만 먼저 치르기로 한 것이 대단히 미안하다며 일어서서 구십도 꺾인 인사를 노인이 영찬부부에게 하는 것도 보았다. 영찬은 준비 없이 이렇게 보내는 딸에게 미안한 생각만 들었다. 부모 노릇을 적당히도 못하게 하는 처사 같기도 하면서다. 적당히 상견례를 마치고 호텔객실로 와 오히려 죄송하다는 딸아이를 영찬은 한참 꼭 안아 주고 이튿날 돌아왔다.
다시 또 이제 초여름, 아파트 창문 밖 밤나무 소나무가 아주 천천히 윗부분만 흔들리고 있다. 지난겨울엔 앙상한 가지만 달고 있던 것이 연두빛 잎사귀가 드믄드믄 보인 때가 한 달 전이었는데 5월이 다 간 지금은 짙은 록색 잎사귀를 저마다 풍성하게 달고 작은 뒷산 전체를 덮고 서 있다. 다들 작년보다 키도 커졌고 줄기도 굵어졌다. 그 가지사이를 까치와 참새 또 다른 작은 새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기들 앞마당 인 듯 당당하다.
작업실 앞 저수지 너머엔 간만에 무지개가 떴다. 장마가 일찍 오려나 보다. 잦은 궂은비가 왠지 싫지 않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영찬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쉽게 볼 수 있는 느티나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닌 것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파리가 색갈이 달라지고 이 마져도 훌쩍 커지고 풍성해져 세상에 정말 변하지 않는 건 없나보다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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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음악이나 연극처럼 소위 말하는 예술이 그나마 그동안 영찬에겐 큰 위안이었다. 척박하기만 했던 자신의 삶의 질을 얼마만큼 높여 주기도 했다. 그 예술이란 단어는 때론 우리 삶에서 주로 허황되고 삶에 밀착되지 못한 것을 지칭할 때 쓰기도 하는 걸 볼 때도 있었다. “예술하고 있네.”주로 경멸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외면도 할지라도 이젠 소신도 가지며 자신 있게 지내볼 생각이다.
시집간 둘째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아빠! 안녕 하셔유---”
“ 짜식아, 왠일여?”
“ 그냥, 보구 싶어서ㅎㅎㅎ”
“ 왜, 힘든 일 있어?”
“ 아니야, ㅎㅎ 엄마한테 잘 해 주고 있는 거지?” 내가 조사해 보면 다 알어“
“ 그래, 짜샤 내가 요새 시장도 봐다 준다!”
“ 그건 기본이지.ㅎㅎ”
“ 언니는 좋은 소식 없어?”
“ 그래 임마, 니가 직접 물어봐라. 속 터져.”
“ 그래도 월급타다 엄마한테 다 맡긴다며.ㅎㅎ”
“ 그럼 뭐 하냐. 시집이나 빨랑 가라구 그래. 서른 둘여!”
“ 가겠지...우리 준이 보러 언제 올겨?” 3월에?“
“ 그래!” “간다!“
다들 이렇게 사나보다. 마누라 있고 자식 둘이 있어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고 복이 있는 거냐. 돈? 그거 자신하곤 인연이 좀 멀지만 가끔 그 돈이 추파를 보낼 때도 있지 않은가.
영찬은 다시 물감과 붓을 챙기고 그림을 그리러 화실을 찾는다.
내년도 전시 작품을 준비하고 기획하고 싶어져서다. 이제는 조금 이해하기 쉬운 구상 쪽도 섞어서 그리기로 했다.
2015년 6월20일
* 구상 ; 현실세계에 존재하여 눈에 보이는 여러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미술. (무엇을 그렸는지 그림의 대상이 분명한 것)
* 비구상 ; 직관이나 상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의 경향(무엇을 그렸는지 구체 적인 대상이 없는 것,구체적인 대상없이 조형요소 만으로 화면을 채운...)
* 추상화 ;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순수한 점, 선, 면, 색채 등 추상적 요소로 표현하는 그림.( 대상은 분명히 있는데 보는 이의 눈으로는 무 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림. 비구상하고는 전혀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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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글을 쫘아악 읽어 내려가보니 어쩜 우리 누구하고 비슷한 그런면이 많아서 한참을 남의일 같지않게 보았구먼 늦어도 파아란꿈을 안고 살면 언젠가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맡기고 살다보면,,,,
"타인의생활과 비교하지말고 그대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가끔씩 단비내리듯 영혼의비타민 잘 읽고 나갑니다~
바쁜 일상속에서도 또 한편의 작품을 탄생시켰구먼 글 올린 그 자체만으로도 성상이 너를본듯 반가워 내용은 아직 읽지도않고 댓글쓰고있네~~
내 차분이 읽어봄세
수고했네~~
필독 했슴다..
물 흐르듯 풀어나가셨슴다. 박수를!
부럽슴다.
다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씩 나아 지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쉽질 않네요. 위의 3분은 제가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수필집을 작년에 냈는데 못 드렸구만요. 가까운 시일에 우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다..항상 건강들 하시구요...
그래 꼭 보내주게 내 성상이 너를본듯 정담아 읽어보겠네~~
무조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