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80
12월2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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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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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khtT03uGdY (김택훈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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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순함, 소박함, 천진난만함, 순수함, 하느님 부르심에 즉각 일어설 수 있는 준비된 마음!>
오랜만에 예쁜 어린이들이 피정 센터를 찾아왔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 신앙 교육을 참 잘 시켰던가 봅니다. 아침저녁 기도, 미사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 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투박하지만 맑은 샘물처럼 순수합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도 압니다. 복잡하거나 계산적이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수 그 자체였던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을 지녔던 마리아, 사심 없는 마음의 소유자였던 마리아, 질그릇같이 소박한 마리아를 인류구원 사업의 첫 번째 협조자로 선택하십니다.
마리아의 언행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얼마나 단순한지 모릅니다. 조금도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전혀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천사의 알림 앞에, 크나큰 하느님 초대 앞에 조금의 자만심도, 우쭐거림도 없습니다. 솔직하고 겸손하게 그저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제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듣고 난 마리아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그 초대를 수락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당대 잘 나가던 예루살렘 귀족 가문의 딸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시골 처녀 마리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하셨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께서 선호하시는 삶의 유형은 마리아가 지녔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는 마리아가 지녔던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함, 소박함, 천진난만함, 순수함, 하느님을 향한 열린 마음, 하느님 부르심에 즉각 일어설 수 있는 준비된 마음….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간 쌓아두었던 서류들이며, 편지들, 잡지들,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다가 마음에 꼭 드는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ㆍㆍㆍㆍ)/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꽃잎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정일근, 쑥부쟁이 사랑)
시인께서는 '사랑하면 보인다'고 강조하셨는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을 의미할까요? 그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사랑, 하느님 중심적 사랑이겠지요. 흐리고 탁한 시선이 아니라 해맑은 시선, 꼬이고 꼬인 부정적 눈초리가 아니라 따뜻하고 낙관적 눈망울을 지닌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사랑말입니다.
청정한 시선, 공감과 경청,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 그런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볼 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 거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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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usGYPA0QX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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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준비가 안 됐는데 받는 은총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자를 잉태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이 은총은 성모님을 인간 중에 가장 복되신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이 되신 것은 성모님의 공로보다는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은총 자체’이신 분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은총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빠져나갑니다. 성모님은 의지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총을 하나도 잃지 않고 보존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에 그것을 보신 하느님께서 천사를 성모 마리아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작은 은총을 보존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실 큰 은총을 주는 것은 멸망으로 이끄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복권에 당첨되면 대부분 그들은 자신이 받은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춘기 어린 나이는 지금 받은 것도 관리할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19살의 나이에 143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마이클 캐롤은 그 많은 돈을 4년 동안 다 탕진하고 지금은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1983년 영국 노퍽주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통조림 공장을 했으며 아버지는 군인이었지만 마이클이 태어난 지 18개월 때 군사 감옥에 구속되었습니다.
그가 7살 때 부모는 이혼했고 새 아버지 밑에서 살았지만 새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괴로운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대 후유증으로 난독증이 생겼으며 중학교를 졸업했음에도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13살 때 절도 혐의로 감옥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복권에 당첨된 것은 19살 때 쓰레기 수거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짓눌렸던 삶에 보복이라도 하듯, 호수 근처의 고급 주택을 현금으로 구매하고 마약, 도박, 술에 빠지게 되었으며, 스포츠카도 여러 대 사들이고 하루에 4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하는 등 사치스럽고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 이모에게는 각각 10억 원씩 주었으나, 2017년에 그의 이모는 남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돈을 가진 그의 횡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으며, 술김에 싸움을 걸거나 차나 상점의 유리에 쇠 구슬을 던져 총 42개의 전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복권 당첨 4년 후인 2006년 모든 돈을 잃게 됩니다. 현재는 집도 없이 비스킷 공장에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를 받으며 빵을 포장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을 그릇이 되지 않았음에도 더 큰 은총을 받으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자신이 얼마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릇의 크기가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많이 받으면 그것은 자신을 멸망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미국에 2002년 당시 사상 최고 당첨 금액인 약 3천 600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잭 휘태커라는 사람인데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그의 가족에까지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순탄했습니다. 회사의 사장으로서 어느 정도의 재력도 있었고 딸과 손녀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권 당첨 8개월 후, 그의 자동차 유리가 깨져있었고 가방에 들어있던 5억 4천만 원의 현금이 도난당했습니다. 또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2명의 클럽 직원이 그에게 약물을 먹여 가방의 돈을 빼앗으려다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더욱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손녀의 남자친구(18세)가 약물 중독을 일으켜 잭의 집에서 사망한 것입니다. 3개월 후에는 손녀의 시신이 차 안에 버려진 채 발견됩니다. 살해범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둑이 12개 지점 은행에서 각각 12장의 위조 수표를 현금화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빼갔습니다. 손녀의 죽음이 있은 5년 후 그녀의 어머니, 곧 잭의 딸도 죽은 채 발견되었고 자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6년 12월에는 잭이 회사에서 일하던 중 집에 불이 나 모두 전소되었고 방화범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은총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물론 복권에 당첨되고 잘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복권에 당첨된 것을 알리지 않고 다니던 직장을 이전처럼 계속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이전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전에 받은 은총에 감사하던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아도 잘 관리할 줄 알지만, 이전의 삶에 감사할 줄 모르던 사람들은 그 작은 것들도 가질 자격이 없어서 더 큰 은총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은총을 독으로 만드는 이들의 특징은 삼구(三仇)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삼구는 불만을 자아내고 큰 은총을 받을 자격을 잃게 합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바로 이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프리 댐피어’입니다. 제프리는 1996년에 복권 당첨금으로 약 227억 원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50:50으로 돈을 나누는 조건으로 이혼합니다. 크리스탈 잭슨을 만나 재혼한 그는 오랜 세월 꿈꿔왔던 팝콘 가게를 시작했지만, 처제인 빅토리아와 불륜에 빠집니다. 빅토리아는 제프리에게 많은 돈을 뜯어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자친구와 함께 보험금을 갈취할 목적으로 그를 납치 살해합니다. 두 사람은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복권을 산다는 것 자체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절대 복권을 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현재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이기에 나중에 돈이 모여도 그 돈을 관리할 능력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가진 것에 먼저 감사하고 지금 주님께 봉헌하고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받은 은총을 잘 관리하여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습니다. 은총도 능력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은총 중의 은총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는 아주 작은 은총도 죄로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그 나무의 표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빈틈없이 금칠이 된 것과 같습니다. 금은 은총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성령으로 성자께서 잉태되시는 완전한 은총의 준비가 됩니다. 성모님은 감사로 당신을 겸손하게 하시어 어떤 교만의 틈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만이 그리스도를 잉태할 자격을 갖추신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셨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그의 몸이 썩어 내장이 터져 나오는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고 우리도 지금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모님은 불만족으로 은총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하와와는 달리 감사의 봉헌으로 완전한 은총의 그릇이 되셨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감사를 생활화하여 우리가 받는 성체가 멸망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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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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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 강생’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필리 2,6-7) 성모님은 ‘나중에’ 메시아가 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될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낳았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무슨 일이든지 당신의 일을 협조자 없이 당신 혼자서 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셨고,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는 일만큼은 당사자인 인간들이 협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인간들 자신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구원’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점 때문에도 인간들의 협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로 선택되신 분이고, 그 선택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함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6-33)
하느님께서는 왜 성모님을 선택하셨을까? 그것은 성모님이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때’였을까? 예수님께서 왜 ‘그때’ 세상에 오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이것은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성격의 일입니다.) 왜 ‘그곳’이었을까? 이스라엘, 갈릴래아, 나자렛 등은 우연히 선택된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신 곳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내고, 또 두 사람이 약혼할 때까지 기다리셨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기뻐하여라.”는 겉으로는 평범한 인사말이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선택에 ‘기쁨으로’ 응답하라는 권고로 해석됩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도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성모님하고만 함께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성모님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부각시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라는 말에서 ‘놀랐다.’는 ‘두려워했다. (무서워했다.)’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나타냅니다. (뒤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천사의 말도 ‘무서워하지 마라.’가 아니라, 그냥 ‘놀라지 마라. 당황하지 마라.’입니다.) 성모님이 놀란 것은 천사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4-38).”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지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의심을 나타낸 말이 아니라, 실행 방법을 묻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는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모님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협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바로 그 응답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종이니 어쩔 수 없이, 시키시는 대로 복종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랍니다.’ 라는 말입니다. 성모님이 원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은 성모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기쁨과 사랑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응답과 순종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성모님은 기도하고, 또 깊이 묵상한 뒤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천사가 성모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답을 들은 뒤에 떠나갔음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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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번개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친구가 왔을 때, 연락해서 모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주교님이 오시면 사제들이 모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약속은 없었지만 꼭 모여야 할 이유가 있으면 모이는 것입니다.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모인다고 해서 ‘번개팅’입니다. 한국에서 뉴욕으로 ‘희망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재단을 운영하는 가수가 왔습니다. 노래도 좋고, 의미도 좋고, 분위기도 좋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들 그렇게 번개 같은 연락을 받고 희망을 파는 사람들의 1890회 공연을 ‘장의사’에서 보았습니다. 공연을 하는 가수도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해 보았지만 장의사에서는 처음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고인과 이별의 아픔을 나누는 장례식장에서 희망과 사랑의 따뜻한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교통사고로, 전쟁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간직하고, 생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공연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던 마포대교에서 10년 동안 공연했다고 합니다. 역 앞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해서, 소록도에서는 나환우들을 위해서, 요양원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해서, 캄보디아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공연했다고 합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뉴욕에 사는 자매님이 가수의 노래를 들었고, 그 취지와 의미에 감동해서 뉴욕에서의 공연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뉴욕에서도 ‘희망을 파는 사람들’ 지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있으니 추운 겨울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노래도 좋았고, 중간 중간에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7년째 부산역 앞에서 노숙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년 전에 가족들과 처음으로 여행 간 곳이 부산이었다고 합니다. 부산에 도착할 무렵 교통사고가 났고, 10일 후에 깨어보니 아내와 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갔고, 본인만 살았다고 합니다. 가족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부산역 앞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돈도, 명예도, 능력도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옆에 있는 가족이 소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88세 노인이 작년에 하느님 품으로 간 할머니를 위해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60년 넘게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그립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와 노래가 어우러져서 진한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바쁜 가운데 번개팅을 주선해주신 하늘가족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주선하신 ‘번개팅’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일을 마리아에게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거냐고 이야기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니 가능하다고 전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선하신 번개팅은 마리아의 순명으로 아름답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계획은 나자렛 시골처녀 마리아의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운명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장소, 태어날 성별, 태어날 집안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운명처럼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는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으뜸 사도가 되었고,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희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번개처럼, 운명처럼 다가오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순명’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나의 순명과 숙명을 통해서 어둠 속에 빛을 밝히듯이 희망의 불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아! 곧 성탄이 다가오네요.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천사의 아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성전이 되셨으니 저희도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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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천사가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인사하자,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그러나 곧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놀람을 알고 말해 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엘리사벳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한 여인의 몸에 들어오십니다. 그 말씀은 세상을 위한 빛이었고 사랑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당황과 고뇌, 깊은 생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과 마음을 넘어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따르기로 합니다.
내가 품게 된 것에 물음을 던질 때 하느님과 대화의 물꼬가 트입니다. 마리아는 응답하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하다 보면 내가 품고 있던 질문과 하느님의 뜻이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맡겨지며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온전한 자유 의지가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 자유 의지로 이렇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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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동정녀 마리아는 아기를 가지리라는 천사의 말에 이렇게 수락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대답을 하기까지 마리아는 얼마나 깊게 고심했겠습니까?
만일 아기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앞날에 미치는 영향을 곰곰이 생각했더라면 도저히 승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가 받아들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보면, 황당하게 여겨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분들이 많이 있지요. 아브라함은 75세에, 낯선 땅으로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하느님 말씀을 따르다 보니, 결국 시련은 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너무나 많지요. 그래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분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치고, 더는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을 맞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일치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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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이것이 은총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천사 가브리엘의 알림대로 엘리사벳에 의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임신을 알렸던 천사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나자렛의 성모 마리아를 찾아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인사하며 이제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주님을 잉태하게 될 것을 전합니다. 바로 이 천사의 인사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가 바로 우리가 매일 드리는 성모송의 시작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기쁨에 넘쳐서 성모님이 될 마리아께 칭송을 드렸던 인사를 모아서 성모송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 마리아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이라고 칭송을 했고, 엘리사벳 또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다."고 찬미 드림으로써 복을 충만히 받은 분이라고 성모님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께 은총과 복을 청합니다. 어떤 은총과 복을 주십사고 청하고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거나 남들보다 한 50년은 더 살게 해달라고 청하십니까? 그런데 실은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더 살면 무엇하며 돈을 많이 벌면 무엇하겠습니까? 죽으면 다 놓고 가야하는 그것들은 복이 아니지요.
돈은 쓸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그 만큼 욕심이 많이 생기고 근심 걱정 또한 그만큼 쌓이게 됩니다. 하느님께 재물의 풍요를 은총으로 청하려고 한다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재산과 적당한 건강이지 넘치는 재산과 건강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하느님께 청해야 될 은총은 무엇이며 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떠한 변화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를 은총이 충만한 여인이라고 칭하는데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은총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은총을 받으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합니다. 항상 감사 드리는 삶을 살게 되지요. 삶이 즐겁고 결코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참 기쁨과 평화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써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재물을 얻어서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먹고 입게 되는 기쁨은 잠시 뿐입니다. 잠깐의 기쁨 후에는 고민이 생기게 되지요. 그것을 지키려고 애써야 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계속해서 흘러넘치기 때문에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재산이나 건강을 통해서 기쁨과 안정을 얻으려고 하지만 거기에서는 끝없는 갈증만 얻게 될 뿐입니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한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참 고요하지요. 그들은 후손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건강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잔잔하면서도 여유 있고 평화롭지요.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은총을 받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두 번째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건강을 잃을까, 자식이 어떻게 될까, 또 재산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30) 천사는 마리아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 잉태를 예고 받았을 때, 마리아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약혼자와의 관계, 부모와 이웃 사람들의 시선들, 또 그 당시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처형을 받는 장면 등이 순식간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러한 처지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알면 죽음 앞에서도 자유롭습니다. 바로 순교자들이 그랬습니다.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화와 사랑이 가득 찬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요. 이것은 비단 스테파노만이 아닙니다. 모든 순교자들이 다 그랬고 누구보다도 시련과 고난이 많았던 바오로 사도 역시 감옥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며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은총을 받으면 하느님께 순명합니다. 하느님이 첫째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에 다 순명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은총 없이는 순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순명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늘그막에 그토록 원했던 자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순명했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청을 아버지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모든 갈등과 이해관계를 넘어서 하느님께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불순종, 또 비판적인 모습들은 그들이 결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알면 불순종하거나 비판하는 모습 따위는 보일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대로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받아들일 수가 있지요. 그리고 이 세상보다도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은총이 충만한 성인, 성녀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은총을 하느님께 청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의 신심은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박복하게 살게 내버려두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은총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부수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은총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 없이 기쁨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차원 높은 삶을 선물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것이 바로 은총 받은 사람의 표징입니다. 은총 받은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 드릴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삶의 모습일 때 그 은총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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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원정학 바오로 신부님]
얼마 전 한통의 휴대폰 문자가 왔습니다. 물론 많은 문자 메시지 가운데 특별한 한통입니다.
‘저 냉장고 없어서 시집 못가요.’ 문자를 보는 순간 수년전 여러 차례 선을 보고도 시집을 못간 노처녀에게 술김에 ‘네가 시집가면 냉장고 사준다.’고 큰소리 쳤던 기억이 났습니다.
사람에게도 다 때가 있는지 만난 지 몇 개월 만에 뜬금없이 시집을 간다는 소리에 기쁨도 있었겠지만 모아둔 돈이 없는 저에게는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성당의 후배로서 또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지내기에는 너무나 진솔하고 편했지만, 그에게는 큰 결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잣대를 들고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능력은 있나, 나쁜 습관, 버릇, 사고방식 등등 이것저것 보다 보면 그만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낸 세월이 아마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한 번은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노처녀라 그런지 아파트 베란다에서 어머님과 가족들이 다 내다보고, 심지어 그녀의 조카들이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내려와 유심히 살피며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며 웃음을 짓기도 한지도 꽤 된듯한데 시집을 간다니... 다들 시집가면 이것 저것 사준다던 동기들은 다들 오리발을 내밀더라며... 믿는 건 신부님뿐 이랍니다.
요즘 냉장고 하면... 백만원이 넘는게 기본이라던데... 이리저리 모아 반값 정도 보내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혼자 살면서 모아둔 돈두 없나.’라고 면박까지 받았습니다. ‘혼자 사니까 그런 거 없어도 돼.’라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입니다.
아마 성모님은 더 황당하셨겠지요. 결혼이 낼 모랜데 임신이라니.. 그것도 누구 아이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는 상황을 겪어야 할 텐데..
하지만 루카 복음은 먼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의 성모님 잉태, 그리고 유명한 ‘성모의 노래’로 탄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황당한 사건을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미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사건은 구약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노년에 아이를 갖는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약속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즉 과거의 약속의 실현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다음에 이어지는 성모님의 동정 잉태 사건은 아직까지 없었던 새로운 사건이면서도 구약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즈카르야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묻지만 천사는 의심했다고 질책하기 보다는 엘리사벳의 사건을 말해주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즉 과거에도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신 하느님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다른 상황이 닥치면 금새 과거의 기쁨도 잊은 채 원망을 늘어놓기가 일쑤인데.. 성모님은 ‘예, 과연 그렇네요.. 전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받아들입니다.
저는 황당했던 일을 통해 생각합니다. 제 형편 뻔히 알면서도 꼭 냉장고를 사달라고 했던 마음을.. 냉장고를 열 때마다 상하지 않고 싱싱하고 시원한 것을 꺼낼 수 있는 기쁨과 ‘관계’라고 하는 기쁨이 더하여 있다고 하는 것을 배우게 해줬습니다.
성모님의 노래는 이 관계의 기쁨이 한층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없을 사건 속에 자신이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쁠까요?
저는 예수님의 탄생과 같은 사건은 다시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술김에 ‘뭐 사준다’는 얘기를 안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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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예고는 성전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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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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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마리아의 순명!>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결정적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부르심에 순명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느님의 전령(소식 전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마리아에게 전한 하느님의 소식은,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던 마리아, 남자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던 처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이 소식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될 이 모든 일들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듣고, "예!" 라고 응답합니다.
마리아의 이 결정적 순명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어머니요,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마리아를 사랑하고 공경합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도들은 이렇게 하고 있는 천주교를 "마리아교다. 마리아를 믿는 이단이다."라는 헛소리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한 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뿐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요,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할 뿐이고, 그분의 모범을 본받고자 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 내 차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따지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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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나는 온전히 나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홀로 나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그저 나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나에 머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나만의 나는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나는 나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이
나를 송두리째 품으니
나는 마침내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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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수많은 실험실에서 망각을 촉진하기 위한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기억을 깨끗하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내용이나 그 심상들만 지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트라우마에 빠지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이를 통해 충만하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는다면 어떨까요? 모두가 행복한 기억 속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살게 될까요? 저 역시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화끈합니다. 그러나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고 있기에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역시 우리의 과거입니다. 어두운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는 더 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자기가 살았던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립니다. 이런 예를 들어 봅니다. 산간 벽촌에 사는 철부지 10대 소녀에게 도사가 찾아가서 “너는 앞으로 대통령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다면, 소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0대이기에 결혼 자체가 너무나 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아기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낳게 된다고 하면, “뻥 치지 마세요!”라고 화를 내지 않을까요?
성모님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보다 더 큰 인물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간음죄는 너무나 큰 죄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는 벌을 받게 됩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갖게 되면 당연히 간음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깜짝 놀랄만한 어마어마한 소식이었지만 분명 피하고 싶은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일도 많은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냐면서 불평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의 반응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7)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하느님의 뜻이기에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에게도 피하고 싶은 상황이 계속 주어집니다. 지워야지만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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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라!!>
학창 시절에 “공부하라”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던 담임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저는 ‘공부 머리’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즉, 공부해야 하는 머리와 그렇지 않은 머리로 구분을 했었지요.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보니, 그런 머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공부는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물건도 계속 사용해야 길이 드는 것처럼, 머리도 멈추지 않고 계속 사용해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으며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올해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인권침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립니다. 여성은 복장의 자유도 없고, 또 취업의 불공평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여성은 교육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생각해 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전쟁으로 인해, 성별 차이로 인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땅에 묻어 둔 사람은 크게 혼나고 맙니다. 어떻게든 변화하는 방법은 공부입니다. 참, 학교에 가서 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가 바로 공부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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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곰곰이 생각하고 맡겨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 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사실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하셨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 18,13-14)
그리고 마리아의 그에 대한 대답도 확실 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진정으로 당신께 온전히 봉헌하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우리야).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 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도구로 쓰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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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고초려一顧草廬>
-주님의 간절하고 겸손한 사랑-
삼고초려三顧草廬, 옛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방문하여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한,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있게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유비의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초려의 간절한 마음에 감동하여 응답하여 나섰음이 분명합니다.
간절한 자가 승리합니다. 간절할 때 감동을 줍니다. 간절할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제 강론도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얼마전 대선을 앞두고 여당과 야당의 러브콜을 받고 갈등하던 모 방송인이 모당 대표가 집밖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어둔 밤 한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 간절한 마음에 감동하여 입당을 결행했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요즘 계속되는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오” 후렴에서도 교회의 구세주 탄생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念願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주소서.”
매 연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시작하여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로 끝나는, 일곱 연으로 이뤄진 제 자작 좌우명 기도시도 제 간절한 염원의 표출입니다. 늘 읽으며 간절한 염원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약한 몸으로 800km 2000fl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잘 마친 이들의 공통적인 이구동성의 결론 역시 '간절함'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하즈를 향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참으로 간절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전달하는 이사야입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이사야의 간절한 말씀입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간절한 자에게 그 마음을 여십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충실히 살고 있던 무명無名의 시골 처녀 마리아를 찾아 나선 간절하고 겸손하신, 눈밝은 주님이십니다. 마침내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 오늘 마리아를 통해 이뤄집니다.
여기서 깨닫는 바 남이, 하느님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보아주지 않는다 추호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밀은 없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보시고 알고 계시며 결국은 이웃도 알게 됩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마리아의 간절한 삶이 하늘에 닿아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이렇게 궁벽한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찾은 주님의 천사입니다.
여기서 착안한 감론 제목이 하느님의 일고초려一顧草廬입니다. 어찌 일고초려뿐입니까! 필요하다 싶을 때는 언제든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무수히 친히 당신 천사를 통해 우리를 방문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미 간절한 이들과 함께 계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간절한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간절함의 은총입니다. 간절할 때 주어지는 주님 기쁨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지입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경청敬聽의 사람, 마리아에게서 그의 충격과 놀라움이 능히 짐작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이 또한 마리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태몽胎夢입니다. 곧 이어 마리아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간절함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에, 사랑에 감동한 마리아의 지체없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에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과 마리아의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이 만난 것입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겸손할 때 마음의 순수요 여기서 샘솟는 열정과 지혜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간절함의 절정이 바로 아드님의 성탄이자 아드님의 부활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실화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700살에 싹티워 꽃을 피어낸 연꽃이 간절함의 염원을 잘 상징한다 싶습니다.
-‘2000년 5월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고려시대 유적지에서 연꽃 씨앗이 발견되었고, 나이를 측정해 보니 무려 700살!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씨앗들 열 개로 싹트기를 시도했다. 마침내 두 개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벌이 날아왔다. 지금은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으로 넓은 연못을 가득 채울 정도로 번성했다. 씨앗은 장장 700년 동안 자신이 싹트기에 꼭 맞는 조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희망을 거두지 않고 기다렸던 씨앗의 간절한 염원이 경탄스럽스럽다.’-(빛두레 2021.12.19. 대림 제4주일 4쪽)
바로 간절함은 이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인 성무일도 시편과 미사는 거의 모두가 참으로 간절한 찬미와 감사, 신망애信望愛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하느님을, 이웃을 감동케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이런 간절하고 겸손한 염원이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간절하고 겸손한 사랑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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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3YckBNjJQ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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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만나시는
가능성의
이야기가
사랑 가득
펼쳐진다.
가능성의
마음을
다시 만난다.
모든 가능성의
뒤에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
사랑의 방식은
가능성의
방식이다.
오늘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새로운
날이다.
새로움이란
불가능을
가능으로
어루만지는
성장의 멋진
시작이다.
이와같이
참된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게한다.
원망이 아닌
현실을
받아들인다.
껍질을 벗고
나오면
모든 것은
은총이 된다.
은총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오늘이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아닌
가능성으로
노래하신다.
복음서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가능성의
사람들이다.
가능성의
하느님께서
구원을 향해
앞장서
걸어가신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하는 지를
다시 만나는
기쁜 대림이다.
모든 기쁨에는
뜨거운 울림이
있다.
울림의 깊이는
사랑과
가능성의
깊이이다.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가능성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가장 좋으신
사랑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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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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