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시간을 갖기위해 다락방으로 올라가 글을 썼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에서 길은 할리우드 각본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9-1241)는 끼니도 거른 채 술 마시고 시만 써대는 자신의 집착이 병이 아닌가 걱정했다(‘詩癖篇·시벽편’).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읽은 당(唐)나라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 시에 마음의 위안을 얻어 다음과 같이 썼다.
✺ [漢詩 映畵로 읊다] 시인이란 숙명
늘그막에 득실 개의하지 않아 행동거지가 너그러워지니,
백거이를 내 스승으로 삼을 만하구나.
비록 세상에 빼어난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연하게도 병들어도 시 짓기 좋아함은 같구나.
백거이가 당시 벼슬에서 물러난 것과 비교해 보면,
내가 올해 시직하려는 때와 비슷하네.
老境忘懷履坦夷(노경망회리탄이),
樂天可作我爲師(낙천가작아위사).
雖然未及才超世(수연미급재초세),
偶爾相侔病嗜詩(우이상모병기시).
較得當年身退日(교득당년신퇴일),
類予今歲乞骸時(유여금세걸해시).
―자해 순화(自解 順和: 스스로 해명하다) 이규보(李奎報, 1169-1241·高麗)
백거이가 노년기 병고 속에 남긴 ‘병중시(病中詩)’ 연작을 따라 쓴 작품 중 한 수다(‘次韻和白樂天病中詩차운화백락천병중시’15수). 백거이는 자신이 병든 뒤 더 시를 많이 쓰는 것을 보니 전생에 시 빚이 있는 것 같다며 시를 자신의 숙명이라고 읊은 바 있다(‘자해自解’). 시인 역시 병이 들자 평소보다 시를 두 배는 더 좋아하게 됐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옛사람도 그러하다는 사실에 걱정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심지어 사직을 앞두고 병가를 낸 기간조차 비슷하다며 우연한 일치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다(병서幷序).
우디 앨런(Woody Allen)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년)에서 주인공 길도 자신의 현업과 소설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영화에선 시와 달리 자정의 종소리에 맞춰 자신이 동경하던 작가들의 시대로 타임슬립(Time Slip)을 해서 직접 과거의 예술가들과 만나 자신의 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타임슬립(Time Slip) :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서로 연결된 타임라인을 갖는다. 판타지 및 SF의 클리셰로,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집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스르거나 앞질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는 일을 말한다. 사고에 가까운 초상현상(초자연현상)이라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과는 구분된다.
✵우디 앨런(Woody Allen)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줄거리 :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큰 성공을 거둔 길은 마음 한구석에 소설가로서의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다. 그는 약혼녀 이네즈와 함께 그녀 부모님의 사업차 방문한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의 비 내리는 거리에서 낭만을 찾는 길과 달리, 이네즈는 화려한 파티와 쇼핑, 그리고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찬 친구 폴과의 만남을 더 즐거워한다. 서로의 온도 차를 견디지 못한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파리의 골목을 헤매던 길 앞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클래식한 푸조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선다.
그 차에 몸을 실은 길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1920년대의 파리였다. 그곳에서 길은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나고,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소설에 대한 조언을 얻는다. 매일 밤 12시만 되면 펼쳐지는 이 마법 같은 시간 여행을 통해 그는 20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예술작품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에게 원고를 교정받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를 만나며 환상적인 영감을 얻는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렇듯 주인공이 꿈에 그리던 위대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점차 현실보다는 과거의 화려함에 깊이 매몰되어가는 과정을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려낸다. 특히 과거의 뮤즈인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면서 길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 : 아드리아나와 사랑을 확인한 길은 그녀와 함께 1920년대보다 더 이전인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로 다시 한번 시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현재를 따분하게 여기며 르네상스 시대를 진정한 황금기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선망하던 1890년대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지만, 길은 비로소 "과거에 대한 동경은 현재의 불행을 외면하려는 일종의 부정"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홀로 현재로 돌아올 것을 결심한다. 2010년대로 복귀한 길은 바람을 피우고 있던 약혼녀 이네즈와 마침내 파혼을 선언하고 파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다. 비 내리는 파리의 밤, 센 강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위를 걷던 길은 이전 골동품점에서 만났던 점원 가브리엘과 재회한다. 비를 맞는 것을 개의치 않는 두 사람이 함께 빗속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끝이 난다.
✵심층적인 해석 : 이 작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노스탤지어, 즉 '과거의 황금시대'에 대한 환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시간 여행은 단순히 판타지적 재미를 주는 장치를 넘어, 모든 세대가 공통으로 겪는 '현실 부적응'과 '이상향에 대한 갈구'를 상징한다. 우디 앨런 감독은 길의 여정을 통해 어느 시대에 살든 삶은 늘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존재하며,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는 과거 역시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에겐 고단한 현재였음을 강조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현실을 도피하여 과거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비가 내리는 현재일지라도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길이 비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으며 가브리엘과 함께 걷는 선택은, 환상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껴안겠다는 성숙한 내면의 변화를 완벽하게 은유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명장면
https://youtu.be/qqp4ViKBvT4
영화는 한편으로 ‘과거에 살고 싶은 사람들’, 곧 이전 시대에 살았으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은 1920년대를 이상적이라 여겼지만, 그 시대 예술가들의 뮤즈인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가 진정한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과거에서 이상을 찾고 위안을 받았다면, 시인은 옛 시인으로부터 해답을 찾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던 백거이 역시 전대 도연명에게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백거이의 시를 통해 자신의 고민을 해소했던 것처럼, 백거이는 이전 시기 도연명의 시에서 자신의 좌절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效陶潛體詩효도잠체시’16수).
영화 속 길은 결국 상업 작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시인도 벼슬을 사직하고 앞으로도 시작에 몰두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시와 영화 모두 옛사람의 자취에서 갈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열망이 또 다른 나의 발견으로 귀결된 것일 뿐이다. 시인이란 숙명은 백거이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 유럽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귀족(부르주아), 상류층이 주축이 된 사회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했던 태평성대이자 휘황찬란했던 유럽 평화의 최고 전성기를 말하며 영국의 산업 혁명을 계기로 공장, 철도, 자전거, 자동차, 증기선, 열차 등 더욱 발전된 이동 수단의 출현 및 과학 기술의 혁신으로 크게 번영하고 제국주의가 대두되며 전 세계를 오로지 유럽만이 독점하고 주도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漢詩를 映畵로 읊다(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6년 05월 28일(목)〉, Daum∙Naver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