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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한 사람은 구텐베르크다.
그는 양피지에 성경을 찍는 방법으로 최초의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의 성경책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양피지에 46행을 찍은 것으로 1760년 마자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인쇄을 발명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그는 골패를 즐겼는데
어느날 골패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생각하다가
각기 하나의 도장처럼 된 이 골패를 순서대로 찍으면
글씨를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덜었다.
그래서 금은 세공업자 휴머리와 의논한 끝에
휴머리는 온을 대고 그는 기술을 제공하여 인쇄소를 차렸다.
그들이 인쇄한 성경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행이 뒤따랐다.
돈벌이가 되는 사업임을 깨달은 휴머리가
구텐베르크를 내쫓고 독자적으로 인쇄소를 운영한 것이다.
돈이 없는 구텐베르크는 서글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크게 낙심하여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구텐베르크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마침 마인즈의 시상으로 부임해온 아돌프 2세가
재능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살고 있는 구텐베르크를 적극 후원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구텐베르크 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동업자로부터 배신당한 고독한 천재 벤처기업가,
귀족적이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
그에 대해 상상한 그림은 얼마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진실한 것일까?
우리는 편견에서 벗어나 구텐베르크의 진정한 모습을 그려낼 수 없는것일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관점을 바꿔 봄으로써,
구텐베르크에 대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유럽 인쇄술이 탄생할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과 구텐베르크 관련
단편적인 기록의 분석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추정하고,
나아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42행성서’의 간행을 위해 필요로 했던
인쇄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구텐베르크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10여년간 거울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등 금속세공기술을 익혔다.
구텐베르크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쇄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포도압착기를 응용 개량한 프레스기의 발명
금속활자의 발명 인쇄용 프레스 기기에 적합한 인쇄용 잉크를 고안하고 개발했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를 정확하고
대량으로 주조할 수 있는 펀치로 찍힌 모형을 포함한 거푸집,
합금금속, 양조화제지 및 책 장정이나 포도주 압착에 사용되던
압착기의 인쇄 전용 압착기 개량, 아마씨유 등 기름으로 만든
유성 검댕잉크 등을 만든 업적이 있다.
그러니 이 중에서 구텐베르크의 진정한 업적은
이런 기술과 유성잉크 목판 인쇄기 사용을 모두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활자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고
활자 제작방식으로 주조를 채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1450년경 마인츠에 인쇄 공장을 세우고 면죄부 등을 인쇄했으며
3년 후 구텐베르크라고 불리는 42행 성서와 더 뒤에 36행 성서를 인쇄한다.
구텐베르크 성경 또는 42행 성서 마자린 성경 Mazarin bible 은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다.
한쪽에 42줄로 인쇄가 되어있어서 42행 성서라고 불린다.
이 42행 성서는 구텐베르크 혁명 인쇄된 책의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이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대소문자와 약어 복합문자와 마침표 등 총 290개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활자조판을 위해 적어도 10만개의 활자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생전에 42행 구텐베르크 성서는 180부가 인쇄되었으나
현재 전해지는 남아잇는 실물은 48부이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유네스코 등재년도는 2001년이다.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한다.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납과 안티몬,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형틀 및 주조기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형틀이 망가지더라도 펀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제작이 가능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활자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 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450년 경에 인쇄기를 발명하고,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42행 성서는 1455년에 간행된다.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 가량을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구텐베르크는 1397년이나 1398년이 태어났다.
유럽에서의 교육은 8세기말부터 수도원과 교회가 담당하였다.
12세기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법전이 발견되어 법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체계가 부활되어 논리학, 신학 및
그 밖에 학문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아라비아 수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수학이 유입되었다.
이와 같이 학문에 대한 자극이 컸으며, 학구열이 팽배하게 일어났으나,
종래의 수도원과 교회학교에서는 이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에 대학이라는 새로운 교육시설과 제도의 대두는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12세기말경에 이탈리아의 볼로냐, 프랑스의 파리와 몽펠리에,
영국의 옥스퍼드 등지에 처음으로 대학이 창설되었다.
1209년에는 옥스퍼드의 일부 학생들이 케임브리지에 대학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대학이 생겨났으며,
1347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대학,
14세기에 오스트리아에 빈대학이 설립되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독일은 약간 늦은 1386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창설되었다.
1400년까지 유럽의 대학은 약 50여개에 이르렀고,
학문과 연구의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14세기 수도원의 서적문화는
종이와 목판인쇄술 등 새로운 기술과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지적 움직임을 통해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
르네상스운동은 인간의 교육 능력에 대한 믿음 속에서
고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고전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하여 결국 서적의
생산이 그 수요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 유럽의 첫 제지공장은 1390년에 제조업을 크게 하고 있던
울만 슈트로머 ( Ulman Stromer ) 에 의해 뉘른베르크(Nuremberg)에 세워졌다.
구텐베르크 가문과 출생15세기 초에 구텐베르크의 가문은 마인츠에 살았으며,
호프 춤 구텐베르크(Hof zum Gutenberg)에서 거주하였다.
그의 부계는 겐스플라이쉬(Gensfleisch) 가문6)의 구성원으로
선조들은 모두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장과 영지에서 나온 농업 수입과 자금, 현물, 의류도매권의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그의 아버지 프리엘레 겐스플라이쉬(Friele Gensfleisch)는
마인츠의 부유한 식료 잡화상의 딸인 엘제 비리히(Else Wirich)와 1386년에 재혼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자녀로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쉬 줌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m Gutenberg, 1400?~1468)가 태어났으나,
구체적인 출생연도와 출생지를 알 수 없다.
후에 요하네스(Johannes)라는세례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삶에 대해서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는
1427년에 생산된것으로, 구텐베르크와 그의 형 프리엘레 앞으로
연금을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수취인들의 직업이나 거주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나, 구텐베르크가 마인츠 시에 거주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1428년에 구텐베르크 역시
길드와 귀족간의 정치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길드와 귀족간의 싸움은 연금을 과도하게 매매하여 마인츠시가 부채
를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1428년에 구텐베르크 역시 길드와 귀족간의 정치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길드와 귀족간의 싸움은 연금을 과도하게 매매하여
마인츠시가 부채를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길드 협의회는 귀족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함으로써 이 난항을 극복하고자 했다.
길드 협의회는 귀족들의 세금 회피를 막기 위해
공민권 박탈과 연금 지불을 중단함으로써 귀족들이 10년 동안
마인츠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협박을 받은 귀족들은 이에 반대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구텐베르크도 이때 마인츠를 떠났다.
구텐베르크의 이주 원인은 대주교 콘라드(Konrad) Ⅲ세의 1430
년 3월 28일자 “화해 조정문”에서 확인된다.
대주교가 작성한 협정 초안은 길드와 귀족간의 권력 균형을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귀환 허가 명단에서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는 마인츠에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텐베르크는 1434년 경에는 스트라스부르에 거주하고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약 2.5km 떨어진
성 아보가스트(St.Arbogast) 수도원 인근에서 살았다.
강 언덕에 위치한 수도원 인근 지역은 구텐베르크가 활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는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웠으며,
기술적인 실험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물을 다루는 일은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어 도시보다는 강 인
근의 작은 마을이 안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불
법적인 화폐 주조를 막기 위해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일은 금지되었지만,
금세공인 길드만은 예외로 대장간 운영이 허가되었다.12)
구텐베르크의 사업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드리첸(Dritzehn) 소송의 문서가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1438년 구텐베르크는
아헨(Aachen) 성지순례용 반사경13)을 생산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의 귀족 한스 리페(Hans Riffe)와 사업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반사경의 생산량은 스트라스부르를 통과하는 수천 명의
순례자의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구텐베르크는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고 대량 생산하고자,
안드레아스 드리첸(Andreas Dritzehn)과 안드레아스 하일만(Andreas Heilmann)을
주주로 영입 하였다.
한스 리페와 구텐베르크는 자신들의 노동력과 견습 수수료와 자본 출자를 위해서
각각 80 굴덴을 내놓았다.
순례 반사경은 1438년 내내 생산되었다. 안드레아스 드리첸은 노동력과 돈을 투자했다.
인쇄소 운영
1444년 이후 구텐베르크의 이름은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고, 1448년 10월 이전까지는 마인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1444년 구텐베르크가 스트라스부르를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이 기간에 해당하는 기록이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구텐베르크는 1448년 10월에는 마인츠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놀드 겔투스(Arnold Gelthus)가 구텐베르크를 대신해서 150 플로린의 빚을 얻었는데, 자신의 재산과 수입을 저당으로 잡혔다.
차관 계약에서는 겔투스가 빌린 돈은 구텐베르크를위해서 사용된 것이며,
구텐베르크가 이 돈의 원금을 상환하고 이자를 갚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구텐베르크가 인쇄소를 차리기 위해서 돈을 빌렸으며,
여기서 최초로 인쇄가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는 1448년까지는 인쇄기를 만들었으며,
아마도 여기서 27행의 도나투스(Donatus), 시빌(Sibyl)의 예언과 터키달력을
고딕 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인쇄의 시작
1449년 후반에서 1450년 전반기에 구텐베르크는 자금이 필요하여 마인
츠의 부유한 사업가 요하네스 푸스트(Johannes Fust)를 사업 파트너로 맞
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푸스트로 부터 총 800 굴덴이라는 거액을 빌리고,
푸스트는 담보물로 인쇄기를 받아들였다. 2년 뒤 푸스트는 추가로 800 굴
덴을 투자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구텐베르크와 푸스트의 합작인쇄소는 아마도 성경 발행에만 제한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1,286페이지 분량의 책이 인쇄되었는데,
이 책이 42행성서(42-line Bible) 이다.
-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된 42행성서는 라틴어로 구약과 신약성서로 본문이 42행, 2
단으로 구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본문의 검은 부분은 검정 잉크를 사용하고, 붉은
색과 파란 색은 각각 색깔의 잉크를 칠한 후 조합하여 인쇄한 것이다. 머리글자
((initial)와 삽화는 후에 소장자의 취향에 맞게 화공들이 각각 채색하였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성서는 머리글자와 삽화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은 유럽에서 금속가공 기술이 아주 빠르게 발전하던 나라였다. 구텐베르크는 기술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작업했다. 책을 한 권 만들려면 상당히 비슷한, 대게 똑같은 모양의 'A','E','O' 등의 활자가 많이 필요하다. 한 쪽에 수백 개의 'E'가 들어가니, 반복적으로 활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주조된 수백 개의 금속활자는 새겨진 철자만 다를 뿐 높이는 동일해야 했다. 활자의 높이가 서로 다르면, 활판을 짜서 압착할 경우 종이가 찢어지기 때문이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160~180부가량 인쇄됐는데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48부 정도다. 전체의 4분의 1, 즉 30~45부는 5000여 장에 달하는 송아지 가죽(vellum)으로 제작했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은 약 10부가 남아 있다. 나머지를 찍는 데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고급 종이 약 20만 장이 들어갔다. 책값은 30길더였다. 당시 사무원의 3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고가였다.
1454년에 프랑크푸르트 무역박람회에서 구텐베르크와 푸스트는 인쇄한
자신들의 성서 한 첩을 선보였다.
시에나의 주교로서 장차 교황이 될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푸스트와의 법정소송
1454년에 푸스트와 구텐베르크 사이에 의견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5년 봄에 푸스트는 즉각적인 차용금 상환을 요구하며
구텐베르크를 마인츠시 법원에 고소했다.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계약대로 이자를
갚지 않고 있으며, 기금을 착복했다는 내용이었다.
1455년 11월에 푸스트가 위임한 공증인 올리히 헬마스페르거가 작성한 문서에 의해
분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1455년 11월 6일 법원이 요하네스 푸스트에게
선언하라고 지시하여 작성되었는데,
푸스트는 증인들 앞에서 자신이 이자를 직접 지불하게 된 돈을 구텐베르크에게 빌려주었다고 맹세했다.
위키백과에서는 패소 이후
구텐베르크가 인쇄기 및 인쇄술의 특허권을 배상금과 이자 대신으로포기했다고 나온다.
판결에 따라 구텐베르크-푸스트 공동의 인쇄소는 1455년에 해체되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소송이후 1457년 공증인의 문서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것으로 보아 마인츠를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57년 이후 정기적으로 스트라스부르에 대출금을 갚은 것으로 보아
재정적 궁핍을 받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458년 10월 구텐베르크는 인쇄소를 다시 운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 왕 찰스 7세는 절단공(punchcutter)인 니콜라우스 옌센(Nicolaus Jensen)을
그에게 보내 새로운 기술을배우게 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계속적으로 인쇄소를 운영했다는 증거는 터키 달력(1454),
여러 도나투스(Donati, 1454~1463사이),
터키 불레(turkenbulle, 1456~1457)로 유명한 사혈(瀉血) 달력(adelosskolender, 1456),
소위 터키 교황의 칙서(Cisiaianus,1456~1457), 천체 달력(1458),
기도하는 오라티오 레스피체(Oratio respice, 1458),
로마 지방 교회의 이름이 있는 프로방스 로마르툼(Romartum, 1458년 경) 등이 있다.
그리고 성경의 재판 인쇄로 새로운 활자형이 만들어 졌으며,
1460년에는 36행성서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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