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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역사추적]
지극히 지엄하고 지극히 존엄한 분께 올리는 음식 수라. 그런데 수라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 한 가지가 숨어 있다. 조찬소, 선조가 마련한 연회를 그린 기록화다. 그런데 특이하고 낯선 풍경, 남자들이 부엌일을 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조선의 남자들 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풍경일까.
수라간의 비밀,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나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요. 성리학의 나라, 남성 중심의 나라, 여성들에겐 질투를 금하고 말이 많다고 해서 아내를 쫓아내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헌데 이런 조선에서 그것도 임금이 마련한 연회에서 남자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처럼 그 당시 남성들이 궁중잔치에서 팔을 올리고 요리를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이 작품 조찬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궁중에서 수라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그 역사부터 추적해보겠습니다.
궂은 궁궐 창덕궁, 그곳에선 어떤 요리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중 음식의 연구와 보건에 힘쓰는 곳 궁중음식연구원. 중요무형문화재 한복려씨가 12첩 반상을 재현하고 있다. 꿩은 겨울철 수라에 자주 오르던 장풍, 꿩 대신 닭이란 속담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조림이나 구이로 자주 먹었고 매 응방을 설치해 꿩고기를 조달하거나 함경도 등지로부터 진상케 했다. 숭어는 수라에 가장 많이 올랐던 어류다. 10월부터 2월까지가 제 맛인데 그 중 얼음을 깨뜨리고 잡는 동수어1)를 으뜸으로 쳤다.
한복려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문으로 하면 이게 빼어날 수자를 써서 ‘수어(秀魚)’라고 합니다. 수어라는 것은 가장 으뜸인 생선이라고 해서 그때 당시에는 숭어가 가장 맛있는 생선으로 여겼습니다.”
살이 짤 져서 여러 가지 요리가 가능한 숭어는 주로 어포나 만두 속, 혹은 살짝 익힌 수채인 어채로 많이 먹었다. 살에서 수박 형이 나는 은어, 은고라고도 불렸던 은어는 크기가 작아서 회나 구이로 주로 먹는다. 풀잎 같이 얇게 저며야 맛이 산다는 동아요리, 동아는 궁중에서 가장 많이 쓰던 겨울 채소였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기 어려운 재료가 됐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왕의 수라가 만들어졌다.
기본 밥상인 대원반과 숭늉 등이 올라간 소원반, 그리고 즉석에서 끊일 전골재료가 준비돼 있는 책상반까지. 궁중에서만 올리던 상이었다던 12첩 반상. 오직 임금만을 위한 상이다.
한복려 씨.
“수라12첩이라는 것은 9란 숫자가 최고로 많은 숫자에요. 거기에다가 궁이라는 데는 별식을 갖다 항상 만들어서 하니까 별찬을 갖다 3개 정도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12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리법이 겹치지 않고 재료가 주재료죠. 겹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이 조리의 상의 구성입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 궁중음식의 맥은 한희순을 통해 전수될 수 있었다. 13살에 덕수궁 주방나인으로 들어갔던 한희순, 이후 주방 상궁이 되어 고종과 순종의 수라를 담당했다. 그리고 한희순을 마지막으로 끊길 번했던 궁중음식의 계보는 다행히 황혜성에게 이어졌다.
“순종이 돌아가시게 되니까 또 가서 3년 상을 능에서 보내시고 오셔가지고 또 윤비를 모시되었죠. 그러는 동안에 황혜성 선생님이 도중에 1950년도 후반에 가서 낙선재를 드나 시면서 한희순 상궁을 만나서 수업을 받으시게 된 거죠.”
황혜성씨가 재현했던 모습, 상궁들이 거들고 있다. 마지막 상궁 김명길의 에세이 <낙선재주변>. 여기엔 그 시대의 수라간 풍경이 세밀히 묘사돼 있다. 낙선재 주변에 따르면 수라상은 주방 상궁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궁중의 잔치인 진연 때에만 대령숙수라고 불리던 남자 조리사가 거들었다.2) 상궁들이 일하는 수라간은 내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퇴선간이라는 간이 부엌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3)
국립고궁박물관엔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했던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도금한 은제 찾잔, 고종이 커피를 마실 때 썼다. 은으로 된 식기도 많은데 뚜껑이 있는 밥그릇인 바리나 주자가 눈에 띤다. 그리고 수라간의 현판, 경복궁 수라간에 걸었던 편액이다. 수라간 그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정궁이었던 창덕궁, 조선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왕비가 거쳐하던 대조전,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수라간 역시 화재로 소실됐기 때문에 경복궁 건물을 뜯어서 복원했다. 대조전 옆, 왕비의 수라를 만들었던 수라간, 1920년에 지은 최초의 현대식 부엌이다. 현대식 부엌답게 이곳엔 오븐이 남아 있다. 연탄을 사용하는 오븐이다. 또 그릇을 올려놓았을 찬장도 있다. 나인과 상궁들로 분주했을 수라간. 수라상엔 상궁들의 손길이 배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수란기 혹은 수란뜨기라고 불리는 조선시대 전통조리 기구입니다. 마치 국자 셋을 묶어 놓은 것처럼 생겼죠. 이 용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수란기는 궁중에서 사용을 했던 계란 반숙기입니다. 그러니까 달걀을 깨서 수란기에 담고 펄펄 끊은 물에 넣으면 흰자만 익고 노른자는 익지 않아서 반숙으로 먹을 수 있게 조리가 됩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수라상을 차리는데 사용했던 이 수란기, 앞서 보신대로라면 상궁이나 나인처럼 여성들만 사용을 했겠군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자들이 부엌에서 계란을 깨고 조리해서 이것이 식기 전에 종종걸음으로 상 위에 올렸겠죠. 이런 광경이 쉽게 상상이 되십니까. 조선시대에 남성들이 이렇게 요리를 하는 게 가능했을까요.
벼락 치던 그날 희한한 사건이 터졌다. 수라간에서 수라를 차리던 두 사람이 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수라를 준비한 이들이 나인이나 상궁이 아니다. 각색장이라 불리던 요리사다.4) 남자들이 요리를 하는 그림 조찬소를 다시 뜯어봤다. 조찬소는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중 한 장이다. 선조가 마련한 잔치 경수연이 1605년 4월 9일 삼청동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경수연,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다. 독상을 받은 문무대신들에게 여자들이 시중을 들고 있다. 임진왜란 후 전후복구를 마치지 못해 풍악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예외로 허락하지까지 했던 특별한 잔치.5)
주영하 연구처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그림 같은 경우는 선조 임금이 직접 지시를 해서 하는 행사기 때문에 비록 임금이 참여하지 않지만 또 재상들을 위해서 임금을 대신하는 그런 집단들이 이제 행사를 준비한 것이죠. 그래서 왕실의 공식적인 연회라고 보아야 합니다.”
(1-17, 1-18)야외에 간이로 설치된 부엌에는 여자들의 모습이 단 한명도 보이질 않는다. 조리사들은 모두 남자, 가마솥을 걸고 요리를 하는 사람도 항아리에서 아마도 술을 뜨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도 그리고 고기를 다루는 긴 칼을 든 사람도 모두 남자다. 연회 이외에는 남자 조리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1903년 고종이 머물렀던 함녕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수라의 生紅蛤에 모래가 섞여 들어가 그걸 먹은 임금의 이가 생했다는 것이다. 옥채를 손상시켰으므로 문책은 당연한 일, 그런데 처벌받은 이름이 모두 남자들이다. 수라를 만들던 남자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왕의 요리사는 정말 남자였을까. 무자진자의궤에서 단서를 찾았다. 무자진작의궤는 효명세자가 마련한 어머니 순헌왕후를 위한 생일 연회 기록이다. 지난 10월 창덕궁 연경당에서 복원된 진작례 180년 전의 연회가 같은 장소에서 재현됐다. 진작례 복원 공연은 철저하게 무자진작의궤에 따라 효명세자가 직접 안무한 춤도 의궤에 그림대로 무대에 올랐다. 연회상도 마찬가지 잔치가 끝나면 신하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배임상도 마련됐다. 이날의 음식은 누가 만들었을까. 진작례 음식을 준비한 책임자는 사옹원의 김사목이라는 남자다. 그리고 이어 백대봉과 이완근도 있다. 모두 남자다. 갖은 기교로 정성껏 마련했을 왕후의 생일상. 수라간엔 남자 요리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증거로 조선시대의 남자들이 궁중에서 요리를 했다고 이렇게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수라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 남자도 일부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죠. 단순히 그뿐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부엌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가능했다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우린 수라간이라는 곳을 속속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0월 12일 정조의 화성행차재현, 행차는 성대했다. 1795년은 정조재위 20년과 사도세자,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겹친 해였다. 이날의 모습이 정조대왕 화성행행도라는 기록화로 남아 있다. 행렬의 선두에는 우의정 체제공이 앞서고 그 뒤로 무려 6천명에 달하는 수행원과 788필의 말이 뒤따르고 있다. 그 중 정도를 위한 말과 가마도 보인다. 국력을 총동원한 조선 최대의 국가적인 행사 게다가 1박 2일이 걸리는 거리. 출발당일에 화성 도착이 어려웠음으로 시흥에 임금이 하룻밤 묵어갈 행궁을 마련해야 했다. 시흥참이다.
7박 8일의 일정을 세세히 기록한 의궤의 찬품조 중에 정조에게 올린 수라 목록이 7첩 반상엔 팥물밥과 명태탕이 올랐다. 정조에게 올렸던 수라상을 재현해 봤다. 1795년 2월 15일의 아침상이다. 그날 정조는 적두수하추라고 불리는 팥물밥을 받았다. 팥물을 내리 섞어 일인분 용 곱돌솥에 한 밥이다. 조선 최대의 행사였던 화성행차에서 정조는 어떤 수라상을 받았을까.
정조의 7첩 반상, 의외로 소박하다. 한편 같은 날 혜경궁 홍씨의 저녁 수라는 정조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전복조림, 꿩적, 소꼬리적, 연어알젓 무려 18첩 반상을 받았다.
김상보 교수 대전보건대학 전통조리과
“일상 식에는 고기를 먹어도 돼지고기나 꿩고기, 닭고기 정도이고 소고기는 거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 소고기를 먹었으냐 하면 뭐, 임금 재위 40년 또는 대왕대비 왕 70살, 이러한 경사스러운 날에 대비해서는 연회를 열 때 그럴 때에는 소도 몇 마리 잡고 많은 음식을 차려서 신하들에게 왕의 은덕을 베풀고 대왕대비의 덕을 베풀고자 하는 뜻에서는 이제 소도 잡았습니다만 보통 일상 식에서는 굉장히 검박하셨습니다.”
임금의 수라를 만들던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떤 곳에서 요리를 했을까.
동궐도6),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각 건물의 명칭은 물론 나무 한그루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장독대가 창덕궁 경춘전 서쪽에 가지런하고 그 아래에 소금창고도 있다. 그리고 우물 가까운 곳에 수라간이 있다. 왕비가 거쳐하는 대조전 바로 곁에 작은 수라간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한참 아래에 또 다른 수라간이 있다. 제법 큰 규모다. 조선시대에 수라는 이조 산하의 司饔院이 맡았다. 사옹원은 대전, 왕비전, 세자전의 수라간을 모두 책임졌다. 그리고 왕의 수라는 사옹원이 중심이 돼 내시부와 내명부가 함께 참여했다.
최고 책임자는 종2품의 상선내시였다. 술과 차를 맡았던 상온과 상다, 사옹원 총책임자인 제거(정3품)가 그 밑에 있고,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식과 주방장 재부, 부주방장 선부가 그 아래에 있다. 종9품의 조리사들 밑엔 별사옹을 비롯한 각색장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다. 탕수색은 물을 끓이는 사람이었고 炙色은 고기를 굽는 사람이었다. 飯工은 밥을 짓는 이었고 泡匠은 두부만 만들었던 사람으로 세세하게 분업화 돼 있었다.
김상보 교수
“궁중음식은 굉장히 섬세하고 손이 많이 가고 또 지엄하신 임금님이 잡수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분업화 됐다고 보고요.”
조찬소를 다시 살펴보자. 술을 담당한 주색, 고기를 굽는 적색, 밥을 담당하는 반공, 고기를 다루는 별사옹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주방장인 인부나 팽부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궁안엔 약 400명의 남자 요리사가 2교대로 요리를 했던 것이다.7)
김상보 교수
“출퇴근 하던 자들로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퇴근하면은 비상시에 임금님께서 요청하실 때 음식을 만들어 올릴 그런 숙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대령숙수는 밤에 항상 대기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올리도록 준비시킨 자들이 되겠습니다.”
수라간은 철저히 세분화 된 그리고 전문성이 강조된 곳이었다.
수라간은 상당히 분업화와 전문화 된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점은 남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상궁이나 나인들. 그녀들은 그럼 어디서 뭘 했던 것일까요. 혹시 수라간을 주도적으로 관리했던 것은 여성들이 아니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남녀가 같은 공간에 섞여서 일을 했을까요.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봉수당에서 1795년 회갑연이 열렸다. 8첩 경풍 화성행행도에는 봉수당에서의 당시 진연모습이 묘사돼 있다. 10여 가지 음식의 궤임상과 독상을 받은 대신들, 그리고 시중을 들고 있는 여자들과 한창 공연 중인 무희들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 최대의 이벤트답게 잔치 뒤에는 대대적인 포상도 잇따랐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상전에 기록이 있다. 공적에 따라 수령에 임명되기도 하고 말 한필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역시 요리를 하고 상을 받은 사람들은 이춘귀, 이해우라는 남자들이다. 그런데 수라뿐 아니라 심지어 나인들의 식사까지도 남자들이 맡았다.
김상보 교수
“일상식, 연회식, 제사식으로 나누어서 분담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수라차지 또는 진지차지 또는 숙수, 또는 취반군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물론 전부 남성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음식을 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수라간의 여자들은 없었던 걸까. 세종시절에 발급한 노비들의 출입증 기록을 살펴보니 남자가 대다수였고 여자는 몇 되지 않는다.8) 그 합은 남자가 376명, 여자가 12명이었다.9) 경국대전을 보면 좀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데 요리를 맡은 사람들은 문소전, 대전, 왕비전, 세자궁으로 나뉘어 4백여 명이 배치돼있다.
김상보 교수
“남녀 성비가 대개 14.2대 1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14.2명, 여자가 1명이 되구요. 여성들의 역할은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든가 또는 불을 밝히는 일이라든가 그런 간단한 일만을 맡겼고 주로 남자노비들이 다 일을 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수라상궁은 누구인가. 1895년 조선 고종 때 궁녀들에게 지급했던 월급명세서를 살펴보았다. 분명히 소주방 즉 수라간에 홍상궁과 진상궁 등 여자들의 명단이 올라가 있다.
주영하 연구처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나인들은 서빙이거든요. 그러니까 음식을 배선한다고 그러는데 만들어진 음식들을 차리고 그 다음에 그 음식들을 왕한테 올리고 그 다음에 설거지를 하고 예를 들어서 그런 종류의 일들을 했기 때문에 수라상궁인 것이죠.”
남자들이 요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조찬소. 이곳은 조선시대에 아주 당연했던 풍경이었다.
주영하 연구처장
“각종 음식을 하는 과정이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고요. 그게 남자들이 또 주역을 받고 있는 그런 모습을 이제 그려 놓았죠. 이것은 경국대전 이후에 우리가 알고 있듯이 궁중의 주방장 혹은 요리사가 남자였음을 증명한 유일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실의 궁중 요리를 남자들이 맡았던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중국을 비롯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선 음식을 나르는 일까지 남성이 맡았음을 기록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시아뿐만이 아니다.
주영하 연구처장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나왔을 때 저한테 일본에 있는 교수들이 몇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서 저한테 문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진짜 대장금이 사실이라고 하면 전근대의 왕조국가의 왕실 시스템에서 보면 굉장히 특이하다는 것이죠.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중국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이탈리아나 프랑스나 남자들이 주로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요리를 담당했죠.”
수라간은 남성들이 주도한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참 이상합니다. 여자들의 손길이 훨씬 더 섬세할 것 같은데 왜 구지 남자들에게 요리를 맡겼을까요. 게다가 반가에선 여자들이 요리를 했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남자가 부엌을 드나드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데 당연히 조선시대 궁 안이라면 더욱 보수적이고 더욱 엄격하지 않았겠습니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간 이유 과연 뭘까요.
서울시내 한 호털의 주방장 문문술씨, 최근 올해의 명장에 선정되기도 한 문문술씨는 서양요리가 전공이지만 한식에도 일가견이 있다. 문문술씨는 호텔주방 경력 20년에 전 청와대 주방장이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 청와대 주방에 남아 있었다.
“아침에 구매를 해오면 경호실이라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검시관이 따로 있는데 시장에서 들어온 것들을 육안으로 일일이 다 체크를 해서 일단 주방에 들어오면 그걸 전부 분산해서 저장할 건 저장하고 만들 것은 만들고 그렇게 부터 요리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리를 하고 만들어 놓으면 또는 만드는 과정을 경호실 검시관이 지켜봅니다.”
올리는 음식에 이상이 있을까 미리 검식하는 과정도 여전히 남아 있다.
문문술씨
“전부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구요. 예를 들어서 2인분을 할 때는 3개를 담습니다. 이 음식은 삼합정과고 이것은 밀전병인데 일종의 이것은 구절판에서 나오는 것인데 구절판을 싸두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직접 만들어서 드리거든요. 세 개를 만들어 놓으면 직접 검시관이 자기가 마음에 든 것을 골라서 직접 다 맛을 봅니다. 다 본 다음에 이상이 없다고 하면 그때 대통령한데 서빙하기 위해서 웨이터가 가지고 나가서 서빙을 합니다.”
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독살을 예방하는 것. 내시의 우두머리인 상선내시가 매번 미리 먹어보았는데 때에 따라선 세자가 하기도 했다.10)
김호 교수 경인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음식이라는 것은 늘 섭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건강을 조섭하는 일은 아주 지근한 사람들 친근한 사람들이 또 신하들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운명을 같이 할 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 내의원 제도를 맡기지 않았거든요. 또 상온도 마찬가지구요. 그렇다고 하면 종친부나 아주 지친한 신하들 가운데서 그런 중요한 음식에 관련된 직책을 맡겨서 자신의 건강과 말하자면 음식들을 관리하도록 그렇게 맡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수라를 남자들이 책임진 이유는 또 있었다. 정조의 화성행차 가운데 궁녀들의 행렬,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렇게 남녀유별이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국가의 공식 업무였던 왕의 수라를 여성들이 맡기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왕의 수라를 여성들이 맡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 그것은 노동 강도였다.
승기아탕을 만드는 과정 전을 부친 후 그것으로 탕을 끊인다. 탕에 들어가는 재료가 모두 완성된 하나의 요리들 게다가 현대화 시설이 아닌 나무나 숯을 사용하는 재래식 방법을 미루어 볼 때 요리는 고된 노동이었음이 분명하다.
김상보 교수
“지존이신 왕께서 잡수시는 음식은 굉장히 세심하고 깔끔하도록 많은 손이 갑니다. 그래서 이렇게 손이 가는 음식을 여성들이 하기에는 조금 많이 힘이 부치지 않나 싶구요. 탕을 보더라도 보통 평균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걸리는 음식이 되겠습니다.”
때문에 각색장 즉 요리사는 누구나 모두 싫어하여 피하는 직업이었다.11) 게다가 월급도 적어 요리사인 숙수들은 도망가기가 일수였다.12) 때문에 고육직책으로 일정기간 부역을 면해주기도 했고13)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도 해주었다.14) 수라간을 여성들이 아닌 남성들이 차지했던 이유엔 왕의 신변보호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사상 그리고 강도 높은 노동이라는 시대적배경이 합쳐진 결과였다.
제주에서 귤을 진상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탐라수렵도입니다. 마당에서 여러 여인네들이 임금님께 바칠 귤을 포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주목사가 이것을 꼼꼼하게 검수하고 있습니다. 왕의 수라가 재료 조달에서부터 벌써 국가조직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이 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공식적인 직함을 받아서 수라를 책임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겠죠. 이제 조찬소에 대한 의심은 풀렸습니다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조찬소의 모습은 그토록 낯설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수라간이 남성들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왕의 건강은 국가의 건강이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소상하게 기록된 내전일기. 1925년 순종의 것이다. 왕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내의원 비상 팀이 꾸려져서 왕의 24시를 기록한다. 기상부터 세수한 시간 심지어 생리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김호 교수
“소변의 맛을 보는 경우도 있구요. 대변의 색깔이라든지 양이라든지 이런 것을 보고 예컨대 설사를 한다든지 또는 변비에 걸렸다든지 이런 것을 봐서 처방이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거든요. 틀림없이 소변이나 대변의 양이나 질 상태를 보고서 처방에 활용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식사시간과 메뉴도 자세하다. 조선의 임금은 하루 다섯 끼를 먹었는데 순종은 시관과 횟수가 불규칙했다. 영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채유. 다섯 명이 쪼그리고 앉아서 우유를 짜고 있다. 당시엔 젖소가 없었기 때문에 송아지가 먹는 젖을 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짠 우유는 대부분 타락죽을 만드는 데 쓰였다. 타락죽은 귀한 보양식이었다. 쌀을 간 것에 우유를 붓고 뭉근한 불에 끊여 낸다. 보양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단한 조리법, 타락죽은 주로 아침 전에 추조반으로 자주 올렸던 음식이다.
소문사설. 18C 내의원 어의 이시필이 쓴 생활백과다. 다소 낯설어 보이는 식치방, 소문사설에 상당부문을 식치 음식에 대해 싣고 있다. 고추장하나에도 정성을 들여 비법을 전수했는데 한켠에 식치 음식을 만든 이는 남자 요리사 숙수라는 대목도 나온다.15) 수라상 차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식치의 기능이었다.
김호 교수
“병이 나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하는 것, 이것은 음식으로 다스린다 해서 식치라고 얘길 하셨고 또 이제 탈이 난 다음에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약으로 다스리는 것인데 그것을 약치가 되는 것인데 그래서 식치가 약치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꿀, 된장, 대추, 쇠고기 등을 갈아서 만든 전약,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음식이다. 이 재료들을 고운 뒤 차게 식히면 양갱 같은 형태가 된다. 전약을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식치 음식이었다.
김호교수
“조선의 이런 식치 음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식 거친 음식이죠. 그리고 적게 먹는 것. 그래서 거친 음식과 적게 먹는 음식 이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는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린 왜 수라가 화려하고 여자들이 만든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을까. 거기엔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은 덕수궁 중화전에서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다. 그와 함께 대한제국의 내시들과 남자요리사들이 대거 해고됐다. 거기엔 고종과 순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남자 요리사 안순환의 손자 안동인씨를 만났다. 안순환이 쓴 자필 자서전. 1909년 11월 수라간 주임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안순환의 인생도 평탄하진 못했다. 수라간도 구조조종에 바람이 불어 대부분의 남자 요리사들이 궁을 떠났다.
안동인 씨 안순환의 손자
“한일합방 되고 궁에서 나오셔가지고 요리집을 했다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안순환은 종로의 명월관을 차렸고 쫓겨나 갈 곳이 없던 남자 요리사와 기생들이 명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각순 박사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순종이 일제에게 핍박받는 것을 보고 그것을 참다못해 사표를 내고 궁중에서 했던 요리를 밖에서도 한편 시범을 보이자 해자지고 문을 연 요리집입니다. 안순환씨는 그래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요리를 이제 민간에게 유포한 그런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명월관은 대성공이었다. 조선의 임금처럼 궁중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인들의 조선요리집 관광이 대유행을 했다. 제2, 제3의 명월관이 속속 들어서 서울엔 요리집이 넘쳐났다. 숙수의 해고와 요리집에 성행은 궁중 음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숙수들이 대거 해고되고 내시들이 사라지니 상궁들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패망했고 궁녀들도 살 길을 찾아 나섰다. 다만 낙선재에 몇몇이 남아 이씨 왕조로 격하된 왕의 식솔들을 살폈다.
수라에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삼국시대의 모습은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의 상 위에 고스란히 남았고 고려 말 몽골의 영향으로 내장 음식이 들어왔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식재료를 사용하는 승기아탕이 들어왔고 청나라로부터는 신선으로 알려진 열구자탕이 들어와 궁중음식에 포함됐다. 수라상은 그 자체로 온전히 이 땅에 역사였다.
음식은 역사입니다. 수라에는 시대의 희비가 모두 담겨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린 우리 모습에 대해 잠시 오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찬소와 같은 경우가 이것 하나뿐이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가 있을까요. 조찬소는 우리 역사에 대한 숱한 오류와 편견 가운데 한 예일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는 우리의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적극적인 물음 속에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 용도로는 금지입니다. 역사 공부를 하시는데 활용하시기를 바라며.....
1) 동숭어의 원말.
3) ‘소주방(수라간)을 내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기 때문에 가져오는 도중에 음식이 식어 수라상은 퇴선간을 거쳐 진상되었다.’
4) ‘수라간 각색장 두 사람이 막 저녁 수라를 차리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한 사람은 즉사하고 한 사람은 약간 숨이 붙어 있습니다.’ 傳 : 중종실록.
5) 선조실록.
7) 세조실록.
8) 별사옹 14명, 탕수증색 10명, 미모 4명, 병모 1명.
10) ‘문종은 세자 때 항상 시선하고 하루에 두 번 이상 찬소에 이르렀다.’ 傳 : 성종실록
첫댓글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