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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자유광고 스크랩 2.삶
묵향 추천 0 조회 4 08.10.30 04: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 삶


삶과 사람과 사랑은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삶,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 이 질문에 ‘삶은 계란’이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이 또한 아주 유쾌하고 훌륭한 답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마 이 답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이제부터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삶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보다 광의의 개념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사실 삶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볼 수 없는 것 모든 것이 다 고유의 삶이 있습니다.
즉, 삶이란건 사람보다 선행된 개념입니다.


성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느 젊은이에게 따라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우리 부모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라고 답하죠.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죽은자의 일은 죽은자에게 맡겨라.’



죽은 자의 일은 죽은자에게 맡겨라! 육신이 죽은 자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살아있으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 또한 죽은 자입니다.
살아있는게 무엇인지 모르는 자도 죽은 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무덤에 회칠을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은자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자신을 꾸미고 거짓지식으로 포장하고,
허상에 빠져 생활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바로 ‘죽은자가 회칠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항상 무언가 되고 싶어하는 자가
살아가는 것을 무덤에 회칠을 한다고 표현합니다.


즉, 이 구절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이것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삶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면 그것은 이미 삶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못 느끼면 그것은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아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사전적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말 이전의 개념이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입니다.
방금 전에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삶이라고 했죠?
그런데 우리는 죽어있습니다. 무덤에 회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스로 깨어나고 싶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실 이것이 삶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삶과 사람과 사랑을 한꺼번에 묶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자를 이해하기 위해, 사자의 먹이가  되는 사냥감들과,
사자가 사는 초원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좋듯이 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삶이라면 사람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종이 바로 사람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호모사피엔스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이며, 그것을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일까요?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행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궁극에 가서는 사랑이 됩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그 존재 자체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신에 귀결됩니다.
성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요? 어떤 제자가 묻습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사람의 행함을 보면 안다.’



그 사람의 행함을 보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안다.
즉, 그 행함에 사랑이 있냐 없냐에 따라서 좋은 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이야기되겠지만 좋다 나쁘다라는 개념은
사실 불필요한 분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가 물어보니 어쩔 수 없이 그 제자의 수준에 맞게 분별을 해 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직접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군요.

불경이나 성서 모두 주옥같은 비유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직접 이야기해 버리면 간단한 것을,
굳이 비유를 하는 바람에 저마다 다른 해석들이 나와 혼란스럽게 했을까요? 

굳이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유를 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로간에 차원이 같아서 납득이 될 수 있었다면
비유로 이야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의 수준이 아직 일천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봐야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려운 이야기들, 말해도 모를 부분들은 전부 다 비유를 통해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하늘나라가 뭐냐는 질문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고 말한 것이나,
연꽃을 가만히 들어보이는 염화시중의 미소(拈花微笑)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지요.

어려운 주제이니만큼 약간 돌아가보도록 할까요?



중세시대는 신이 창조한 시대였고 신의 손안에 있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던 시기였죠.
신학은 신의 말씀이고, 그 신의 말씀은 성경에 쓰여져 있기에,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들이 학문은 물론 대중의 삶조차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진리 또한 성직자가 판단하고 재단하였습니다.
자유롭게 사유해야 할 철학마저도 신을 증거하기 위한 신학의 시녀로 존재했던 시대.
중세에는 과학조차도 신을 증명하기 위한 보조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흑기에도 의식이 개화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브루노같은 이는 우주가 무한하기 때문에
지구가 중심일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신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하고
신과 자연이 하나라고 주장한 브루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7년간의 옥살이 끝에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맙니다.
화형 당할 당시에 한마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누군가 던져준 십자가마저도 비웃음으로 답했다는 그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갈릴레이는 타협이라도 했지만 브루노는 타협이란 것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의 희생위에서 꽃핀 것이 바로 근대입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제 데카르트로 인해서 나라는 존재는 신이 없어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신으로부터 비로서 독립선언을 게 된 것이죠.-
물론 데카르트는 독립한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검증해줄 심판관으로
다시 신을 끌어들이긴 합니다.  이런면에서는 동시대를 살았던 스피노자가 보다
더 삶에 가까운 깨달은 자임에 분명합니다. -
그러나, 신에게서 독립한 철학은 현대에 어와 해체위기에 처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이러한 해체작업의 하나로 볼 수 있을 듯 하군요.
중요한 것은 긴 암흑기를 거쳐나가면서 신에게서 독립하듯이, 인간의 의식은
지금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쌍어궁이다 보병궁이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황도12궁을 나누는 별자리들 중에서 물병자리를 한자어로 보병궁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자전축은 23.5도 기울어져 있으며, 이 자전축은 천천히 세차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자전축이 가리키는 별자리가 계속 바뀌지요.


25,800년 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5,800/12= 2150년 정도의
기간을 하나의 별자리마다 배당해서 쌍어궁이니 보병궁이니 이름붙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2천년전이 바로 물고기자리가 시작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시대를 쌍어궁시대라고 하며 그런 이유로 물고기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2천여년이 지난 지금, 춘분점은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로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점성술에서는 지금이
물고기자리시대에서 물병자리시대로 넘어가는 시기, 즉 쌍어궁시대를 거쳐
보병궁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오면서
인류의 의식이 제자리 걸음을 했을리 만무합니다.
중세와 근대의 이야기처럼, 우리 인류의 의식은 진보했습니다.
이미 많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깨어나가고 살아 움직이며 진보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주제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하시지요?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진화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전부 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야한다.
이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처는 좋고 인간은 안좋다라는 흑백논리로 수행을 해 왔습니다.
종교인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은 육도윤회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중생이었습니다.
죄악에 가득차 거듭나야할 구원과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즉, 존재를 비교하던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중생과 부처 둘 중에 부처가 좋은거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을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에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기 싫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인류가 사람이기 싫은 한 사람으로 삶을 저주하고
인생을 저주하며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이 사람이기를 싫어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이기를 싫어하니,
그 사람의 일생이 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깨닫기를 소망하는데,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났을까요?
단언컨대, 이 소중한 진리의 이야기를 접하고
그 진의를 이해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중생이 있으니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 중생이 있다는 식으로,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는 기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듭 난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거듭 안난 사람은 나쁜사람이다.라고
기독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존재형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형태. 즉,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불성의 또 다른 표현이며 현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다 소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외부적 상황과 표현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성은 그대로입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수험생이라면 어떨까요?
합격하면 잘난 사람이고 합격 못하면 못난 사람이라는 이런 기준이 성립할까요?
그 어떤 것이든지 여러분 자신이 아니던가요?
대학에 가고 안가고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낙방한 사람이건 합격한 사람이건 둘 다 사람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깨우친 성자나 깨우치지 못한 범부나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순간외엔 없습니다.
그런데, 매 순간 깨어서 살아있는 이는 참으로 발견하기 힘이 듭니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항상 묶여 살아갑니다.
내일 어떤 것이 생기면 내가 행복해질텐데..라고 이야기하며 괴로워합니다.
혹은 옛날에 이러지 말았어야했는데..라며 또 괴로워합니다.
순간을 살아가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깨어있는 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일 내가 행복하려면 오늘 지금 이 자리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십년후의 행복을 위해 지금 죽어라 고생하다가 9년후에 죽게될 수도 있습니다.

‘오지도 않은 십년후의 행복 때문에
9년동안의 행복을 내팽겨치고 평생 불행하게 살아간 어리석은 이’ 라는 묘비명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미래에 매인 사람도 불행한 일이지만 과거에 매인 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내가 불행했기 때문에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불행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 때문에 다가오는 행복을 내팽겨치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간 어리석은 이’ 라는 묘비명이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불행이 현재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면,
내 현재의 존재양식이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삶을 보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생명은 바로 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결국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왜? 신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으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편안하지 않던가요? 위하고 아껴줄 때 즐겁지 않던가요?


왜 그런걸까요?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존재의 본질이 사랑이기에 그러합니다.
미움도 한 감정이요 괴롭히는 것과 한감정이지만
사랑하는게 제일 편하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던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랑을 해보니 너무 괴로와서 사랑도 싫고 다 싫다.
아무 감정도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편하지 않은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없다는 말은 마음이 죽어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감정을 비춥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비추고 있습니다. 
감정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나는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마음이 죽어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말로 시체라고 합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시체놀이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마음은 항상 감정을 비춥니다.
자기 생명이 존재하는 한 마음은 항상 감정을 비추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존재할 수 도 없습니다.

왜? 마음이 바로 비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자신을 인식시켜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사이에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있기에,
그 둘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영은 비물질이고 육은 물질인데,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이 두가지를 찰떡궁합으로
중매 서주는 중매장이가 바로 마음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의 양태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즐기세요.
노래로 춤으로 마음껏 순간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니까요.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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