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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
청와대는 기와 색깔로 이름 지어졌다
도자기 굽듯 구워낸 15만장… 100년 이상 버틸 수 있어
조선 초 경복궁 등 일부 건물에도 청기와 사용
일반 기와 비해 과도한 비용 탓에 논란 일기도
▎창덕궁의 편전으로 현존하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한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관저를 ‘백악관(White House)’이라고 하듯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과 관저가 있는 지역을 ‘청와대(Bule House)’라고 부른다. 200년 이상 역사의 백악관 건물은 1812~1814년 미·영 전쟁 당시 영국군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울 때 외벽이 시커멓게 탔는데, 이후 벽에 흰색 페인트칠을 하면서 ‘백악관’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제26대 루즈벨트 대통령 때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대일 항쟁기와 이승만 대통령 당시까지 청와대 명칭은 ‘경무대’였다. 청와대가 지금의 명칭과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다.
윤 대통령은 취임 수개월 후인 1960년 12월 11일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한 뒤 기자들과 함께한 차담(茶啖)에서 경무대의 개칭 문제를 슬쩍 언급했다.
‘명칭의 유래는 차치하더라도 경무대는 전 정권 때 폭정을 자행했던 곳으로 국민적 이미지가 좋지 않아 바꾸자는 의견이 많았다. 지붕의 기와가 파랗다는 의미에서 청와대, 동네 명칭을 따서 청운대라는 의견도 나왔는데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기자 여러분들이 좋은 이름 하나 골라 달라’고 윤 대통령은 가볍게 주문한다.
윤 대통령은 1960년 12월 30일 특별담화를 통해 1961년 1월 1일부터는 경무대 대신 청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관저의 지붕 기와가 청색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평화스러운 이름일 뿐만 아니라 청기와는 우리 문화재와도 관계 깊으며, 영어 명칭인 ‘Blue House’가 미국의 ‘White House’와도 비견될 수 있는 이름이라 이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도 청와로 덮여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근정전 취두(鷲頭) 제작을 청와로 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든다며 그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문종실록]에서도 근정전과 사정전이 청와로 돼 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청와가 문종조(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령(掌令) 정지하(鄭之夏)가 아뢰기를 “또 듣건대 청기와를 구워서 만드는 데 재력이 너무 많이 들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문소전(文昭殿)과 종묘(宗廟)에도 오히려 덮지 못했는데, 어찌 불우(佛宇: 불당)에 이를 덮겠습니까?”_[문종실록] 즉위(1450)년 2월 28일
지금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은 모두 청기와가 아니므로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창덕궁의 경우는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업무를 보는 건물)인 선정전(宣政殿)이 현재도 청기와로 돼 있어 청기와가 올려진 옛 궁궐 건물이 어떠했을지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다만 실록에 나오는 청와의 색상이 지금의 청기와와 동일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본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일(1910년 8월 29일) 이후 35년간의 대일 항쟁기 동안, 조선 후기 이후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청와대 지역 역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그 이전인 고종 33(건양 1,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리는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사건으로 경복궁 권역은 이미 비어 있는 상태였다.
1년 후 고종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택해 환궁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경복궁 대신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명실상부한 황궁 역할을 하게 됐다. 일제는 비어 있던 경복궁의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조선총독부를 신축하면서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 있던 옛 후원 자리에도 조선 총독의 관저를 새로 지었다.
관저는 1939년 제7대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 당시 완공됐는데, 대일 항쟁기 동안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제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까지 총 3명의 총독이 살았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아베 총독이 내부를 불태웠으나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이를 개조한 후 미군정청 조선 주재 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의 집무실로 이용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1948년 8월~1960년 4월), 윤보선(1960년 8월~1962년 3월), 박정희(1963년 12월~1979년 10월), 최규하(1980년 3월~1980년 8월), 전두환(1980년 8월~1988년 2월), 노태우(1988년 2월~1990년 10월) 등 6명의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다.
지금의 청와대에 지어졌던 일제의 조선 총독 관저는 경술국치 이후 35년간의 대일 항쟁 기간에 세 번째로 지어진 관저였다.
첫 번째는 ‘왜성대(倭城臺)’에 있었던 총독 관저로서 지금의 서울 중구 퇴계로 26가길6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 왜성대는 남산 일대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 등이 주둔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왜성대, 왜장 또는 왜장터 등으로 불리게 되면서 지명으로서 고착됐다고 한다. 예장동은 조선시대에 군사들의 훈련장이 있었던 무예장을 줄여 예장(藝場)이라 한 데서 유래됐다.
일본공사관이 첫 번째 조선 총독의 관저로
서울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통감관저 터. 표석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 / 사진:이성우
왜성대의 총독관저가 처음부터 조선 총독의 관저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본공사관의 용도로 지어진 것이었다. 물론 최초의 일본공사관도 왜성대 지역에 있었던 건 아니다. 최초의 일본공사관은 경기감영(京畿監營: 경기도청에 해당) 소속 중군 병력의 주둔지였던 경기중영(京畿中營)의 건물들을 사용했다. 서대문구 천연동 31번지, 지금의 동명여중 자리에 있던 경기중영은 청수관(淸水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곳이다.
태종은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박자청에게 중국 사신의 체류와 접대를 위해 지어진 모화루(慕華樓) 남쪽에 커다란 연못을 파도록 지시했는데 태종 8(1408)년 완성된 모화루의 남지(南池)와 경기중영은 서로 인접해 있었다.
‘청수관’이라는 이름은 주변에 남지가 있다 보니 경기중영 정문 앞에도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던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서대문구 천연동 13번지, 금화초교 자리에 있었던 남지는 실록에 따르면 길이 380척(약 114m), 폭 300척(약 90m) 깊이 두세 길(6~9m)의 아주 큰 연못이었다고 하며, 1912년 토지조사 기록에서는 2180평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기록에서 1127평 규모로 확인되는 경기중영의 거의 두 배 가까운 넓이였다. 4년 후인 태종 12(1412)년 현재의 규모처럼 확장된 경복궁의 경회루 공사 역시 박자청의 작품이다.
조선은 고종 13(1876)년 2월 일제와 맺은 강화도조약으로 같은 해 윤5월 청수관을 일제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청수관은 조선이 외국에 제공한 최초의 공관이다. 청수관을 공사관으로 사용했던 일제는 고종 19(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불에 타버리자 임시 공사관을 받아 사용하다 고종 21(1884)년 4월 교동에 위치한 금릉위(錦陸尉) 박영효의 집을 매입한 후 새로 공사관을 짓고 낙성식까지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낙성식 이후 한 달 남짓 만에 불에 타버렸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계기로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같은 해 11월 체결된 한성조약에 따라 조선이 제공한 부지에 다시 공사관을 짓게 됐다. 이 건물이 고종 22(1885)년 예장동에 지은 공사관 건물이다.
고종 42, 광무 9(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제에 박탈당하고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의 외교 기관도 전부 폐지됐다. 이듬해인 고종 43, 광무 10(1906)년 2월 1일부로 서울에 조선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일제로부터 간섭과 감독을 받게 됐다.
최초의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外部) 청사를 활용했다.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이 자리한 세종로 82번지 일대가 당시의 외부 청사 자리다. 통감부는 그후 약 1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친 후 고종 44, 광무11(1907)년 1월 왜성대 지역의 공사관 건물 인근에 조성한 신축 청사로 이전하면서 기존에 사용했던 공사관 청사를 통감의 관저로, 경술국치(1910년) 이후에는 다시 명칭만 바뀐 채 총독의 관저로 사용했다.
1939년 9월 제7대 조선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경복궁 후원이었던 경무대 지역에 총독관저를 신축하며 관저가 옮겨간 후 이곳은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활용됐다. 이곳은 일제 패망 후에는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됐다. 당시의 총독관저 건물은 현재 멸실되고 없으며, ‘기억의 터’로 조성된 공간 안에 ‘통감관저 터’라고 각자된 표석으로 위치를 알려 주고 있다.
두 번째 관저는 제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한국주차군사령관(韓國駐箚軍司令官) 재임 당시이던 1908년, 러일전쟁 군비 잉여금 50만원을 사용해 1908년에 지었다. 이곳은 600평 부지에 1909년 12월 완공했는데 용산의 아방궁으로 불릴 만큼 호화로웠다.
두 번째는 군사령관 관사, 세 번째는 수궁(守宮) 터
▎‘북궐도형’에 표시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건물 배치 가운데 수궁의 위치(붉은색 원 안).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60~61면 전재(轉載). / 사진:이성우
원래 이곳은 군사령관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총독의 관저로 전환된 이후에도 유지 비용의 과다, 남산 지역 통감부와의 상대적으로 먼 거리 등이 고려됐음인지 이곳이 집무실이나 거처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기록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피로연·축하연 등 연회나 접대 등이 개최됐다는 기록 정도만 남아 있다.
용산의 총독관저가 있었던 지금의 장소에는 주한 미군사령부 예하 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원투원(121) 병원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브라이언 올굿 육군 지역 병원이 있던 장소이다. 병원 명칭은 이라크 전쟁 당시 헬기 피격으로 전사한 브라이언 올굿 대령의 이름을 따서 2008년 6월 개명했으며, 2019년 9월 대부분의 기능이 평택의 미군기지(캠프 험프리스)로 이관되고 용산의 기지 남쪽 현재 위치에는 병원의 일부 기능만 남아 있다.
마지막은 1939년 경복궁의 후원(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신축한 경무대 총독관저다. 고종 44, 광무 11(1907)년부터 사용된 왜성대의 신축 통감부 청사는 순종 3, 융희4(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 총독부 청사로 전용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사무공간 부족 탓에 이전을 결정했다. 후보지로 여러 장소를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결정된 지역은 경복궁이었으며, 1916년부터 10년의 공사 기간을 거친 후인 1926년 10월 신청사 낙성식을 가졌다.
총독부가 신청사로 옮겨 가면서 경복궁 주변으로 여러 관공서와 건물들이 신축되고 상권 역시 옮겨가게 됐다. 그러다 보니 왜성대 지역에서 50여 년 존치돼 왔던 총독관저는 유지·보수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이동 거리도 가깝지 않아 1930년대 중반부터 현재의 청와대 자리인 경무대로 이전이 결정돼 있었다.
1935년 5월 5일 자 [동아일보]를 보면 ‘총독부 신청사를 경복궁 안으로 옮긴 후 북촌 지역으로 상권이 옮겨가게 될 거라며 총독 관저도 경무대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예산까지 편성했다가 삭제됐으나 내년에 다시 계상(計上) 제출하겠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3월 착공한 총독관저 공사는 이듬해 6월 상량식까지 했으나, 중일전쟁 여파로 물자가 부족해 한동안 공사가 중지됐다가 1939년 4월 공사가 재개된 후 9월 20일 낙성식을 했다.
조선 총독의 신축 관저 자리는 조선 후기 이 지역의 경비를 담당하던 군사들을 위한 건물인 수궁이 있었던 자리였다. 고종 5(1868)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북쪽 출입문인 신무문 밖,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담장을 두르고 후원을 조성했는데 그 중앙쯤 되는 지역에 관저를 신축한 것이다.
‘북궐도형(北闕圖形)’을 보면 후원에는 융문당 권역과 경농재 권역을 아우르는 곳과 춘생문과 융문당 사이에 각각 수궁이 표기돼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 수궁 가운데 동쪽인 춘생문 근처의 수궁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에 없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후원의 역할이 상실됨에 따라 다른 건물들과 함께 일제에 의해 훼손·철거됐다. 일제는 그중 중앙의 수궁 부근에 총독의 관저를 지었다.
현관문 방향이 바뀌게 된 사연은
▎청와대 수궁 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각자(刻字) 표석 뒤쪽으로 절병통이 보인다(붉은색 원 안). / 사진:이성우
신무문의 동쪽 가에 춘생문 2칸이 있다. 그 서쪽에 춘화문 2칸이 있다. 문안의 서북쪽에 영군직소 9칸 및 화장실 1칸이 있었는데 모두 지금은 없다. 그 남쪽의 담장 사이에 사각문인 춘도문이, 그 북쪽에는 수궁 12칸 및 화장실 1칸이 있었는데 모두 지금은 없다. (…) 융문당 서쪽 가에는 춘안당 10칸이 있고, 동서 행각 합 6칸, 남쪽 행각 6칸이 있으며 영원문이 있다. 그 북쪽에는 오운각 10칸이 있다. 동쪽에는 옥련정 1칸이 있다. 북쪽에는 천하제복지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샘이 있다. 서쪽 가에는 벽화실 9칸이 있다. 남쪽에는 수궁 14.5칸이 있다. (… ) _[궁궐지]에 수록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중 수궁에 대한 기록
1938년쯤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景武臺官邸境內敷地配置圖)’를 보면 지금의 경호실과 영빈관이 있는 서쪽 지역은 관사로 돼 있으며, 전체의 거의 중앙쯤 되는 지역에 조선 총독관저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관의 방향이 일반적인 건물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신무문 앞에서 진입해 들어가는 도로 개설 여건과 관저 건물 동쪽 및 북쪽이 급경사의 산악과 골짜기로 돼 있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총독의 경무대 관저 건물은 역대 대통령 재임 중 일부 증·개축은 있었겠지만 1980년대 초까지도 도로나 건물 구조에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난 현관 방향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이듬해인 1981년 남쪽으로 바뀌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경무대에서 살았던 조선 총독들의 말로가 좋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의 퇴임도 그리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풍수지리적 관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궁 터에 지어진 청와대 구 본관 대신 오늘날의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인 1988년 12월 17일 신축이 결정됐으며 이듬해인 1989년 7월 22일 착공해 약 2년의 공사를 거친 후 1991년 9월 4일 준공됐다. 광복 후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일 항쟁기 조선 총독이 거주하던 곳을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 동기가 돼 대통령 관저와 함께 신축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조선 총독 관저였던 청와대 구 본관에서 5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1층은 대통령의 집무 및 행사 공간이었고 2층은 생활 공간인 관저였다. 따라서 지금처럼 본관과 관저가 별도 건물로 되기 전까지 당시의 대통령들은 2층에서 1층으로 출근했다 다시 2층으로 퇴근하는 시스템이었다. 근무 중에는 대통령과 눈이 마주쳐도 목례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청와대 경호 인력은 행사 중 애국가가 나와도 움직이지 않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순간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경복궁에 건립된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청와대의 구조선 총독 관저의 철거 문제는 노태우 정부 초기부터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민족 자존심 회복’ 대 ‘역사적 가치 파괴’ 등 찬반양론의 의견으로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두 건물의 철거를 단행했다. 이로서 1939년부터 1993년까지 반세기 이상 자리를 지켜왔던 구 조선 총독의 관저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YS,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거 단행
▎청와대 구 본관 터에는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주목(朱木)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 사진:이성우
이때 철거된 구 조선 총독의 관저 자리는 주변 지형을 따라 흙으로 돋워 훼손된 명당(明堂)·길지(吉地)의 회복을 도모했다는 얘기를 당시 공사에 관여했던 대통령비서실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즉 비보(裨補) 풍수(風水)라는 것이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일제가 조선 총독의 관저를 앉힌 곳은 삼각산에서 백악(북악)으로 흘러온 기(氣)가 솟아 나오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관저를 지은 것이므로 관저를 없애고 원상대로 흙을 돋우면 국가를 위해 다시 좋은 기운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보면 북한산 보현봉과 청와대 뒷산인 백악 사이에 ‘보토소(補土所)’란 지명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과 궁궐의 지맥을 보전하고 북돋우기 위해 보토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보토를 한 지역은 총융청(摠戎廳) 관할인 보토소를 둬 관리했다.
북한산 형제봉에서 영불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심곡암과 영불사 중간쯤에도 ‘보토고개’라는 이름을 가진 고개가 있는가 하면 ‘보토현’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 창의문에서 북악스카이웨이 정릉 방향으로 가다 북악팔각정을 지나면서 1㎞쯤 가는 곳이다. 즉 삼각산~보현봉~형제봉~북악의 구진봉을 잇는 지점은 지형이 낮고 잘록하게 돼 있어 풍수지리상 산의 맥이 약한 급소라고 생각해 보토소를 두고 중점적으로 관리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보현·문수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됐는데, 보현봉의 곁가지 산발이 곧 도성의 주맥이기 때문에 총융청에서 보토소를 설치하고 주관해 보축(補築)했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 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峯), 백악산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이 되며. (…) _[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산천(山川)’
절병통(節甁桶)이라는 것도 있다. 절병통이란 정자 등의 건물에서 지붕이 한곳으로 모이는 지점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때로는 지붕을 장식할 목적으로 지붕 꼭대기에 설치하는 항아리 모양의 기와를 말하는데 때로는 돌을 다듬어 만들기도 한다.
청와대 수궁 터(구 본관 터)에는 1993년 10월 구 본관 철거 당시 유일한 흔적인 현관 꼭대기의 절병통이 남아 있다. 지금은 잔디동산 땅 위에 놓여 있지만 그 높이는 당시 현관 절병통 위치와 동일하다. 그 높이만큼 흙을 북돋아 보토를 했다는 의미다.
청와대는 이 수궁을 포함한 일대가 고려의 남경,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궁 유적이라는 점, 특히 옛 청와대 본관이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됐다는 점을 기념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안내판과 ‘청와대 구본관 터’ 기념 표석을 세웠다.
조선시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고 있는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外賓) 접견 등에 사용되는 중심 건물이다. 이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20여 명에 달하는 각계 전문가들이 30여 회에 걸친 자문 회의를 통해 설계와 도안을 마련했으며, 우리의 옛 왕궁 건축 양식을 토대로 현대적 감각과 쓰임새를 고려했다. 특히 지붕의 곡선, 기둥의 비례, 창문살의 형태까지도 세심한 검토를 하였다.
통상 우리 전통 건축은 대청마루, 안방, 사랑방의 크기 등 모든 것이 좌식(坐式) 생활에 맞도록 돼 있기 때문에 본관을 신축할 때 전통과 현대적 요소를 조화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대조전 등 규모가 큰 건축물이 있기는 하지만 전통 한식 건물의 방은 대부분 9자 내지 12자를 근간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본관은 크고 작은 행사나 회의, 외빈 접대 등을 위해 넓고 높은 공간이 필요했다. 이에 본관의 중앙부에는 2층의 한옥 양식 본채를 두고, 그 좌우에는 단층 한옥양식 별채를 배치했다.
본관 1층에는 규모가 작은 오찬 및 만찬 또는 다과 행사시 사용하는 인왕실, 그리고 영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인 무궁화실이 있으며, 본관 2층에는 대통령이 외빈을 접견하는 장소인 접견실, 접견실 행사 후의 연석회의나 수석 및 보좌관회의 등 소수의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장인 집현실, 그리고 10명 이내의 인원이 식사할 수 있는 백악실이 있다.
서측의 별채는 국무회의 및 다수의 인원이 참석해 임명장을 수여하는 행사를 할 수 있는 세종실, 동측의 별채는 중규모의 오찬 또는 만찬 행사를 할 수 있는 충무실이다.
지붕의 청기와는 약 15만장으로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내어 100년 이상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 현관 앞에는 차량 출입을 위한 안마당, 국빈 영접과 의전행사를 할 수 있는 큰 뜰(大庭苑)을 두고 주위에는 붉은색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대통령 집무실의 새로운 시작, 청와대 본관
▎1995년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작업의 막바지 모습.
그동안 엄격히 통제됐던 청와대 지역도 정부가 바뀌어 감에 따라 국민에게 개방되는 범위가 꾸준하게 늘고 있다. 전두환 정부 시절만 해도 청와대 앞 도로는 일부 주민들을 제외하고 차량은 물론 도보 통행도 자유롭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로 바뀌면서 차량 통행은 자유롭지 않았어도 도보 통행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인왕산 지역의 등산이 허용됐으며 청와대 방향으로의 사진촬영도 허용됐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 지역은 일부 제한적 단체관람 이외에는 여전히 관람이 여의치 않았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단체관람뿐만 아니라 개인 관람도 허용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경복궁의 북쪽 출입문인 신무문(神武門)이 열렸다. 그동안 경복궁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신무문으로 나오는 것은 경호 안전상의 문제로 허용되지 않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청와대 앞길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고 영빈관 앞쪽으로는 마치 남대문 앞에 광장이 생겼듯 광장이 생겼다.
현재의 문재인 정부에서는 청와대 방향의 차량 검문과 바리케이드가 사라졌다. 청와대 내부의 사진촬영이 가능한 장소도 한 군데가 더 늘었다. 청와대를 통해 필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비록 더딘 감은 있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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