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무 「詩의 溫度」] ⑬ 조촌 사는 일가 사람을 만나 함께 읊다
닭 잡고 밥 짓느라 부엌에서 도란도란
울타리에 저녁 안개 서려 으스름 짙어가네.
반쯤 누런 버들잎은 시들어 쳐지고
대추는 새빨갛게 익었네.
냇물은 빨리 흘러 그물치기 어렵고
산바람은 차가워 이불 자주 끌어안네.
목동牧童이 돌아올 적 뿔[牛角] 두드리는 소리 나니
이것이 바로 틀림없는 가을소리네.
鷄黍廚人語(계서주인어) 籬煙薄暮深(리연박모심)
半黃楊委髮(반황양위발) 純赤棗呈心(순적조정심)
溪急妨提綱(계급방제강) 嵐寒慣擁衾(람한관옹금)
牧歸聽扣角(목귀청구각) 端的是商音(단적시상음)
*鷄黍계서 : 닭을 잡아 국을 끓이고 기장으로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黍 기장 서
*廚주 : 부엌 주. 广집 엄+尌멈출 주.
*嵐람 : 남기 람(남). •람기嵐氣 : 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같은 기운. 산山바람. 회오리바람.
*商音상음 : 가을 소리. 상商은 계절로는 가을을 일컬음
―『아정유고 3 雅亭遺稿 三』 이덕무李德懋(1741~1793)
✺첨세병添歲餠(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떡)
세시歲時 흰떡을 쳐서 만들고 썰어서 떡국을 만든다. 추위와 더위에 잘 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견디기 때문에 그 정결함을 취한다. 세상 풍속에서는 이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 한 살을 더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억지로 그 이름을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떡’이라는 뜻에서 ‘첨세병添歲餠’이라 하였다. 이에 시를 지어 ‘첨세병’을 노래하였다.
천만 번 절구에 쳐서 눈빛[雪色]이 동글동글
저 신선 부엌의 금단[金丹]과 비슷하네
해마다 나이 더 먹는 것 몹시 미워
슬프구나! 나는 이제 먹고 싶지 않네
千杵萬椎雪色團(천저만추설색단)
也能仙竈比金丹(야능선조비금단)
偏憎歲歲添新齒(편증세세첨신치)
所悵吾今不欲餐(소창오금불욕찬)
*세시歲時에 떡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 떡국을 먹지 못하면 한 살을 더 먹지 못한다. 그래서 굳이 그 이름을 ‘첨세병’이라 하였다고 주註가 달려 있음.
*금단金丹 : 선단仙丹. 먹으면 신선이 된다. 신선이 만든다고 하는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영약靈藥.
―『영처시고 1 嬰處詩稿 一』 이덕무李德懋(1741~179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당대의 시인들에게 “조선의 시를 쓰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조선의 시를 쓰려면 반드시 “이덕무의 시를 보라”고 외쳤다. 박지원이 볼 때 당시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찬미하는 시는 단지 중국의 옛 시를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시에 불과할 뿐 조선의 시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적 불명의 시였다. 반면 박지원은 당시 사람들이 ‘비루하다’, ‘거칠고 서툴다’, ‘자질구레하고 보잘 것 없다’고 혹평한 이덕무의 시는 참된 조선의 시라고 극찬했다.
이덕무의 시를 혹평한 대표적인 사람이 자패子佩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루하구나. 이덕무가 지은 시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건만 그 시와 비슷한 점을 볼 수 없구나. 이미 털끝만치도 비슷하지 않은데 어찌 그 소리가 비슷하겠는가. 거칠고 서툰 사람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오늘날의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풍속과 유행을 즐겨 읊는다. 지금의 시일 뿐 옛 시는 아니다.”
박지원은 자패의 혹평을 비판하면서 이덕무의 시가 진실로 볼 만한 까닭은 중국의 옛 시와 비슷하거나 닮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이덕무의 시는 중국의 옛 시가 읊은 시적 대상과 소재가 아닌 ‘지금의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풍속과 유행’을 시적 대상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참된 조선의 시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덕무의 시는 오늘날 조선의 풍속과 유행을 읊고 있기 때문에 만약 공자公子가 살아 돌아와 다시 시의 경전인 『시경詩經』을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면 반드시 조선의 시 가운데에서는 이덕무의 시를 채록採錄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덕무의 시를 통해서만 조선의 산천과 풍속과 기후, 조선 백성의 성정, 조선의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와 닮은 혹은 비슷한 시를 무엇 때문에 구태여 조선에서 구하겠는가. ‘중국적인 것’과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그 시는 별반 가치와 의미가 없는 가짜 시이자 죽은 시가 된다. 반면 ‘조선적인 것’을 담을수록 그 시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가치와 독특한 의미를 지닌 진짜 시이자 살아있는 시가 된다. 조선의 시를 써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덕무의 시를 혹평한 자패는 유득공柳得恭의 숙부 유금柳琴(1741~1788)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금은 이덕무의 시를 훗날 청나라에 가져가서 반정균潘庭筠에게 “그의 시는 평범한 길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최고의 비평을 받아온 장본인이다. 한때는 이덕무의 시가 중국의 옛 시를 닮지 않았다고 비방하고 비난했던 사람이 이덕무의 시야말로 참된 조선의 시라고 찬미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당시 이름 없는 시인에 불과했던 이덕무의 시를 중국(청나라)에까지 가져가서 비평을 받으려고 했겠는가.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시를 청나라 지식인들에게 소개하고 비평을 청할 만큼 이덕무의 시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옛것에 익숙한 사람에게 새로운 것은 거부감과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새로운 것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순간 거부감과 반감은 호감과 수용 그리고 찬사로 뒤바뀐다.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도전하고, 개척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세간世間의 거부감과 반감을 두려워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참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안목과 식견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 가치와 의미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설령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손자 박주수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 실학박물관
*朴趾源(1737-1805) : 조선 후기 소설, 철학, 천문학, 병학, 농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한 북학의 대표적 학자.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으로 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금柳琴·유득공柳得恭 등과 교류했으며, 박제가朴齊家·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1780년 연행에서 접촉한 청의 문물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저술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호질虎叱〉·〈허생전 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자패子佩(조선) :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초명은 이환李芄 호는 산북山北.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사간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증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의 딸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동생이다.
―『아정유고 1雅亭遺稿 一』 이덕무李德懋(1741~1793)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 편역 <한정주>역, 출판사: 다산초당, 출간일: 2020.02.17.
✵이덕무李德懋(1741~1793) : 영조 17년에 태어나 정조 17년까지 활약한 조선 후기 문장가이자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 자는 懋官무관, 호는 炯庵형암·雅亭아정·靑莊館청장관·嬰處영처·東方一士동방일사·信天翁신천옹 등이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가난해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가학家學과 독서讀書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흔히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졌으나, 지독한 독서 편력만큼이나 시에 대한 열정과 문장 실력, 탐구 정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당대 최고 지성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면서 '위대한 백 년'이라 불리는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기를 주도했다. 아이 같은 천진하고 순수한 감정을 중시한 독창적인 글쓰기 철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진경을 담아낸 수많은 진경 시와 산문, 동아시아 삼국 시문을 다룬 문예비평서 『청비록淸脾錄』, 18세기 일본 사회 제도와 문화를 심층 연구한 『청령국지蜻蛉國志』, 조선 고유의 풍속을 정리한 백과사전적 연구서 『앙엽기盎葉記』, 그 밖에 『사소절士小節』, 「열상방언冽上方言」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남겼다.
특히 개성을 강조한 자유로운 문장은 멀리 중국에서까지 인정받았으며,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이후 국왕 정조가 열었던 시 경연에서도 여러 번 장원을 차지했다. 1792년 이덕무와 박지원을 위시한 개성적인 문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을 휩쓴 문체반정에 휘말렸음에도, 사후 국가적 차원에서 유고집 『아정유고雅亭遺稿』가 간행될 만큼 대문장가로 인정받았다. 아들 이광규가 편집한 전집으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사회적 틀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데 거리낌 없던 이덕무의 문장론과 철학, 초지일관 소신을 지킨 강직한 삶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인문학적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청장靑莊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에 사는데, 먹이를 뒤쫓지 않고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한다. 이덕무가 청장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형암행장炯菴行狀〉 중에서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이덕무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 편역: 한정주(역사평론가), 다산초당, 2020.02.7.》, 《Daum, 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