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철학의기초중간과제 2015101268 철학과 김나영.hwp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철학하기
과목: 아시아 철학의 기초
소속 학과: 철학과
이름: 김나영
학번: 2015101268
과제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생각한 중간과제는 김치완 교수님이 수업해주신 ‘아시아철학의 기초’ 강의와 교재(『애니메이션으로 떠나는 철학여행』 )을 토대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굉장히 매혹적인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 자연, 그리고 동양철학에 담겨진 사상과 어떤 방향으로 컨텐츠화된 것인지에 대한 해석이라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낯선 길을 걸어야할 상황에 처합니다. 이때의 말하는 ‘낯선 길’이란, ˹센과 치히로와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낯선 환경 속에서 부모님과 동떨어져 자신과는 다른 또 다른 자아(‘센’)를 스스로 만나게 되고, ‘노동’이라는 것을 통해 책임을 배우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다움의 조건을 깨우치게 되는 등 그러한 상황에 마주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는, 세계의 어떤 불가사의함이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점차 크나 큰 정도로 느껴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이제 곧 중학생이 되어 ‘입시’라는 것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거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여 첫 사회생활을 맛보는 대학 새내기들의 경우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족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등의 여러 가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소한 차이일지라도, 낯선 길을 만나는 그 순간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긴장과 두려움, 슬픔, 분노 등에 맞서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이러한 낯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유지시켜 더 성숙한 자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이름’을 잘 지켜내고, 이름답게 살아가야한다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왜 중요할까?
우리가 갖는 이름에는 잠깐 갖게 되는 일시적 이름이 있고, 영원히 갖게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 앞에 있는 ‘OO대학교, OO학과, OO회사, OO원, OO그룹 등’ 이 해당되고, 후자는 나의 이름, 영화로 치자면 ‘센(千)’이 아닌 ‘치히로(千尋)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자와 후자 중 어떤 이름에 더 걸맞게 살아야하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영원히 갖게 되는 ’나‘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간직해야하고 당당해져야할 후자의 이름보다는 자신의 앞에 붙은 가변적인 수식어구에 목을 메어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센과 치히로와 행방불명˼에서 나오는 ’하쿠‘ 또한 원래는 강의 신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유바마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점차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되어 예전에 자신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까먹고 맙니다.
주안공 치히로는 이 세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유바마에게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때 치히로(千尋)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뜻에서 센(천)으로 바뀌어버리는데, 이는 즉 치히로가 ‘치히로’다워질 수 없는 존재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이때의 ‘센’은 단지 이 세계, 즉 오로지 노동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유바마의 세계) 속에서 불리는 이름으로, 이 때 치히로의 조력자로 나타나는 하쿠는 치히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절대 너 이름을 잃어버리면 안되. 그러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나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어.”
하쿠의 이 대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까먹고 자신이 속한 계급 내에서 붙여지는 수식어구, 즉 이름 앞에 있는 ‘OO대학교, OO학과, OO회사 사원, OO원 등’의 수식어구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는 사고관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있다’는 것, 즉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하이데거 등에 이어서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와 고찰을 주로 다루는데, 이러한 존재를 규정하고, 증명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이름에 대하여 ‘正名(정명)’사상 즉, 이름에 맞게 살아가야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공자의 사상이 있습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임금은 ‘임금’ 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 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워야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영화 속에서 치히로는 자신이 빼앗긴 이름 치히로를 잊지 않고, 자신의 이름에 걸 맞는 선택, 자신의 이름의 명분에 맞는 선택을 하면서 자신이 처한 낯선 환경을 풀어나가고, 다시 자신의 진짜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렇듯 낯선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주어진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진정한 삶을 사는 게 아닐까요?
인간과 자연
여기서 나오는 부패의 신은 처음 유바마의 세계(온천탕)에 올 때 ‘들어와서는 안 되는’ 외부 손님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부패의 신을 치히로가 책임을 맡고 온 정성을 다하여 맞이하고, 부패의 신이 된 근원인 가시(쓰레기)를 빼내주어 나중에 하쿠의 생명을 구해줄 소중한 ‘약’을 받습니다. 이때 알고 보니 그 손님은 부패의 신이 아니라 성스러운 ‘강’의 신이었다는 것이었고, 그 장면은 우리에게 우리가 부패시킨 환경에 대해 깊이 반성할 수 있는 문제의식을 제공합니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지나친 개발,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연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무분별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버린 쓰레기, 폐기물 등으로 인해 부패의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이 ‘손님’은 인간들에게 하찮고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되는데,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환경오염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기피하는 인간 사회를 나타내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 표출에 대한 욕망
아마 ˹센과 치히로와 행방불명˼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가오나시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중 사람들은 가오나시를 보면서 “쟤 뭐야?”, “이상해. 왜 저래?”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오나시는 유바마의 세계에 오기 전 치히로의 자기중심적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여기서 나오는 가오나시는 흔히 말하는 ‘애정 결핍’에 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관심과 애정에 대한 욕망이 너무 심해서 타인의 육체를 빼앗고, 타인이 원하는 금화 등의 물질적인 것을 보여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게 치히로에게만 먹히지 않자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오나시가 현대 사회에선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괴리감으로 인해 소외·격리되어왔던 사람들이 억눌러왔던 자신의 존재 표출에 대한 욕망을 충동적으로 조절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묻지마 폭행’, ‘묻지마 칼부림’, ‘악플러’, ‘sns 중독’, ‘자살’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흔히 ‘존재감’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악플러의 대다수 연령대는 40-50대의 아줌마들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20-30대 나이와는 달리 활동하지 않고, 집에서 은둔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흔히 두려워하는 ‘묻지마 살인’, ‘묻지마 칼부림’ 등의 황당한 사건들의 범인 대다수는 살인을 저지르거나 폭행을 가한 이유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라는 등이라고 답한다고 합니다. 이들 모두를 ˹센과 치히로와 행방불명˼의 나오는 가오나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관심과 애정에 굶주린 자기중심적 존재, 이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내면에 깃든 존재입니다. 그 욕망이 커지면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나와 타인의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욕망이 잘 조절되어 치히로처럼 떨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에 대한 맹자의 사상과 연결 지어 볼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맹자는 인간의 조건을 ‘나와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不忍人之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인간다움이 결국은 인간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가오나시는 관심과 애정에 굶주려 이러한 타인과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만의 욕망만을 집착하는 존재입니다. 센이 어쩌면 자기의 숨은 자아일 수도 있는 가오나시를 제니바의 집에 남겨두고 하쿠의 본래 이름을 기억해내고, 유바마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숨겨진 자아를 떨쳐내고 인간답게 살아가라는 동양 철학의 가르침이 깃들여있습니다.
첫댓글 숨겨진 자아를 떨쳐낸다는 것은 아마도 본능적인 욕구를 극복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심리철학에서는 물론 자신은 잘 알지만 타인을 알지 못하는 자아를 숨겨진 자아라고 한답니다마는 동양철학에서 감춰진 자아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어서 긍정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