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야망을 향한 화살은 떠났다
①
장례식은 성대히 치루어졌다.
일세의 성자(聖者), 천하제일지가(天下第一智家) 천기세가(天機勢家)의 제 십오대가주(十五代家主) 환천대공(換天大公) 우문학(宇文鶴)의 죽음은 무림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마왕성을 붕멸시킨 가장 큰 주역의 한 인물로서 만인의 존경을 받아온 환천대공, 그는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
본래 천기세가의 가주들은 대부분 명이 길지 못했다. 지나치게 심력을 소모한 탓이었는지 대부분 사십을 넘긴 예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환천대공의 죽음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장례식은 성대했고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다.
사천(四川)의 검문(劍問)에 위치한 천기보는 문상객들로 인해 초만원이었다.
각대문파에서 보낸 조객들과 각 지방의 영웅호걸들은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예의를 다하기 위해 머리에 흰 띠를 둘렀다. 장례식은 엄숙하게 치루어졌으며 전체적으로 극히 진지한 분위기였다.
이제까지 천기세가는 무림과 거의 왕래가 없었으나 이번 장례식은 성대했다. 그것은 천기세가의 명성이 아직도 무림인에게 확고함을 증명해 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천기세가에 문상 온 조객들은 한결같이 내심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룡(巨龍)이 죽은 지금 천기세가를 누가 보존할 것인가? 거룡의 후예인 현 소가주는 아직 젊을뿐더러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약골이니 이제 천기세가도 지는 해와 같이 사라지지 않겠는가?'우문천릉(宇文天凌)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부친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 큰 타격을 받은 듯 창백하고 병색마저 감돌았다. 수척한 그의 눈에는 정기가 없었다.
그는 막 통보를 받고 천기보의 보문 앞에 나와 있었다. 빛을 잃은 눈으로 일단의 기마인(騎馬人)들을 바라 보았다.
줄잡아 삼십여 명, 금빛 찬란한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봉황금대를 두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일기당천의 용자들이었고 장대한 체격과 형형한 신광은 위엄이 당당했다.
마차,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를 호위한 채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마차에는 금빛 깃발이 펄럭였다.
- 구주진천위(九州震天威)!
당금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문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천하의 성지 봉황성의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한 필의 오추마가 우문천릉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상의 인물은 삼십대 중반의 금삼인이었다.
눈은 가늘고 길었고 낯빛은 은은한 자색(紫色)이었으며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고 큰 키에 콧날이 날카로왔다.
이 인물-- 천하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담세기!
그를 봉황성의 차기 성주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면신군은 신단기성 단목신수의 대제자(大弟子)였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봉황삼왕(鳳凰三王)으로 불리우는 봉황성주의 삼제자 중 대제자인 그는 이미 봉황성의 전권을 장악하다 시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오직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차기 후계자는 봉황성과 그녀를 함께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문가지였다.
자면신군의 역광으로 미루어 그가 후계자가 될 확률은 컸다.
이미 그는 대외적으로 봉황성을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대문파에서는 은연 중 그것을 인정하는 터였다.
자면신군 담세기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문천릉을 담담한 눈으로 잠시 바라본 후 간단히 포권했다.
"사부님을 대신하여 문상을 왔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오."우문천릉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담대협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선부(先父)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담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우문천릉 형제의 비범함은 훨씬 더한 것 같아 기쁘오.""과찬이십니다. 담대협!"
우문천릉은 얼굴을 붉혔다. 이어 마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마차 속에는 어떤 귀인께서......?"
담세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우문가주께서는 알만한 분이시오."
"......?"
우문천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마차의 구슬 주렴 속으로 부터 한 가닥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하고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문(宇文) 오라버니, 벌써 소매를 잊으셨나요?"
순간,"아...! 가영(苛英) 소저......!"
우문천릉의 창백한 얼굴에 벅찬 감회가 피어 올랐다.
그 표정을 담세기는 놓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가느다란 눈꼬리가 흔들렸고 섬광 같은 안광이 솟았다가 빠른 시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안녕하셨어요, 오라버니?"
자르륵......!
주렴 사이로 희디 흰 옥수(玉手)가 먼저 나타났다. 이미 교족이 내려섰으며 순백색 장의를 입은 섬세한 몸매를 가진 미부가 마차로 부터 내렸다. 그녀는 밝은 햇살 아래 나타났다.
햇살이 유독 그녀에게 내려 신비하고 영롱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아쉬운 것은 그녀의 얼굴이 역시 하늘색 면사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우문천릉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많이 변했다...! 예전의 그녀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이미 여인이 되었구나.......'그는 이 년 전의 달콤했던 무엇을 떠올렸다.
봉황성주의 회갑에 참가했을 때, 침향원에서 처음 대면했던 소녀 단목가영은 봉황성주의 금지옥엽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어떤 숙명적인 교감을 동시에 느꼈다.
연회는 십 일 동안 계속 되었다.
그들은 거의 매일 만나 학문과 예술을 논했으며 그 사이 무언의 정감이 싹튼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오라버니... 여전하시군요."
달콤한 음성에 우문천릉은 흠칫했다.
"소매는... 몰라보게 성숙해지셨군요."
그들의 눈길이 허공에서 뜨겁게 엉켰다. 그러나 이때 자면신군 담세기의 담담하면서 침중한 음성이 끼어 들었다.
"우문가주, 우선 선부께 참배하도록 해 주겠소?"
"아...! 물론입니다, 담대협!"
우문천릉은 당황하여 급히 몸을 돌렸다.
신위(神位)는 대전에 모셔져 있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조객들은 차례로 신단에 다가가 열려젖힌 관(棺) 앞에 이르러 절을 했다.
환천대공 우문학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군웅들은 엄숙하고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절을 했다.
이윽고, 자면신군 담세기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신단 앞으로 나아가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 관 옆에 서 있던 우문천릉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담세기는 관 앞에 섰다.
번뜩......!
그의 깊디 깊은 눈 속에서 한 가닥 전광 같은 안광이 솟아나왔다. 그는 관 속의 시선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우문천릉에게 물었다.
"가주, 선부께서 돌아가신 사연은 무엇이오?"
그 말에 우문천릉은 탄식하며 말했다.
"본가 대대로 내려오는 패혈증이라는 괴질입니다."
담세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본인이 잠시 선부를 살펴 보아도 되겠소?"
"......!"
우문천릉은 안색이 변했다.
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도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그러나 담세기에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별다른 뜻은 없소. 이것은 다만 사부님의 당부였기 때문이오.""하지만......."
우문천릉의 얼굴에는 약간 항의하는 기색이 어렸다.
"가주, 무림인은 항상 죽음과 동반하고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오. 더구나 선부의 경우 무림의 안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오."우문천릉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확실히 담세기의 태도는 경시적이었다. 허나 어찌하겠는가?"뜻대로 하십시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담세기는 곧 관 앞으로 접근했다. 그는 유심히 시신의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뻗어 목 밑과 손목을 검사했다. 그의 행위는 분명한 것이었다. 혹시 유체가 가짜인지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중인들은 그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긴장감을 동시에 느꼈다.
'틀림없군.'
담세기는 무억양으로 말했다.
이미 그는 시체를 확인했으며 또한 완전히 숨이 끊어졌음도 확인했는데도 슬쩍 시체의 심장 부위를 눌렀다. 그것을 본 순간 우문천릉의 안색은 순간적으로 핏기를 잃었으나 곧 회복되었다.
담세기는 물러서더니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중하게 십배를 올렸다.
'운명을 향하여 화살은 떠났다.'
우문천릉은 자신을 향해 그렇게 뇌까렸다.
장례식은 무사히 치루어졌다. 비록 담세기의 행동에 대해 중인들은 한동안 술렁였으나 더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은 밀봉되었고 천기세가의 가법(家法)에 따라 처리되었다. 대대로 천기세가의 가주는 죽은 후 화장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
우문천릉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등이 벽에 반사되어 그의 관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눈이 광채를 발산했다.
'예상대로다. 담세기는 그의 밀명을 받고 문상을 온 것이 아니라 시신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우문천릉의 눈에 섬뜩한 살광이 번뜩였다.
'놈은 시신을 살피는 척하며 중수법(重手法)으로 심장을 눌렀다. 후후... 설사 무쇠로 만든 심장이라도 가루로 만들 무서운 중수법을.......'아... 그랬던가?
'후후... 어리석은 자여! 그대의 눈이 아무리 예리하다한들 어찌 내 우문천릉의 완벽한 계획을 눈치채겠는가? 봉황성... 이제 너희들의 시대도 그 운이 다해감을 아느냐?'우문천릉-- 대체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그는 야망의 불꽃을 가슴 속에 간직한 무서운 인물이었단 말인가?'모든 것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머지않아 바람이 몰려들 것이다. 후후훗... 피바람... 검은 바람... 미친 모래바람이... 중원의 하늘은 어두워질 것이다...후후후후후훗......!'무슨 뜻인가?
피바람... 검은 바람... 미친 모래바람이란......?
우문천릉은 화운거(華雲居)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곳에는 단목가영이 묵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그의 얼굴은 다시 창백한 병색으로 화했다.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가영소저, 얼마나 그대가 그리웠는지 아시오?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오직 그대만을 생각 했었소."처량한 탄식과 한숨은 상사병 걸린 약골문사의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이때 그의 등 뒤에서 자색 그림자가 흔들렸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담세기가 아닌가?
그는 미끄러지듯 회랑의 기둥 뒤로 몸을 감추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우문천릉이 사라지자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릉, 알 수가 없군. 네놈은 정말 책벌레에 불과하단 말인가......?"담세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움직여 봐야 나의 손바닥 안... 그러나 가영에게 더 이상 접근하는 것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 담세기가 있는 한은 말이다."스스슷.......
그의 모습은 마치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불가사의한 신법이었다.
적막에 싸인 천기보의 불빛은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고 그 절묘한 침묵 속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쏴아아......!
바람이 추녀 끝을 스치고 천기보의 화원을 스칠 때 문득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무서운 야망과 욕망의 청춘이 악마와 간통(姦通)하는 순간에 삽시에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과연... 또 하나의 겁풍(劫風)이 그 눈을 뜰 것인가?
아득한 암천(暗天)으로부터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뇌음이 일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과 함께 비라도 내릴 듯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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