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번째 편지 - 산책로 공원, 우면산 무장애숲길
제가 대구지검 차장검사 시절 새로운 관사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담당자에게 사무실에서 가까울 것, 신축 아파트일 것, 평수는 얼마나 될 것, 주위에 큰 마트가 있을 것 등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한 달여를 골라 9가지 조건에 만족하는 아파트를 관사로 정하였습니다. 제가 원하였지만 충족하지 못한 마지막 한 가지는 "아파트 주위에 등산로가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등산로가 있는 주거지는 흔하지 않습니다. 등산로가 있으면 아침 풍경이 달라집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등산을 하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산 근처 주거지들이 그런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죠. 제가 사는 남부터미널 부근에도 등산로가 있습니다. 바로 우면산 등산로입니다.
저는 가끔 이 등산로를 이용했습니다. 아침에 슈퍼빌 아파트 앞 아쿠아 육교를 건너 우면산 자락으로 들어서면 5분 이내에 심산유곡에 들어선 것 같은 풍경이 나타납니다. 해발 293미터짜리 산 정상의 소망탑까지 오르면 꽤 힘들지만 갔다 오면 아침나절 무엇을 해낸 듯한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제법 가팔라 무릎에 부담이 되어 다른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소위 둘레길입니다. 예술의 전당 뒷길을 큰 도로와 평행하여 걷는 길입니다. 아쿠아 육교에서 소리 쉼터라는 곳까지 다녀오면 1시간 반이 걸립니다.
평범한 산책로이지만 두어 번 깔딱 고개가 있습니다. 그 고개들 때문에 매일 가는 것은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봄부터 그 길 주위에 데크길 공사판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괜한 공사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레길은 그런대로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깔딱 고개가 있었지만 그것도 가벼운 등산길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주일에 한 두어 번 갈 때마다 데크가 점점 더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속도는 굉장히 빨랐습니다. 2-3일 지나면 또 몇 10미터가 만들어져 있고 이러기를 몇 번 하다가 지난 5월 15일 데크길이 개통을 하였습니다. 이름하여 <우면산 무장애숲길>입니다.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휠체어를 타고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이 길이 개통된 후 가끔 이 길을 따라 아침 산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운동은 좀 덜 되는 듯했지만 참 편하고 여유로웠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 아내와 같이 이 길을 산책하였습니다. 휴일 오후 <우면산 무장애숲길>은 아침 산책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 길은 둘레길이 아니라 '산책로에 있는 공원'이었습니다. 등산로가 공원이 되리라 상상하지 못하였는데 이 숲길은 그 자체가 공원이었습니다.
서울의 공원하면 용산 가족공원이나 한강 강변공원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공원이 주는 이미지는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30분만 지나면 더 이상 놀 거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부모는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지만 저는 딱히 할 것이 없습니다. 둘러볼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서울의 공원은 공원이라는 이름이 주는 설렘은 있지만 막상 그곳을 가봤을 때 저에게 주는 쾌적함이나 즐거움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숲길에 만들어진 공원은 전혀 달랐습니다. 산책길과 공원의 두 이미지를 같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산책로 공원은 저에게 1시간 반 정도 산책의 즐거움을 안겨줬습니다. 중간중간에 만들어진 벤치는 공원에서 느끼는 쉼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쉼터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는 것과는 다른 편리함과 쾌적함을 주었습니다. 이 산책로에는 군데군데 쉼터와 벤치를 많이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쉬면서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도 아내와 자리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삼십 분을 소요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발상이 등산로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등산로는 쉼 없이 걷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가다가 힘들면 바위나 나무뿌리에 불편하게 앉아 잠깐 쉬고 곧 일어나 길을 재촉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숲길은 등산로와 전혀 달랐습니다. 기존의 산책로와도 달랐습니다. 걷기에 편하다는 것 말고도 <쉼>을 숲길의 기본 속성으로 장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원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숲길을 걸으면서 서울 전역이 이런 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실현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울 외곽이 서울 둘레길 2.0이라는 것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위치한 서울 창포원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서울 동쪽을 따라 수락산, 불암산, 구룡산, 망우산, 고덕산, 일자산을 지난 다음 서울 남쪽을 따라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관악산을 거쳐 안양시, 광명시를 들렀다가 다시 구로구로 접어들어 서울 서쪽을 따라 봉산, 앵봉산, 북한산, 도봉산을 거쳐 다시 출발점인 서울 창포원에 도착합니다.
코스는 모두 21개였고, 코스 중 긴 것은 10.7km 짧은 것은 4.6km이었습니다. 21개 코스 길이의 총합은 156.5km입니다. 이 코스를 완주한 사람에게는 서울특별시장이 서울 둘레길 완주 인증서를 줍니다.
그중 몇 개는 우면산 무장애숲길과 유사하게 무장애길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보지 않았지만 그곳도 우면산 무장애숲길처럼 산책로가 공원으로 바뀌어 있을 것 같습니다.
산책은 우리의 생각(策)을 가볍게 흩트리는(散) 행위입니다. 그래서 산책길은 철학자와 관련된 일화가 많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그 길 중간에 있는 카를 데오도르 다리(Karl Theodor Bruke)를 매일 점심 식사 후 같은 시간에 건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합니다.
일본 교토에도 철학의 길(哲学の道)이 있습니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겼다고 해서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자들이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면서 생각을 흩트리면 그 생각을 정리(整理)하는 곳은 어디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산책에서 돌아와 그의 서재에서 생각을 가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면산 무장애숲길의 공원 벤치는 산책하며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로 정원은 산책과 정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생각의 보금자리입니다.
혹시 머릿속이 복잡하여 생각을 흩트리고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우면산 무장애숲길을 찾아가 보십시오. 머리가 맑아질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6.3. 조근호 드림
<출처 : 조근호의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