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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그리스어), 라틴어(로마 제국의 언어)를 포함한 12개 언어를 마스터했다는
프랑스의 언어천재 학자
장푸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
이 일화는 부친에게 “트로이를 찾아낼게!”라고 말한 다른 소년을 생각해냅니다.
어느 쪽이나 같은 확고한 신념과 몽유병적인 신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년 시대의 꿈은 무엇과 달랐을까.
샐리먼은 평생 독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샹폴리옹의 머리는 급속히 발달하여 반 아이들은 일찍부터 뒤지고 있었지만
그는 교육에 있어서의 정통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슐리만은 전문적인 지식 없이 일을 시작했지만
샹폴리옹은 그 당시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형이 그의 교육을 감독했다.
그는 소년의 지나친 지식욕을 억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무구한 학문의 숲 한가운데서 샹폴리옹은 무신을 가로질러 최고봉을 방황했다.
그는 12살때에 최초의 작품 ‘위대한 개의 역사’를 썼다.
그는 역사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아담으로부터 동생 샹폴리옹으로의 연대기’라고 부르고 있다.
13살때 아랍어 시리아어 칼데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콥트어를 배웠다.
놀랍게도 그는 배우고 행동했고 실제로 조우했던 것은 모두 이집트와 어떤 관계가 있었다.
어디를 생각해도 무의식 중에 이집트인의 의문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 고대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젠데, 파라비아어, 파르시어 교재에서 발췌한 것을 연구했다.
이러한 텍스트는 그르노블의 푸리에의 도움이 없으면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언어학이었다.
샹폴리옹은 파라오 왕국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했던 1807년 여름
17세 때 언급하는 모든 재료를 사용했다.
이 대담한 시도는
그가 성경과 관련된 것을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 원문이나 콥트어와 비교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경우에만 감사할 것이다.
콥트어는 구이집트어와의 연결이 하나밖에 없었다.
콥트어는 17세기까지 이집트 북부에서 쓰였다.
샹폴리온의 능력
샹폴리옹은 파리로 이사해 공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당국은 그가 직접 과목을 골라 논문을 쓰게 했다.
보통 학생들이 쓴 것 같은 논문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파라오 지배하의 이집트라는 책의 줄거리까지 썼다.
1807년 9월 1일, 그는 이 계획된 작품의 개요를 발표했다.
그르노블에 있는 리제의 교수들은 모두 무른 소년의 발표를 듣기 위해서 모였다.
그는 너무 긴장해서 그들 앞에 섰다.
천재의 뜨거움에 흥분해서 그의 얼굴이 빛났다.
그의 생각은 확고한 논리를 가진 대담한 제안을 계속했다.
교수들은 압도당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 소년을 교수로 삼기로 했다.
로놀던은 일어서서 챔피언을 껴안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업적을 고려한 결과 교수로 선정됐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당신이 유명해지면 우리가 처음으로 당신의 천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샹폴리옹은 하룻밤 사이에 장교생에서 교수로 승진했다.
리제 건물을 나오는 도중 샹폴리옹은 기절했다.
그는 당시 매우 섬세한 청년으로, 감정적으로 되기 쉬운 폭력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이미 많은 장소에서 천재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급속한 지적 성장은 유명하다.
육체적으로도 그의 나이에 조숙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파리, 수도, 유럽중의 중심지 그리고 그 정치적, 정신적 초점을 그렸다.
오빠와 함께 70시간을 타고 있던 무거운 마차가 파리에 가까워졌을 때
샹폴리옹은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뜨거운 환상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노란 파피루스가 눈앞에서 헤엄치고 12가지 언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푸리에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로제타 스톤이 생각났다.
로제타 스톤은 복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현무암에 새겨진 상형 문자는 너무 성숙해서 그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한 당국자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형제가 파리로 여행하던 중에 샹폴리옹이 갑자기 그의 은밀한 생각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피지에고에서의 야망을 말했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창백한 얼굴과 검은 눈을 하고 말했습니다.
"상형문자 해독합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닷풀이라는 남성이 로제타 스톤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차르는 포트 라시드의 페이허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책임자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 자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 요새는 나일에서 로제타 북서쪽 4.5마일에 있는 프랑스군에 의해
줄리안 요새라고 불렸다.
부차르는 슬라브를 카이로까지 수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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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학의 연구체계를 확립했고,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 때 이미 라틴어와 헬라어(그리스어)뿐만 아니라 6개의 고대 동양 언어에 통달했으며.
상형문자 해독은 계속된 관심사였다.
헬라어(그리스어) 문헌을 상형문자 및 민중문자로 옮긴 글이 새겨진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어,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이 이 비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을 거둔 뒤,
이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1821~22년에 로제타 스톤에 씌어진 상형문자와 신관문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상형문자 기호와 거기에 대응하는 헬라(그리스) 문자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작성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관 관장을 지냈고, 고고학 탐사를 위한 이집트 탐험대를 지휘했다.
목차
이집트학 연구의 체계를 확립했고,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 때 이미 라틴어와 헬라어(그리스어) 뿐만 아니라 6개의 고대 동양 언어에 통달했다.
또한 프랑스 그르노블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에서 그는 콥트어가 이집트 고대 언어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공부한 뒤, 19세 때 그르노블 고등학교의 역사 교사가 되었다(1809~16).
한편 상형문자 해독은 그의 끊임없는 관심사가 되었다.
헬라어(그리스어) 문헌을 상형문자 및 민중문자로 옮긴 글이 새겨진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어,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이 이 비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을 거둔 뒤에야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1821~22년에 그는 로제타 스톤에 씌어진 상형문자와 신관문자(神官文字)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상형문자 기호와 거기에 대응하는 헬라(그리스) 문자에 대한 완정한 목록을 작성했다.
그는 상형문자 기호 가운데
일부는 자모이고
일부는 음절이며
일부는 앞에 나온 개념이나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지시대명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열리기를 기다리는 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고대 이집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가 마침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발견은 다른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일부 학자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인신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관 관장이 되었으며(1826), 고고학 탐사를 위한 이집트 탐험대를 지휘했으며(1828),
콜레주 드 프랑스에 그를 위해 특별히 신설된 이집트 고대 문화 강좌를 맡기도 했다(1831).
이집트어 문법책(1836~41)과 이집트어 사전(1841~43) 외에도
그의 저서에는 〈상형문자 입문 Précis du système hiéroglyphique, etc.〉(1824)·
〈이집트 신전, 고대 이집트의 신화적 인물집
Panthéon égyptien, ou collection des personnages mythologiques de l'ancienne Égypte〉(1823~25, 미완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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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년 12월 23일 ~ 1832년 3월 4일)은 프랑스의 이집트학 연구가로서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샹폴리옹은 프랑스의 옥시타니 로트주 피작(Figeac)지방에서 7명의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7년 동안 그르노블(Grenoble)에서 지냈으며 유년 시절부터 언어학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었다.
16살이 되던 해에 12개의 언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천재였으며 16살,
대학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콥트어(고대 이집트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살이 되던 해에 그는 라틴어, 헬라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1809년에 그르노블 대학에서 역사학 부교수가 되었고 그의 동양학,
특히 콥트어에 관심이 많은 결과인지,
그 결과 당시 발견된 로제타석에 적힌 글의 해독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22~1824년간을 로제타석의 해독에 매달리게 된다.
끊없는 연구 끝에 필레에서 발굴된 오벨리스크 하나를 참조할 수 있었고
로제타석에 오벨리스크의 문자를 대입해 마침내 이집트어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작품 《Précis du système hiéroglyphique》은 현대 이집트학을 탄생시킨다.
그의 이집트학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영감을 받은 것이고 샹폴리옹은 프랑스 대학교에서 이집트학 교수가 되었다.
이집트 상형문자
토마스 영은 스웨덴 외교관 요한 아케르블라드의 조사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을 최초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그는 몇몇 문자를 번역할 수 있었지만 완전한 해독에는 이르지 못했다.
영의 작업은 후에 샹폴리옹이 해독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1822년 샹폴리옹은 마침내 처음으로 해당 문자의 정확한 해독에 성공하고
고대 이집트어의 문법을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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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나폴레옹은 군대의 최전선에서 그르노블에 입대했다.
너풀거리는 횃불 빛이 그의 얼굴에 흩날리면서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마지막 긴장의 순간 나폴레옹은 벽의 대포를 향해 홀로 섰다.
역사적 장면에서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멜로드라마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위에서는 포수가 어쩔 수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 '나폴레옹 만세!'라는 외침이 터져 모험가가 들어와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드파인가의 심장인 그르노블이
나폴레옹의 개량 계획으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샹폴리옹의 형 피지는 나폴레옹의 숭배에 동정하고 있다고 항상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제 그는 편하게 열정을 표현했다.
나폴레옹은 유능한 개인비서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시장은 피지에고를 데리고 왔다.
피지에고의 이름은 샹폴리옹으로 조금 틀렸다.
길조입니다.
황제는 반은 제 이름과 같다고 말했죠.
황제가 형에게 인터뷰했을 때 샹폴리옹에게는 무관심했다.
나폴레옹은 젊은 교수에게 연구에 대해서 물었다.
황제는 그에게 오랫동안 말을 걸었다.
그는 콥트학 연구를 파리에서 출판하겠다고 제국주의적으로 약속했다.
아마 그는, 젊은 교수의 언어 연구의 화제를 꺼내기 위해, 다음날 상파울루 대학의 도서관을 방문했다.
이집트를 정복한 2명이 마주보고 섰습니다.
1명은 나일의 땅을 세계정복에 포함시켜
거대한 관개시설을 건설함으로써 나라의 경제를 살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집트 땅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었지만
고대의 유적을 마음의 눈으로 천 번이나 목격하고 순수한 지식의 힘으로 되살려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콥트어를 표명하는 공식적 용어로 표명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콥트어를 표명했다.
황제로서의 나폴레옹의 상상력이 샹폴리옹과의 만남에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실각은 일시적인 복귀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엘바는 망명자였지만 세인트 헬레나는 묘지가 될 것입니다.
부르봉 가족은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강인함과 복수심이 부족했다.
그래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유대인은 마치 하늘에서 만나는 것처럼 벌을 받았습니다."라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피지는 나폴레옹을 뒤쫓아 파리로 간 것이 완전히 밝혀져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샹폴리옹 사이에는 정치적 즉결 재판의 절차상의 차이는 없었다.
그것은 잘못이며 그르노블에 앙심을 품고 그에게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를 바로잡지 못하게 했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백일의 시대'의 막판에 사방팔방으로 원한을 품고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를 바로 세우지 않도록 했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백일의 시대'의 무모한 일의 막판에 사방팔방으로, 즉흥적으로, 사방으로 샹폴리옹은
이 중대한 전술상의 실수를 저지르고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사기 위해 1,000프랑을 마련했다.
왕당파가 그르노블에 진출하자 샹폴리옹은 벽에 나타나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방위자를 도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라투스 장군이 마을을 포격해 샹폴리옹의 귀중한 원고가 손상되었을 때
젊은이들은 벽에서 뛰쳐나와 도서관의 3층으로 올라가 정치와 전쟁을 잊고 있었다.
전진하자 그는 큰 건물에 홀로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파피루스를 구하고 물과 모래를 날라 불을 껐다.
샹폴리옹이 드디어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한 것은 반역죄로 대학을 중퇴한 후였다.
추방은 1년반 계속 되고, 그 후 파리와 그르노블에서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그 후 그는 반역죄를 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1821년 7월 그는 학생들에 의해 교수로 키워진 도시에서 도망쳤다.
1년 후, 그는 유명한 ‘상형문자에 관한 다시상’을 출판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사원의 비밀을 밝히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많은 코멘트가 쏟아지면서
상형문자 해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고대 학자들은 대부분 상형문자를 언급하며 중세에는 해석들이 많았다.
헤로도토스, 슈트라보, 디오돌스는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상형문자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문자라고 말했다.
기원전 4세기, 호라폴론은 이 글씨체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남겼다.
후에 작가들은 호라폴론의 해설을 공통의 출발점으로 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지지해야 할 정보원이 없기 때문이다.
호라폴론은 상형문자는 그림문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림에 순수한 상징적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다음 세기에 퍼진 이유다.
이 전통 덕분에 비학계 사람들은 상상력을 북돋워 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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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기호의) 집합들이 나를 멈춰 세웠어.
그것들을 연구하고, 하루 종일 생각해 봤어. (중략-) 그렇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
헬라어(그리스어), 라틴어(로마 제국의 언어)를 포함한 12개 언어를 마스터했다는
언어천재 장푸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이 한창 이집트 문자 연구에 몰두하던 청년 시절
열두 살 위인 형 자크조제프에게 부친 편지에서 토로한 말이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그에 따른 대량의 고대 이집트 자료 유입이 촉발한
'이집트 열풍'에 그 문자를 해독해 보리라 작심한 젊은 언어학도도 이렇게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하지만 이로부터 14년 뒤 이제는 중년이 된 샹폴리옹은 마침내 문자 해독에 성공한다.
이로써 나폴레옹 원정대가 발견했지만
영국군에 빼앗겨 버린 로제타석을 일생의 라이벌인 영국 학자보다 앞서 판독하는 데 성공한다.
판독에 성공한 그 순간의 샹폴리옹 행적은 드라마틱하게 전한다.
1822년 9월14일 정오 무렵,
파리 마자랭 거리 28번지에 칩거하며
이집트 성각문자(신성문자라고도 함) 해독에 마침내 성공했다고 확신한
그는 집을 뛰쳐나와 200m 거리를 단숨에 달려 프랑스학술원으로 들어선다.
형 자크조제프의 학술원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그는
원고뭉치를 흔들며 "발견했어"라는 말을 외치고는 곧 기절해 버렸다가
닷새 만인 9월19일 저녁에야 겨우 의식을 회복한다.
정신을 차린 그는 이튿날 연구를 재개해
"1822년 9월27일 어둡고 축축한 금요일 저녁에 모든 학문 분야의 전문가"가 참석한
금석문 학회 모임에서 그 자신이 밝혀낸 성과를 공개했다.
실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때 청중석에서는
이 자리에서 직접 대면은 처음인 이집트 문자학의 라이벌 토머스 영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는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판독함으로써 마침내 삼천 년 고대 이집트 역사가 서광을 여는 순간이었다.
고대 근동어 전문가인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번역한 레슬리 앳킨스와 로이 앳킨스의 단행본 '문자를 향한 열정'은
'세계 최초로 로제타석을 해독한 샹폴리옹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그 성격이 잘 드러난다.
2000년 영국에서 나온 원서 제목은
'이집트의 열쇠: 성각문자 판독으로 가는 여정'(The Keys of Egypt: the Race to Read the Hieroglyphs).
제목이나 부제 어디에도 샹폴리옹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이 책은 그의 평전이면서 동시에 고대 이집트 문자 판독의 여정에 대한 보고서다.
영국 런던고미술협회 전문위원이자 부부 고고학자인 저자들은
아직 장교 신분인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이듬해인 1790년 단행한
이집트 원정을 추적하는 데서 문자 판독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 원정대에 학자들이 포함됐으며,
그들이 군대를 따라 어떤 일을 했으며,
로제타석은 어떻게 입수했고,
또 그것을 넬슨이 이끄는 영국군이 어떻게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정리했다.
이어 저자들은 프랑스혁명과 그 여파에 따른 나폴레옹의 집권, 유럽 침공전, 제국의 몰락 등등
시대 흐름과 부침을 같이하면서 샹폴레옹이 어떠한 간난들을 뚫고서
마침내 불후의 업적을 내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왕관들의 주인, 위대한 영광, 이집트를 세웠으며 신들 앞에서 경건하고 적들에게 승리한 자,
인류의 문명 생활을 되찾은 자, 삼십 년 축제의 주인인 부왕에게서 왕권을 물려받은 젊은 왕의 통치"
이런 문구로 시작하는 로제타석의 성각문자 판독에 나아가기 위해
샹폴리옹이 콥트어를 그토록이나 연마했다는 대목에서는 불굴의 집념이 오롯이 드러나기도 한다.
콥트어는 이집트 크리스토교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고대 이집트어의 흔적으로 간주된다.
1803년 3월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집트어 판독을 위해
"나는 콥트어 연구에 전념하겠어"라는 결심이 보이기도 한다.
실제 이런 배경은 샹폴레옹이 나중에 로제타석 문자를 판독하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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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12월 23일 프랑스 시골 마을 피자크에서 태어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타고난 언어 신동이었다.
어렸을 때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읽기와 쓰기를 터득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쓰기’를 베껴 그린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한 편의 글을 그림들의 집합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습관은 나중에 샹폴리옹이 성각 문자를 해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미 열여섯 살에 헬라어(그리스어), 라틴어(로마 제국의 언어) 등 12개 언어를 마스터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대 언어와 이집트 문명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이집트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나폴레옹 원정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유물과 문서, 각종 자료들이 전 유럽에 넘쳐 났고,
많은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앞다투어 나섰다.
우연히 이집트에 다녀온 학자 조제프 푸리에를 만난 어린 샹폴리옹은
돌과 파피루스 조각에 새겨진 성각 문자들을 보고 자신이 반드시 그것을 해독해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젊은 치기였는지, 자신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샹폴리옹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고
결국 세계 최초로 이집트 성각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학자들에게 성각 문자 해독의 단초를 제공한 유물은, 단연 로제타석 비문이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로제타석에는
똑같은 내용이 헬라어(그리스어), 성각 문자, 민중 문자로 각각 쓰여 있다.
학자들은 읽을 수 있는 헬라어(그리스어)를 중심으로 미지의 언어인 성각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애썼지만
오랫동안 연구는 답보 상태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각 문자=표의 문자’라는 전제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그 틀을 깨고 ‘성각 문자=표음 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바로 샹폴리옹이다.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텍스트와 성각 문자 텍스트를 비교한 끝에,
성각 문자 텍스트에는 가변성이 있고 그것은 표음 문자와 표의 문자가 혼합된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성각 문자를 해독해 냄으로써 수많은 고대 이집트 유적과 유물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미궁에 빠져 있던 고대 이집트학 연구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프랑스와 영국의 명예를 건 세기의 대결에서 집념과 끈기로 승리하다
샹폴리옹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기까지 많은 난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격동기를 살았던 그는 끊임없이 위기에 직면했다.
유럽 각지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강제로 군대에 징집되어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의 도움으로 매번 그 위기를 가까스로 넘어갈 수 있었다. 또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 정국이 요동치면서 연구소와 대학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침에 따라, 샹폴리옹의 입지는 항상 불안했다. 그는 언제나 가난과 불안,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원래 몸이 약했던 그의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중간에 쫓기고 유배를 당하고 반역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외부 요인도 성각 문자와 고대 이집트 연구에 대한 샹폴리옹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들이 먼저 성각 문자를 해독할까 걱정했다. 르누아르, 오셰르블라드, 카트르메르 등이 속속 연구 업적을 발표하면서 샹폴리옹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잘못된 것이었고, 샹폴리옹은 자신이 이 경쟁의 승리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품고 꿋꿋이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 그에게도 숙명의 라이벌은 있었다.
샹폴리옹의 최대 경쟁자는 영국 학자 토머스 영이었다.
샹폴리옹과 달리 영은 어릴 때부터 각종 교육 혜택을 충분히 누렸고
의사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유산도 상속받았다.
오리엔트 언어에 관심이 있었던 영은 로제타석 비문 해독에 나섰고,
심지어 한때는 샹폴리옹을 앞서 나가기까지 했다.
샹폴리옹은 자신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경쟁자에게 위기감을 느꼈으며,
심지어 영이 로제타석 비문 해독에 대한 중요한 연구 성과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등재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사실에 초조해했다.
더구나 이집트 열풍이 전 유럽을 휩쓴 가운데 샹폴리옹과 영의 학문적 경쟁이
프랑스와 영국의 명예를 건 세기의 대결로까지 비쳐졌기에
두 사람의 경쟁은 더욱 과열되었고 그만큼 부담감도 커졌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영의 한계였다.
성각 문자 외에도 의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던 영은
결국 성각 문자를 완벽하게 해독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와 달리 샹폴리옹은 성각 문자와 고대 이집트학이라는 한 우물에만 평생 집중했고,
로제타석 비문을 중심으로 성각 문자 텍스트를 다각도로 연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샹폴리옹은 토머스 영을 누르고 ‘세계 최초의 성각 문자 해독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 크리스토교와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고대 이집트학의 창시자
샹폴리옹은 고대 이집트 유물을 분류하고 조사하는 작업에도 헌신했다.
1826년에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처음으로 생긴 이집트관의 큐레이터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이집트에 관심 있는 학자라면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오랫동안 학계 변방에 있었던 샹폴리옹이 이로써 대외적으로 당당히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는 관람객들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얻고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샹폴리옹은 이집트 유물에 적힌 글들을 해독하여
그것들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원칙에 따라 배치했다.
당시에 전시품들을 예술적 가치에 따라 배치하던 관행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1828년 샹폴리옹은 프랑스의 샤를 10세와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의 원조를 받아
직접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샹폴리옹을 중심으로 한 학자 일행은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 클레오파트라의 비문 등을 직접 보고,
나일 강을 따라가며 고대 유적들을 탐사했다.
그들은 테베, 아스완, 아부심벨 등 다양한 지역을 돌며 신전과 무덤에 있는 수많은 벽화와 글 들을 모사했다.
고단한 일정에 샹폴리옹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지만,
그래도 그는 이집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고 느꼈고 몹시 행복해했다.
현재 이집트 유적들 중 상당수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샹폴리옹 원정대의 기록들은 매우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 탐사를 통해 샹폴리옹은 크리스토교에서 주장하는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고대 이집트 문명이 존재했음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크리스토교에서 주장하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어서,
당대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1830년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샹폴리옹은 자신의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 상태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병을 앓으면서도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 나갔으나 끝내 1832년 3월 4일 운명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형 자크조제프가 그의 미완성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고,
이는 고대 이집트학 연구의 기틀이 되었다.
『이집트어 문법』과 『이집트어 사전』은 이후 성각 문자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고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전 유럽에서 등장했다.
샹폴리옹 덕분에 성각 문자 기록들을 읽을 수 있게 된 학자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이집트 문명의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샹폴리옹은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고,
그가 살았던 지역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과 거리 등이 남아 있다.
고고학자인 레슬리 앳킨스와 로이 앳킨스가 쓴 이 책을 통해
고대 이집트학의 선구자 샹폴리옹의 크나큰 열정과 끈기를 생생하게 느끼고,
고대 이집트 문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