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제정된 남북 체제 경쟁 차원의 선언적 조항들
기업은 경쟁시장에서 형성된 임금과 근로조건을 제공할 수밖에 없어
60~70년대에 근로기준법 완벽히 적용했다면, 기업들 문 닫고 근로자들 실직했을 것
자유경제원에서 열렸던 전태일 관련 한 세미나에서 필자는 전태일의 분신 장면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내려와서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석유 냄새가 펄펄 나는 친구의 몸에 성냥불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타오르는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고 하는데, 이럴 수 있었을까? 그러자 세미나에 같이 참석했던 류석춘 교수가 다른 분신 장면을 서술했다. 김개남이 등장하지 않으며,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고 갑자기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필자가 읽은 『전태일 평전』은 1983년 초판이었고 류 교수가 읽은 것은 2009년 신판이었다. 이 두 서술의 차이가 왜 생긴 것인가? 추후 류 교수는 김개남이 누구였을까를 추적한 연구물을 냈다.
전태일이 죽으면서까지 준수하라고 절규한 근로기준법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5월 제정되었다. 전쟁 중 북한이 노동자 천국이라고 체제 선전 공세를 해대는 상황에서 남한도 근로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노동조합법 및 노동쟁의조정법이 1953년 3월 제정・시행되는 등 노동 관련법이 모두 정전 전에 제정되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이 노동 관련법 대부분의 조항들은 남북한 간 체제 경쟁 차원에서 선언적인 의미의 조항들로서 그 당시에 지켜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노동법 체계는 1961년 이후 일부 개정을 통해 구체화되었을 뿐이고 1970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분신자살할 때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0년대에 시행되었던 근로기준법은 상시 16인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만 적용되었다. 퇴직금, 월차유급휴가, 18세 이상 여자의 시간외근무 제한 관련 조항은 상시 16인 이상 30인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근로시간은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하고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까지 늘릴 수 있었다.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했다. 사용자는 연장근로와 야간근로 또는 휴일근로에 대하여는 통상임금의 100분의 50이상을 가산하여 지급하여야 했다. 사용자는 1월에 대하여 1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했고, 1년간 개근한 근로자에 대하여는 8일, 9할이상 출근한 자에 대하여는 3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월 1일의 생리휴가와 산전후를 통하여 60일의 유급보호휴가를 주어야 했다. 일정한 사업에 대하여는 사용자는 근로자의 채용 시와 정기로 의사에게 근로자의 건강진단을 시켜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사업의 종류와 규격 또는 정기 건강진단의 횟수를 정하는 규정이 관련 시행령에 없었다. 13세 이상 16세 미만자의 근로시간은 1일에 7시간 1주에 42시간을 초과할 수 없었으며 사회부의 인가를 얻은 경우에는 1일에 2시간 이내의 한도로 연장할 수 있었다. 여자와 18세미만자는 야간 및 휴일 근로가 금지되었다. 산업재해보상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 제8장의 16개조가 규정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아버지와의 대화 도중에 이런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 전태일 본인이 하루에 14시간(식사시간 포함)씩 1주에 7일을 일했으며 한 달에 2일만 쉴 수 있었다. 전태일은 신경성 위장병, 안구충혈, 신경통을 앓고 있었지만 건강진단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공이나 18세미만자의 실태는 더욱 열악했다. 천장의 높이가 1.6m 정도라서 허리를 펼 수 없었고,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았고, 너무 밝은 조명 아래에서 일하므로 햇빛 아래서는 눈을 뜰 수 없었고,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 찬 방에서 하루 13 ~ 16시간씩 일해서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었다. 근로환경은 성장기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크게 분개했으며 이를 개선해 보고자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김개남과 더불어 1969년 조직하였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여 이 “바보회”를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역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69년 여름 해고되었고 평화시장에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어 구로동, 남대문, 동대문 등에서 임시직을 전전하였다.
전태일은 1969년 8 ~ 9월경 노동실태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찾아 갔으나 실태조사 한번 나오고 반응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 각하”에게도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가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이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고 있었다. 1970년 여름 삼각산 기슭의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신축공사장 인부로 4개월 일한 후인 9월 왕성사 재단사로 취직하였으나 10월 초 해고되었다. 10월 7일 경향신문 등에 평화시장의 실태를 보도하는 기사가 게재되었고 업주들은 11월 7일까지 평화시장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자살하였다.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법을 지키라고 전태일이 주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행정관청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 기업주와 근로감독관을 처벌하지 않은 것도 잘못된 것이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적인 업체를 설립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계획한대로 업체를 운영할 수 없었다는 반증(counterevidence)이다. 평화시장의 모든 기업주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악덕 기업주라고 단죄할 수 있는가? 당시 평화시장에는 의복을 만드는 천여 개의 기업, 3만여명의 종업원이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있었다. 다른 기업보다 임금을 덜 주거나 근로조건이 나쁘면 그 기업은 근로자를 고용할 수 없었다. 모든 기업은 경쟁시장에서 형성된 임금과 근로조건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근로기준법을 준수했다면 그 기업은 문을 닫아야 했고 그곳에 고용되었던 근로자들은 실직했을 것이다.
원래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1987년 이전에 근로기준법 등의 불철저한 집행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정부의 억압이 비현실적인 노동법의 폐해를 수정하는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이렇게 할 수 없게 되었던 1988년 이후 1997년 기간 동안에는 임금이 한계노동생산성을 상회하였다. 이 상회는 해마다 누적되어 1996년의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을 14%나 초과하였다. 6・29선언 이전과 달리 이 기간에는 노동조합 활동이 활성화됨으로써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을 준수하게 되어 임금이 한계노동생산성을 상회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을 실물경제에서 찾는다면 한계노동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이 10년간 지속되어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이 임계치를 넘는 순간 경제위기가 닥쳐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적용해 보자. 이 시기에 근로기준법 등을 철저히 지켰었다면 경제가 성장하기도 전에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근로기준법의 불철저한 집행과 노동조합 활동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의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이 경제상황과 맞지 않는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이상적인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기 매우 어려웠고 임금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전태일은 1970년 9월경에 설문조사에서 본인의 월급을 23,000원으로 응답하였다. 노동청의 1970년 『직종별 임금조사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남자 기자의 월평균 임금이 22,700원, 남자 교직자의 월평균 임금이 37,200원이었다. 그 당시 기자와 교직자는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었다는 점과 연령도 상당히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등학교를 중퇴한 22세 청년 전태일의 월급 23,000원은 결코 낮은 임금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삼동(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에 근무하는 재단사의 월급을 15,000원 ~ 30,000원으로 대학노트에 적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970년 청계의류 재단사의 임금은 30,000 ~ 153,000원이었다. 전태일의 월급 23,000원에 12를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6,000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이었다. 이 비교는 전태일의 소득이 그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꽤 높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당시의 근로자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1970년의 87,000원을 국내총생산 디플레이터를 이용하여 2017년 원화로 환산하면 234.2만원이다. 2017년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3,363.5만원이므로 1970년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2017년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7.0%에 지나지 않는다. 일인당 실질 국내총생산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노동생산성이 낮아서 근로자들이 절대적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1964년 봄경 평화시장 안의 한 업체의 견습공(시다)이 되었지만 구두닦이, 우산장사 등의 일을 간간이 하다가, 1965년 가을 평화시장 삼일사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본격적으로 평화시장의 근로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견습공을 시작할 때 월급은 1,500원이었다. 사직・해고와 취업을 반복하여 1970년 월급은 23,000원이 되었다. 6년 사이에 15.3배 증가한 것이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이 7.6배나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들어온 이후 사직하거나 해고되면 곧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실질임금이 빠르게 오르고 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이 견습공에서 미싱사,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될 정도로 기능을 향상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의 집행은 불철저했으며 그 정도는 변화가 없었으므로, 본인의 인적자본 축적과 시장의 힘에 의해 실질임금이 급증한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전태일의 이타심(altruism)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근로기준법은 지켜질 수 없는 법이었다. 비현실적인 근로기준법이 한 아름다운 청년을 안타까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박기성 객원 칼럼니스트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