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56회
철수에게 점심을 얻어 먹고 도서관을 갔습니다. 누나가 동생에게 얼르 듯 철수에게 꼭 공부
하라는 당부를 하고선 연구실로 갑니다. 더운 날씨, 연구실에
있기가 답답할 것 같았습니다. 금방 공부하라고 당부해 놓고 온 철수를 찾아가 내가 심심해
졌어, 같이 놀아.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약대로
가지 않고 바로 교문을 나와 버렸습니다.
한산한 거리, 더운 햇살. 내 시야에 정희의 약국이 놀다가라고 손 짓하는 것 같네요.
약국 문을 열었습니다. 정희는 약국 구석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더군요. 너 참 심심한가 보구
나.
"어? 너 이 시간에 왠일이야?"
"학교에 있기 싫어서."
"어제 내가 철수 가지고 놀린 거 따지러 왔니?"
"내가 어린애니? 그런걸로 따지게."
"제법 삐치던데 왜?"
"좀 놀다 갈게."
"그래라. 안 그래도 심심했었는데..."
진짜 심심했군요. 시원한 약국 안에서 보는 바깥, 이 약국 만큼이나 무료해 보입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지나는 사람들도 드물고 학교만 아니었으면
교외의 한적한 시골마을 같았을 이 곳, 방학이라 학생들이 빠져나간 이 곳은 이름 낯선 면
소재지 같은 느낌입니다.
"차라도 한 잔 끓여봐."
"씨, 어제 철수도 들어 와 바로 차나 한잔 끓여 달래더니... 완전 한통속이야. 둘 다 약 지어
가는 꼴을 못봤어."
"훗. 내가 철수와 사귀는 게 웃기니?"
"아니 왜."
"지금 네 말투가 아주 재밌다는 투다?"
정희는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시원한 냉커피를 대접했습니다.
"어제 철수가 냉커피 달랬어. 너도 이거 마셔."
"후후. 고맙다. 요즘 약 장사는 잘 되니?"
"너도 약 장사라고 그러니?"
"어머, 미안. 철수에게 배웠어."
"방학 때는 뭐. 그래도 지난 달과 평균 내면 병원에서 받던 월급보단 나아."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지 않니?"
"아니. 이 약국 차릴 때 내 결혼 자금 저당 잡혔지만 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아. 내가 노력
하던 하지 않던 병원에서 받는 월급은 거의 같았어.
한 달 월급을 받고 다음달도 이만큼의 월급을 받을 것이다. 물론 보너스란게 있었지만 거의
고정적이었지. 미래도 비슷할 것 같았어. 하지만 여긴 달라.
내가 약국 차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모르지만 이번 달에 이만큼 수
입을 올렸다고 다음달도 이만큼이다라는 보장이 없거든. 물론
첫 두달을 제외하곤 그 다음달 부터는 수입이 비슷했어. 그래도 정해져 있는 급료를 받는
것하곤 느낌이 틀려. 다음달은 더 나을거다... 흠, 재밌어."
"철수가 약장사, 약장사 그러는 이유가 있구나."
"훗, 또 철수를 꺼집어 넣는다."
"우리 잘 어울려 보이던?"
"쿠쿠, 참 재밌어 보여. 부럽기도 해."
"너 철수 알고 지낸지 오래 되었잖아. 진짜 연하라는 이유 때문에 관심이 없었던 거야? 우
리 사이가 부러우면 네가 사귀지 그랬어?"
"허허, 어제 질투한게 맞구만."
"그거 아니라니까."
어제 기분이 좋았던 것은 절대 아니에요. 기분 나빴어요. 철수와 단 둘이 있을 땐 모르겠는
데 정희와 셋이 있게 되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보다
정희가 철수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정희가 철수와 더 친해 보인다는 생각. 그 생각에 솔직
히 질투심이 생깁니다.
"나 너무 신경 쓰지마라. 내가 철수를 좋아하긴 해도 한 번도 남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
니까."
"왜에? 연하라서?"
"아니야. 내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없어서 그래. 걔는 참으로 밝아.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부류야. 현실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틀에 갇힌
소년처럼 이상적이기도 하지. 사람 때문에 고민은 해도 그 사람 뒤에 있는 현실 문제 때문
에 고민하지는 않아."
"어렵다?"
정희가 타 준 냉커피가 좀 쓰네요. 기집애가 커피 맛을 잘 모르군요. 정희는 읽던 책을 덮고
나를 빤히 쳐다 봅니다.
"너 장난 아니지?"
"뭐가?"
"철수 사귀기로 한 거?"
"응."
"상처 주지마. 상처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너에게 버림 받으면 상처가 오래 갈 것 같애."
철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정희의 말투가 맘에 들진 않지만 내가 가
진 생각과 비슷합니다.
"내가 상처 줄 것 같니?"
"아니."
"그런데 왜?"
"어줍잖은 현실 문제 꺼내면서 너네 둘 사이 멀어지게 하지 말라구."
"무슨 말이야?"
"내가 철수를 남자로 보지 않았던 건 걔는 자기 주위의 삶에 대해서 밖에는 알지 못해. 자
기와 비슷한 수준의 밝은 생활밖에는 모르는 애야. 그 속에서는
많은 고민도 하고 경험도 해 보았겠지만 틀을 벗어나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 같을 거야.
철수는 앞으로의 삶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 해.
삶의 여러모습에 대해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 기회도 없을 것 같아."
"너 철수에게도 이렇게 어려운 말 했지?"
"그렇다."
"사회생활 2년차가 뭘 그리 많이 안다고?"
"후후, 나는 좀 약았어. 예전부터..."
약았다? 뭐가 약은거지? 나는 정희가 좀 밋밋하다는 생각은 해도 약았단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요.
"네가 왜 약았는데?"
"아직 멀었어. 난 좀 더 약아야 돼. 그럴려고 생각 중이야. 우리 집은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여유가 있는 형편이 아니야. 요즘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늘
이것저것 걱정이 많아."
"갑자기 그 말을 왜 해? 너네 집 못살지는 않잖아."
"못 살지는 않다. 그 말은 현실 문제에 대해 걱정할 게 많다는 수준을 뜻하지.
여유보다는 부족한 게 많은, 그로 인해서 돈 문제로 고민해야 할 게 많다는 그런 뜻이야. 난
앞으로 내 삶의 여유를 부모님에게 떠 넘길 수 있는 처지가
못 돼. 대학 사학년 때 학비는 내가 마련해서 냈어."
"이 약국?"
"훗, 부모님 이름만 빌린거지. 부모님 이름으로 돈을 빌리고 내가 갚는 식이야. 물론 부모님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돈이 나왔지만 내가 부담한 게 훨씬
많아."
"그랬구나."
"음, 철수가 왜 남자로 보이지 않냐고 물었잖아. 철수네는 부자였어. 걔를 보면 어둔 구석이
없었어. 단란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못 느끼고 자란
애란게 표가 나. 그런 애들은 자기의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해도 쉽게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지. 어찌보면 참 답답할 때가 많아. 벗어나지도 못할 거면서
그리고 또 그럴 마음도 없어면서 쓰잘데기 없는 고민들은 왜 그렇게 또 많이 하누. 사치스
럽다는 거지. 철수도 그랬어. 철수가 별 것도 아닌걸로
고민이랍시고 나에게 틀어 놓았던 게 얼마나 많은 줄 모르지? 너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모
두 현실과는 무관한 하늘의 뜬 구름 잡기식의 고민들이었어.
철수를 보면 참 생각없이 보이는 경우가 많아. 현실에 대해 무감각할 뿐더러 별 꿈도 없어
보여. 그치만 그런 철수가 참 좋았어. 그래서 남자로 보이지
않아."
"이게 지금 날 놀리나. 조,좋다면서 남자로 보이지 않다니."
"내 계산상으로 철수는 남자로 보여선 안돼. 그게 서로를 위해 좋아. 철규씨와 헤어지고 철
수가 남자로 보일뻔도 했어. 바보같이 말이야."
"너..."
"더 들어 봐 이 기집애야. 난 사랑은 밋밋하게 해도 현실 고민은 하지 않고 살고 싶어. 약국
을 차린 것은 많은 부담이 있지만 좀 더 나은 생활을 꿈꿀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고 예전 철규씨를 오랫동안 사귀었던 것은 그 사람 배경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밋밋하지만 그 사람하고 살게되면 현실 문제로
걱정은 하지 않을 것 같았어. 나 약대출신 여자야. 약대 출신 여자가 맞선 시장에서 인기 있
는 거 알지? 내게 주선 들어 오는 남자들 꽤 괜찮던데?
철수는 생각없이 보여서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워."
"철수가 그렇게 생각없이 보이니?"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아직 학생이고 어리니까 그런거겠지."
"너도 생각없이 보여."
"응?"
"생각없는 애는 생각없는 애와 살아야 돼."
"야! 너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
"기분 나빴니?"
"그럼 그 말 듣고 기분 좋겠니?"
"난 좀 약았어. 분명 그래. 사람을 볼 때 이것 저것 계산을 많이 해."
"그건 나도 그래."
"후, 넌 사람 그 자체를 가지고 계산하지. 나와 성격이 맞니, 그 사람 순수하니 착하니 이딴
거, 그리고 유치한 사랑 문제들. 난 그런 걸로 계산하지는
않아. 니가 예전에 내게 꺼내 놓았던 고민들,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참 웃겼어.
그 나이때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네게는 참 중요한 문제였구나라고 생각
했지만 가벼워 보였어. 내 방에 철수가 있을 때 네가 찾아와
동아리 선배와의 어색한 관계를 걱정 했었잖아. 난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대수롭지도
않게 여겼어. 잠시 가졌던 감정들, 시간 지나면 그냥
없어지는 데 뭘 그리 심각해 하냐라고 반문하고 싶었어. 근데 철수는 그게 아니더라. 툭툭
내 뱉긴 했어도 자기가 많이 생각했던 거라 소신있게 대답을
했었지. 그때 너네 둘이 친해 질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어."
"너, 계속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어줍잖게 약은 내가 보기에도 너네 둘은 참 철부지들이야. 사회의 어둔면과 약은 면은 하
나도 모른 채 누가 봐도 참 유치하게 노는 것 같애."
"야!"
"그래서 부러워. 세상이 너네들을 속이면 너네 둘은 아마 껴안고 울기는 해도 너네들을 속
인 세상을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아. 속이면 속이는대로
울리면 울리는대로 그렇게 살 것 같애. 밝아서... 너네 둘, 지금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
가?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 부자집 자제들이 오히려 욕심이
과해서 더 약게 구는 수가 많지만 너네 둘은 아닌 거 같애. 욕심이 없는 건지 바본지... 하여
튼 너네 둘은 앞으로도 별 이상한 것들로 고민하고
계산하겠지. 결혼 문제를 생각할 때도 저 녀석과 살면 사랑하며 재밌게 살수 있을까, 이딴
고민만 하겠지?
나처럼 저 사람 가정환경이 어떻고 저 사람 수입이 얼마니 어느 정도 수준으로 소비를 맞추
고 어느 정도 사회가 준 부를 누리며 또한 어디서 무슨
명함을 내밀고 살 건지,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거야. 그래서 너네 둘이 좋아 보여. 참 바보
같지만 순수해 보여서 좋아. 하지만 난 아냐, 세상이 날
속이면 나도 세상을 속일 것이고 날 울리면 나도 울릴거야. 아니 밟고 일어 설거야. 만약 철
수가 내 남자라면 날 울릴거야.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많으니까. 그러면 난 철수를 미워하겠지. 그래서 철수는 동생으로 좋아는 해도 남자로 생각
하면 안돼는 녀석이야."
"허어..."
조금 어이가 없네요. 정희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게 말을 막 합니다. 자기 생각을
말해 놓고 나를 보며 웃는 정희가 못마땅하긴 해도 밉지가
않은 건 정희가 했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나와 철수가 잘 어울린다는 말 때문일
까요. 내가 알기에 정희는 약지 않습니다. 약은 척 하려고
애쓰는 거지요.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정희는 상처를 받고 있나
봅니다.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정희는 싫게 변하는 자기 방어를 위해 지금 변명을 하는 겁니다. 자
기는 약았다는 말로써... 정희도 철수에게 약간의 감정은
가지고 있었군요.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대학 때 가장 친했고 마
음이 맞았던 친구가 정희입니다. 아주 약았다면 철수와 날
부러워 하지 않을 겁니다.
"넌 철수 같은 애를 만나야 돼. 철수가 승주씨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했지?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다르더라. 둘이가 너에게 하는 걸 보면 닮은 점이 보이긴
해. 마음을 잘 표현 못하고 네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지. 맞지?"
"응."
"승주는 유약해 보이지만 매정한 구석도 많을 것 같애.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자기 삶에 널
맞추려고 할 거야. 그리고 승주는 어두워. 왠지 어두워
보였어. 그래서 난 승주가 처음부터 별로 탐탁치 않았어. 철수는 정신 없어 보이지만 흔들리
지는 않을 타입이야. 네 마음을 몰라서 그렇지 널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을거야. 너도 좋아하는 맘이 쉽게 변하는 애는 아니지?
승주가 철수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여. 하지만 승주는 부러지기 쉬울 것 같애. 좌절감 같은 걸
느낄 타입이야.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사람이란 거지. 만약 네 곁에 승주가 머물고 네가 부러진 승주를 보살펴야 할 입장이라면
넌 견뎌내기 힘들어 할 거야. 철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타입이지만 툴툴 털고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애야. 내가 느낀바로는 그래. 승주는 부러지면
마냥 너에게 의지할 타입이고 철수는 어려울 때 네 곁에서
웃어줄 애야."
"너무 철수 편드는 거 아냐? 그리고 승주는 이제 철수 상대가 못 돼."
"그걸 좀 제발 철수에게 인식시켜 줘라. 하긴 너도 좀..."
"뭐어?"
"아휴... 둘이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 가지고..."
"누구 나랑 철수?"
"그래 너랑 철수. 철수가 만약 연상이었으면 뭘로 트집 잡아 고민했을까? 쉽게 사귀지, 쩝!"
"철수가 아직 나에 대해 안심을 못하는 건 알아. 고쳐줘야지."
"쉽게 될까?"
"야, 김정희!"
"왜?"
"너 그렇게 변하지 마."
커피 컵을 내려 놓고 메롱하고 약국을 나왔습니다. 내가 현실 문제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나쁜 건가요? 그런대로
사회로 나와 먹고 살 자신 있고 부모님을 좀 의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 경제적으로 힘
든데 부모님이 모른척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부모님 재산이면
날 충분히 원상복귀 시켜 줄수 있습니다. 사람 좋으면 됐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재밌게 살면 됐지 복잡한 현실 문제를 왜 따집니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아무 생각없이 그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 할 겁니다. 이런 생각하며
사는 내가 생각이 없는 건가요?
주어진 만큼 혜택을 누리면서 과하지 않게 살면 되지요. 욕심이 없어서 그렇나요? 혜택 받
은 게 많아서 하는 소리로 들릴까요? 그럴수도 있겠죠. 하지만
난 인생을 복잡하게 이것저것 계산하며 따지고 살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삶은 다른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는 나대로 재밌게 살 겁니다. 그래도 고민이
없이 생각없이 살지는 않습니다.
에구, 이런 녀석하고 내가 닮았다니... 정희 말 때문에 철수가 생각나 도서관을 가 보았습니
다. 그냥 엎드려 자는군요. 세상 만사 태평이다. 진짜
생각없이 자네요. 책은 왜 펴 놨누.
"야."
들은 척도 안하는군요.
"야, 박철수. 야아, 박철수!"
아무리 방학이고 사방 열람석에 학생이 없는 한산한 도서관 내이지만, 에어콘 때문에 시원
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자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지만 박
철수 너 너무 깊은 잠 잔다. 에라이!
"으쒸, 왜 때려. 누구야?"
"나다 니 애인."
"어? 누나 왜 다시 왔어요?"
한 쪽 볼이 아주 빨갛다 못해 탄다 타.
"집에 가자 그냥."
"지금 몇 신데?"
"다섯 시 다 되어 간다."
철수가 주위를 살피면서 정신을 차릴려는 모양입니다. 손가락을 하나, 둘, 두개를 오므리는
것을 보니까 세시부터 잤나 보군요. 그럼 삼십분 동안은 뭐
했을까요?
"누나 집에 바로 갈거에요?"
"그럴 생각이야."
"밥은 안 먹고?"
"어휴, 그러니까 정희가 너보고 생각 없는 놈이래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네 집 잘 사니?"
"뜬금없이 왜 그래?"
"잘 사냐구?"
"못 사는 편은 아니다."
정희 말하고 틀리지요?
아직 잠이 덜깬 모습입니다. 정희가 내 마음은 잘 읽었네요. 나 저런 철수가 더 좋아 보입니
다. 반듯하게 앉아 열심히 공부하다 내가 온 것도 모르는
철수의 모습 보다, 여기까지는 공부해 놓고 가야 되니 누나 먼저 가요 하는 것보다 내가 왔
다고 그냥 책상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가방 안에 넣어 버리고
일어서 반가운 웃음을 짓는 철수가 더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철수의 말에 또 기분이 좋습
니다.
"뭐 해? 가요."
"너 이런 식으로 공부해도 학점은 나오니?"
"할 때는 피 터지게 해요. 이 번 시험 때 코피도 터졌는데... 내가 마냥 노는 것처럼 보여도
다 계산하고 논단 말이에요. 생각없이 놀지는 않는단 말이지.
오늘은 체력 비축."
잠에서 덜 깬 얼굴이 비장하게 바뀌면서 철수가 말했습니다. 그렇죠, 세상 생각없이 사는 사
람이 어딨겠습니까. 가치관 차이일 뿐이죠. 나도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저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살까 하는 것 말이지요.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이해하려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참 철없고 가치 없는
생각으로 보일 지 모르나 내겐 참 중요하고 재밌는 생각입니다.
"너 체력 엄청 남아 돌겠다?"
연하가 어때서 57회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럴까? 해는 하늘에서 빤히 쳐다 보고 있고 아무리 방학이
지만 학교에는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낭자 이 무슨 희괴한 짓이요?"
"뭐? 낭자? 참 여러 가지로 부른다. 너 체력 남아 돈다며?"
"누나가 그렇게 물어 보는데 없다 그래 그럼?"
"야아~, 철수야."
"나 장가 가야 된다 말이야."
"이거하고 장가가는 거와 무슨 상관이야?"
"이런 짓하고 나면 여자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신세 조지는 일이란 말이야."
"치, 야아."
"나중에 깜깜한 새벽에 하면 안될까?"
"지금 해 줘."
이 여자가 쪽팔리게 왜 이래. 내 체력 남아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업어 줘? 이
여자가 뭘 잘 못 먹었나, 아니면 누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았나? 도서관에 잘 자
고 있는 날 깨워서 집에 가자더니 집까지 업어 달라고? 누나를 위, 아래로 꼬아
보았다. 25살 맞어?
"왜 그러는데요?"
"재밌잖아."
"업히는 사람은 재밌겄지. 무슨 일 있었어?"
"생각없이 이런 것도 해봐야지 안그래? 철수야아."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저 여자의 눈망울이 그래, 박철수 망가져 보는거야.
라고 꼬드긴다.
그래 조금 심심하기도 한 세상, 이런 쪽팔린 짓도 해 봐야 나중에 웃을 수
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가방 들어요."
가방을 벗어 누나에게 주었다.
"가방은 왜 주는거야?"
"그럼 내가 가방까지 들어요?"
"업어주는 거야?"
"그 손수건 같은 거 없어요?"
"그건 왜?"
"복면하게."
"그렇게 쪽팔리니?"
"그럼 안 쪽팔리겠냐?"
예전 승주가 꽃 받치며 꿇어 앉았을 때보다 더 쪽팔린 상황이다. 그래, 승주
그 새끼도 그런 짓을 했는데...
"진짜 업혀?"
"업어 달라며? 빨리 업혀요."
졸라 달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엄청 빠르게 달렸다. 씨바, 누나 업고 달려 나
가는데 학교 들어 오던 과 선배들과 마주쳤다. 바보같이 웃어주고 안면 몰수 했
다. 위에서 누나가 무슨 포즈를 취했는지 모르지만 선배들, 졸라 웃을 줄 알았는
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봤다. 내가 그렇게 걱정 되 보여요? 내 모습이 웃기도
힘들만큼 불쌍해 보여요? 선배들은 나 때문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
다. 뛰다가 고개 돌려 누나 얼굴을 보았다. 다 죽어 가는 환자의 얼굴 표정이
다. 날 보더니 혈기를 찾고 씩 웃으며 혀를 쫑긋 내 미는 것이 나 잘했지?라고
묻는 거 같다. 여우다. 나는 어리숙하고 착한 늑대고....
"헤엑. 헥 헥."
"야, 집까지 가야지."
"숨 가파 죽겠어. 잠시 쉬었다 가요."
교문을 벗어나 자취방 건물로 들어 가는 골목의 옥수수 밭 옆, 보는 사람이 없
길래 잠시 멈춰 섰다.
"나 가볍지?"
쪽팔린데 가볍고 무거운게 어딨냐.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진짜 너 생각없다. 업어 달란다고 진짜 날 여기까지 업고 와? 후후."
"아까 사정할 때는 언제고?"
"너 데리고 살면 즐겁긴 즐겁겠다."
"누나!"
"왜에 철수씨?"
"밥 먹고 갑시다."
57
오랜 만에 운동을 한 탓인지 밥 맛이 좋았다. 홍은정, 저 여자가 밥 먹다 자주
날 쳐다보며 웃는다. 왜 그러지?
"왜 그렇게 쳐다 보는데?"
"후후, 좋아서."
"그럼 밥 값은 누나가 내요."
식당에서 집까지 또 그짓 했다.
"이제 그만 합시다."
"그런게 어딨어? 밥까지 먹였더니 얘가 배신 때리네."
"예까지 업고 왔잖아요."
"그러니까 마저 업어 줘야지."
또 업고 뛰었다. 이런 모습을 자취방 건물주가 본다면? 내일 자취방 쫓겨날 수
도 있다. 그러면 승헌이는 어디다 재우지?
누나 방 앞에서 누나를 내려 놓았다.
"허억! 헉."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린다. 숨도 가프다.
"후후, 나 오늘 저녁엔 계속 집에 있을 테니까 승헌이 오면 놀러 와. 네 방은
썰렁하지?"
"지금은 뭐할건데?"
"너 때문에 내 몸에서 땀 냄새 나. 샤워하고 손님 맞을 준비 해야지."
이상한 뉘앙스의 말이다. 쌔가 빠지게 고생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 박철수가 불
쌍하다.
"그럼 나중 승헌이 오면 놀러 갈게."
"그래, 그때 시원한 냉커피 타 줄게. 정희가 타준 것보단 맛있을거야."
갑자기 정희 누나는 왜 튀어 나와. 그려 나중에 보자.
승헌이는 밤 열시를 조금 넘어 내 자취방을 찾았다. 들어 와 별 다른 짓하지 않
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인형 하나를 껴안더니 푹 한 숨을
쉰다.
"뭔 일 있었냐?"
더울텐데 물이라도 먹어라. 뜨끈 미지근한 물 한잔 따라서 녀석에게 건네며 물
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사랑이였어."
"미친놈 지랄하고 자빠졌네."
"힘들더라도 다시 나만의 여인으로 해야 겠어. 조금 구속하는 것이 영영 떠나
보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야, 공대생은 그런 말 하면 안돼."
녀석이 심하게 나를 째려 보았다.
"너?"
"내가 그런 말 했다고 기분 나쁘냐?"
"이 인형 의정이가 준 거잖아."
내가 뺏었냐 새꺄. 지가 놔두고 가 놓고선. 여태까지 보관해 주었음 고맙다고
할 것이지.
"가져 가려면 가져 가."
"내 제대할 때까지 잘 보관해. 발베개로 쓰면 죽는다?"
저 새끼가 어떻게 알았지?
"오늘 뭐 했냐?"
"그냥 지나간 우리들의 추억들을 되새겼지. 스티커 사진도 찍어보고 짧은 입맞
춤도 나누었다. 왜 여름이었을까?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으면..."
이 새끼 완전히 돌았네.
"군발이 되면 다 그러냐?"
"오 오, 나의 줄리엣이어. 철책의 변방에서 난 총을 들고 있지만 내 마음에
는..."
"너 있는데 철책 안 보이잖아."
"가만 있어 봐 새꺄. 총을 들고 있지만 내 마음은 항상 그대만을 품고 있다오.
오오 나의 줄리엣이여...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가 있지만 내 마음은 언제
까지나 그대 곁에 머물 것이오. 오 나의 줄리엣이여, 내 뜨거운 피는 그대를 향
한 내 사랑. 내 피가 식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사랑할 겁니다. 멋있지?"
"전쟁 터지면 제일 먼저 총맞을 새끼가 여깄었네."
"새꺄, 공대생도 이런 말을 한 번쯤은 하고 살아야 돼. 지나가는 여학생만 보
면, 어이 예쁜데, 지나가는 연인을 보면, 어이 그림 좋은데? 그러니까 욕 들어
먹는거야. 군발이도 그러지는 않는다."
"공대생 중에 그러는 놈 있냐?"
"동엽이."
"그 새끼는 좀 그렇지. 그럴 때보면 꼭 대마초 핀 놈처럼 느끼해."
"너 대마초 피워 봤냐?"
"아니."
"그럼 새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참, 씻고 나서 누나 방 가자. 커피라도 한 잔 얻어 먹
게."
"그럴까?"
"빨리 씻고 와."
"그냥 가면 안될까?"
"씻고 와 새꺄. 그 여자가 얼마나 공준 줄 모르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라."
누나는 잠들 때 더 예뻐 보이기도 한다. 화사한 조명등 아래, 화장기가 가신 얼
굴. 성숙함을 벗고 조금 소녀다와 진다. 조금만 덜 예뻤으면 저 모습처럼 나보
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으면 내 이런 불안함은 가지지 않았을텐데.
기분 좋게 승헌이와 누나에게 냉커피를 얻어 마셨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
고 있다. 누나 방, 남자는 나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특히 이 시간
에는... 근데 승헌이가 들어 와 있다. 누나가 또 승헌이에게 졸라 친한 척이다.
승헌이 참 잘 생겼다. 묘한 질투심, 기분이 살 나빠지고 있다. 참 친한 승헌이
가 일순간 밉게 보였다.
승헌이까지 누나에게 친한 척이다. 아까 내 사랑 뭐라해도 예쁜 여자가 꼬리치
면 금방 헤, 하고 달려갈 놈 같다.
"나이 많은 여자도 누나 같으면 그런대로 괜찮네요."
"그렇지?"
나 말고 승헌이를 위해 웃어주는 저 웃음.
"괜찮긴 뭐가 괜찮아. 계속 겪어 봐. 너네 누나들이랑 똑 같애."
누나가 날 꼬아 보았다.
"얘 왜 저러니?"
"몰라요."
어쭈, 너 둘이 더 친한 척 한다 이거지?
"승헌아. 네 말이 옳았다. 넌 나처럼 절대 나이 많은 여자와는 사귀지 마라. 빨
리 늙는다."
멀뚱히 날 바라보는 누나, 의아한 표정이다.
"너 또 기분 나쁜 거 있니?"
"승헌이에게 물어 봐."
"너 간혹 감 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아. 왜 그래?"
"위에 단추 좀 바로 해라. 잘못하면 가슴 보이겠다."
"야!"
"네?"
그렇다고 화낼 것 까진 없지. 승헌아 커피 다 마셨으면 자러 가자.
연하가 어때서 58회
철수는 또 삐쳤습니다. 이젠 헛갈립니다. 무엇 때문에 삐치는지 보다 왜 자꾸
저런 모습으로 삐치는지 헛갈립니다. 내 마음을 안다면 저렇게 삐친 척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야, 너 삐친거야?"
"내가 뭘 삐쳐. 가자 승헌아."
나이도 어린 게 속 많이 썩이네요. 나이도 어린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
에 그는 그 걸 느껴서 저러는 걸까요?
"왜 금방 가는거야?"
"자야지."
아주 퉁명스럽게 답을 합니다. 이게 진짜 삐쳤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한거
야. 자기 친구라 승헌이에게 좀 친한 척 한 것 뿐인데 벤댕이 같은 저 녀석 또
삐친 표정입니다. 철수와 나 둘만 있을 땐 참 잘하는데, 누구 하나 섞이면 달라
지네요.
"내일 아침에 밥 차려 줄테니까 여기 와서 먹어. 승헌아 너도 와아돼?"
"네."
"뭐가 네야 새꺄. 너 스프에 밥 말아 먹고 싶어? 내가 찌개 사 줄게. 누나는 스
프에 밥 말아 먹고 학교 가요. 우리 아마 일찍 일어 나지 못할거야."
저 녀석 살 열 받게 만드네요.
"야, 박철수."
"왜요?"
너 자꾸 이러면 안 만난다고 해 버릴거다,라고 말할까요? 내가 차일 것 같습니
다. 녀석은 아마도 그만 만나자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래 그만 만나, 그럴 것 같
거든요.
저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간혹 어디로 튈지 모르게 하는 경우가 잦
네요. 저녁에 날 업고 뛰어 올 때만 해도 그냥 좋았는데...
"그럼 내일 아침은 밖에서 사 먹자. 내가 사줄게."
"나 때문에 사 주는거야, 승헌이 때문이야?"
하아, 어이가 없네요. 그럼 저 삐친 모습은 역시 내가 승헌이에게 좀 친하게
군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이건 두 살 어린 게 아닙니다. 숫제 유치원 생하
고 사귀는 것 같네요. 내가 자기 아니면 뭣하러 승헌이에게 밥을 사준답니까 아
침부터...
"그럼 넌 스프에 밥 말아 먹어. 승헌아 내일 아침에 밥 사줄게 너 혼자라도 나
와?"
"네."
유유 상종이네요. 승헌이 저 녀석도 아주 눈치가 없는 놈이군요.
"쩝, 그래 둘이서 맛있게, 아주 맛있게 아침 먹어라."
"알았다. 넌 늦잠 자, 내 밥 먹고 들어 와서 깨워 줄게."
그래, 같은 놈들끼리 잘 논다.
철수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위해 시간
을 좀 내야 겠네요. 어린 놈 비위 맞춰 주기 힘들군요. 그래도 재밌어요. 동생같
은 연인, 아니다 연인 같은 동생. 난 어릴 적 철없이 다투다가도 금방 되돌려 지
는 남매들을 부러워 했습니다.
아침에 밥 얻어 먹으러 온 건 진짜 승헌이 뿐이었습니다.
"철수는 안 온대?"
"잘 쳐 먹고 오래요."
"일어 났어?"
"네."
"달래서 같이 오지."
"놔두세요. 누나 좋아서 저러는게 표가 나잖아요."
"누나가 많다더니 제법 잘 안다?"
"하하. 누나도 쟤 진짜 좋아해요?"
"아닌 것처럼 보여?"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뭐?"
"아니에요."
나도 삐쳐서 승헌이에게 밥을 사주고 난 다음 그냥 등교해 버렸습니다.
오늘도 날씨가 참 덥겠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걸음 걸이가 무겁게
보이네요. 오늘 점심 때에도 정희를 찾아 가 볼 요량입니다.
언제나 히죽 웃는 듯한 표정, 배 선배가 차가운 캔 커피 하나를 던지며 접근을
해 오네요. 푸우.
"고마워요."
"뭘. 이 번 일요일에 뭐할거야?"
"왜요?"
"시간 있으면 소개팅 하나 하라고..."
"으엉?"
"같이 공부했던 친구 하나가 귀국을 했는데... 예쁘고 멋있는 아가씨 한 명 있
으"
"이 봐요, 배 성준씨!"
"에? 왜 화를 내? 그 녀석 멋진 놈이야."
"선배, 나 사귀는 사람 있다는 거 몰라요? 일부러 그러는거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진지하게 사귈 수 있는..."
"이씨! 그만 말해요? 후우..."
진짜 짜증 나네요 저 사람. 철수에게 화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네요. 바로 연구
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안녕."
"후후."
"왜 웃어?"
"철수도 오전에 여기 왔었어. "
"치."
"점심 때 다 됐는데 뭐 좀 시켜 먹을래?"
"됐어. 차가운 물이나 있음 한 잔 줘."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얼음이 띄워진 냉수가 속
을 시원하게 합니다.
정희네 약국에서 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고 뭔가 구체적인 일 하
나를 계획하기로 했습니다.
"은정이 너 철수 잘 모르니?"
"그래도..."
"나는 너네 둘 사이에 끼기 싫다."
학교로 들어 오는 길에 도서관을 찾아 갔습니다. 승헌이는 오늘도 자기 여자 친
구를 만나러 간댔습니다. 막 자랑을 하던데요. 작년에 당구도 같이 한 번 쳤지
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예뻤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철수 말에 따
르면 영 시원찮은 것 같은데 승헌이 말 표현을 빌리자면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너무나 섬세해 감히 그 아름다움을 범할 수 없는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후후,
공대생들도 그런 비유를 할 줄 알더군요.
도서관에서 철수를 한 참 찾았습니다. 허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그
래서 못 찾았어요. 전 엎드려 자는 녀석들만 유심히 보았거든요.
"야."
철수 특유의 모습, 슬며시 고개를 들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뭐야,라는 저 표
정. 한 손으로 쓰고 있던 걸 슬 가리네요.
"왜 왔어요 또"
"또?"
"오늘은 아침, 점심 다 굶어서 업어 줄 힘 없어요."
"아침도 안 먹었어?"
"그 나가서 얘기해요."
철수 옆, 옆에 앉은 기집애가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하라고 하네요. 아
주 어려보이는 데 버릇이 참 없군요.
"너 몇 학번이야?"
이것도 아마 철수에게 배운 걸 겁니다.
철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 친구에게 잘 해 줘서 고마워요."
"응? 그 말 진심이야?"
"제 표정 보면 몰라요?"
"그러면서 같이 있을 땐 왜 그래?"
"그건 나도 잘 모르지."
"치, 밥 먹으러 가자."
후후, 녀석이 배가 고팠나 보네요. 그래, 삐치면 너만 손해지, 아침에 그냥 승
헌이따라 나왔으면 넉넉하게 배불리 먹었을텐데...
"너 다음주에 시간 있어?"
"왜요?"
"너 정희더러 며칠 휴가내어 어디 놀러 가자 그랬다며?"
"정희 누나에게 갔었어요?"
"응."
"여름이고 방학인데 계곡이나 바다 같은 곳을 가보고 싶지 않아요?"
"너 나와 가고 싶은거야, 정희와 가고 싶은거야?"
"그것도 눈치 못 채냐?"
"그럼 넌? 내가 승헌이에게 친한 척 한다고 삐친 게 누군데."
"난 누나에게만 삐친게 아니라니까. 승헌이 그 새끼 말 끝마다 나이 많은 여자
는 안된다 그래놓고 누나에겐 졸라 친한 척 하대. 내가 안 삐치게 생겼냐?"
"어떻게 그렇게 속이 좁을 수가 있니? 승헌이 걔 참 착하더라."
"나도 알지 그건."
"하여튼 다음 주에 그럼 시간 한 번 내 볼까?"
"진짜 갈려구? 정희 누나는 뭐래요?"
"같이 갈 생각이 있나 보던데?"
"헤, 그래 어디로 갈까? 바다가 좋을까 산이 좋을까?"
"멀리 갈래?"
"멀리?"
"저기 밑에 지리산 갈래? 아니면 무주도 괜찮고... 그 쪽 계곡이 화려하대."
"바다는?"
"여름 바다는 너무 경솔해."
"응? 이과생이 그런 말 하면 안되지."
"계곡이 나을 것 같다."
"다음 주 언제 쯤?"
"넌 아무때나 시간 되지?"
"응."
"가만 교수님이 화요일부터 어디 가신다고 했지?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 출발하
자."
"며칠간?"
"2박 3일정도... 내가 엄마 차 빌릴게."
"차 몰고 가려고?"
"그래, 여러 곳 둘러 보려면 차가 있는 게 낫겠지?"
"헤헤, 진짜 가는거야?"
"응."
정희는 삼,사일 약국 비우기도 어렵고 우리 따라 갈 생각도 없다 했습니다. 철
수와 단 둘이 갈 생각입니다. 남자와 단 둘이 간다는 게 조금 꺼림칙 했는데 정
희 말 듣고 맘을 고쳐 먹었지요. 저 녀석? 후후.
"그럴때만 남자지?"
"무슨 소리야?"
"철수만 탓하지 마. 네가 철수 대하는 것을 보면 남자친구라기 보다 동생으로
대하는 것 밖에는 안 보여. 은정이 너 철수 잘 모르니?"
"그래도..."
"나는 가기 힘들어. 그리고 너네 둘 사이에 끼기도 싫어."
"진짜 철수와 단 둘이 가도 괜찮을까?"
"니가 알아서 해. 니 애인이니까 네가 판단해야지."
"쿠쿠. 하긴..."
"쿠쿠."
"너 왜 웃어?"
"넌 왜 웃니?"
웃을 이유야 많지요. 철수 지가 남자라고 날 어찌해 보려 하면 쿡쿡 웃어 버리
면 됩니다. 그러면 우쒸 그러겠죠? 아휴, 딴 맘이나 먹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내가 유혹하는 일은 있어도 철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시험 해 볼
까? 시험은 무슨 시험, 바로 옆에 살면서 밤 마다 그렇게 내 방을 들락 거려도
입맞춤 하잔 소리 제대로 못하는 놈인데...
"박철수?"
"왜?"
"넌 꼭 가야 된다. 나중에 물리면 안된다."
"알았어요."
밥을 먹고 난 뒤 철수는 기분 좋게 어디론가 내 뺐습니다. 도서관으로 가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아휴, 좀 삐쳤던 게 마음에 걸려 저녁 무렵에 또 도서관을 갔습니다. 철수와 같
이 올 생각으로 말입니다. 철수의 열람석은 낮에 자리를 비웠을 때 모습 그대로
입니다. 아까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 철수는 한 번도 이 자리에 앉지 않았나
봅니다. 연습장을 뒤적여 봤지요.
흠, 아까 이런 낙서를 한다고 손으로 가렸군요.
"참 아름다운 크리스탈 잔이 있다. 깨지기 쉽다. 내 손에 쥐고 있다 깨지면...
차라리 플라스틱 컵이었으면 좋았을텐데."
한 놈은 섬세해서 뭐 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그러지 않나 그리고 한 놈
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을 연습장에 써 놓질 않나. 어렵다. 내 님은 아직 절
믿지 못하나 봅니다. 근데 이 녀석 어디 간거야.
연하가 어때서 59회
"야, 공부 열심히 한다?"
당구장 외 다른 장소에서는 잘 아는 척 하지 않던 선배 하나가 도서관에서 내
게 친한 척 했다. 키득 키득 웃는 폼이 어제 내가 누나를 업고 뛰는 모습을 본
것 같다.
"형은 방학인데 학교엔 어쩐 일로 왔어요?"
"나? 집에 있음 심심하잖아."
"집에 안 내려 갔어요?"
"다시 올라 온거야. 학생이 학교에서 놀아야지."
"학교가 노는 데구나..."
"말대꾸가 늘었네. 너 몇 학번이야?"
"에이, 90학번들 왜 그래요. 말꼬리 잡혔다 싶으면 학번이나 따지고..."
"그랬냐? 넌 언제 내려 왔냐?"
"전 어제 내려 왔어요. 공부나 할까 해서."
"그러냐? 나도 공부나 해 볼까? 전공 책 아무거나 하나 줘 봐."
"없는데. 형 가방 안 가져 왔어요?"
"응. 전공책 하나 줘 봐."
"공부는 무슨... 형 대부분 과목 이수했잖아요. 이학기 때 몇 학점이나 들어
요?"
"5학점, 취직도 됐겠다 2학기는 별 걱정 없어."
"저보다 4학점 적게 듣겠네요. 진짜 공부 하시게요? "
선배의 얼굴은 공부하고 싶은 표정이 아니다. 대충 왜 도서관을 나왔는지 알
지. 형 얼마나 늙고 삭막해 보였으면 열람실에서 이렇게 떠드는데 누구하나 뭐
라 그러는 사람이 없냐. 쯔쯧. 형 얼굴에 나는 예비역 노땅 고학번임,이라는 표
가 나나 봐요.
"음, 졸업하면 언제 당구치겠냐. 우리 당구장 가서 공부하자."
"네?"
"난 못다 이룬 삼백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넌 200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당
구 공부하러가자."
옆에 앉은 쪼그만 여학생이 이쪽을 힐끗 쳐다 보더니 킥킥 웃었다. 90학번이
나 되어서 비웃음이나 사다니...
"도서관엔 왜 오신거에요?"
"애들 만날려면 도서관 와야지. 넌 공부할거냐? 당구나 치러 가자."
"저 지금 당구 칠 기분이 아닙니다. 저 공부할래요."
"어제 이상한 짓 하더니 이상하게 변했네."
"형도 봤어요?"
"응. 그 예쁜 약대생 어디가 아팠니?"
"쩝. 모른 척 해 주세요."
"너 그 여학생하고 사귀는거야?"
"사귄다? 그 의미가 뭐에요?"
"가깝게 지내면 사귀는 거 아니냐?"
"열심히 치세요."
"그려, 열심히 해라."
당구 치자는 유혹도 뿌리치고 밥 먹으러 가는 것도 참고 열심히 공부했다. 오
늘 누나가 날 보러 도서관을 오지 않는다면 진짜 삐칠 것라는 각오를 하고선 도
서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가 잘 된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누나가 나타나지 않자 잡생
각이 들었다.
좋다, 단 둘이 있을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아직 어린가 보다.
지금 난 누나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근데 먼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헤어짐
이 분명 있을 것 같다. 거기다 내 어린 맘으로 누나에게 삐치는 횟수가 늘어 간
다. 승헌이에게도 삐치는 내 자신이 싫다. 친구였다면, 예전처럼 그냥 동생이었
다면 삐치는 횟수가 많지 않았을텐데...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연인으로 삼은
건 아닌가. 삐쳤을 때 내 마음은 누나를 하나씩 구속하려 드는 것 같다. 앞으로
계속 구속하려 들것이고 그러면 헤어짐이 있을 때 난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
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냥 예전처럼 친한 동생이라면 슬플지라도 멋있게 웃으
며 떠나 보낼 수 있을텐데. 누나가 내 여자라고 생각하면 난 비참해질 것 같다.
누나를 구속하려 들면서...
크리스탈 잔이 있다. 쇼 윈도우 안에 고고한 조명을 받고 화려하게 빛나는 고
급 크리스탈 잔이 있다. 밖에서 바라볼 땐 그저 아름답단 생각 뿐이다. 한 참 동
안 그 진열장 앞에 서서 그 잔을 바라보다 웃으며 내 갈 길을 떠나면 된다. 떠나
면서 뒤 돌아 보는 시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쇼윈도의 아름다운 크리스탈 잔
은 바라보다 갖고 싶다는 고운 미소하나 띄우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낫다. 만일
그 아름다움에 못 이겨 그 잔을 사 버렸다면 그때부터 걱정 하나가 생길 것이
다. 깨질까? 내가 잘못해 깨진다면, 누군가 잘못해 깨 버린다면... 그 걱정 때문
에 난 그 잔이 깨지지 않도록 그 아름다움을 구속해 버릴거다. 아무도 보지 않
는 깜깜한 혼자만의 진열장 속에.
크리스탈 잔? 그 좋은 비유네. 그렇담 한 자 적어 놔야지.
크리스탈 잔이 있다. 깨지기 쉽다. 내 손에 쥐고 있다 깨지면... 차라리 플라스
틱 컵이었으면.
"야."
에이쒸, 좀 더 써야 되는데... 꼭 이럴 때 온다 말이야. 공부하고 있을 때 오던
지 아니면 마저 써 놓고 연습장을 넘기고 난 뒤 왔어야 되는데. 꼭 지 생각으로
뭘 적고 있으니까 온다 말이야. 누나 니도 양반 되긴 걸렀다. 공준디... 양반 보
다 높구나.
누나를 만나고 밥을 얻어 먹으니까 아까 가졌던 잡 생각들이 말끔히 없어졌다.
또 생기겠지만 지금은 누나가 날 달래 주었기에 그저 좋을 뿐이다. 그리고 좋은
약속이 하나 잡혔다.
"누나도 꼭 가야 돼."
"알았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것, 예전부터 꿈 꾸었던 일이다. 멀리 떠난다,
비록 누나와 단 둘이 가는 것이 어색해 정희 누나를 끼워 넣었지만 마냥 좋을
수 있다. 정희 누나는 나 이전에 은정이 누나 친구고, 은정이 누나 이전에 내 친
구다. 삐칠 일이 뭐 있겠냐.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좋아하는
누나와 여름의 낭만을 즐기며 아름답게 놀다 오면 된다. 그리고 훗 날 미소 지
을 수 있는 추억 하나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헤헤, 기분이 매우 좋아 졌다.
다음 주가 너무 기대 된다. 기대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 공부할 수 있겠냐. 누
나와 헤어진 뒤 바로 당구장으로 달렸다. 선배들이 다 치고 갔을까봐 숨을 헐떡
이며 뛰어 갔다. 당구장 문을 열었고 선배들을 봤다.
"내가 왔소이다. 헉헉, 한게임 더?"
당구장 주인 아저씨가 서비스로 박카스 한 병을 주었다.
저녁 무렵에 도서관으로 돌아 왔다. 공부하기 싫어 졌다. 집에 가야지. 가방을
챙겼다. 연습장을 뒤적이던 순간 내 글씨 아닌 무언가를 보았다. 내가 잡념에 사
로잡혀 몇 자 적은 글 밑에 답글이 달려 있었다.
난 크리스탈 잔이 아니란다.
누나가 왔다 갔나?
집에 들어 올때 보니 누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벌써 들어 왔구나.
그날 밤은 누나가 승헌이에게 친한 척 해도 암말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어울
리며 소박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마음이 편했다. 후후.
밤에 승헌이와 단 둘이 누워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은 집에 갈 것이다.
"오늘은 사자머리와 뭐했냐?"
"사자머리 아니야. 걔 머리 길게 늘어 트렸어."
"그러냐?"
"오늘은 영화 한 편 보고 찻 집에서 이야기만 했다. 걔가 그러대. 내가 야속했
대. 자기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놓아 주려고만 했다나, 내가 그랬대. 푸하
하, 다시는 나 같이 잘생기고 소박한 사람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기다리고 싶었
는데 나는 떠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았대. 음. 멋있는 말이지 않냐?"
"무슨 소리냐? 어이가 없다. 하여튼 요즘 젊은애들 영화는 많이 봐 가지고...
너들이 뭘 안다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상한 말들을 엄청 많이 해요. 안
그렇냐? 조금 구속하는 것이 영영 잃는 것 보단 낫다. 자기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영화 대사를 써라 써."
"오늘은 참는데 내일부터는 그러지 마라. 육군 병장 송승헌 열 받으면 무섭다?
그러는 너는 사랑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냐?"
"나? 없지 당연히. 그래서 힘들다."
"후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지 마라. 네 맘 같다고 생각 해."
"아는 척 하네?"
"답은 없는거야.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말한 것 뿐이다."
"엉? 야."
"왜?"
"너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승헌이는 일요일날 잡혀 있는 약속을 기약하고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 왔다.
"너 휴가 끝날 때까지 나 만나기 힘들거다."
"들어가서 일주일만 있다 또 나올거야."
"그럼 그때 연락해라. 나는 이제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알았다. 다음에 보자."
할 일이 많았다. 놀러 갈 계획을 잡아야 되기에...
"아버지, 삼일간 제가 약 배달 하겠습니다. 용돈 좀 주세요."
여행 경비도 모아야 했고, 이 것 저것 필요한 것들도 생각해 내야 했다.
이틀이 지나 갔다.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지리산 가기로 합의를 봤다고 한
다. 나는 합의한 일이 없는데...
"잠은 어디서 잘 건데."
"엄마 차 못 빌렸어. 그냥 버스 타고 갔다 오래."
"그래요?"
"어, 내가 다 계획을 짰어."
"어떻게."
"수요일 오후에 출발하자. 진주 가는 버스를 타는거야. 첫 날은 진주에서 자고
아침 일찍 지리산으로 가는 거지. 어찌어찌 해서 하루는 콘도를 잡았어. 근데 휴
가철이나 더 이상은 무리더라. 하루 지리산 계곡에서 놀고 그 다음날은 노고단
을 가는거야. 거긴 차가 가니까...히치 하이킹을 하는고야. 니가 좀 걸리긴 하지
만 내 외모로 충분히..."
"거기서도 공주하려고?"
"응. 그리고 남원으로 가서 밤 기차 타고 서울로 올라 오면 돼. 계획 잘 잡았
지?"
"콘도는 어딘데?"
"나도 잘 모르지. 알려 준대로 찾아 가면 돼."
"누나네 콘도 아냐?"
"아니."
"나는 뭐 가져 가야 돼?"
"너 필요한 거. 날 즐겁게 할 수 있는 거."
"정희 누나는 뭐 필요하대요?"
"정희? 음..."
"사진기는?"
"내 사진기 있어."
"모래 고속 터미널에서 보는거야?"
"그 전에 나 보고 싶으면 연락 해."
"누나 거기 어딘데?"
"여기? 학교."
"모레 봅시다."
배낭에 옷 가지들을 넣었다.
"아버지, 왠만하시면 선글라스 하나 사시죠."
"필요하면 니 돈 주고 사."
내 옷가지들과 수건같은 거 넣고 나니 뭘 더 가져가야 할 지 난감했다. 기분으
로 술 한 병 훔쳤다.
"병이 허약해 보이는 군. 비싼거 아니겠지?"
여행 떠나기 전 날 누나와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았다. 설레는 맘으로 말이다.
정희 누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같이 갈 거면서 한 번도 전화가 없었다. 내가
전화 안 해서 삐쳤나? 모르겄다 내일 볼텐데 뭘.
"내일 12시에 진주행 버스 타는 곳에서 봐."
"같이 안 가고?"
"너네 동네서 바로 거긴데 너 혼자 못 가니?"
"그려, 거기서 봅시다."
작은 배낭, 33회 동창회 기념,이라는 글이 새겨진 등산 모자, 차마 선글라스는
쓸 수 없었다. 무릎을 덮는 반바지에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신었다. 멋있어 보였
다. 빨간 폴로 티. 정열의 사나이 박철수도 피서를 떠나 보는구나. 대학 사년동
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은정이 누나 고마바요. 흑흑...
짧다 싶은 반바지에 발목까지 올라 온 이상한 샌달에 팔없는 티. 까만 썬글라스
를 끼고 아주 요염한 척 누나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야하지는 않지만 색다
른 섹시함... 저런 여자하고 같이 여행을 떠난다니...푸하하, 잘났다 박철수. 누
나는 가방을 두개 들고 있었다.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은 평상시 핸드백 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깜직한 가방.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던 큼지막한 베낭을 나에게 던
져 준다.
"안녕, 이건 니가 들어라. 12시 반 표가 있었어."
"벌써 끊어 왔어요? 정희 누나 아직 안 왔어."
"응? 자 여기 네 표, 서울 올 때 차비는 니가 내라?"
"나, 경비는 충분히 가지고 왔어. 정희 누나에게 연락해 봐요."
"정희 안 가. 우리 둘만 가는거야."
"에?"
연하가 어때서 60회
길 가에 늘어 선 가로등이 쏜 살같이 사라진다. 야, 고속 버스 빠르다. 우등 고
속 버스, 내가 이거 생기고 어디 멀리 여행 떠난 적이 있던가? 없네. 그려 처음
타 보는거구나. 신난다! 의자 신기하게 생겼네.
남,녀가 유별한데 이렇게 은정이 누나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도 아무일 없을런
지... 막 기대된다.
밖으로 따가운 햇살, 초록에 못 이겨 남빛이 감도는 벼 이싹들. 나무들. 좋다!
창 가에 앉아 있는 누나는 밖을 쳐다 보며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은정씨."
"왜에?"
폼 잡는다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은 잠시 감았다 뜨고 한 손으로 숙여진 머
리결을 쓸어 올리는 저 행동은 전형적인 공주병 환자의 모습이다.
"둘이서 간다고 진작 말을 해주지."
"단 둘이 가자고 했으면 니가 망설이지 않았을까?"
"뭘 망설여. 기횐데..."
"무슨 기회?"
고개를 잘래 잘래 흔들어 말을 잘못했다는 제스쳐를 보내 주었다. 무슨 기회?
나도 알 것 다 아는디...
"누나야."
"으응?"
"왜 둘이 갈려고 생각했는데?"
"좀 믿어라구. 사람 사귈 때 기간 정해 놓고 사귀니? 왜 헤어질 걸 염두해 두
니?"
"내가 그렇게 보여요?"
"그래. 그리고 삐치지 좀 마. 나를 좀 여유롭게 바라 봐."
"이렇게?"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마요네즈 왕창 찍어 먹었을 때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 보
았다.
"에그 화상아. 마음을 좀 여유롭게 가지라구."
그래 여유를 가지자. 박철수 잘난 놈이다. 누나 귀를 잡았다.
"귀 좀 줘바요."
"아아, 왜?"
귓속말로 사랑하오, 낭자. 라고 말하고 나, 사랑해? 라고 귀엽게 물었다.
"푸우우."
누나가 참지 못하는 웃음을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유치했지만 그런 반응을 보
이는 데 내가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겠냐.
하여튼, 고속 버스 참 빨리 달린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 진주란 곳은 나타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출발한 지 꽤 시간
이 흘렀는데 버스는 휴게소란 곳에서 떠 멈춘다.
차가 서자 마자 쪼로로 앞으로 달려 나가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되요?"
"이제 반 왔어."
그럼 앞으로 두 시간도 더 넘게 버스를 타야 되는겨?
"은정씨."
나가자고 커피 마시는 포즈를 취해 주었더니 하품을 하는 폼이 나보고 사오라
는 뜻 같다. 아랫 것이 어떻게 여유를 가져?
버스에서 나머지 시간은 졸라 재밌었다. 박는다, 박는다, 박았다. 제자리. 주
위 한 번 살피고 다시 눈이 감기고 기울어진다 기울어진다, 숙인다, 박는다, 박
는다, 박았다. 또 제자리, 주위 한 번 살피고 어랏? 이번엔 입주위도 한 번 닦
네. 멀뚱히 앞을 쳐다 보다가 또 고개가 픽 숙여진다.
내가 잠시 졸고 일어 나니 옆에서 참 재밌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나의
자는 모습. 아무리 우등 버스라 편안한 의자지만 그래도 버스 안에서 앉아서 자
는 폼은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저 여자 자는 모습이 저 여자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도도하고 이지적인 모습과는 매치가 안된다. 그려, 다 같은 인간인데. 조금
은 불안해 보이고 조금은 허술해 보이기도 하는 모습. 누나의 얼굴이 또 창 쪽으
로 기울어 지길래 조심스럽게 누나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응?"
"내 어깨에 기대요. 나는 이제 잠이 안 오거든."
버스는 다섯시간 조금 넘게 달려 진주란 곳에 도착했다.
"뭐여?"
"왜?"
"지리산 어디 있는겨?"
"이거 완전 바보 아냐."
고속 버스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누나가 숙박할 곳을 알아 보러 전화하러 간
동안 혼자 버스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니 왔나?"
억양이 이상해 주위를 곁눈질 해 보았다.
"야이 가시나야. 이 년이 미쳤나."
뭔 얘기를 저렇게 상스럽게 하냐. 또 한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총각 부산 가는 버스는 오디서 타노?"
어떤 아줌마가 가만히 있는 내게 이상한 억양으로 물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렸
다. 버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가는 버스 밖에 없는데 뭘 물어 보십니까? 가
운데 서 있다가 부산 가는 버스 타면 되지.
"저긴가 본데요?"
야, 처음 온 곳에서 길 가르쳐 줬다. 자랑해야지. 누나가 몇 몇 촌넘들의 시선
을 받으며 나타났다.
"가자."
"어디를?"
"짐 갖다 놓고 시내 구경해야지."
"이런 촌 구석도 시내가 있어요?"
주위에서 겁난 시선들이 내게 고정이 되었다. 미안한 표정으로 씩 웃어 주었
다.
다리를 건너서 버스를 탔다. 강가는 제법 아름다웠다.
아 새끼들, 졸라 떠들었다. 고등학생인 것 같았다. 어디 근처에 학교가 있나보
다. 보충수업 받고 하교하는 애들인가? 누나를 의식해 졸라 크게 떠드는 놈
들... 시선이 몰래 몰래 누나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야이 녀석들아 나도 애 취
급 받는데... 신경 꺼.
"어디 가는거에요?"
"예약했어."
"에?"
"호텔 예약 했다구."
"어디?"
"저기 보이는 걸꺼야 아마."
"무슨 돈이 있다고 호텔을 예약 해?"
"이런 촌 구석에 있는 호텔이 뭐 비싸겠니?"
이 번엔 누나가 주위의 겁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나도 따라 겁난 시선을 보냈
다.
"어? 방 하나 잡았어요? 나는?"
"너? 나랑 같이 자면 되잖아."
"이 여자가..."
"같은 방에서 몇 번 자 봤잖아."
"누가 듣는다 좀 조용히 말해라."
엘레베이터를 탔다. 단둘이서...
"침대 두개 있는 방 얻었어. 괜한 상상하지마."
눈을 똥그랗게 오므리고 입을 쭝긋 내 밀고 물었다.
"그래도 같은 방이지?"
"응."
"나를 우습게 보는거야 뭐야."
"너를 믿기 때문에 그런다."
"같은 방이면 아무래도... 밤에 내가 덮치면 어떡할래?"
"너네 아버님에게 일러 주고 당장 식 올리지 뭐."
"장난하냐 지금."
"너 내 말 잘듣잖아."
호텔 방에 들어서고 난 꼭 신혼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친구들끼리 왁
자지끌 떠들고 고생하며 떠나는 여행. 좋지. 그리고 연인과 떠나는 이런 여행?
이것도 괜찮네. 근데 저 여자 돈을 제법 쓰네.
방은 하나지만 욕실 쪽에 칸막이가 있어 흡사 두개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방 중간에 탁자 하나가 놓인 한 50센티의 공간을 두고 싱글 침대가 두개 놓여
져 있었다. 잘때 손 잡고 잘 수도 있겠다. 푸헤헤!
"나가자?"
"안 씻구?"
"갔다 와서 또 씻어야 될텐데. 니가 밥 사줘야지. 저기 짱어 구이집 있더라."
"그래요?"
누나 엄청 많이 먹더라. 장어 졸라 비쌌다. 나는 이런 여행 꿈 꾼것이 아닌데.
천막 쳐놓고 라면 하나에 목숨 걸며 누나 쫌만 먹어. 나도 좀 먹자. 이런 거 생
각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돈이야 뭐...
밥 먹고 시내 구경도 했다.
"이런 촌 구석에 지하상가도 있네."
"그렇네. 호호."
주위의 위협스런 눈 빛들. 많이 쫄았다.
시내 돌아 다니다 괜찮은 커피 숖이 있어 들어 갔었다.
"여기요. 음... 넌 모카골드라고 했지? 전 아이스커피 한 잔 주시구요. 화장실
이 어디 있죠?"
"저기 또이레또 글자 보입니꺼? 거기라예."
"아, 고마워요."
"뭘예. 괜찮심더."
누나가 사투리 쓰면 상당히 재밌겠다.
"아뜨뜨..."
나도 냉커피 시킬걸 씨... 근데 이런 촌구석까지 내려 와 커피숖은 왜 왔을까?
아까 호텔에 보니까 스카이 라운지에 커피숖 있더만... 굳이 시내를 나와 가지
고 말이야.
"철수야 개한나?"
"에?"
"괜찮니? 이 걸 여기 사람들은 개한나? 이렇게 묻던데?"
"어디서 배웠어?"
"화장실에서. 어떤 기집애가 화장을 고치더니 친구보고 자꾸 개한나? 나 개한
나? 묻길래. 개한나가 뭐냐구 물어 봤지."
"재밌다. 말 낯선 곳으로 베낭여행 온 것 같네."
"그렇지 응? 다음에 철수랑 외국으로 배낭 여행도 같이 가 볼까?"
"기회되면."
"내가 유럽 쪽은 잘 알잖니.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은 꽉 잡고 있지."
"좋겠수."
"다음에 같이 한 번 가자."
"돈 생기고 시간 나면."
"생각하니까 진짜 너랑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떠 오르네."
"후후, 많이 힘들었던 곳이죠?"
"응?"
"부려 먹을 놈 생각났을 거 아냐."
"쯔쯧, 하여튼 좋은 말은 못해요."
시내 구경하며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가 호텔에는 11시 넘어 들어 갔다. 관광호
텔이라고 나이트 클럽도 있었지만 둘이서 놀려고 외면했다.
졸라 기분 묘하다. 아무리 칸 막이가 있고 입고 나올 옷 다 들고 들어 갔지만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온 몸을 전율케 한다. 저 소리는 누나의 하얀 피부, 고
운 선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 샤워기에서 나온 물줄기가 슬픈 목을 타고
가녀린 가위뼈에 잠시 머물다 꿈 꾸는 젓가슴에서 푸후후, 깊은 배꼽을 지나 즐
거운 골반 선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앙증맞은 종아리를 흘러 땅에 부닺쳐 깨지
는 소리. 칸 막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상한 상상을 했다. 덮치지도 못할 거 이
런 상상하면 뭐 하냐. 맞다, 술 가지고 왔다.
누나가 머리를 탈탈탈 틀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너 씻어."
"누나 금방 샤워하고 나왔는데 내가 바로 들어가도 되나?"
"왜?"
"누나 체취가 남아 있을 거 아냐."
"무슨 말이야?"
"누나 샤워 옷입고 했어? 다 벗고 했을 거 아냐."
"이게, 야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어."
"나도 남잔데 씨. 니가 방 하나 잡았잖아."
"어? 이제 니가,라는 소리까지 나왔어? 호호."
"재밌어요?"
"응. 너 말 높이지 말고 반말 해라. 그리고 이름 불러."
"후후, 내 편한대로 할 거야."
"그래 너 편한대로 해. 자기야 빨리 씻고 와."
"으흐, 살 떨리네."
누나랑 새벽 한 시까지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보며 놀았다. 진짜 신혼 여행 온 기
분이었다. 창 밖 강 빛이 고왔고 거기에 담긴 별 빛이 아름다웠다. 강 건너 편
에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예술 회관의 전경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 왔다. 나란
히 앉아 바깥을 보며 이야기 했다. 창을 열어 길 떠나는 바람에 밤이 시원하다.
침대 밑에 마주 앉았다. 종이 컵에 삼분의 일 만큼 술을 따랐다.
"우리 절대 냉장고는 손대지 맙시다."
"응."
"이건 비싼 술인가요?"
"이거? 엑스오 샤보떼? 별로 안 비싼 술이야."
"음 다행이군. 딱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잡시다."
"그래."
진짜 딱 한 잔 마시고 잤다. 기분 좋게 각자 침대 위로 올라가 잤다. 이 정도
시간에 같은 방에 있었던 적이 많아 별 요시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단지 낯선
곳이라 알 수 없이 피어오는 정감, 누나를 바로 곁에 둔 묘한 설렘이 있을 뿐이
다. 미소 지으며 잠을 청했다. 여행 끝나면 내 마음이 좀 달라질까?
"철수야 손 줘 봐."
난 팔 하나를 건네 주었고 누나는 내 손을 꼭 쥐었다. 누나는 건너 편 침대에
서 한 손을 내어 한 동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저 여자가 진짜 아주 많이 날 사
랑하고 있는 걸까? 누나는 십분 쯤 내 손을 잡고 있다 힘 없이 스르르 떨구어 버
린다. 침대 밖으로 내려 져 있는 누나의 하얀 손. 누나는 잠이 들었나 보다. 난
벌떡 일어 났다 .
기회다.
누나의 고운 미소를 보았다. 내 손을 잡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놀러
와 신나서 저러는 걸까? 누나의 얼굴 표정이 너무 아기같고 천진난만하게 즐겁
다. 저런 얼굴 보고 어떻게 덮치냐. 침대 밖으로 나온 누나의 한 손을 이불 속에
다 넣어 주었다. 잘 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