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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학벌없는사회 하재근 사무처장은 지난 주 칼럼을 통해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미워하고 싶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공화국’ 내의 계급구조를 까발리며, 영화 <300>이 <하얀거탑>보다 위대한 이유를 조근 조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2편 ‘놀라운 국제경쟁력’에서는 ‘공공적 자유인’을 그려낸 <300>이 ‘사적 노예’를 그려낸 <하얀거탑>보다 위대하다며, 이른바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방향이 어느 쪽이어야 할지 묻고 있다.
① 역겹도록 건방진 그리스인
② 놀라운 국제경쟁력 | | |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명입니다. 한 명이라도 방패를 거두고 등을 돌리면 즉시 전원 몰살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까요? 나만 죽어라고 앞을 보고 있는데 어느 사이에 옆 사람이 등을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힐끔 옆을 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혹은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일이 감독관을 세워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투하기도 바쁜 판에 감독관에 역량을 낭비할 일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효율이 떨어집니다. 경쟁력이 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
레오니다스는 자식이 있는 사람들로만 300인의 결사대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그래 내가 지금 목숨 바쳐 자유를 지키면 내 자식이 자유인으로 클 수 있을 거야. 공화국이 내 자식을 자유인으로 키워줄 거야’라는 ‘신뢰’가 없었다면 그들이 집을 나설 수 있었을까요? (물론
스파르타는 왕국이지만 그리스 도시국가는 대체로 공화국. 스파르타 왕정도 법에 의한 지배라는 측면에서 공화국에 가까웠음)
한국사회는 어떻습니까? 아비 없는 자식이 장차 어떻게 자라게 되나요? 지금 이 땅에 어떤 ‘신뢰’가 있습니까? 지방에 사는 사람의 자식이 일류대 간다는 신뢰가 있습니까? 노동자의 자식이 일류대 간다는 신뢰가 있습니까? 강북 사는 사람은요? 그렇다면 이제 대한민국에서 지방민, 강북주민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외적이 쳐들어와도 그들은 이제 총을 들 필요가 없겠군요.
우리나라는 일종의 강요된 국가총화 체제였습니다. 사이비 중장보병체제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평생고용과
고교평준화였습니다. 이 체제는 국제 무한경쟁에서 놀라운 경쟁력을 발휘했습니다. 기적이라고 일컬을만한 경제성장을 일궜습니다. ‘300’인에게 작업복을 입히면 경제개발 시기 한국 노동자의 모습이 됩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말하자면 스파르타의 300인처럼 싸워온 것입니다. 그들이 국가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사들의 말로가 어떻게 됐습니까?
국가를 신뢰한 ‘노동 전사’들의 말로는 ‘노예화’…노조가 투쟁하는 이유90년대 자유화 개혁 이후 노동자들은 배제 당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노동유연화라는 유령이 들이닥쳐 칼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자식은 해체된 고교평준화 체제에서 일류고들로부터 배제 당했습니다. 일류대로부터도 배제 당했습니다. 결국 공화국의 지배권으로부터 배제 당했습니다. 명실상부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지배권은 자산가들이 탈취했습니다.
* 고교평준화 - 국가가 모든 국민으로부터 학교선택권을 몰수한 것. 교육의 기회 균등 분배. 공화국의 근간.
* 평생고용 -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의 경제적 토대.
* 자유화 개혁 - 고교평준화 해체(학교선택권 확대, 자사고, 특목고), 평생고용 폐지
-> 다수 국민의 노예화
-> 자산가들은 일류고를 선택해 지배신분이 될 자유 획득
-> (사이비) 공화국마저 해체됨신뢰가 사라진 사회에 강박적인 사적 이익 추구만이 난무합니다. 노조는 왜 그렇게 투쟁할까요? 그렇게 악에 받쳐 돈을 긁어내 자식 교육비에 투여하지 않으면, 공화국이 결코 내 자식을 자유인으로 키워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재테크에 몰두할까요? 내 앞가림 내가 하지 않으면 공화국이 내가 노예로 전락할 때 구원해주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왜 능력만 되면 외국으로 가고 싶어 할까요? 공화국을 위해 헌신하는 건 쓸 데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모두를 믿지 않습니다. 옆 사람이 금방이라도 등을 돌리고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은 무너졌습니다. 불신과 공포, 이기심만 남았습니다.
경제지표는 좋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회적 자본을 갉아먹으면서 번영(?)을 누리는 셈입니다.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하던 나라가 갑자기 4%대 성장을 하고 있는데 번영이라니 좀 웃기네요. 말하자면 천재가 어느 순간 범재로 전락한 건데, 바로 90년대 자유화 개혁 이후 벌어진 사태지요.
경쟁력이 뚝 떨어진 겁니다. 사회적 자본이 고갈됐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사라져서 사람들이 더 이상 공공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학생마저도 이젠 자기 앞가림에 바쁩니다. 시민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용기도, 자부심도, 정신의 무한성도, 신뢰도, 결국엔 경쟁력도 사라졌습니다.
일류고, 일류대, 부자들만 자유인인 나라…공화국 시민권 받지 못한 지방민, 강북주민의 배신은 과연 비윤리적인가공화국 로마의 중장보병은 지중해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시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부의 집중이 심화되었습니다. 공화국에 내전이 닥칩니다. 결국 전제정으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막판엔 중장보병의 경쟁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용병을 사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 시민들이 지키려 했던 영웅적인 자유는 ‘국가 규제에 복종할 자유’라고 했습니다. 국가 규제를 뛰어넘을 자유는 노예적 자유입니다. 자유화 개혁을 상징하는 말은 ‘탈규제’입니다. 모든 국민에게 자유를 주자 모든 국민이 노예가 됐습니다.
요즘 일류 대학들이 국가 규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절대적 자유를 누리겠다고 난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영화 <300>에 나오는 괴수군단이 바로 대한민국 일류 대학들이기도 했던 겁니다. 괴수들이 국가경쟁력을 갉아먹으면서 크고 있습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공공의 일, 즉 국가의 일을 내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강력한 국가경쟁력의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리스에서도 문제는 있었지요. 그리스 공화정은 노예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귀족과도 같은 소수 시민만 있고, 국민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공화정은 도시국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시민은 자유인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함께 자유인이 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냉혹한 경멸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노예적 정신(야만인)에 대한 경멸과 약자에 대한
무시로 나타났습니다. 스파르타는 병약한 아이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그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우회로를 일러주는 배신자는 기형의 몸 때문에 자유인의 밀집대형에서 거부당한 사람입니다.
공화국의 시민권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의 배신은 정당합니다. 같은 논리로 대한민국의 지방민, 강북주민이 대한민국을 배신해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일류고, 일류대, 부자들만 자유인이니까요.
공화국이 아닌 나라는 결코 애국심의 대상인 조국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시민들에게만 조국이었습니다. 시민 아닌 자가 애국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공화국이 해체된 대한민국에서 국민들은 더 이상 애국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남은 애국심이라곤 영토, 조상, 역사 등 민족주의적 광기의 애국심뿐입니다. 공화국의 자부심으로서의 애국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공공정신도 사라졌습니다. 자유인이 사라졌습니다.
흔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로마에 빗대는데 그것은 잘못된 비유입니다. 정확하게는 아테네가 미국식 제국주의의 원조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자유인이었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 공화정의 한계입니다. 21세기에 우리는 그 자유를 약자에게도 넓혀 국민을 만들면 됩니다. 그것이 위대한 공화국, 내 조국입니다. 300인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있는 조국. 하지만 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점점 더 약자에게 냉혹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안 좋은 점만 배우고 있습니다.
* 영화 <300>의 배신자 : “나도 싸우게 해 주세요.”
레오니다스 : “넌 전투력이 없잖아. 즐~”
* 한국의 노동자 : “나도 계속 일하게 해 주세요.”
자본 : “너 경쟁력 있어? 즐~”
* 노동자의 자식 : “나도 공부하게 해 주세요.”
학교 : “너 사교육비 있어? 성적 몇 점이야? 특기적성, 경시대회는? 조기유학 다녀왔어? 등록금은 있니? 즐~”‘300’인의 자식들은 이제 비명문교를 나와서 비정규직이 돼야 한다박정희의 고교평준화는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중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결국 귀족사회화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고교평준화가 그나마 제대로 기능할 때는 잠시 국민이 국가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지만, 점차 괴리가 심해졌습니다. 고등교육이 서열화 되어 있어 귀족사회로 가는 엔진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 고등교육 서열체제 -> 입시경쟁심화 -> 사교육비 팽창 -> 다수 국민 배제(노예 형성)군사독재를 끝장 낸 후 우리가 했어야 할 개혁은 강요된 국민총화체제를 동의에 의한 실질적인 국민총화체제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국민이 모두 자유인이 되는 공화국을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300’인의 전사가 되어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갔지요.
고등교육 서열체제는 그냥 두고, 중등부문에까지 서열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사고, 특목고. 그것이 저항에 부닥치자 2006년도엔 개방형 자율학교라는 우회안을 냈습니다. 국립대 법인화를 통해 고등교육 서열체제를 돌이킬 수 없도록 구조화하려 합니다. 그런 식으로 부의 집중이 심화되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교육격차가 심화됐습니다. ‘300’인의 자식들은 이제 비명문교를 나와서 비정규직이 돼야 합니다.
자유를 엉뚱하게 당장, 즉각적인, 최대한의 규제철폐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자유는 왕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공화정의 자유이지요. 무제약적인 자유를 누리는 크세르크세스를 그리스 시민은 노예로 인식했습니다. 90년대 이후 자유화 개혁은 다수 국민도 노예로 만들고, 국가 규제로부터 풀려나 자유를 향유하는 기득권 세력도 역시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공화국은 예속을 선택할 자유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자유화 개혁은 수요자 선택권 확대라는 이름으로 예속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즉, 강자들에게 명문고를 선택할 자유를 준 대신, 약자들에겐 3류고를 선택할 자유를 준 것입니다. 대학에게도 역시 학생을 선택할 자유(선발권)을 확대시켜 줘 ‘300’인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린 조국을 잃어버린 겁니다.
뛰어나고 헌신적인 시민이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잣집 자식이 지배하는 나라그리스는 노예를 제외한 시민들 사이엔 그나마 자유가 있었지요. 그것이 경쟁력의 원천이었지요. 우린 어디에 자유가 있습니까? 일류고, 일류대를 접수한 부자들은 자유롭습니까? 그들도 공공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노예일 뿐입니다. 그들이 창 하나, 방패 하나 들고 우리 공동체를 지키러 전장에 나설 것 같습니까? 노예입니다. 정신이 무한히 확장 되지 못하고 육체적 유한성, 욕망 안에 갇힌 것이지요.
‘300’인의 공화국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강자는 법 위에 군림합니다. 공화국의 법은 강자를 향한 규제인데, 거꾸로 무너진 공화국에서 법은 약자를 향해서만 칼을 세웁니다. 그러자 석궁이 법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지금 레오니다스처럼 명을 내려 볼까요?
‘국민들이여! 법의 이름으로 국가를 위해 죽어라!’
돌아오는 건 조소뿐일 겁니다. 국가를 위해 죽을 시간 있으면 법관 되기 위해 고시원 가겠네요. 법의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을 이용한 지배를 위해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공동체에서 경쟁력이 생길 턱이 없지요.
뛰어나고 헌신적인 시민이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잣집 자식이 지배하는 나라로 변해갑니다. 교육이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추깁니다. 자유화 개혁의 원조인 미국에서마저도 상속세 폐지에 대해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이, 지배권 세습은 안 된다며 반대합니다. 우리 사회의 부자들은 감세, 감세, 감세, 그것밖에 모릅니다. 사회자본 파탄, 국가경쟁력 고갈입니다. 자유화 개혁은 그런 부자들에게 ‘지배할 자유’라는 노예의 표지를 선물했습니다. 국민들에겐 ‘지배당할 자유’라는 노예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300인 군단은 해체 됐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이 ‘그렇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나 하나 잘 되면 되는 거잖아’하면서 <하얀거탑> 장준혁에게 열광합니다. 공공적 자유인은 사라지고 사적 노예만 남았습니다. (
헤로도토스 <역사>에 의하면, 테르모필라이 전투 이탈자는, 병으로 이탈한 두 명중 한 명은 최후의 전투에 급히 참가 전사, 살아남은 다른 한 명은 ‘겁쟁이’라는 별명을 부여받고 스타르타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일을 당하다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명예회복, 전령으로 파견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치욕감으로 자살. 우리나라는 지금 국외탈출을 명예로 여김. 장준혁만 남았음.)
<300>이 <하얀거탑>보다 위대한 것은 자유인들의 공동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주완, 장준혁, 민충식 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보다 <300>의 공동체가 경쟁력이 더 클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정도 돼야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대자본에 맞서 자존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이른바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방향이 어느 쪽이어야 할까요?
/ 하재근(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
첫댓글 영화 안에 많은 의미가 있군요...용병들 복장부터 바디라인 왕짜 장난아니군요^^ 몸 만들기 합숙 훈련 했다 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