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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본심
누가복음 6:27-3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일곱째 주일이다. 지금은 봄이 오는 길목이다.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나면서 갑자기 새봄이 찾아 온 듯하다. 웅크리고 있던 만물이 깨어나며 기지개를 켠다. 새봄, 나는 어떤 희망의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 주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형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기미년 3.1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고, 또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연다. 우리 민족의 고난을 기억하고 희망을 앞당기기 위해 기도하길 바란다.
지난 주 중에 연희동에 있는 하노이의 아침에서 베트남 쌀국수와 볶음밥을 먹었다. 식당이름 때문인지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하노이 식당에서 세월호 ‘4.16 합창단’ 지휘자와 단원 두 분과 함께 하였다.
이번 5월에 세월호 부모로 구성된 ‘4.16합창단’이 미국 한인감리교회(KMC) 초청으로 LA와 뉴욕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를 방문한다. 6번 공연을 한다. 이 일로 사전 협의 차 온 친구 목사를 돕기 위해 함께 만난 것이다. ‘4.16합창단’은 광화문에서 열리는 3.1절 100주년 정부기념식 무대에 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번 미국방문에 감리교회들과 LA와 뉴욕, 토론토의 시민단체인 ‘세월호를 사랑하는 엄마들의 모임’(세사모)이 함께 한다고 했다. 준비하면서 그 엄마들이 묻더라고 한다. “어떻게 교회가 이런 일을 하죠?” 자기들이 아는 교회는 모두 보수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인데 세월호를 기억하고, 초대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이렇게 대답했단다. 그건 당연한 일이며, 본래 교회는 그런 아픔을 감싸주는 곳이다. 다만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잃어버려서 오해를 산다고도 변명했다. 1.5세인 그 젊은 엄마들은 종종 훼방꾼 노릇을 하는 교인들에 대해 잔뜩 화가 나 있어서, 목사의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고 한다.
1)
그렇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 본심’을 잃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그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산상설교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본문은 산상설교의 누가복음 판이다. 무엇보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곧 선하게 대할 것’을 몇 번씩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27).
원수사랑은 예수님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결정적 메시지다. 원수사랑은 산상설교의 백미로, 기존 율법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말씀이다. 분명히 새겨들어야 할 것은 그렇다고 악을 포용하고, 불의와 타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원수사랑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35).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원수사랑에 대한 실천강령을 분명하게 풀이하고 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악을 미워하되, 죄를 지은 인간을 증오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의 악한 태도에 대해서도 여전히 나의 선한 태도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최악에 대해 최선으로 맞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구하는 자에게 주며,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라.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단순한 착함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선을 의미한다.
이를 요약하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이다. 황금률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어떻게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온유함이 아닌 지나친 패배주의가 아닌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니체의 말대로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처럼 들린다. 결코 우리 시대에 통용될 수 없는 윤리이다.
두 사람이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보기와 달리 덩치가 큰 가진 사람이 멱살이 잡혔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잘 참으면서 맞대응하지 않았다. 그에게 예전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참았다. 주먹은 억지로 참았지만, 입은 못 참았다. 한 마디 뱉었다. “이 놈아, 예수는 내가 믿고, 구원은 네가 받은 줄 알아라.”
산상설교에 비추어 보면 그는 절반쯤 잘했다. 감정을 억제하고 참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뺨 저 뺨’(오른뺨, 왼뺨)의 논리까지 실천하지는 못했다. 예수님의 ‘오른뺨, 왼뺨’의 윤리는 적극적인 사랑의 공세를 뜻한다. 인내심은 물론 폭력상황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폭력에 대한 무장해제까지 나아가라는 것이다.
‘속옷, 겉옷’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참 어렵다. 너무 어렵다고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인가?
2)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32).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34).
남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죄인도 그만큼은 한다는 것이다. 세리와 이방인도 자기 사람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조건부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 넘으라는 것이다.
‘개척자들’이란 단체가 있다. 용산의 보광중앙교회의 청년들이 기도하면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계 안에서 화해 사역이다. 개척자들은 동남아시아 티모르 섬에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티모르 섬은 둘로 나뉘어 서쪽은 인도네시아가 지배하고, 동쪽은 2002년에 독립하여 동티모르가 되었다.
동티모르가 독립운동을 할 때 민족이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동, 서 사이에 애국이란 이름으로 서로 이웃을 살해하고, 불사르고,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훼방하고 서쪽으로 넘어 간 사람들을 인도네시아는 애국자로 환영하였고, 지원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인도네시아는 그들 서티모르를 버렸다. 그곳은 물도 부족하고, 토지도 끊임없이 분쟁에 휩싸였다. 서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이젠 동쪽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곳에는 정든 집과 농사지을 땅과 콸콸 쏟아지는 물이 있다. 그런데 돌아갈 용기가 없다. 몹쓸 짓을 저지른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억지로 몸을 피해 인도네시아 난민촌에 들어와 살게 된 그 가족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개척자들의 사역은 그들 사이에서 영상우편배달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서쪽 난민촌의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비디오 편지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전달해 주고, 또 답장 비디오를 만들어 오는 것이다. 영상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사랑하는 친척과 이웃의 이름을 부르면서 목이 메고, 용서를 빌고, 돌아가고 싶음을 사정한다. 사랑을 고백한다. 비록 당장은 만날 수 없지만 조금씩 화해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는 것이다.
개척자들의 사역은 얼마나 고귀한가? 주소가 제대로 없는 신생국가 동티모르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해변 가 모모 마을의 큰 망고 나무 뒤 바위 옆집의 스테판’을 찾기 위해 숱하게 닮은 비슷한 지형을 뒤져 발품을 팔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스테판들 중에서 진짜 스테판을 찾기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수고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 위에서, 숲 속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에게 천사 같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수지간도 서로 연결이 가능하고, 화해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삶에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산상설교는 예수님이 그 말씀으로, 또 삶으로 생생하게 체현하신 계명이다. 우리에게 강요하는 의무적 윤리가 아니다. 우리가 닮고 참여해야할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주현절기에 요절을 암송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여기에서 ‘온전하게’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온전하게’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그 거룩함, 그 자비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의 공동체 안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는 것이다.
이솝 우화에 성내는 사과라는 얘기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바닥에 사과가 떨어져 있었다. 발로 냅다 걷어차니 사과가 커지더란다. 어쭈 이것 봐라? 나중엔 길을 막을 정도로 자랐다. 씩씩거리고 있으니 지혜자가 곁을 지나가며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가라고 충고한다. 그냥 지나가니 사과가 원래대로 줄어들더란다. 사과는 사람의 분노를 상징하는 것이다. 가만 놔두면 사그러질 것을 건드려 화 돋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살게 되었지만, 너무 많은 온유함을 잃었다. 우리 안에 평화보다 오히려 분노가 우후죽순처럼 자란다. 더 많이 정죄하고, 배타적이다. 아픔에 대해 공감능력을 잃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없어졌다. 더 보수적일수록 더 따듯한 법인데, 상처받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한다.
밖에서 보는 시선은 오늘의 교회가 더 냉정하고 불관용적으로 본다.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실망이 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분노를 방치한 채 살았다. 분단 탓으로, 이념 대립 탓으로, 차별 탓으로, 불경기 탓으로 돌렸다. 사실 미국의 세사모 엄마들은 교회에서 ‘예수 본심’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냉대 때문에 크게 상처를 입고 있었다.
2006년 여름에 서울을 방문한 선데이 음방 목사가 한국사회의 갈등현상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 사회는 분노로 가득합니까?” 나는 그 설교를 듣고 배웠다. 우리 사회에 분노는 그리스도인들이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한 마디를 통해 곰곰이 우리 시대의 화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마크 릴라가 쓴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교회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다. 처음에 주류 교회는 도시의 소수 민족 이웃 공동체나 시골의 작은 마을공동체에서 성장했다. 그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따듯한 관계였다.
그런데 교외지역이 발전하면서 교회가 대형화 되고, 사람들은 서로 몰랐다. 그들은 일요일마다 기분에 따라 다양한 교회에 나가는 습관을 익혔다. 대형교회, 스타 목사를 쇼핑하였다. 교회 안에서 기독교교리, 죄의식에 대한 인식은 커갔지만, 사회적 책임의식은 놀랄 만큼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홀로 구원을 받았다”(마크 릴라).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이다. 선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교리로서 공부만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라는 계명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교회를 새롭게 한 존 웨슬리는 첫 감리교인들에게 믿음과 함께 생활원리를 가르쳤다. 280년 전의 일이다. 감리교회는 연합신도회 총칙을 ‘세 가지 생활수칙’이란 이름으로 활용한다. ‘웨슬리 식으로 살아가기’이다.
첫째,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둘째, 선을 행하라(Do Good).
셋째, 하나님과 사랑 안에 거하라(Stay in Love with God).
이것은 산상설교의 원리를 요약한 것이다. 초기 감리교회의 슬로건이며, 새로운 시대의 윤리였다 너무 단순해 진리가 되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공동체의 삶 가운데, 영국사회 속에서 다시 회복하려는 마음과 의지였다.
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삶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족 톨레레게’ 진도에서 신명기 법전은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남을 부당하게 대우하지 말고, 약자라고 억압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고,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갚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
한마디로 율법이든, 복음이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너희 아버지처럼 거룩하고, 너희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라.’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따듯한 시선에 의지하여 산다. 하나님은 나를 비판적인 심판의 눈이 아니라, 끝까지 나를 긍정해 주신다. 우리는 그 은혜로 사는 존재이다.
삼일절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대전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에서 바라보는 비전은 그동안 꿈은 꾸었을지언정, 현실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한 길이다. 그 비전이 비로소 열매 맺는 것이다. 남북이 화해하고 원수관계를 청산하는 일은 얼마나 복된 현실인가? 39년 전 5.18과도 화해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70여 년 전 남북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마침내 평화가 올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용할 기쁨이다. 우리역시 용서받을 죄인이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다. 우리 역시 늘 부족함을 호소한다. 그러니 먼저 주라, 반드시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변명을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기도하고, 힘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 거룩한 성품과 하나님의 자비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아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맛볼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