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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람
고쳐 나지 않고는 종교 개혁 절대 못한다. / 信天함석헌
교회를 팔아먹는 세상
이제 사흘이 지나면 루터가 95 개 조항 붙이는 걸로 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된 그날이 됩니다. 성경 본문(「요한복음」 4장)은 내가 늘 좋아하는 구절이니까 그걸 택하기로 했습니다.
미국 오는 것도 이제 이번이 일곱 번째예요. 우리나라 교회 오라는 데가 있으면 가서 보고 하느라 미국 전국을 다 돌고 그러는데, 이번에도 동부에도 갔고, 여기 며칠 있다가는 서부와 중부로 해서 또다시 한 번 돌고 갈 것입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사방에서 공통된 점을 하나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돈을 마련한다든지 해서 교회를 시작한 데도 있지만, 대개는 본래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던 교회를 빌려 줘서 하는 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다 이렇게 크고, 또 상당히 많이 모이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집에 비한다면 사람은 대단히 적은 걸 봤어요. 재미있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아마 본래 믿던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겠지만, 일 원짜리, 일 달러짜리를 받고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 빌려 주는 거예요. 그런 곳을 내가 두 군데 보고 왔습니다. 다른 데도 또 있나 봅니다. 서양 사람들이 그래도 오래 기독교를 믿어서 그런지 교회를 팔아먹을 수는 없고─한국에서는 곧잘 팔아먹습니다. 목사님이 아주 억대의 권리금을 받아먹고 나간다니 할말이 없지요─또 거저 주려고 해도 행정상 거저는 못 넘어가게 되어 있답니다. 그래 그 형식을 밟느라고 일 달러만 내라 해서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일 달러도 없이 그냥 받았다는 데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걸 보면서 참 섭섭한 게 하나 있어요. 이렇게 교회를 크게 지었을 때에야 사람이 꽉꽉 차니까 그러지 않았겠어요? 그랬는데 어쩌면 이 사람들 교회 안 오게 되었을까? 그래도 여기는 많은 편입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1970년이니까 십오 년 전인데 영국에 가니 지나가면서 봐도 교회가 텅텅 비어서 도무지 사람들이 안 들어가는 데가 많아요. 거기서는 국교(國敎)인데 말이지요.
그렇게 세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 말로도 미국이 낫다고 그럽디다. 영국에선 국교인데도 국민의 십육 퍼센트가 교회에 나오고, 미국에서는 육십 퍼센트가 나온다고 그럽디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 일반이 요새 돌아가는 말로 사양길에 들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해가 저물어서 다 넘어가게 되었다는. 기독교가 이럴 때 다른 종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창때, 우리 나라 처음 기독교 들어오던 때 참 왕성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만은 지금도 예외가 돼서 큰 교회가 많이 서잖아요.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날마다 하나씩 새로 들어선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많아요. 심하면 교회 하나에 교인이 십만 명이 된다, 이십만 명이 된다는 데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예외지요. 시골에 가면 교회가 거의 비다시피 하지 않았을까?
천주교는 이백 년이 넘었고, 개신교는 지난해 백 주년 기념을 했지요. 나는 여섯 살, 일곱 살 때부터 교회에 갔어요. 그 외진 촌에 교회가 들어왔으니까. 그런 시골에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된 걸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보통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해야겠지요. 지방으로 말하면 아주 형편이 없는 곳인데, 거기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래도 일찍부터 비교적 순진하게 믿은 것으로 기억되고, 그런 것이 참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데다 비기면 지금 세계가 왼통 문젭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기독교도 역시 종교의 하나로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날이 그날이니 만큼 이 기회에 “한국 교회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한번 말해 보는 게 어떠냐 해서 그저 있는 대로 내 생각을 말해 볼까 합니다.
예수님 마음이 내 마음
나는 네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제일 많이 읽습니다. 좋아하는 이유가 어디 있냐면 네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은 대개 예수님이 무슨 놀라운 일을 하셨나, 어떻게 전도를 하셨나 하는 걸 주로 말하지만, 「요한복음」은 겉에 나타난 행동보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셨나 하는 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에요.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요한 자신이 아마 본래 좀 내성적인 사람인가 봐요. 나 자신도 성격이 어느 편인가 하면 내성적이라서 생각하는 편의 사람이지 행동은 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이 훨씬 보고 싶은 거예요.
「요한복음」중에서도 3장에서 니고데모가 찾아가서 보던 얘기, 4장에서 수가에 사는 여인이 예수를 만나 서로 문답하다가 신앙을 얻게 되는 얘기, 8장에서는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죽게 된 몸이 예수님 앞에 온 덕분에 용서함받고 새사람이 되는 얘기, 둔한 내 마음이지만 그것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그래 여러분한테도 권하고 싶은 것이, 다른 것도 물론 보시지만 「요한복음」 잘 읽어 보시라는 겁니다.
거기 1장 맨 처음에 예수님이 어떻게 나셨나, 그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든지 아담의 자손으로 났다든지 하지만, 요한은 그런 건 제쳐놓고 천지 창조되던 맨 처음부터 캐 내려오잖아요. 예수님은 다른 것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고 할까, 하나님 자신이라 할까, 그러던 그이가 사람으로 되어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요. 잘 아실 줄 압니다만,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셔 말씀으로 난 분이다. 그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이 지어졌다.” 그러면 대개 예수란 이의 근본되는 데가 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다음에, 무슨 동정녀에게 잉태됐다든지 피난 갔다든지 살아났다든지 하는 것 다 생략했지요.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 많으니까 설명 안해도 괜찮은 줄 알고. 참 깊은 속에서 보고 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1장 처음에 벌써 ‘새사람’이란 뜻이 들어 있어요. 말씀으로 세상이 모두 다 창조되었는데, 창조한 그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오셨는데, 도리어 그 생명의 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 혹은 그 예수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사람’이 된다고 했지요. 새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어요. 이제 그것은 다른 사람 모양 살과 피, 뼈다귀, 이런 것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정욕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지로 된 것도 아니고, 이성으로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지어진 아주 정신적인, 영적인 사람이라, 그런 의미로 새사람이라고 그래요. ‘새사람’이라는 제목을 하나 정해 놓고 「요한복음」을 보세요. 그런 것이 자꾸자꾸 나와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도 “네가 새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란 것은 어쩔 수 없이 육신이 다 있기는 하지만 육신이 있는 이 사람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니고데모가 몰라보잖아요. 그래 “아, 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면서─요즘 말로 하면 국회의원에다 겸해 목사인 셈이지요. 정치가 종교를 다 차지하는 ‘산헤드린’의 최고 회의에 속한 사람이니까─민족을 지도한다면서 영이 무엇인지 육이 무엇인지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이냐?” 하셨어요. 책망이라기보다 타이른 것이지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그 니고데모도 어느 정도 완전한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그 증거로는 마지막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제자들까지 겁이 나서 다 도망 가고 “선생님, 저는 죽어도 안 갈 겁니다” 그러던 베드로조차 그만 약해져서 피하고 그랬는데, 니고데모란 사람이 “그래도 사람을 장사할 때 이렇게 맨몸으로 할 수가 있나?” 하고 옷을 입히고 향료를 가져가서 섞고 그랬다고, 아리마대 요셉하고 둘이 가서 그랬다고 하잖아요.
제자들도 도망을 갔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이랬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전에 있었던 그런 따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 줍니다. 여간 담대하지 않아서는 로마 총독이 와 있는데 무시하고 거길 갔겠어요?
일의 성패는 하늘에 있다
이제 그 얘기도 그렇지만 4장의 얘기도 역시 그런 제목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한 번만 말고 자세히, 여러 번 읽어 보셔야 알아요. 예수님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하면 “예수님의 제자 만드시는 것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아진다더라.” 또 그런 소식이 바리새 교인들의 귀에 들어갔단다, 그 문제예요. 그것을 듣고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셨다, 갈릴리로 내려가는 도중에 거기 가셨다고 해요.
어째서 그랬는지 생각을 좀 해보셔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안 가지만요. 세례 요한이 나서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이 보낸 자다”, 그러고 사람들이 모두 거기 나아가 세례받잖아요. 예수님 자신도 그랬어요. 말하자면 요한한테 세례를 받았던 예수인데 그 예수의 제자가 요한의 제자들보다도 더 많아진다니까 대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가 있잖아. 그 소문이 바리새 교인의 귀에 들어갔다더라.
바리새 교인들이 요한도 미워했는데, 하물며 요한보다도 더 자기네 행동을 반대하고 책망하는데, 그 힘이 더 강해진다고 들었을 때 어땠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놈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는데” 뭐 그랬을 것 아니오? 그 소문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제는 그전처럼 성전에서도 가르치고 큰소리로 외치고 해서 정면 충돌하는 걸 그만두시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려고. 왜? 문제가 이렇게 되면 어차피 저 사람들이 나를 오래 두지 않을 거다, 아시는 거예요. 아시니까, 처음에 “나와 같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도 하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과 뭐 꼭 반대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면 계속 아주 맹활동을 하실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방법을 달리해. 정면 충돌을 피해요.
요새 우리 나라 일이 어렵고 하니까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과 정면 충돌을 하여야만 잘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것도 일리 있지요.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내가 유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줄 믿지만 내가 그렇게는 안한다.” 열 두 영, 한 영이 얼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만 명은 될 거 아니오? 그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덮어놓고 정면 충돌을 자꾸 해야만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동양에서도 성현들이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고 했어요. 성경 뜻은 물론이지.
물론 그건 무슨 이해가 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한자리 얻어 하기 위해서라든지, 이 기회에 어떻게 돈을 모아 볼 생각을 한다든지 그런 건 말도 안 되고. 그건 우선 도덕적으로 허락이 안 되는 것이니까 말할 것 없지요. 어쨌거나 “내가 이걸 가지고 왜 후퇴를 하나? 어떻게든 힘껏 해서 내가 이기도록 해야지” 그렇게 말을 해야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고 좋아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안 그러셨어요. 왜 안 그러셨느냐 하면 “나는 내 생각에서 내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아버지인 하나님이 나한테 가르쳐 주시니까 그대로 하지만, 일이 이것대로 되겠나 안 되겠나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것은 「사도행전」 처음에 있어요.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이런 것을 잘 생각하셔야 돼요.
「사도행전」 처음에 제자들이 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세 이래의 다윗모양으로 그렇게 훌륭한 우리 나라가 지금 말도 안 되게 남의 식민지로 되었는데, 이러한 능력이 있는 이 양반이 정말 늘 기다리던 메시아 아니겠느냐? 심지어 우리 주님이 그렇게 될 때에 누가 첫째고 누가 둘째일지, 자기네끼리 서로 제가 높아 보려고 했단 말이에요. 안 될 소리 같지만 그때도 그랬다는 걸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해요. 여러분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바싹 옆에 가서 달라붙어 나도 어디 한자리 해볼까 그런 생각이 아마 날 겁니다.(웃음) 사람이란 그런 건데, 마지막으로 승천을 한다니까 제자들이 또 그래요. “그럼 이스라엘을 정말 회복시킬 때가 이때입니까? 이제라도 무슨 방법, 놀라운 기적을 해서 하실 겁니까?” 그러니까, 아 천만 뜻밖에 “나 몰라!” 그러잖았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영원히 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그랬어.
그것이 예수님인 줄 아셔야 합니다. 지금 나서서 시국이 이렇다고 싸우는 사람들 큰 잘못은 “우리가 하면 틀림없이 되겠지, 된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정말 참 운동을 하는 사람은 하는 데까지 하기는 하지만, 되고 안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달렸으니까 실패된 때에 가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이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겠지” 합니다. 신앙이 계속되려면 본래부터 그렇게 아셔야지, “우리가 하는 건 틀림없어. 뭐 다른 맘 안 가지고 하는 거니까 하나님이 꼭 성공을 시켜 주실 거야” 그러는 건 자기 판단이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라는 거요.
그러면 하나님은 같이 그렇게 하지 왜 아니하나? 그런 데 참고되는 말은 요나의 얘기예요.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나쁜 놈들이니까 가서 망한다고 그래라” 하니까 요나가 안 간다고 했어. 처음엔 간다고 했다가 안 간다 그랬어.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아주 자비하신 하나님인데, 지금 보시고 화가 나니까 가서 망한다고 그래라 하시지만, 또 마음이 달라지셔서 용서하실지도 몰라요. 괜히 그랬다가 “예언자라더니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랬군” 하면 자기 면목이 없어지잖아. 그런 생각에 겁이 난 겁니다. 그걸 덮어놓고 요나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어. 사람인 다음에는 그렇잖아. 가서 했으면 “아, 그 사람 예언 들어맞았다” 해야 자기도 마음에 좋고 그런 건데, 하나님을 지내봤는지라, 노하기보다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니까 지금 노해서 “가서 회개하라. 회개시켜라” 그러지만, 용서하신다면 나만 무슨 꼴이야, 그런 줄 알고 나 안 갈랍니다 한 거예요.
“안 갈랍니다” 하고 말로 할 수가 없으니까 도망을 가서 배 밑창의 저 깊은 데 가서 말도 안하고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자고 있지 않았어? 그랬는데 기어이 그걸 뒤집어 내서 “이 사람아, 너도 사람인 다음에는 우리 다 죽게 됐다. 너도 네 하나님을 불러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 다음에 솔직히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옳은 일인 줄 분명히 확신을 갖고 하는 데까지는 하지만, 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진다”, 더구나 “내가 살았을 때 이루어진다”고는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천만에, 그렇게 안 되는 일 많이 있단 말이야. 사람이 그런다고 다 된다면 세상에 안 믿을 놈이 어디 있어요? 네 도덕적으로 하는 판단 가지고는 하나님 생각 알 수 없다, 그러면 도덕률이라는 것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는 셈이니까 하나님의 절대성이 없어져. 그런 걸 믿어 가지고는 이 속에서 참 힘은 안 난다 그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게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날 살려 두시려면 살려 두시고 죽이시려면 죽이시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내 직책이 이것이니까 말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틀림없이 하나님이 날 도와 줄 거다. 내가 눈으로 볼 거다” 단언했다가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이 그걸 안했으니까 이 점은 틀림없는 문제예요. 백에서 아흔 아홉이 다 들어맞을는지 몰라도 어느 하나는 안 맞아. 이유를 알 수 없지. 왜 그런지를 누가 알아요?
그로 인해서 다시 흔들린다면 본래 참으로 믿었던 게 아니지요. 역시 나를 믿었지. 내가 해서 내게 돌아온다니까 틀림없이 내게 오겠지 하고 사람을 향해 큰소리를 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미처 모른 거란 말이야. 그러면 어느 때 반드시 일이 뒤집혀서 낙심할 염려가 있어요.
사람의 생각은 못 맞힐 것이 없다, 하나님 믿기만 하면 꼭 내 말대로 해준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흥정을 해서 “믿는 대신에 꼭 이루어 주지요?” 하고 다짐하려 하면, 하나님은 물론 “그러려면 그만둬!” 그럴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제법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건 「사도행전」에 있는 걸 보고 인용하는 거니까 여러분들이 생각을 깊이 할 필요가 있으실 거예요.
제자 교육을 위한 마음
예수님이 바리새 교인들하고 정면 충돌할 필요 없다고 하신 건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마음에 새 마음이 난 거요. 저 사람들이 결국은 나를 죽일는지 모른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내가 가기 전에 여기 무얼 만들어 놓고 가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제자 교육하자는 문제예요. 세상의 악한 세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그 사람들을 없애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건 하나님이 아무 때 가서도 없애시겠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지금은 저 사람들 세력이 저렇게 가는 걸 그냥 어느 정도 허락을 해주신다면,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가야 한다면 말이지. 그래 기도하셔.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오. 그렇지만 제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는 걸 보면 예수님도 될 수 있는 대로 살아서 결과를 보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 점까지 생각해서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또 그렇다고 그냥 무책임하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어느 정도 준비를 시키고 가요.
그래서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제자들을 얼마 동안 조용하게 교육을 시키느라고 가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뭐랬느냐 하면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 사람들과 같은 종자지만 그전 전쟁 때 저 메소포타미아에서 오고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와서 정복하고 해서 그 씨가 좀 혼혈이 됐어.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저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고 사람이 아닌 줄 알아. 자기네가 믿기 위해서 그러는 건 좋지만, 그걸 가지고 차별하고 상종도 안해요. 말도 안하고, 결혼 안하는 건 물론이고 물건을 사고 팔지도 않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로 갈 일이 있을 때는 사마리아로 직접 거쳐 가야 쉽지만, 저 요단강 밖으로 돌아서 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 거 없잖아. 잘못했다지만 그렇다고 차별을 하면 되냐? 똑같은 사람인데 뭐, 못 갈 거 없잖아. 욕하면 욕 좀 먹으면 그만이지” 그런 태도도 있고, 하여간 그리로 바로 가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다른 성경보다 예수님이라는 이가 마음씨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자세히 나와요. 그걸 자꾸 비교해 보고 생각을 하셔야지요.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 그저 “믿습니다” 하기만 하면 거저 주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점도 있기야 있지요. 있지만, 예수님은 될수록 자기의 마음씨를 그대로 사람들 속에 심어 줘서 자기가 돌아간 다음에도 계속 진리가 살아 있어 싸워 갈 것을 생각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로 간 것이지요.
아마 예루살렘에서 떠나면 하루나 이틀쯤 걸리는 노정이지요. 한나절 걷다가 피곤하고 목마르고 땀 흘리셨을 테니 이제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보고, “여보시오, 나 물 한 잔 주시오”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자가 뭐라 했지요? “유대 사람들이 우리보고 상종도 안하더니 오늘은 왜 나더러 물 달라 그러세요?” 그러니까 한편은 고마워서 그럴 수 있고, 그렇잖으면 조금 빈정댔는지도 몰라요.
예수님 손에 두레박도 아무것도 없지, 어쨌거나 자기가 줘야 할 것만은 뻔하니까 좀 비싸게 보이려 했는지도 몰라요. 그걸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아무 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어. 다른 종교에서는 그 사람 눈이 이상하게 생겼다든지, 귀가 대단히 크다든지, 뭐 그런 말이 많잖아요. 그런데 여긴 그런 거 아무것도 없어. 육신의 조건은 똑같은 거지.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런 데 있지 않고, 이 속의 이 영혼이 정말 하나님의 것으로 일치된 자리에 갔나 안 갔나 하는 데 있지. 외형이 틀린다면야 안 믿을 놈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 그래 그 여자가 업신여길 수도 있고, 이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예수님은 초면이거나 구면이거나 사람을 만나면 그저는 안 떠난다는 겁니다. 왜? 사람 만나는 건 하나님이 나더러 그 사람한테 뭘 하라, 좋은 일 하라는 걸로 아셔. 그러니까 기차간이건 버스에서 만났건 사람이 사람을 만났으면 그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야지. 그런 마음이 그 속에 들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왜 나더러 물 달라고 하세요?” 빈정대니까 “네가 날 몰라 그러지, 네가 만약 날 안다면 날보고 물 달라 그럴 거야. 그 물은 정신의 생명인데, 네가 구하면 주겠는데” 하고 말씀을 해요.
그러나 그 여자가 아직도 못 알아들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아, 그럼 우물에 물 안 길러 와서 좋겠네요. 그 물 좀 주세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지요? “너 가서 네 남편 데리고 와” 그랬단 말이에요. 물 준다 안 준다 말씀하시던 분이 남편 데려오라는 소리는 왜 했겠나?
사람의 마음이란 닫혀 있어서는 교훈이 안 들어가요. 죄 지은 사람은 마음이 닫혀요. 죄가 알려지면 세상에 어디 얼굴 들고 나갈 틈이 없다고 생각해서, 누굴 만나든지 비밀로 감추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겐 말이 안 들어가. 마음이 열린 사람이 아니고는 예수님이 하셔도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남편 데려오라는 소리는 왜 했느냐 하면, 이 여자가 결혼 생활에 고장이 있어요. 결혼을 안하고 아마 무슨 갈보 노릇을 했겠지요. 보통 사람한테도 마음이 맑으면 남을 뚫어 보는 힘이 있는데, 직감으로 이 여자를 보시고는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다, 예수님 마음이 그렇게 된 거예요. 왜? 나는 목이 타서 물 안 마시고는 못 견디게 됐지만, 저 사람은 영혼이 타서 곧 죽게 된 여자니까. 만나지 않았으면 몰라도 만났으면 어떻게든 내가 건져 주고 가야지, 그냥 갈 수가 있나? 말은 거기 안 나와 있지만 생각하면 그런 뜻이 거기 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놓질 않아요. 여자는 남편 데려오라고 하니, “나, 남편 없어요” 그런단 말이야. 거짓말인데, 재미있는 건 예수님이 “네 말이 옳다. 남편이 다섯이 있다가 지금 그것도 참 남편이 아니니까, 네가 없다면 없지” 하는 거예요.
그 여자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괜히 시끄러운 소리 듣기 싫으니까 말 끊고 슬쩍 피해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그런 건데,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는 거야. ‘그렇지. 네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말하지 않은 걸 다 안다고 하는 바람에 이 여자가 그만 엎어져요. ‘아이구, 무서워. 이거 이럴 수가 없지.’ 사람이란 그런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는 데는 속일 수가 없어져.
성경 최고봉의 문답
그러니까 딴 말이 나와요. 그게 중요한 대목이에요. 마음을 제가 여는 것. 여자가 만일 “별 소릴 다 한다, 당신 길이나 가시오” 그랬다면 영 말이 끊어지고 마는 건데. 그러고 나서 예수가 “이년아, 말 안 들을 거냐!”(웃음)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말할 만큼 해서 안 되면 내버리는 거지만,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 여자 누가 ‘남편’ 소리만 하면 언제든지 가슴이 두근두근 대. 누가 알지나 않나? 업신여기지 않나? 그래 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그 얘길 하니까 항복을 한 겁니다. “예, 내가 보니 선지잡니다.” 그건 이제 무조건 항복한 거고, 무조건 항복한다는 건 가슴이 열린 거고, 가슴이 열리니까 이제 말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 대목이 내가 새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새사람─종교 개혁하려면 새사람이 되어야 하지, 낡은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 요점은 그거야. 이 여인은 외양은 변한 게 없지만 이제 딴 사람이에요. 가슴을 열었기 때문에. 가슴에 죄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그대로 내보인다는 건 ‘숨김없다’ 그겁니다. 숨겨져 있으니까 죄가 있지, 그걸 개방한다면 없어질 수가 있어요. 이제 그 마음이 그렇게 되니까 여자 입에서 전에 없던 새 소리가 나와요. 새사람이 됐으니까. 무슨 소린고 하니 “당신들은 예배하는 곳이 이 산에, 아니, 저 예루살렘에 있다 하고, 우리 사마리아인 조상들은 기리림 산에서 예배했다는데 어느 게 참 예뱁니까?” 이것이 사람으로서 최고의 질문을 한 거예요. 어떤 게 참 신앙입니까, 이 산에서 우리 조상이 한 대로 해야 옳습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해야 옳습니까?
이제 대답을 들어보세요. 베드로에게도 이런 말 한 일이 없고, 요한에게도 이런 말 한 일이 없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과 참으로 예배해라!” 이보다 더한 진리가 어디 있어?
나는 그래서 이걸 성경의 최고봉이라 그래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은 이 상대 세계에 있는 어떤 훌륭한 것, 그런 따위가 아니야. 절대, 거기에 사람의 생각이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계시다, 그럴 수도 없고 안 계시다 할 수도 없어요. “아름답다” 그러면 벌써 미운 것 뒤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상대 세계에서 하는 말은 하나님에게 갖다 댈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말, 모든 생각을 떠납니다. 그 앞에는 무조건 “예” 하고 엎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말씀을 사도 중에 누구한테가 아니라, 사마리아에 있는 갈보한테 처음으로 했다니 놀라운 것 아닙니까?
사도에게도 말 안했던 최고의 진리를, 뭐 신학교를 가거나 고등학교를 졸업을 못했더라도 이 말은 틀림없이 들어가니까 한 거예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예배하는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이 그때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어. 그러니까 이제 아주 참 사람으로 살아 있는 문답을 해. 그 여자가 뭐라 그랬지요? “아, 메시아란 이가 오시면 모든 걸 가르쳐 줄 줄 압니다.” 그러고 감사했어요.
그 여자도 이스라엘에서 자라났으니까 그 얘기를 했지. ‘메시아’란 것을 안 건 조상을 잘 뒀기 때문이지, 조상 잘못 뒀으면 메시아란 걸 알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개인으로서 잘못을 했어도 그 민족으로 났으면 그 전통이 유전으로 내려와 있다는 말이야. 그것이 참 귀한 것이에요. 사람은 개인이 물론 중요하지만, 역사가 없이는 개인이 사명을 못합니다.
민족이 못쓰게 되면 개인이 잘날 수가 없고, 개인이 없으면 민족을 고칠 수가 없는 관계가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개혁한다고 그저 누구나 불러다가 “종교 개혁합시다.” 그렇게는 안 돼. 여기서, 이 씨에서 나서 죄를 지어도 여기서 짓고, 그 생명의 끄트머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것이 살아나야지, 누구 딴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지요? 이제 여자가 물동이를 놓고 도망하듯 읍내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물 길러 나왔던 여자가 물동이를 놓고 달음질로 마을로 들어갔다니 일은 아주 크게 일어난 겁니다. 자기 하던 일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우리 가족 점심 먹이려고 물 길러 왔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우리 민족 전체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다. 이걸 나 혼자만 듣고 있을 수가 없잖아.’ 그래 달려가서 동리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이거 봐, 내 한 일을 말을 안했는데도 다 아는 이 사람이 메시아 아니야!” 그전 같으면 사람들이 그 여자 말을 들었겠어요? 낡은 신짝같이, 벗어 버린 신짝같이 아는 여잔데. 하지만 그 말하는 것과 모양과 그 무엇이 다 달라. 새사람이 됐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와서 보고 그럽니다. “과연, 네 말이 옳다. 아까는 네 말을 듣고 그랬지만, 이제는 내 두 눈으로 보니까 사실이다.”
그러면 그게 종교 개혁이 된 거지 뭐예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적어도 「요한복음」 사마리아 여자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있잖아요.
거기 조금 아래 켠으로 내려가면 제자들 이야기가 있지요. 우물가에서 예수가 여자하고 문답을 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 얼굴을 보니 아까 떠날 때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여자도 그렇고. 그래도 제자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하고 한참 있다가 “뭘 좀 잡수셔야지요” 하잖아요. 그래 “나는 내 양식이 따로 있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라요. 이건 뭐 꼭 밥을 먹어야 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으면 죄 속에 빠져 죽게 된 영혼 하나를 건지는 게 하나님의 일인데, 오늘은 큰 생선을 하나 통으로 삼킨 거예요. 그러니까 속이 든든해. 배가 부르단 말이야. 그래서 오늘 나 먹지 않아도 좋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그걸 모르고 누가 먹을 걸 갖다 드렸을까(웃음) 수근대지요. 평상시에는 가깝지만 자기네가 직접 당하지 않고는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밖에는요.
시대에 뒤진 기독교
이제 본국(本局)의 것에 대해서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어려워진 건, 교회가─다른 사람보고 말할 것 없어요. 과학자나 이런 사람들도 책임 져야 하지만 믿는 사람 먼저 책임 져야 할 건데─하나님 내쫓았어. 지금 크리스천이란 사람들도 사는 데서는 하나님 외면하고 사는 거지. 말로는 하나님 찾고 그러지만 정말 믿는 사람 어디 있나?
나는 그의 집을 하루 저녁 잠깐 찾아 봤을 뿐이고,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평생 못 잊는 미국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네스트 하킹(Earnest Hocking). 하버드 대학 철학 주임으로 이십여 년 동안 있었던 분인데, 그분 말대로 한다면 이 문명은 세속(secular) 문명이에요. 세속적인 교회당도 뭐도 다 있지만, 사실상 이 사람들은 하나님 믿는 사람들 아니다, 하나님 내쫓았다는 겁니다. 정치에서는 더구나 하나님 없습니다. 나 여기 오면 미국 사람들하고 몇 번 얘기했습니다만, 나는 두 가지 미국으로 본다고 그래요. 여기 민중의 미국 다르고, 정치인이라든지 재벌, 군벌의 미국이 다르다는 거예요. 당신네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인, 재벌, 군벌 들인데 미국에 민주주의 어디 있냐? 이 사람들은 같은 미국인이라지만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책임이 누구에게 떨어지는고 하니 신자에게, 믿는 사람에게 떨어질 거지요.
그런 것에 지금 우리가 직접 간접으로 관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실상 부인한 셈인데, 뭐 신학에서도 “하나님 죽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때부터 그랬어요. “내 하나님은 여기에 없다. 당신네들은 산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살고 죽고가 없는 하나님 믿었으니까 죽을 염려 없다.”(웃음)
하나님은 산 자요, 하나님 살았다, 그 말 옳지요.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 소릴 너무 자꾸 하고 나면 하나님 죽고 말아요. 하나님은 본래 살고 죽고 하는 생명을 초월한 분이니까 말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과학자들이 사람이란 우리가 지식으로나 이성(reason)으로 아는 이것이 전부지 종교가 말해 주는 게 뭣이 있느냐고 하잖아요. 그러는데도 기독교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거기서 발명을 해주고 공장에서 물건 나오면 “아, 이것도 편리해 좋고, 이것은 맛이 있고, 이것도 좋고” 할 줄이나 알았지, 언제 무슨 프로테스트(protest, 저항) 해봤어요? 기독교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데, 프로테스트해야 옳은데, 이날까지 이 수십 년 내에 프로테스트한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이 이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이제야말로 종교 개혁도 참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까 말하던 대로 우선 새사람이 돼야지요. 예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오셨는데, 그건 이 육신으로 인해서, 본능으로 인해서 사는 게 아니고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생명으로 고쳐 나는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볼 수가 있어요.
루터는 훌륭했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완전한 사람만 쓰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루터가 아니었다면 그걸 누가 해요? 오늘은 루터 개혁할 때의 그 개혁 정신이 죽었습니다. 없습니다. 도리어 어느 점은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몰라요.
그 다음 다른 조건도 있어요. 시대가 달라지면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나는 이 시대면 시대는 보통 말로 하면 ‘시대 정신’이 있다고 그래요. 시대 정신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선 기독교 신자들이 매우 많이 떨어졌어. 가령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이 되는 시댄데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 없이 “이대로 있는 게 좋잖아” 그러고 있을는지 몰라요. 하지만 어쨌거나 무슨 이데올로기란 말 나오고 하게 된 것은 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신자들 살아가는 모양도 거기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 있는 동안에 낡아빠진 살림살이가 됐어.
루터가 다른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믿음만으로!”를 강조해서 구교의 잘못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건져내는 데 상당히 힘이 있었던 그런 모양으로 있어야 돼.
지금은 하나님을 당초에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해요. 절대란 건 없다고, 과학이면 다인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이 교만해졌으니까. 그게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이런 것을 종교가,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이 기독교가 체험을 고쳐 해서 이 시대의 말로 해야 돼. 성경에 있는 말이지만 묵은 말 그대로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해요. 병이 자꾸 되풀이되고 나면 처음에 잘 듣던 약을 써도 효과가 나지 않잖아요. 면역이 생겨서. 그런 모양으로 성경에 있는 그 말들도 이 시대 정신과 맞게, 지금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다시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더구나 교회라는 제도, 이건 많이 달라져야 하고.
부디 이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걸 못하더라도 이 종교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 시대 우리가 어딜 가서 들어도 시원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남편을 다섯 번 여섯 번 갈면서 인간의 찌꺼기로 살던 그 여자가 “기리림 산에서 예배하는 게 옳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게 옳습니까?” 하는 모양으로 그 문제가 나오도록 그렇게 이 시대 사람들에게 말할까? 이 시대 사람들은 너무도 유쾌하게 잘사니까, 좀 어려움이 있던들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문제가 터진다면 무슨 옷이 없다든지 먹을 게 없다든지 그런 따위가 아니고 더 심각한 걸로 올 겁니다. 그래서 벌써 그런 것이 날마다 신문에 보도되는 거고, 이제 점점 가면 더할지도 몰라요.
그런 때에 그렇게 되는 그 사람 어딜 찔러서 새로 나게 하는 무슨 운동이 나야 할 건데, 난다면 어디서 나겠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저 사람 영혼이 방금 타서 죽어 가는데, 나는 이 목이 타는 정도지만 저 여자는 영혼이 타 죽어 가는데 내가 어찌 그냥 지나가느냐, 그래서 도망 가려는 여자를 못 가게 막고 “안 놔 준다. 항복하고야 내가 간다” 그러는 모양으로, 우리가 현대 사람한테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만한 믿음이 우선 내 속에서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씨알의소리 1989. 5월 101호-(1985년 10월 27일 미국 로스엔젤레스 한인교회에서 한 강연)
저작집30; 14- 217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