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랫말에 나오는 정겨운 단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그 시절 기차를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차를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진해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가서 처음 봤고 타 본 것은 고2 수학여행 갈 때 처음인 듯하다.
그러니 노랫말 속에 나오는 기찻길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고 기차 지나는 소리가 어떻길래 아기는 기차 소리를 듣고 쌔끈쌔끈 잠을 잘 잘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있었다.
학교 통근길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거대한 동체에서 품어져 나오는 소리도 요란하고 크기도 엄청나서 괜히 무서워 멀리 떨어져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초등학교시절에 부른 노랫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 땜에 혼란스러웠다.
쉽게 말해 낭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가사 말을 쓰는 작가는 왜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막연하나마 궁금했다.
세월이 지나 어느 순간 역세권이라는 곳에 지은 아파트를 사고 이사를 하여 살면서 불현듯 떠오른 노래가 이 노래다.
집에 있으면 지하철이 달린다.
전 구간이 지하철은 아니고 지상에 놓인 철길을 달리는 기차가 달리면 아주 시끄럽다.
음률에 맞춰 칙칙폭폭 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레일 마찰음이 신경을 곤두서게 하면서 달리는데 화가 치밀 것 같은데도 예전에 배운 노랫말 때문인지 몰라도 별로 거슬리는 느낌은 없다.
요즘은 창문 문틀이 발달하여 문을 닫아버리면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다.
8량 정도를 이끌고 달리는 기차는 신비롭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엄청난 괴력으로 저렇게 많이 매달고 달릴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면 그냥 웃음이 난다.
천진하다 못해 약간 모자란 인간이 되어버린 자신의 엉뚱함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시끄러운 굉음을 내면서 기차는 달렸고 그 옆 오두막집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잠을 곤히 잤다는 노랫말이 떠올라 그 시절 귀마게가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다.
초갓집의 방음장치는 전혀 안돼 불가능했을텐데 그 시끄러운 소리에 아기가 깨지않고 잔다는 상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지만 우린 깊은 잠에 빠지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함을 알기에 그럴수도 있겠다고 인정하려 한다.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잠들어 기차 지나가는 소리를 못들었다 해도 엄마 아빠는 들었을텐데 그곳이 낭만이 있고 괜찮은 주거환경인지도 궁금해진다.
물론 어릴 때 몰랐다.
그러나 철이 들고 새로운 경험들이 곁들여지면서 흔히 하는 얘기 중 기차길 옆과 부둣가에는 아이들이 많다는 얘기가 수긍이 가는 이유를 알게 된다.
왜 환경의 특성에 따라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는지를 궁금해하진 않았지만 그곳엔 그럴만한 요건들이 갖춰져 있었음을 알고 웃게된다.
여행을 하다보면 기찻길옆에는 확실히 아이들이 많다.
그것은 기차가 내는 소음으로 잠깬 어른들이 부지런을 떨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똑같은 조건이라면 특출난 생식력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새벽기차 소리에 잠은 깨고 아이는 잠들어 있으니 뜨거운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부둣가에도 아이들이 많다.
예전에 여객선이 다닐 때 예를 들면 부산을 출발한 여객선은 여수로 향하는데 그 여객선이 중간 기착점 항구에 닿을 즈음이면 항구의 관계자와의 소통을 위해 뱃고동을 울린다.
그때면 잠에서 깨어나고 특별한 관계자가 아닌 사람은 본능에 충실하다가 만든 것이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번식과 환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환경에 따라 인간의 본능에 의한 생산활동이 증가하니 자연스럽게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음을 부인할 수 없다.
흔히 말해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출생률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볼 때 부인하기 어려운 결과물이다.
이런 상상을 한 것은 요즘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아이들이 바글거리는 곳을 방문하면서 어째서 이곳은 이토록 많은 아이들이 자랄까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상상하고 얻은 결과물이지만 재미있어 오늘 토설하는 것이다
부둣가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시절 살았던 작은 어촌마을보다 정기 여객선이 와닿는 작은 항구에는 훨씬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고 자라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안다.
역세권은 아파트 분양할 때 광고지에 맨 처음 들어가는 말이다.
교통이 편리하다는 얘기지만 살다보면 불편한것도 동시에 존재한다.
시시각각 오고가는 지하철의 소음도 문제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소음도 간과할 수 없을 정도니까.
젊었으면 어떨지 모른다.
간헐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본능에 충실하여 인구감소로 고민하는 정부에 크나큰 기여를 했을수도 있겠지만 지금 깨어나 있는 것이 불편할 만큼 잠이 감소하여 오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이다.
또 기차는 달린다.
한 여름 창문을 내리고 바깥 공기라도 쐬고 싶은데 굉음을 내고 수시로 달리는 기차소음이 무서워 창문을 꼭 닫고 머리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치고 있으니 내 기억속 노랫말 기차길옆 오막살이 아기 아이 잘도 잔다는 다양한 상상과 결과물을 만들고 이젠 추억속으로 사라짐을 느낀다.
몸과 마음은 일치하나보다.
그 아름다운 노랫말이 왠지 모르게 감흥없이 느껴지는 것은 육신이 늙어가 엉뚱할망정 다채로운 상상을 하는 것 마저 싫어졌음을 알게 된다.
오늘도 창가에 앉아 쉼없이 무거운 몸을 굉음과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는 기차를 멍하니 바라다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시절 내가 불렀던 노랫말을 떠올려 흥얼거려본다.
웃고 있다.
기차는 굉음을 내고 달리고 잠깬 나는 사랑을 하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을 그 언제가의 기억을 더듬어면서 또 웃고 있다.
추억은 늘 아름다운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