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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07
#혜진의 부엌
다용도실을 뒤지는 혜진.
입을 삐죽거리며 보고 있는 파출부.
혜진: 아줌마, 이게 웬 소주병이에요?
소주병 들어 보인다.
파출부: (시치미 뚝 떼고)모르죠.
혜진: 여기 빈 맥주병두 있네.
맥주병 들어 보인다.
파출부: (눈만 멀뚱)
혜진: 아줌마, 술 마셔요?
파출부: (펄쩍) 아뇨.
혜진: (노려보더니 한숨)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파출부: 무슨 조환지 모르겠네. 아무렴 내가 남의 집 일 와서 일 안하고 술타령이나 하겠어요?
혜진: (기가 막히는 걸 참고)강아진 왜 화장실에다 가둬놨어요?
파출부: 강아지요? 지발로 들어갔겠죠. 네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가겠어요?
혜진: (화나서) 아줌마.
파출부: (얼른 웃으며) 미안해요 사모님. 일하는데 하도 쫓아다니면서 짖어대길래.
혜진: ... (어떡할까 바라보는)
파출부: 앞으론 잘할게요. 한번만 눈감아주세요.
혜진: (한 숨 쉬고)애들이 정 들었으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갈게요. 하지만.
파출부: 염려마세요 사모님. 사실은 어저께 제가 좀 우울했었거든요. 애 아버지가 요즘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글쎄 돈두 못 버는 주제에 바람을 피고 다니지 뭐예요. 여기 사장님처럼 돈이나 펑펑 벌어오면 모를까.
수다를 떨어대고 있는 파출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혜진,
못 참고 돌아서 부엌을 나간다.
파출부: 나가세요? 사모님.
혜진이 나가자 입을 삐죽하는 파출부.
#동. 안방
화장대.
마주보고 앉은 혜진.
혜진: ...
머리를 손으로 넘겨본다.
그러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학원 앞
차 세워놓고 기대 학원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혜진: ...
자신도 모르게 반쯤 고개를 돌려 길 건너를 보려는 혜진.
그러나 더는 고개를 못 돌린다.
혜진: (소리) 우연일까.
고개를 돌려 가만히 고개 숙이는 혜진.
혜진: (소리) 우연이었는지도 모르지. 삿뽀로의 공항에서 만났던 때처럼.
학원을 바라본다.
아이들 모습 보이지 않는다.
혜진: (소리) 우연일 리가 없어. 삿뽀로에서두 그랬잖아. 서울서부터 날 봤다구. 남편과 헤어져 울고 있는 날 봤다구.
순간 혜진이 홱 몸을 돌려 길 건너를 본다.
길 건너 준수의 모습 보이지 않는다.
혜진: ...
문득 허탈한 웃음.
멈췄다가 다시 웃는 혜진.
“엄마”
나리와 나래가 달려와 혜진에게 매달린다.
#어느 피자집 안
재롱 피며 맛있게 먹고 있는 나리와 나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혜진.
핸드폰의 벨소리.
나리가 전화 왔다는 시늉.
혜진 정신 나서 얼른 핸드폰의 플립을 연다.
낯선 전화번호와 발신자 정보 없음이라는 문자.
망설이는 혜진.
나리와 나래 본다.
장난치고 있는 나리와 나래.
혜진: ...
통화 버튼 누른다.
혜진: ...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가만히 플립을 닫는 혜진.
#길(밤)
혜진의 차 온다.
#동. 차안(밤)
천천히 차를 몰고 있는 혜진.
나리: (뒤에서 얼굴 내밀고) 엄마, 한 바퀴만 더 돌자.
혜진: 벌써 두 바퀴 돌았는데.
나리: 엄마아.
혜진: 마지막이다?
환성을 지르는 나리와 나래.
혜진: 엄마하고 드라이브하는 게 그렇게 좋아.
나리: 우린 학원만 다니잖아.
혜진: 학원 다 때려치울까.
나리: 와, 신난다.
나래와 하이파이브 하는 나리.
나리: 정말이지 엄마!
혜진: 아빠하고 상의해서.
나래: 야, 서커스 아저씨다.
나래가 앞 쪽을 손짓한다.
혜진 본다.
모터사이클 한 대가 혜진의 차를 추월해 달려간다.
바라보는 혜진.
그대로 달려가 버리는 모터사이클.
보이지 않는다.
나리: 에이, 아니네.
실망해서 뒷자리에 주저앉는 나리와 나래.
#혜진의 거실(밤)
애들 방문 조용히 열고 살며시 빠져 나오는 혜진.
문 닫기 전에 방안을 본다.
#동. 애들 방(밤)
강아지 가운데 두고 잠든 나리와 나래.
바라보는 혜진.
방문 닫는다.
#동. 거실(밤)
문 닫고 기대앉는 혜진.
거실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열렸는지 바람에 팔랑이는 커튼.
그 위에 오타루의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보인다.
혜진: ...
흑 치미는 그리움 같은-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혜진.
그 위에.
- 오타루의 눈 축제에서 준수를 찾아 헤매는 혜진.
부딪히는 사람들.
높은 곳에서 두리번 준수를 찾는 혜진.
그 혜진을 잡는 준수의 손.
준수의 가슴에 뛰어드는 혜진.
불꽃들. -
혜진: ...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는 혜진.
순간 전화벨 소리.
요란하다.
애들이 깰까봐 얼른 달려가 수화기 집어 드는 혜진.
동원: (전화에서) 나야, 핸드폰 꺼놨어?
혜진: 애들 재웠어요.
동원: (전화에서)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오늘 못 들어갈 거야.
전화 끊는 소리.
혜진: ...
창문 본다.
여전히 바람에 팔랑이고 있는 커튼.
그 위에 터지고 있는 수많은 불꽃들.
#다애의 원룸 안(밤)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동원.
다애: (소리) 규칙위반이잖아요 이건.
동원: 맥주 좀 사다 넣어두라고 했지.
동원의 발 밑에 떨어지는 동원의 옷가지.
돌아보는 동원.
다애가 동원의 옷을 건지고 있다.
동원: 규칙은 깨지라고 만들어놓은 거 몰라.
다애: 난 누가 옆에 있으면 잠 못 자요.
동원: 그럼 자지 말고 얘기나 하자구. 난 새벽에 회사로 나갈 거니까.
다애: 왜 날 이상하게 만들어요.
동원: 뭐가.
다애: 애완견 가게서 부인하고 마주쳤는데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요.
동원: 모른 척 했다면서.
다애: ... (기막혀 본다)
동원: 새삼스럽게 죄의식이 난다 그거야?
다애: 모른척한 게 아니구요. 숨이 막혀서 그냥 쳐다본 거예요.
동원: 앞으로 잊지 말고 맥주 좀 냉장고에 넣어 놔.
냉장고에서 물병 꺼내 마시는 동원.
바라보는 다애.
물병 냉장고에 넣고 돌아서는 동원.
동원: 뭐 하고 있는 거야.
다애가 옷을 입고 있다.
동원: 맥주 사러가?
다애: ...
동원: 다애야.
다애: 말했죠, 난 누가 옆에 있으면 잠 못 잔다구요.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시집 갈 생각두 못하는 거구요.
옷 대충 입고 문으로 가는 다애.
동원: 얘가 정말.
다애 팔 잡는 동원.
그 팔 확 뿌리치는 다애.
다애: 남편하구두 같이 못 잘 거 같애서 시집두 안 간다구 했잖아요.
나가버리는 다애.
기가 막혀 서있는 동원.
#혜진의 현관 앞(밤)
현관 계단에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혜진.
외롭다.
더 웅크리는 혜진.
#다애 원룸 앞(새벽)
동원 나온다.
차 키를 꺼내 원격조정으로 차문 록을 해제하는 동원.
동원: ...
건너편에 주차해 있는 다애의 차를 본다.
다가간다.
차안을 들여다본다.
다애가 뒷좌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다.
차창 두드리는 동원.
다애 동원을 본다.
들어가서 자라고 제스추어 하는 동원.
다애: ...
동원을 보더니 시트 등받이 쪽으로 돌아누워 버린다.
#동원의 사무실 안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오는 현필, 대진, 석환.
현필: 어!
놀래서 본다.
동원이 욕실에서 이를 닦으며 나오고 있다.
현필: 여기서 주무셨어요?
동원: 내일이 트리플 위칭 데이지?
대진: 대충 넘어가는 분위긴데요.
동원: 포트폴리오 다시 짜야겠어.
현필: 저흰 해장국 먹고 들어오는 길인데요. 뭐 좀 사다드릴까요.
동원: 커피하고 베이글이나 하나 사와.
석환: 딴 건요.
핸드폰 벨소리.
동원: (탁자의 핸드폰 집으며) 커피 블랙으로 사와.
석환: 네.
나간다.
현필과 대진은 컴퓨터 키고 서류 꺼내오고 부산떤다.
동원: (전화) 하동원입니다. ... 왜... 엄마가?
#혜진의 거실.
급히 들어오는 동원.
파출부: 오셨어요.
동원: 애들은요.
파출부: 학교 보냈죠.
동원: 집사람 많이 아퍼요?
안방으로 간다.
파출부: 몸살이신가 봐요.
안방으로 들어가는 동원.
#동. 안방
들어오는 동원.
동원: ...
본다.
혜진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다.
동원: 애들 시켜서 전화나 걸고.
움직이지 않는 혜진.
동원: 아주 신문에다 광골 내지 그래.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혜진.
동원: 그 따위로 치사하게 나올 거면 아예 갈라서자구, 이 판에.
움직이지 않는 혜진.
화가 나서 부르르 떠는 동원.
침대로 가서 이불을 확 제치는 동원.
동원: ...
흠칫한다.
진땀을 흘리며 오한이 나는 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혜진.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코 훌쩍이는 다애.
명자: 우리 집으로 오지, 차 있겠다.
다애: 차 시동 걸 기운두 없었다고 했잖아.
명자: 그럼 그냥 소파에 자빠져 자든지.
다애: 왜 활 내고 그래.
명자: 답답하니까.
다애: 거기 휴지나 이리 줘.
명자: (휴지통 던져주며) 그렇잖아. 그렇게 싫으면 관곌 끊던가. 그 사람 도움 없으면 니가 뭐 굶어죽겠니.
다애: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했잖아.
코 팽 푼다.
명자: 그러니까 성구씨하고, 아니 준수라고 했지. 아무튼 그게 누구든 둘이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 서로 좋아하면서 뭘 꾸물대.
다애: (화나서) 좋아한다고 다 돼?
명자: (놀래서 본다)
다애: 좋아하면 뭐하냐구.
또 한번 소리치고 코 팽 푸는 다애.
명자 문 쪽을 보더니 고개 돌린다.
다애: (좀 미안해서) 뭐.
명자: 왔다.
안쪽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명자.
문 쪽 뒤돌아보는 다애.
준수가 서있다.
#달리는 다애의 차안
다애: (운전하며) 어딜 가는데.
준수: 그냥 가자는 데로 가.
다애: 감기 때문에 어지러워 죽겠다구.
준수: 우회전.
다애: 꼭 티를 내. 무슨 일이든지.
차 우측으로 꺾는 다애.
#어느 길
우회전해서 달려가는 다애의 차.
#준수의 오피스텔 방안
문 열린 복도에 서있는 다애.
준수: (방안 대충 치우며) 들어와.
다애: ...
안으로 들어온다.
방안을 둘러본다.
벽에 걸린 준수의 사진.
바라보는 다애.
준수가 문으로 가서 문을 닫는다.
다애: 문 잠그지 마. 기분 나쁘니까.
준수: (냉장고로 가며) 뭐 좀 마실래.
다애; 여기서 사는 거야?
준수: (냉장고 문 열고) 맥주, 쥬스, 물, 뭐 마실래.
다애: 이런 큰 사진 걸어놓는 사람은 나르시즘 환자라고 그러던데, 뭐 잘났다고 이런 사진을 걸어 놔.
준수: ...
캔 맥주 두 개 가져와 소파에 주저앉는다.
다애 돌아선다.
캔 맥주 따서 한 모금 마시는 준수.
다애: 왜 날 여기 끌고 온 거야.
준수: ...
고개 숙인 채 맥주 또 한 모금 마신다.
다애: 심각한 거야. 심각한 척 하는 거야. 뭘 바라고 이상한 분위기 잡냐구.
준수: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성구하고 북해도엘 갔었어, 일본.
다애: ...
준수: 둘이서 산엘 올라갔는데 성구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어.
다애: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데)
준수: 지난번에 일본간 건 성구 시첼 찾으러 갔던 거야.
다애: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잘두 나오네.
준수: (본다) ... (번뜩이듯)
다애: 그런 말을 나보고 믿으라구.
준수: ... (꿈꾸듯) 지금쯤 북해도의 눈이 녹기 시작했을 거야... 사월이 되면 눈 속에 파묻혔던 성구의 시첼 누군가 발견하겠지.
맥주 캔 집어 들어 마신다.
비었다.
다른 캔 맥주 따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준수.
목이 타는 모양이다.
비로소 심각해져서 준수 옆에 앉는 다애.
다애: 정말이야?
준수: ...
다애: 고개 좀 들어봐.
준수: ... (천천히 본다)
다애: 왜 죽었는데... 어쩌다?
준수: ...
마치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피하듯 고개 돌리는 준수.
바라보는 다애.
천장을 바라보며 울음을 집어 삼키는 준수.
#어느 병원의 병실
혜진: ...
눈 뜬다.
“괜찮아?” 동원의 소리.
소리 나는 쪽 보는 혜진.
동원이 앉아있다.
혜진: ...
가만히 눈 감는다.
그 얼굴 위에-
동원: (소리) 독감 걸린 지 오래 됐다는데 약두 안 먹고 버티면 어떡해. 폐렴으로 번지도록 미련하게.
눈 감은 채 고개 돌리는 혜진.
동원: ... (바라본다) 미안해.
혜진: (고개 돌린)
동원: 오해하지 마. 어젠 회사에서 잤어. 내일이 트리플 위칭 데이라... 당신 알지. 그 날은 주식이 춤을 춘다는 거.
혜진: (고개 돌린 채) 가서 일 보세요.
동원: ...
가만히 입맛 다시고 혜진에게 다가가는 동원.
손이라도 잡아줄 요량으로 손을 뻗히다가 멈추는 동원.
여전히 고개 돌린 채 움직이지 않는 혜진.
동원: 한 이틀 입원하라니까 맘 편히 먹고 쉬고 있어. 나 회사 갔다 애들 학교에서 오면 고모네 데려다 주고 다시 올게, 알았지?
혜진: ...
동원 문 쪽으로 간다.
“여보” 혜진의 소리.
멈추는 동원.
그 얼굴에-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돼요?” 혜진의 소리.
좀 짜증이 나서 돌아서는 동원.
동원: 회사일두 회사일이구 애들 학교서 돌아올 시간...
말을 멈추는 동원.
눈물이 글썽해서 동원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동원: 폐렴 초기랜다. 심각한거 아니래.
혜진: ...
동원: 알았어. 전화 좀 걸고 들어올게.
밖으로 나가버리는 동원.
혜진: ...
두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사라졌다.
#준수의 오피스텔 방안
가방을 들고 와 다애 앞에 던지듯 놓는 준수.
다애: 이게 뭐야.
준수: 여름에... 아니 가을쯤 되거든 열어봐.
다애: 이 안에 뭐가 들었는데.
준수: 그냥 가지고 있다 나중에 열어보라구.
다애: 뭐가 들었는진 알아야지.
준수: ...
다애: ...
준수: 가봐. 샤워 좀 해야겠어.
욕실로 가는 준수.
다애: (벌떡 일어나며) 왜 죽은 거야, 성구씨.
준수: (멈추는)
다애: 죽였어? 준수씨가.
준수: ...
돌아서는 준수.
다애: ... (바라보는)
준수: 나두 모르겠어. 성구가 왜 절벽 밑으로 떨어졌는지.
다애: 그게 무슨 말야. 둘이 같이 산 위로 올라갔다면서.
준수: ... (바라보더니)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어. 둘이 산 위에 올라갔었는데 성구가 실수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고 하면.
다애: 준수씬 알 거 아냐.
준수; ...
다애: (안타까워서) 이리 와서 앉아봐. 차근차근 따져보자구. 무슨 해결방법이 있을 거 아냐.
준수: ... (문득 미소)
다애: 준수씨 잘못이 아니지?
준수: ...
소리 없이 웃는 준수.
다애: 웃음이 나와. 준수씨가 누명을 쓰게 생겼다면서.
준수: 세상엔...
다애: ... 세상엔 뭐.
준수: ...
입술을 움직이는데 말이 나오질 않는 준수.
다애: (외치듯) 세상엔 뭐.
#어느 병원 전경(밤)
#동. 병실 안(밤)
병실 장의자에 누워 잠이 든 동원.
혜진: ...
어두운 병실 침대에 벽에 등 기대고 앉아서 잠든 동원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잠든 동원.
그 위에-
“혜진아, 나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처녀였어?”
#신혼여행지의 호텔 방안(회상)(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반듯이 누워있는 혜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원.
놀래서 동원을 쳐다보는 혜진.
동원: 동경서 나 만나기 전에 사귄 사람 없었냐구.
시트를 끌어다 가슴 더 가리며 고개 젓는 혜진.
동원: 한번두 없었어?
혜진: ...
끄덕인다.
동원: 그 나이 되도록?
혜진: 그런 거 따지세요?
힘들게 물어보는 혜진.
동원: (돌아앉으며) 나 만나기 전에 누굴 만났든 어떤 관계였든 난 상관없지만.
혜진: 일본사람들은 그런 거 안 따지는데.
동원: (본다) ...
혜진: (베시시 웃는다)
동원: 그래?
혜진: 처녀 총각 땐 아무나 사귀어도 되지만 결혼 하면 순결을 지켜야 하는 건데.
동원: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거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 동원.
혜진: (고개 돌려 보며) 동원씨가 처음이었어요. 연애한 것두 동원씨가 처음이었구... 키스도 처음이었구...
동원: (돌아누우며) 우리 이러자.
혜진: ...
동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미리 말하고 헤어지기로.
혜진: (짐짓 난처한 얼굴 만든다)
동원: 좋지?
혜진: 난 싫어요.
동원: 내 말은.
혜진: 동원씬 그러세요. 난 좋아하는 사람 안 만들 거니까.
동원: 만약 생기면.
혜진: 대체 왜 그래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살고 있는데 왜 또 좋아하는 사람을 만드냐구요.
동원: 살다보면 그럴 수 있잖아.
혜진: 그래두 난 싫어요.
돌아 누워버리는 혜진.
동원: (보더니) 내가 이걸 왜 물어보느냐 하면... 당신이...
혜진: (고개 돌리며) 내가 뭐요.
동원: ...
혜진: (일어나 앉으며) 말해줘요. 내가 뭐요.
동원: 감정표시가 없으니까 그렇지. 이 맹꽁아.
혜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동원.
#어느 병실 안(밤)(현실)
잠든 동원.
그 위에-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좀 더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시해야지. 이건 뭐 죽은 사람처럼.”
혜진: ...
바라보고 있다.
잠든 동원.
가만히 한숨 내쉬며 창문을 바라보는 혜진.
어두운 창밖에 소리 없이 부서지고 있는 오타루의 불꽃들.
#다애의 원룸 안(밤)
들어와 준수가 준 가방을 내팽겨 치듯 소파에 던져버리는 다애.
냉장고로 가서 작은 사이즈의 병맥주를 꺼내 입으로 뚜껑 따서 뱉어버리고 마시려다 가방 본다.
다애: ...
바라보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소파로 가서 가방을 열려고 자크를 잡는 다애.
문득 멈춘다.
“열지마” 준수의 소리.
#준수의 오피스텔 안(회상)
가방을 열려다 준수 보는 다애.
다애: 그럼 말해봐.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준수: ... 내 청춘.
다애: (기막혀) 뭐?
준수: 스물여덟... 내 인생이 그 속에 다 들어있다구.
다애: 그걸 왜 나한테 맡겨?
준수: ...
다애: 왜.
준수: 그 사람 그만 만나.
다애: ...
힘없이 가방에서 손이 떨어지는 다애.
준수: 정말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애써 환하게 웃어 보이는 준수.
#다애의 원룸 안(밤)(현실)
한 숨 내쉬며 소파 밑에 주저앉는 다애.
#양수리 가는 길
달리는 차-
“집 주인 신분은 알 거 없고 선배님은 그냥 알겠다고만 하세요.”
이형사의 소리.
#동. 차안
껌을 까서 입에 넣고 소여물 먹듯 우물거리며 껌을 씹는 박병식.
이형사: 그 집 외아들이 몇 달째 실종 상탠데 경찰에서 수사할 일은 못 되구요. 그보다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겠지요. 그 친구 여러 번 집을 나간 경력이 있으니까 머잖아 제 발로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님은 그저 찾는 시늉만 하세요.
박병식: (껌만 우물우물)
이형사: 웬 껌을 그렇게 자주 씹으세요. 담배 끊으셨어요?
끄덕이는 박병식.
이형사: (웃으며) 얼마나 오래 사시려구요.
박병식: 죽을 때 고생 좀 덜하려구.
이형사: 잘 하셨습니다. 폐암 같은 거 걸리면 고생이죠.
#강회장의 별장 대문 앞
철문.
기다리는 차.
이형사: 요즘도 거기다 돈 퍼붓고 계세요?
박병식: ...
이형사: 그만하시죠. 선배님 노후도 생각하셔야죠.
박병식: 열렸다.
앞을 가리킨다.
철문이 열리고 있다.
#교도소의 시체 안치실 앞(회상)
관이 나온다.
젊은 여인이 관에 매달려 울부짖는다.
멀리서 바라보는 박병식.
#형사과 안(회상)
박병식 들어온다.
과장: 어이, 박형사. 추동춘이 기억나?
박병식: 누구요?
과장: 추동춘이라고 왜 유흥비 때문에 지 어머닐 살해하고 사형당한 친구 있잖아.
박병식: (생각하더니) 아... (하면서도 기억이 희미하다)
과장: 진범이 따로 있었대.
박병식: ... (멍하니 바라본다)
그 얼굴에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강회장 별장의 거실(현실)
여인: 이런 일이 뭐 한 두 번인가요.
안방 문 앞에서 떠들고 있는 여인.
강회장과 마주 앉아있던 박병식이 여인을 쳐다본다.
여인: 돈 떨어지면 연락이 올 건데 이 분이 난리네요. 그러니 점점 버릇이 나빠지죠.
강회장: (눈 지그시 감고 있다) ...
여인: 내버려두세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고.
강회장: 할 만큼 했으면 들어가 있지.
여인: 그동안 사업한다고 갖다 쓴 돈만 해두 빌딩 한두 채는 넘겠다.
투덜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 꽝 닫는 여인.
박병식: ...
조심 강회장 눈치 살핀다.
강회장: (나직이 한 숨 쉬고 박병식 보더니) 이번엔 예감이 안 좋소. 오랫동안 집을 비워도 살아있다는 표시는 꼭 하는 아인데.
박병식: ...
강회장: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그것만 알아봐 주시구려. 살아있으면 저 살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만에 하나 죽었으면...
박병식: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강회장: (메모지 건네며) 뭐든 알아내면 여기로 전활 해 줘요. 딴 사람 통하지 말고.
박병식: ...
메모지 본다.
전화번호다.
강회장: 그 애에 관한 정보 같은 걸 더 주고 싶지만 그러면 편견 같은 게 생길 거 같애서.
박병식: 네, 저도 그게 좋습니다.
강회장: ...
바라보더니 가만히 끄덕인다.
#달리는 차안
무릎 위 서류봉투에 돈 봉투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얌전히 쥐고 있는 박병식.
이형사: (힐끔 보며) 강남 바닥부터 뒤져보세요. 있는 집 애들 노는데 뻔하잖습니까.
#양수리 부근 매운탕 집
매운탕 국물을 수저로 떠서 조심 입으로 가져가는 박병식.
이형사: 참, 저번에 증권사 친구가 부탁한 건은 그만 두셨다면서요.
박병식: ... (국물 마시고) 나쁜 놈이야.
이형사: 누가요.
박병식: 그 친구 직장상사 부탁이라고 하더니 지가 바람피는 젊은애 뒷조살 부탁한 거야. 애두 있구 부인두 있는 놈이 원.
이형사: (새끼손가락 펴 보이며) 이거 뒷조사 말입니까.
박병식: (화를 내며) 세상에 나쁜 놈 참 많아. 돈 없어 도둑질 하고 홧김에 살인하는 놈들보다 그런 놈들이 더 나쁜 놈들이라구. 법에도 안 걸리는 나쁜 놈들!
침까지 튀기며 흥분하는 박병식.
#변두리 동네 언덕길
박병식이 언덕길을 올라온다.
좀 숨이 차다.
멈춰서 쉬는 박병식.
#형사과 안(회상)
과장: 사표?
박병식: ...
과장: 갑자기 사푠 왜?
박병식: ...
대답 없이 수건 꺼내 목 뒤의 땀을 닦는 박병식.
과장: 이 친구 이거. 수살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사표까지 낼 게 뭐 있어. 그리고 추동춘이 사형당한 게 자네 책임도 아니잖아.
박병식: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돌아서 나가는 박병식.
과장: 이런다고 죽은 놈이 살아나.
화가 나서 소리치는 과장.
#변두리 동네 언덕길(현실)
언덕을 올라오는 박병식.
어느 집 대문을 기웃거린다.
담이 낮아 안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느 집안
대문 열고 얼굴 디밀고.
박병식: 계십니까? ... 계세요?
부엌에서 여인이 나온다.
박병식 보더니 반색하며 달려오는 여인.
여인: 아이구 오셨어요?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여인.
박병식: 장사 잘 되세요?
여인: 예, 선생님 덕분에 팔자가 폈죠 뭐.
박병식: 애들두 잘 크구요?
여이: 예.
연방 굽실거리는 여인.
박병식: 저...
속주머니서 돈 봉투 꺼내 내민다.
여인: 아이구 이러지 마세요. 이젠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박병식: 뒀다 급할 때 쓰세요.
여인 손에 쥐어주고 황급히 돌아서는 박병식.
#동. 집 앞
나오는 박병식.
여인: (따라 나오며) 선생님 성함이라두.
박병식: (흠칫 멈춘다)
여인: 요즘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이 어디 있겠어요. 교도소에서 그이한테 신세를 졌으면 얼마나 졌다구.
박병식: (본다) ...
여인: (눈물 훔치는)
박병식: 약속을 했어요. 동춘이하고... 사회 나가면 제수씨랑... 돌봐 주겠다고.
여인: (보더니 울면서) 정말 억울해서 죽겠어요. 시어머니 죽인 진범이 따로 있었다는데 그이만 사형을 당했으니. (콧물을 손등으로 훔치더니) 경찰서랑 법원 찾아가서 우리 그이 잡아넣은 그 때 형사 놈이 누구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그 형사 놈을 꼭 찾아내서 사생결단을 하고야 말거예요. (다시 울며) 아이구 분하고 원통해서 어떻게 사나.
박병식: ...
울고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박병식.
#동. 부근 언덕길
뛰듯이 내려오는 박병식.
멈춰서 뒤돌아본다.
숨이 가쁘다.
주머니 뒤져 담배 찾다가 껌을 꺼낸다.
떨리는 손으로 껌을 까서 입에 처넣는 박병식.
우물우물 씹어대는 박병식.
#박병식의 연립주택 부엌(밤)
라면 끊이는 박병식.
냄비에 계란 까 넣으며 싱크대 위에 펴놓은 성구의 사진들을 보는 박병식.
성구의 사진들.
룸싸롱이나 오픈카 위에 걸터앉아 찍은 사진들.
박병식: ...
룸싸롱에서 찍은 사진을 집어 들어 유심히 들여다본다.
성구가 양 옆에 앉은 젊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찍은 사진 옆에 머리에 종이로 만든 모자를 쓰고 파티나팔을 불고 있는 준수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사진 집어 든다.
생일 케잌의 촛불을 끄고 있는 성구의 사진.
#같은 곳(밤)
거실탁자에 라면을 올려놓고 후르륵 후르륵 먹고 있는 박병식.
그 위에-
박병식: (소리) 집 나간 마누랄 찾아다니다가 형사가 됐다. 이놈저놈 붙어먹는 마누라가 미워서 치정에 얽힌 사건이라면 두 눈이 뒤집혀서 더 뒤지고 다녔다. 추동춘도 그 피해자일 것이다. 처자식까지 있는 놈이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노모를 죽였다고 믿었으니 전후 사정을 헤아릴 여유도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한 숨 쉬듯) 이놈의 증오심이라니...
라면을 먹으며 옆에 놓인 사진 집어 들어 다시 본다.
생일파티.
파티나팔을 불고 있는 준수.
#혜진의 부엌(새벽)
냉장고에서 우유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원.
양복 차림이다.
#동. 안방(새벽)
문 여는 동원.
동원: 자?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혜진.
혜진: 아녜요.
동원: 더 누워있어. 나 나갈 거니까.
혜진: ... (침대 등받이에 기대서) 미안해요. 일어나서 뭐든 만들려고 했는데.
동원: 난 신경 쓰지 마. 회사에서 적당히 아침 먹으니까 (문 닫으려다) 참 내 정신 보게.
안으로 들어오는 동원.
안주머니에서 지갑 꺼내 체크카드 꺼내 화장대 위에 놓는다.
동원: 여기다 돈 좀 넣어놨어.
혜진: 통장에 돈 있는데 왜요.
동원: 따로 쓰라구.
혜진: ...
동원: 기분두 그런데 쇼핑이나 하든지. (방문 쪽으로 가다) 당신 맘대로 쓰라구, 알았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고 나간다.
혜진: ...
화장대 본다.
체크카드.
#혜진의 집 현관
혜진 나온다.
하늘을 본다.
햇빛에 어지럽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혜진.
파출부: (현관문 열고) 늦으세요.
혜진: ...
어지러운지 참고 서있는 혜진.
파출부: 오랜만에 햇빛 보니까 어지러우신가 보다. (웃고 들어가려다) 참 애들은 언제 데려오실 거예요?
혜진: 오늘 내일...
고개를 돌리다 다시 햇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 가리는 혜진.
#어느 옷가게 안
혜진이 탈의실에서 새 옷을 입고 나온다.
점원: 아이구 사모님 잘 어울리시네요. 몸에 군살이 없으니까 옷의 실루엣이 좋으시네요. 어쩌면 그 나이에 그 몸매를 유지하세요? 다이어트를 하시나 봐요.
수다 늘어놓는 점원.
거울을 보고 있는 혜진.
혜진: 앞이 너무 많이 파였나? 내 나이에.
뒤돌아서서 거울 보는 혜진.
혜진: 뒤도 그렇구.
점원: 사모님두 참. 요새 누가 나일 따져요. 다들 젊게 입으시잖아요. 몸매가 중요하죠.
혜진: ...(망설이는)
점원: 다른 분들은요, 몸매가 안 받쳐주니까 못 입는 거예요.
혜진: ...
말없이 다른 옷 고르기 시작한다.
#동. 앞
빈손으로 나오는 혜진.
혜진: 미안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점원: (내다보며) 스타일 좀 바꿔보세요 사모님.
흘기며 눈웃음치는 점원.
#어느 구둣방 안
하이힐을 신어보는 혜진.
거울 앞에서 발을 움직여본다.
마음에 안 드는지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어느 백화점 안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혜진.
가방가게에 들어가 이런저런 가방을 메보고 들어보고 하는 혜진.
#동. 백화점의 야외 휴게소.
혜진: ...
다리가 아픈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누군가 옆에 앉는다.
무심코 자리를 좀 비켜주려고 벤치 끝에 옮겨 앉는 혜진.
그 앞에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손.
혜진: ...
본다.
준수: (보더니) 아이스크림 좋아하시잖아요.
혜진: ... (바라보는)
무심해지려고 하나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혜진의 눈빛.
준수: (고개 돌리며) 만나서 꼭...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혜진; 무슨 사과?
준수: (본다) ...
혜진: 난 사과 받을 일 없는데.
준수: (고개 돌리며) 우연히... 어떤 분인지 알게 됐어요. 사시는 곳, 애들이 몇인지...
혜진: 내 뒷조살 하고 다녔어요?
준수: (본다) ...
혜진: (기가 막히다는 듯) 왜.
준수: ... (바라보더니)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양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하나를 한 입 베어 먹는 준수.
여전히 기가 막혀 보고 있는 혜진.
준수: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지도 대충 알아요. (괴롭게) 알아야 했어요.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북해도엘 갔었는지...
벌떡 일어나는 혜진.
준수: (잡듯이 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놓고 싶어요. 눈 덮인 오타루의 깊은 계곡 속으로요.
혜진: ...
움직이지 못하는 혜진.
준수: ...(보더니) 지워버리고 싶으시겠죠?
혜진: (본다) ...
준수: (자꾸만 웃으려고 애쓰고 있는)
혜진: ...배 안 고파요?
준수: ...
서러움이 터져 나오듯 웃는 준수.
#어느 레스토랑 안
접시에 남은 음식을 포크로 가만히 뒤적이고 있는 준수.
혜진: ...
그런 준수를 바라본다.
준수: ...
혜진을 보더니 어깨를 움츠리며 포크를 식탁에 놓고 반듯이 앉는다.
혜진: 하루 종일 내 뒤를 따라다녔어요?
준수: ...
혜진: 못됐네.
밉지 않다는 미소.
준수: (뭐라고 하려는데)
혜진: 언젠간 한번 만날 줄 알았어요. 만나지 않길 바랬지만. 하지만 이런 식은 아녜요. 그때처럼 날 우연히 마주치는 거면 몰라두.
준수: ...
또 한번 어깨를 움츠리고 자세를 바로 하는 준수.
혜진: 우연이든 뭐든 나에 대해서 뭐든 알고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입장을 바꾸어서.
준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요.
혜진: 무슨 말이 그래.
어이없다는 듯 웃는 혜진.
준수: (불쑥) 많이 아프셨어요?
혜진: (웃음 그치는)
준수: 밤새도록 병실을 바라봤어요. 어느 병실인지는 모르지만.
혜진: 덕분에 잘 먹었어요.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어서 그냥 굶을까 했는데.
준수: ...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 볼펜을 꺼낸다.
고급 볼펜이다.
다른 주머니 뒤져 종이를 꺼낸다.
카드 영수증이다.
빈 공간을 찾아 뭔가 급히 쓰는 준수.
그 모양을 비로소 천천히 바라보는 혜진.
준수의 손목에서 빛나는 고급시계.
준수: ...
카드 영수증에 쓴 메모를 혜진 앞에 조심 놓는다.
혜진 본다.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혜진: (준수 본다)
준수: 또 제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소리 없이 환하게 웃어 보이는 준수.
#달리는 혜진의 차안
혜진: ...
왼손은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뭔가 움켜쥐고 꼼지락거린다.
혼란스럽다.
차창을 여는 혜진.
차창 밖으로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카드 영수증을 밖으로 내던진다.
#다른 길
혜진의 차 갑자기 길옆에 정차한다.
#동. 차안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혜진.
그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다 문득 멈추는 혜진.
맥이 풀린다.
핸드폰의 플립을 닫아버리는 혜진.
#혜진의 부엌(밤)
밤참 먹는 동원.
동원: 뭐 샀어?
싱크대서 일하는 혜진.
동원: 쇼핑 좀 하라니까. 카드에 돈 넉넉히 넣어놨어.
혜진: (홱 돌아서며) 우리 이혼해요.
동원: ...
혜진: ...
동원: (웃으며) 뭘 해?
혜진: ...
한 숨 쉬며 싱크대로 돌아서 일 하려다 싱크대 위에 두 손 얹고 고개 푹 숙이는 혜진.
동원: 세상엔 네 종류의 남편이 있어. 돈두 주고 사랑도 주는 남편, 돈은 주는데 사랑은 안 주는 남편, 사랑은 주는데 돈은 안 주는 남편, 마지막으로 돈두 안 주고 사랑도 안 주는 남편. 난 일등은 못 되도 이등은 되잖아.
혜진: ...
수돗물 확 틀고 그릇 닦는 혜진.
동원: 가만있어봐. 돈은 줘도 사랑은 안 주는 놈보다 돈은 안 줘도 사랑을 주는 놈이 더 좋다는 건가. 그럼 난 삼등이네.
혜진: ...
고개 푹 숙이고 울음 참고 있는 헤진.
#동. 안방(밤)
침대에 누운 동원.
옆을 본다.
돌아누운 혜진.
동원: 나 좀 봐.
혜진: ...
동원: 이 쪽으로 돌아누워 보라구.
혜진의 어깨를 잡아당긴다.
끌려왔다 다시 돌아눕는 혜진.
동원: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집 나가서... 북해도 가서 말야.
혜진: ...
동원: (고개 돌려보며) 그래? ... 당신 일 저질렀지?
혜진: (등 돌린 채) 아뇨.
동원: 그런데 왜 그래.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혜진: ... (눈물이 사라지는)
동원: 그래, 생각 좀 해 보자구. 신혼여행 가서 내가 먼저 그랬지. 살다가 좋은 사람 생기면 미리 말하고 헤어지자구.
혜진: ...
동원: (한 숨 쉬며) 그 정돈 아니거든. 그 앨... 그 정도루 좋아하는 건 아냐. 당신하고 이혼할 만큼.
혜진: (등 돌린 채) 고맙네요.
동원: ...
고개 돌려 혜진 보더니 슬며시 손을 뻗쳐 혜진의 팔을 잡아당기는 동원.
반쯤 끌려오다 동원의 손을 뿌리치는 혜진.
동원: 왜 그래.
혜진: ...
동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웬수처럼 살자 그거야.
#동원의 사무실 안
들어오는 현필.
동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러닝머신을 타고 있다.
현필: 아침 내내 계속 밀리는데요.
동원: (숨 가빠하며) 얼마나 떨어졌는데.
현필: 방금 전에 싸이카까지 울렸어요.
동원: ...
러닝머신 스위치 끈다.
더워서 와이셔츠 단추 서너 개 푼다.
동원: 너 임마, 바닥까지 떨어진 기분 알어?
현필: (웃으며) 이 바닥에서 몇 년 짼대요.
동원: 주식 말고 인생.
현필: 네?
동원: 왜 놀래.
현필: 아이구 부장님이 그런 말씀하면 어떡해요. 그럼 남들은 벌써 다 죽었죠.
동원: 니들 날 그렇게 알고 있지. 하동원이 인생은 완벽하다.
현필: 우리들 우상인데요, 부장님은.
동원: ...
냉장고 가서 물 꺼내 마시는 동원.
현필: 뭐 고민 있으세요.
동원: 없어.
현필: 근데 왜요.
동원: 알 거 없어.
현필: 깜짝 놀랬잖아요. 무슨 일 있으신가 하고.
동원: 할 수 없다. 우리도 좀 팔자.
현필: 이럴 땐 버티는 게 부장님 원칙이잖아요.
동원: 밀릴 땐 밀려야지. 여편네한테두 밀리는데.
현필: (놀래서 눈 껌벅)
동원: (힐끔 보더니) 자식 또 아는 체 한다. 눈 깜박이지마, 임마.
꽥 소치 치는 동원.
#혜진의 부엌
간식 먹는 나리와 나래.
허겁지겁 이다.
혜진: 고모가 간식두 안 만들어 줬어.
나래: 응, 배고팠어.
나리: 엄마 아프지 마. 고모네 집 가기 싫단 말야. 고모 얼마나 무섭다구.
혜진: 고모가 무서워.
나래: 응, 도깨비 같애.
혜진: 도깨비?
나래: 으앙.
오만상 찌푸리며 머리 위에 두 손으로 뿔 만들어 보이는 나래.
웃는 혜진.
#어린이 놀이터
아이들과 뛰놀고 있는 나리와 나래.
벤치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혜진.
그네 타는 나래.
뒤에서 밀어주는 나리.
나리가 나래를 안고 미끄럼틀 타고 내려온다.
시소 타는 나리와 나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나리와 나래.
그 사이 사이로 복순이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닌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혜진.
그런 모습 위에-
혜진: (소리)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듯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생이, 인생을 말하기엔 아직도 젊지만 산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북해도엔 가는 게 아니었다. 어쩌자고 나를 허물어버린 것일까. 세상엔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아이들. 부끄럽다... 부끄러웠다. 죽는 날까지 나는 부끄러워하면서 살 것이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반사적으로 플립을 열고 전화를 받는 혜진.
혜진: (전화) 여보세요...
순간 굳어지는 혜진.
준수: (전화에서) 내가 적어준 전화번호 버리셨죠? 그러실 거 같애서 전화했어요.
혜진: ...
돌아본다.
두리번 준수를 찾는다.
준수 보이지 않는다.
전화기 든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혜진의 집 전경(밤)
집안에 환하게 켜진 불.
#동. 거실(밤)
동원이 나리, 나래와 집짓기를 하고 있다.
좋아서 웃고 있는 나리와 나래.
#동. 부엌(밤)
과일을 깎고 있는 혜진.
아이들 웃음소리.
거실을 본다.
나리와 나래를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어서 다니는 동원.
힘이 든다는 듯 엎드린다.
동원의 등에서 떨어지며 웃어대는 나리과 나래.
덩달아 옆에서 짖어대는 복순이.
혜진: ...
쓸쓸한 미소.
다시 과일 깎는데 전화벨 소리.
놀래서 식탁 보는 혜진.
핸드폰.
계속 울리는 벨소리.
동원: (거실에서) 잠깐만 아빠 전화 좀 받고.
혜진: ...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 내쉬는 혜진.
거실을 힐끔 보는 혜진.
동원: 잠깐만. 안에 가서 받을게.
부엌 쪽 힐끔 보며 서재로 가는 동원.
혜진 얼른 돌아서 과일 깎는다.
동원이 외치는 소리에 다시 거실 보는 혜진.
동원이 서재로 들어가려다 전화기에다 소릴 지르고 있다.
동원: (전화) 얼마나 올랐다구, 다운지수가... 나스닥은... 그렇게 올랐단 말야? 야야야 가만 좀 있어봐. 오늘 우리가 얼마나 내다 팔았지? 미치겠네. 잠깐만, 서재 들어가서 컴퓨터 좀 키고.
허둥지둥 서재로 들어가는 동원.
혜진: ...
식탁 위의 핸드폰 본다.
가만히 핸드폰을 집어 플립을 열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전화번호들이 뜬다.
준수의 전화번호 확인하고 메뉴를 누른다.
삭제 메뉴를 누른다.
삭제 메뉴를 골라 버튼 누른다.
“삭제할까요” 문자가 뜬다.
확인 버튼 누르는 혜진.
준수의 전화번호가 사라진다.
혜진: ...
힘없이 식탁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 혜진의 얼굴 위에 오타루의 불꽃들이 명멸한다.
-제7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