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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 - 정결례와 봉헌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중, 1970년대 중동 남편들이 중동에 건설 붐이 일던 시절의 실화라고 합니다.
남편이 돈 벌려 중동으로 간 두 주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멀리 열사의 땅에서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보내주는 돈을 꼬박 꼬박 저축 했습니다. 통장에는 돈이 점점 쌓여가고 어느덧 천만 원도 넘어갔습니다.
둘 다 남편들이 떠날 때 돈을 모아 셋방을 면하고 집을 장만하자고 약속했던지라 통장만 보면 벌써 집을 장만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주부에게 웬 전화 한통씩이 걸려왔습니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했는데 외롭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저 외로운 부인들에게 위로를 주기위해서 전화를 했노라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댄스 교습소 춤 선생 이었습니다.
외로우시니 운동 겸 소일거리 겸 한번 놀러 나오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았지 마음속 한편에는 남편이 없는 외로움에 힘들었던 주부는 설마 별일 있으려고 심심한데 구경이나 한번 가지 뭐 하는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그 길로 그 주부는 매일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비에게 몸도 돈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인은 그도 전화를 받고 마음이 움직였으나 다시 돌아올 남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져먹고 요동치 않았습니다.
때때로 외로움과 그리움에 울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남들과 같이 풍족치 못하여 셋방에 살며,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하나 하는 신세 한탄도 나왔지만 오직 돌아올 남편을 생각하며 꾹 참고 아이들을 기르며 살았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두 집에는 중동에서 편지 한통씩이 날아왔습니다. 뜯어보니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보 얼마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나 며칠 후면 귀국이요”
편지에는 비행기의 도착 날짜와 시간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일 보고 싶으니 돈이 아무리 들어도 꼭 김포 공항에 나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두 부인은 둘 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한 부인은 너무 기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숨겨 논 통장을 끄집어내어 보고 또 보고 울기도하고 웃기도하고 어서 그 날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이집 저집에 가서 자기 남편이 돌아온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부인은 그 날 밤부터 불안과 두려움 후회로 역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통장은 이미 벌써 비었고, 빚마저 벌써 수백만 원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죽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그 날 한 부인은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고 김포공항에 나갔습니다. 핸드백에는 이미 수천만 원으로 늘어난 통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인은 그날 자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퍼온 글: cafe.daum.net/wordofgod)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성전에 바쳐진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이 문장에서 복음사가는 ‘정결례’와 예수님의 ‘봉헌’을 같은 문장에 놓습니다.
사실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정결례를 해야 하는 사람은 ‘성모님’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여자가 자녀를 낳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여겨져 비둘기 등의 제물을 바치며 정결례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상한 것은 당시 법으로는 예수님을 바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아버지인 ‘요셉’이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 맨 처음 예수님의 족보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자녀도 여자가 낳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낳는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아기를 낳아 부정한 몸이고, 또한 여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아기가 사제의 손에 의해 봉헌되었기 때문에 히브리 문화 안에서 ‘부모’가 아들을 봉헌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오롯이 도로 바쳐 ‘봉헌하는 예식’은 이 문장 안에서 미묘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위의 예화에서 보았듯이, 정결하지 못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돈을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자신을 위해서 써 버렸습니다. 반대로 정결한 여인은 남편에게 다시 그 돈을 바치는 것에 매우 행복해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에 유일하게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도로 바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정결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성자께서는 그래서 그 정결한 몸을 다시 받아 당신의 신성과 결합하여 예수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또 오늘 봉헌에서도 사실 자신이 오롯이 바친 몸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바치는 실제 주인공은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정결례가 되는 것입니다. 봉헌하시기에 정결하신 것입니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합니다.
이는 지금은 상징적으로 아기를 봉헌하지만 나중에는 실제로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하며 그렇게 십자가의 속죄 제물로 봉헌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오롯이 모세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제물을 드리는 중재자는 깨끗한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드리실 수 있는 만큼 깨끗하신 분은 그 하느님을 세상에 내려오게 하신 통로이신 성모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내 자신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내 남편도 내 자녀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신랑이신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이고 간음하여 정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결하게 살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자살한 그 주부처럼 될 것이고, 정결하게 살았다면 기쁘게 그 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사는 유일한 길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내 자신까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봉헌하는 것입니다. 봉헌축일의 가치는 이렇게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정결한 신부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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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현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 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봉헌의 의미를 오늘의 삶에서 되살리고자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봉헌 생활이 있는데, 특별히 오늘은 모든 수도자와 수도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가 며칠 전에 받은 편지 한통을 읽어 드릴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수도성소를 받고 외국에서 봉헌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수녀님의 글 입니다. 오늘이 봉헌 생활의 날인 봉헌 축일 이라 더욱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중국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저희 수녀회 공동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저는 정신 지체 아동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있지만 전부 부모로 부터 위탁 받아 있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여 처음으로 수도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작하는 저의 봉헌 생활은 먼저 저 자신부터 얼떨떨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외국인 신분으로서의 선교의 삶이란 국내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우선 수도자란 신분을 드러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의 학부모들이 저희들의 신분에 대하여 몹시 궁금해 하였습니다.
'국적이 다른 여자들끼리 왜 여기 와서 이렇게 함께 사는걸까?' '남편들은 얼마나 너그럽기에 아녀자들과 저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가?'
중국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처음엔 질문 자체가 재미있었지만 그것도 끝이 없이 계속되니까 너무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듣다 못한 중국인 우리 공동체 직원이 적당히 둘러 대 주어 피곤함은 면했지만, 그 댓가로 저희들은 졸지에 아이 서넛을 한꺼번에 가진 유부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서의 저의 봉헌 생활은 법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수함과 함께 더욱 맛들여 갔습니다. 아이들의 연령은 5세에서 16세, 이들은 자폐아, 대뇌 척수증, 지진아, 다운증후군의 아이들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로 교육시키기 위해 모였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24시간 이들과 같이 생활함이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수없이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고 주위의 물건들이 모두 장난감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일 저지르기를 밥 먹듯이 하였으므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악동(?)들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이 아이들은 저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기억력이 짧고 이성적인 판단력의 부족이 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긴 하지만 서로 용서하고 빨리 화해하는 모습,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단순함이 저를 항상 일깨웁니다. '어린이 처럼 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뜻을 조금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생활습관들이 늘어나고 또 저희들의 보살핌이 그들을 위하는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는 학부형들로 부터 감사의 말을 들을 때면, 마음속으로부터 '주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하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봉헌 생활의 예언자적 성격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가르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가장 나약한 이들의 손과 발, 마음이 되어 함께 엮어 나가는 이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한껏 체험합니다.
방학 때 집에서 가지고 온 껌을 꾸깃 꾸깃 구겨서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불쑥 내미는 그 순수함을 통하여, 또 이웃 집 총각이 결혼식하는 것을 보고 와서는 무작정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에서, 큰 죄 지을 줄 모르고 늘 명랑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에 물든 이 세상을 자비하심으로 돌보시는 까닭은 바로 이 깨끗한 영혼들의 순수한 삶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제 동생이 생각납니다. 그 곳에서 수녀님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자식이 생겨 유부녀가 되어버린 수녀는 아니지만 진짜 아이 둘을 둔 유부남입니다.
본성이 워낙 선한 동생이라 아마도 수녀님 못지 않게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수녀님의 봉헌 생활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생 또한 신앙인으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미약한 봉헌의 삶을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가슴속에 조용히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매일 매일 헤아려보는 우리들의 봉헌의 삶입니다. 아멘.
차성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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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한 알베르또 신부님
성당 식구들 가운데에서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있거나 혹은 연로하셔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신부가 직접 찾아가서 함께 기도해 주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신부가 되고 처음으로 성당 식구들 가운데 아프거나 연로하신분들을 방문할 때 였습니다. 어떤 할머니 집을 찾아갔는데, 집의 문을 열자마자 냄새가 많이 나고, 그리고 집안에는 그리 정돈되지 못했습니다.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고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드셔서 잘 들리지도 않는 분이 주섬주섬 무엇을 챙기시더니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제 손에 봉투를 하나 쥐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게 건네는 말씀이 “신부님, 이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써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할머니도 어려우신데, 할머니가 쓰세요!”라고 제가 말씀드리니까, 할머니는 “이거 없다고 저는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더 어려운 사람들 위해 써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제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이 세상이 그래도 살아갈만하고, 그리고 어찌보면 이 세상이 그래도 사람사는 향기가 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내어놓고 봉헌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거대한 재물과 그리고 권력과 착취로 쌓아진 것들은 오히려 파괴하고, 죽이고 그리고 억눌려 버립니다. 그러나 내어놓는 삶은 모든 것을 살리고, 그리고 일으켜 세우며, 그리고 또한 새롭게 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 자신의 사람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 치지만, 그 가운데에서 조그마한 것이지만 자신의 것을 소중하게 내어놓는 그 주름 가득한 할머님의 손길처럼 곳곳의 많은 이들은 진정 하느님만으로도 행복하고,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들으신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 자식일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 뜻대로 쓰여지도록 내어놓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놓으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 모든 구원의 시작은, 그리고 모든 사랑의 시작은 바로 내어놓음에서 시작됩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어오심도, 그리고 십자가에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는 그분의 내어놓으심으로 그리고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사회가 어두운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마저 자신의 구원만,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감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내어놓음을 살아가지 못하는, 그리고 아파하고 그리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껍데기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나 반성해 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로만 끌어당기는 것보다도 먼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서 밀어주는, 그리고 내어놓고, 희생할줄 아는 그런 마음과 영혼의 손놀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일년에 쓸 초를 봉헌합니다. 초 한자루도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고 내어놓고 태움으로 인해서 좁디좁은 곳이나마 밝힐수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들의 삶속에서 먼저 내어주고 희생함으로 인해서 세상은 더욱 밝게 됨을 초 한자루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하나의 촛불로서 세상을 밝혀 주어야 할것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는 우리들도 새롭게 봉헌되고, 그리고 또한 새롭게 내어놓을 수 있을때 이 사회는 더욱 밝아지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성전에서 새롭게 우리를 내어놓고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인한 알베르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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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 신부님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이 지난 다음, 산모였던 성모님의 정결례와 함께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봉헌되는 예수님을 향해 예언자 시므온이 이야기한 대로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우리는 한 해 동안 주님의 빛을 밝혀줄 초를 축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음 속에 봉헌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빛이 되시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은 묵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빛을 먼저 눈으로 목격한 예언자 시므온은 하느님께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에게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이런 두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의미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하는 의미와 그 빛의 내용이 모두 우리 앞에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시므온이 하느님께 고백한 것처럼 이 빛이 세상에 와 비치게 된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상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그 비추임의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당신이 선택하신 그 백성에게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며 이 빛은 온 세상, 이방인의 땅으로 퍼져나가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인간의 사람됨을 알려주신 그 내용을 밝혀 보여주시고 모든 이가 당신을 바라보고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원하시는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길을 열어주시고자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시작이 그러했듯 작은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사람이 되시어 이스라엘 사람으로 모든 이를 구원하실 삶을 이루신 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므온이 성모님께 던진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으로 그 빛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 시켜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치 불의 뜨거움을 나타내듯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매우 고통스럽고 아픈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빛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비춰 그들을 일으키기도, 또 쓰러뜨리기도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빛이 걸어야 하는 길은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어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고통스런 삶이 되리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으로 인해 그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게 되리라, 곧 그들의 어둔 부분이 이 빛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 자체이시므로 하느님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드러남으로써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이들이 그들의 삶에 참 힘을 얻고 그 몸을 일으켜 하느님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수많은 예언과 말씀을 어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삶 앞에서 그들이 하느님이 믿어오던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왜곡되었던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는 잔인한 자신들의 삶의 진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사랑스런 사람을 죽이려는 그들의 생각이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님 생애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과 그분의 운명,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질 하느님의 사랑의 완성 모두를 말입니다. 하느님을 밝혀주는 빛, 그것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미사에서 주님의 빛을 밝힐 초들이 축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단에서, 또 여러분의 기도 자리에서 그 작은 촛불을 처음으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 큰 빛이신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는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성모님께 안겨있듯 말입니다.
그 빛이 자라고 자라 이 세상을 구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초들에 불을 붙일 때도 이 빛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이방인들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빛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불꽃들이 됩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어둠을 밝히는 뜨거움으로 세상을 밝히고 구원을 전합시다.
정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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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진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온 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오로지 하느님의 구원만을 갈망하며 주님을 만나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온 한 고집스러운 신앙인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에 좋은 것이라든지 경치가 좋은 곳이다 하면 시간과 비용을 내어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지금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많은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을 얻으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만일 최고의 것을 찾게 된다면, 진짜 좋은 것을 찾게 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진짜 좋은 것을 찾지 못해 저렇게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찾게 되면 이러한 방황도 끝을 내게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 주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신앙인이 주님을 만나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 다 이루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는 진짜 좋은 것,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았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고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을 손에 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여리고 약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갓난 아기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온전히 깨여 있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생생한 감격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힘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지혜입니다. 보잘것없는 생명 안에 담겨 있는 우주 창조의 힘을 발견한 놀라운 순간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는 아이가 성인으로 인정 받기 위해 성년식을 가지는데, 그 전날 밤이면 그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칼 한 자루만을 쥐어 준 채 혼자 버려두고 나온답니다.
혼자 남은 아이는 밤새 캄캄한 밀림 속에서 각종 맹수와 독충 그리고 늪을 피해가며 공포의 밤을 보내게 됩니다. 어느덧 밤을 지새고 밝아오면 그 아이는 놀란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완전 무장을 한 채 아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이후로 아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항상 지켜주리라 믿는 아들은 아버지의 이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됩니다.
구원의 약속만을 굳게 믿고 평생을 살아온 한 노인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공포와 불안으로 지쳐 있는 소년은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구원 약속과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오늘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서강진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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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주어진 숙제
오늘은 주님성탄대축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이미 5세기초부터 동방교회는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를 근거로(2,22-40) 모세의 율법이 정하는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 축제를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시작하였다.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1월 6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정결례 축일은 성탄 후 40일이 되는 2월 14일이었다. 650년경 교황 마르티노 1세가 이 축일을 로마교회에 도입하면서 '마리아 빛의 축일'로 정하여 2월 14일에 지냈으나, 얼마 후 2월 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가 이미 336년경부터 12월 25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내왔기 때문에 이 날부터 40일째 되는 날이 2월 2일이기 때문이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동방교회는 오늘 축일의 핵심을 '주님의 성전봉헌'에 맞추어 주님성탄사건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거행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초 축성과 촛불행렬을 곁들여 성모 마리아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서방교회는 이 날 성전에 필요한 초들뿐 아니라 전기가 없던 당시 가정에서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초들까지 축성하여 속죄와 참회의 의미로 성대한 촛불행렬을 거행하였다.
1960년 전례개혁을 통하여 오늘 축일의 원초적인 의미에 비중을 실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축일명을 '주님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축일에 마리아의 자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집에 봉헌된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마리아와 요셉, 시므온의 예언말씀과 안나의 역할도 상당히 부각된다.
예수가 비록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봉헌례와 산모의 부정을 벗는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
야훼 하느님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죽여버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신 바로 그 날 맏아들과 맏배를 야훼께 물러내는 계명을 내리셨다.(출애 13,1-2.11-16)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그 첫아들은 출생 30일이 되면서부터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봉헌례를 치러야 하며(민수 18,15-16),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에 1주간 부정기간과 33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40일째 되는 날, 딸을 낳은 경우에는 2주간 부정기간과 66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80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1년 된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치는 정결례를 치름으로써 부정을 벗고 정결을 찾아야 했다. 가세(家勢)가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만 바칠 수도 있다.(레위 12,1-8).
이에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를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카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로서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카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루가의 의도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Epiphania, 顯顯)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은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된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게 된다.
예언녀 안나는 결혼 7년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과부로서의 안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안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안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안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그녀가 시므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므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가는 안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므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리게 된 것이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리가 고통을 배우는 숙제를 하는 동안,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는 숙제를 받았고 세상은 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숙제를 받았다.
예수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육적인 건강과 영적인 지혜를 갖춘(40절) 성인(成人)으로 성장하는 것은 예수 스스로가 메시아임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성장을 의미하듯이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 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박상대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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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훈 신부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합니다. 이 축일은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의 탄생 40일이 되자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하느님께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 각 성당에서는 전례 때 사용할 초를 축복하고 봉헌합니다.
세상에 빛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시메온은 의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말씀에 따라 메시아를 자신의 눈으로 뵙기를 고대하면서 기다려 온 사람이었고, 한나는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되자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이 아기가 바로 세상의 구원이요, 어둠에 있는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빛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봉헌된 이로써 당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갑니다. 그분의 행적이 어머니에게는 영혼을 꿰찔리는 고통이기도 했지만, 그분의 말씀과 사랑의 기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세상은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고 외치셨던 예수님의 삶,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하셨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참된 봉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봉헌 생활은 기다림과 바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 세월 하느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볼 날을 기다려온 시메온의 삶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한 기다림이란 마냥 넋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세상에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초처럼, 우리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촛불은 다른 초에 그 불을 옮겨 붙여도 결코 작아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처음 그대로의 불빛과 뜨거움을 간직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는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나누어도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열정으로 타오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불꽃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겠지요.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이제 그 빛과 뜨거움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안의 고통과 부조리와 아픔을 우리 신앙인들이 감싸안으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참된 봉헌 생활의 의미를 함께 깨닫고 우리 삶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설 수 있도록, ‘저의 모든 것은 주님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강지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