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백미러 속에서 멀어져 가는 재약산 표충사 위로 대한을 넘긴 날 씨가 포근한 함박눈을 내리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재촉하 여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에서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들판을 가로질러 단장 천 율전교를 건너면 활성동 마을 깊숙한 곳 칠탄산 자락에 쇠락한 영원사지 가 있다.
보감국사부도(寶鑑國師浮屠)와 보감국사묘응탑비(寶鑑國師妙應塔碑)가 계 곡에 파손된 채 흩어져 있던 것을 유사한 것끼리 모아 1972년 복원하였는 데 불완전한 모양이다. 주변 밭에는 대추나무가 즐비하고 아직도 밭두렁에 는 부서진 기와조각들이 쌓여 있다.
예전에는 절집들이 들어서 있었을 법 한 곳곳에 묘지들이 들어와 있다. 철구조물로 울타리를 만들어 정리해 놓 은 보감국사부도는 지대석(地帶石)과 기단석(基壇石)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 여 불안하고 탑신(塔身)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보감국사(1251∼1322)는 고려말 충숙왕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 냈다. 보감국사묘응탑비는 비석과 지대석은 없고 이수(용의 형체를 새겨 장 식한 비석의 머릿돌)와 귀부(龜趺:거북형상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만 남아있다.
귀부의 중앙에는 비신을 박은 장방형의 홈이 있고 둘레에 구름문양 을 새겼으며 등허리에는 귀갑문(龜甲文:거북의 등 껍데기)이 정연하다. 조 각의 형태는 비교적 섬세하고 이수는원상(圓床)의 삼각형으로 앞뒤에 두 마리씩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하고있어 고려시대 탑비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부도와 탑비 옆으로 3구의 석조물이 있으나 부서진 것을 시멘트로 보수 를 하여 흉한 모습이다. 밀양시 산외면 입구에 안내판 한 개만 세워져 있어 도 시청까지 가서 돌아오는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욕심을 내면 서 밀양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영남루(嶺南樓)로 향했다.
시립도서관 앞을 거쳐 항상 물이 넘실거리는 강가로 나오면 서늘한 바람 이 얼굴에 닿는다. 강 상류쪽 철교에는 추억을 싣고 달리는 기차가 쉴새없 이 지나가고 있다. 절벽 아래 화석(化石)을 지나면 아랑각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우리나라 3대 누각중의 하나인 훤칠한 영남루가 서있다.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의 휴식공간 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 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 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려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 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 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 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누각이다.
밀양산성 복원공사를 하고있는 사잇길로 잠시 오르면 대문을 2개나 지나 야 만나는 작은 절집 무봉사(舞鳳寺)가 있다. 신라 혜공왕 9년(733)에 법조 가 영남사의 부속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에는 대웅전에 모셔 진 높이 0.97m의 보물제493호 무봉사석조여래좌상(舞鳳寺石造如來坐像)이 있다.
네모진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고 둥근 편으로 가슴 이 다소 움츠러들어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너무 두꺼워서 옷주 름과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단정하고 양감있는 신체표현, 간략해진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 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