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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프리, 차별의 상징 수 0.6%와 75%
지난 3, 4월에 실시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최첨단 무기의 전시장’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핵폭탄 탑재 가능한 B52전략폭격기나 B2스텔스 폭격기, F22스텔스 전투기 등이 투입되어 국내를 마음껏 저공비행했다.
그런 바람에 거의 주목되지는 않았지만, 4월 ‘독수리연습(FE)’에서 한미 해병대가 포항 일대에서 대규모 상륙 훈련을 실시했을 때에는,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가 보유한 수직 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리(MV-22)’도 처음으로 훈련에 참가했다.
‘오스프리’에 관해서는 실전 배치 이전부터,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기능을 겸비하고 순항속도와 전투행동반경을 비약적으로 늘린 “활주로가 필요 없는 꿈의 비행기(wonder weapon)”로 선전되는 한편으로, 잦은 사고(2006년부터 2011년까지 사고발생 건수는 58건)로 “미망인 제조기(widow maker)”라는 오명을 떨친 ‘결함기’로도 유명하다.
그로 인해 본국인 미국에서도 오스프리 훈련은 주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원활히 진행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뉴맥시코 주에서는 1600통의 반대의견이 제출되어 훈련이 대폭 연기되었고, 하와이 주에서는 주민과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주변의 유적에 대한 영향이나 소음 피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계획을 단념했다(前泊).
그런데 이 오스프리가 당초 계획대로 2012년 10월에 오키나와의 미 해병대 후텐마(普天間) 항공기지에 무사히 배치되어, 최저고도 60미터에서의 초저공비행훈련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윽고 한반도의 동해안에도 출몰하게 되었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후텐마는 주택지와 학교 등이 밀집한 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기지인데, 어떻게 사고가 끊임없는 결함 수송기가 배치되어, 미국의 항공법에도 일본의 항공법에도 금지하고 있는, 63빌딩의 20층 높이를 비행하는 훈련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물론 오스프리 배치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대는, 미국의 예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우선 오키나와 현의회는 무려 3차례에 걸쳐 초당파적인 통일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현내 전 41개 시정촌 의회가 의견서를 제출했다.
2012년 9월 9일 개최되었던 오스프리 반대 현민 대집회에는 1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이 숫자는 오키나와 기지 문제가 크게 요동치는 계기를 만든 1995년 미군의 소녀폭행사건에 항의하는 현민 총궐기대회에 모였던 8만 5천여 명보다 많은, 본토 복귀 후 최대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섬 전체의 강력한 저항은, 미군에 의해서도 중앙정부에 의해서도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군이 아시아 방위전략 상 군장비 첨단화의 일환으로 계획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일미 지위협정 상 미군 기지 내의 기종 변경에 관해서는 일본정부가 개입할 권리가 없다’는 자세를 일관했을 뿐이다. 이 근간에는 일본 내에 미군 주둔을 규정하는 일미 안전보장조약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강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군사력에 뒷받침되어 있는 미국의 패권에 협조하여 일본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국익’이고, 그것이야말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길이라는 이 믿음은, 그를 위해서는 국민의 일부인 오키나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희생의 시스템’과 세트로 맺어져 있다(高橋).
패전 후 미 점령군이 천황제 유지와 일본의 비무장화를 오키나와의 분리군사지배와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했던 점령정책에 연원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아무리 소음문제나 실탄사격훈련·비행훈련의 위험, 폭행사건 등에 항의하며 일상적으로 느끼는 생명의 위험을 호소해도, 그 호소의 목소리는 일관해서 묵살당하고 억눌린 채 침묵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이다. 이 차별의 상징이자 결과가, 너무나도 유명한 숫자인, 일본 전체 면적의 불과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 땅에 약 75%의 미군기지가 집중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행복의 원천이며 생산의 장인 땅이 전쟁과 파괴를 위한 군사기지로 되어, 항상 누군가에 의해 목표물로 조준되어 있는 오키나와에서, 주민들은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기지에 의존해서 살아가면서 기지가 배태하는 온갖 부조리를 끌어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지의 이러한 구조적인 폭력을 아무리 호소해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길이 없다면,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을 종주국으로 하는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키나와와 식민지 조선
그렇다. 한국에선 아열대의 이국적인 낭만이 넘치는 휴양지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도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의 현실 일탈의 욕구를 채워주는 지상낙원처럼 선전되고 또 소비되는 오키나와는, 미군기지의 섬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라크전쟁 등에서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발진기지, 보급기지로 사용했던 ‘전쟁을 위한 섬’이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 섬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전에는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렀던 섬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키나와’는 일본의 영토도 아니었다. 이 지명은 류큐(琉球) 왕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부여된 행정구역의 명칭이다(1872년의 ‘류큐 처분’).
경쟁과 차별과 소외에 지친 우리를 잠시나마 치유해 줄 것 같은 유토피아의 섬 오키나와의 실체는 근대 이후 열강에 의한 점령과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거듭해온 소외의 땅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오키나와’는 일본이 민족통일과 근대화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류큐 왕국을 점령한 후에 부여한 ‘지역명’이다. 물론 점령 후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는 달리, 오키나와는 식민지 본국인 이른바 ‘내지(內地)’에 속하여 일찍부터 국민통합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식민지와 달리 국어(일본어) 교육과 천황숭배의 교육정책이 점령초기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패배하여 오키나와인들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의지가 거의 사라진 후인 1898년에는 징병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본토에서는 1873년에 실시), 비슷한 시기에 소학교 취학률은 90%에 달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2년에는 마침내 참정권도 부여되어 오키나와에 대한 제도적 법적 차별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통합정책이란 동화정책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일체의 오키나와적인 것은 인정되기 힘들었다. 예를 들면, 조선과는 달리 오키나와어 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표준어’를 구사하지 않은 아동에게 방언찰(方言札)이라는 고리를 달고 다니게 하는 벌을 가해 오키나와어를 추방하고자 한 시도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문명의 땅인 본토와 구별되는 차이(고유성)는 미개한 것으로 여겨져 차별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오키나와인들 스스로도 차별을 벗어나 사회적 상승을 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중앙으로부터 백안시되었던 풍속습관을 개선하고자 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불황과 1920년의 세계적인 설탕가격 폭락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종사했던 오키나와 농촌이 직격탄을 맞은 후 급격히 증가한 과잉인구가 본토 노동시장으로 흡수되어 프롤레타리아화하게 되자, 이 경향은 한층 뚜렷해졌다. 그들은 자발적인 ‘생활개선 운동’을 전개하며 스스로 ‘일본인화’하고자 했다.
이때 개선 대상이 된 것은 오키나와어 외에 맨발, 문신, 돼지변소, 시신의 뼈를 씻는 장례의식인 세골(洗骨), 이름, 각종 종교행사 등이었다. 즉 오키나와인들도 본토로부터의 차별에 맞서는 전략으로 자신들의 출신을 은폐하거나 차이를 소거(동화)함으로써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키나와인들의 전략은 자신들을 조선인 등과 구별되는 내지인의 위치에 두고 식민지인들에게 내지로부터의 차별을 전가시키려는 왜곡된 차별의식을 배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성공전략일 뿐, 본토에 의한 뿌리깊은 오키나와 차별의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일본군의 방위전략이었다.
이미 1934년에 오키나와 담당 사령관에 의해 작성된 문서에는 오키나와는 본토 방위를 위해 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철저한 방위태세를 갖추어야 하는데, 오키나와인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도가 희박하므로 항상 감시해야 한다는 식의 강한 불신감이 드러나 있었다(太田).
이러한 차별의식은 실제로 본토 방위를 위한 ‘시간 벌기’와 천황제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끔찍한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군은 일본어 이외에 오키나와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스파이로 간주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등, 다양한 이유로 주민들을 스파이 취급하여 사살하기 일쑤였고, 일본군의 연명을 위해 주민들을 보호 밖으로 내몰아 총알받이로 삼기도 했다. 29곳에서 발생한 집단자결은 어느 것도 일본군이 깊이 관여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관련 희생자보다 민간인 희생자(10만 명 이상)가 많았던 원인을, 당시 오키나와 총인구보다 더 많은 병력(54만 명)을 이끌고 상륙하여 공중폭격 등 무차별살상을 감행한 미군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오키나와 주민들뿐만 아니라 조선 혹은 일본내의 조선인들도 노무자, 군속 등 각종 명목으로 동원되었고, 강제 연행된 일본군 위안부들도 있었다. 2만 여명에 이른다고도 하는 그들은 비행장 건설공사와 진지구축공사, 군수품 수송, 은폐호 파기 등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에 투입되어 기아와 중노동 속에 죽어갔고, 또 총알받이로 소모되었고,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전쟁피해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1만 여명이 희생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오키나와 전투는 오키나와인들도 조선인들도 결코 ‘천황의 백성’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피억압자로서 희생되는 공통의 역사적 수난 체험을 직접 겪으면서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친근함은 일본의 패망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휘말려 미국의 전후 세계전략에 편입되면서 그 행방을 잃고, 오키나와는 미군기지로, 반도의 북쪽은 그 가상적국으로 간주되어 서로를 위협하는 위치에 세워지는 고약한 운명을 끌어안게 되었다.
일본과 미국이 한반도에 정치, 군사적 긴장이 존재하는 한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북한이 서두에서 언급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반발하여, “주일미군도 우리 전략 로켓부대의 표적에 들어 있다”고 표명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이 운명의 저주가 풀리지 않고 있음을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태평양의 쐐기돌”과 한국전쟁
본토 방위를 위한 시간 벌기로 전쟁터로 만들어졌던 오키나와가, 패전 후 또다시 평화 일본의 새 출발을 위한 희생양으로, 미국의 직접지배하에 요새화되어 간 것은 모든 저주의 시작이었다.
전쟁책임을 면책받고 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했던 천황도, 1947년에 “25년 내지 50년, 혹은 그 이상 오키나와를 군사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도 된다”는 메시지를 GHQ에 전달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가 확실시된 1949년에 본격적인 오키나와 기지건설 예산을 계상했고, 맥아더는 “일본은 공산주의 진출 저지의 방벽”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윽고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되는 1953년 7월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북한지역에 공중폭격을 통한 ‘초토화 정책’을 감행하면서(김태우), 오키나와의 출격기지, 보급기지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1951년부터 기지건설에 박차를 가했고, 여기에 참여한 일본 기업들은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였다. 일본의 전후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던, 한국전쟁으로 초래된 이른바 ‘조선특수’는 그 상당부분을 오키나와 미군의 수요가 차지했다.
이에 비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은 처참했던 오키나와 전투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체험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섬 전체에는 임전태세가 취해져 등화관제 등이 실시되었고, 밥짓는 연기까지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로 인해 전쟁의 공포는 증폭되었고, 소련군이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거나 하여 혼란과 불안은 극에 달했다.
미군정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반응은 부당한 우려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기지의 섬에 사는 한, 전쟁체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했던 것이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로서의 지위가 확정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서이다. 이로 인해 패전국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상태에서 독립하여 주권을 회복한 반면,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의 배타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제3조).
조약 발효 이후인 1953년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토지수용령을 발령하여 ‘총검과 불도저’로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기지를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생활은 비참했으며, 미군정은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운동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주민들을 농업이민으로 볼리비아에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이렇게 진용을 정비한 “태평양의 쐐기돌(keystone of the Pacific)” 오키나와에 독립이나 해방이나 평화를 상징하는 ‘전후’는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인들의 고난으로 점철된 기나긴 ‘자기회복’의 과정은, 전쟁으로 주민의 약 4분의 1이 사망한 처참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의 상호이용관계 속에서 ‘박탈당한 전후’를 계기로 하여 본격화한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 오키나와 사람들의 해방에의 의지와 그것을 결집시킨 운동은 오키나와의 불완전한 위치만큼이나 혼돈과 혼선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당초 오키나와와 일본은 다른 민족이라 규정하고, 자신들은 파시즘의 압정 아래 고통받던 소수민족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해방군’으로 선전했으며, 미국 주도하에 류큐국 독립 구상이 검토되기도 했다.
이 무렵은 일본공산당이나 일본사회당도 이러한 미국의 노선에 따르고 있었으며, 특히 본토의 오키나와 출신자 전국조직으로 오키나와인연맹(沖縄人連盟)이 결성되었을 때, 일본공산당은 그 결성대회에 「오키나와 민족 독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 “설령 고대에 오키나와인이 일본인과 동일한 선조에서 갈라졌다고 해도 근세 이후의 역사에서 일본은 명백히 오키나와를 지배해 왔습니다. 즉 오키나와인은 소수민족으로서 억압받아온 민족입니다. 제군의 해방은 세계혁명의 성공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보호되는 것입니다”라는 방침을 천명했다(1946년 2월).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혁신세력들은 오키나와가 미국의 신탁통치 등을 거쳐 독립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졌다.
하지만,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의 오키나와 통치 목적이 군사거점의 항구적 구축에 있음이 확실해지자, 급격히 “평화헌법 아래의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본토 복귀론으로 전환되어 갔다.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던 1951년 4월에 오키나와에서 결성된 일본복귀기성회가 실시한 서명운동에서 서명자의 86%가 일본 복귀를 희망했다.
그런데, 이등국민으로서의 차별의 과거를 지우고 제기된 ‘본토 복귀론’에는, (1)전승국에게 빼앗긴 치시마, 오키나와, 오가사와라를 탈환하여 일본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자는 보수파들의 주장과, (2)미제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투쟁을 전개하여 완전한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는 좌파들의 주장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1)과 (2)는 모두 동화주의를 주장하고 있어 그 경계가 애매하고 운동 쪽에서도 혼란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면,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주장하는 (1)에 비해, (2) 쪽은 같은 제국주의에 억압받으면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제3세계, 특히 아시아 민족들과의 민족적 연대를 중시하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2)는 기존의 ‘일본적인 것’의 재구축을 강하게 요구하는 주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의 혼란 속에 치러진 한국전쟁은, 미국에게는 오키나와의 공격기지, 보급기지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시켰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기지의 섬에 산다는 것의 무게를 통감하게 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좌파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반기지/반전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 중에는, 기지의 섬에 사는 한 불가피하게 구조적으로 미국의 폭력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는 가해자에 서게 됨을 통감하는 동시에, 기나긴 억압의 역사를 가진 조선의 주민들에게 운명적인 동류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등화관제 중에 기숙사의 등을 켰다는 이유로 근신처분을 받고 그 부당성을 호소한 학생들이 퇴학당하거나, 미군에 의한 부당한 토지 수용에 저항한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은 류큐 대학 사건(1953년/1956년)이 있었던 류큐 대학에서, 학생들이 발행한 문학 서클지인 『류대문학(琉大文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리기도 했다. 제목은 「비참한 지도」이다.
찰랑찰랑거리는 3리 안쪽 바다 건너편에 냉혹한
27도선의 벽은 너희들의 비둘기의 목을 분지르고
너희들의 멋진 꿈을 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의 이마와 생각과 발 위를
덕지덕지 덮어가는 활주로
가는 곳마다 별표로 도배되었다.
골프장이 있는 지대.
그것은 어제 조선의 젊은이들과 보리밭을 태웠던
괴수의 주둔지. 그리고
거기에도 저 어부를 살육한 악취를 풍기는
캔이 저장되어 있다. 틀림없다.
미국의 군사기지로서의 오키나와의 가해자적 위치와, 일본에서 분리된 채 항상적인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오키나와인들이 느끼는 피해자 의식을 자각하면서, 그들은 반도의 북쪽으로 다가가는 말을 찾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미군기지를 끌어안고 살며 같은 고통에 직면해 있는 한국의 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기지반대운동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에 비해, 북한과의 교류나 서로에 대한 관심이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참고한 자료>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
아라사키 모리테루, 정영신 외역, 『오키나와 현대사』, 논형, 2008.
大田昌秀 편, 『総史沖縄戦』, 岩波書店, 1982.
高橋哲哉, 『犠牲のシステム 福島・沖縄』, 集英社, 2012.
前泊博盛 編, 『本当は憲法より大切な『日米地位協定入門』』, 創元社,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