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레옥잠
김창제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뿌리로 가지 뻗고
보라색 꽃으로
사랑을 키우는 여자
늘 물 위에 떠 있어야
사랑인 줄 아는 너는
수평의 아름다움을 꿈꾸나
가늘게 뻗은 실뿌리처럼
아래로 아래로 땅 닿을 듯
그리움을 발돋움 해보지만
어느 곳에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잎사귀 넓은 만큼 하늘 꿈을 꾸는 사랑
늘 그렇듯이
잎이 푸를 때 사랑은 견고했지
물방개 소금쟁이 미꾸라지
나비들까지 물 위에 떠 있게 하는
꽃 피우고 가지 뻗고
떠있는 그리움으로
웃음 즐거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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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의 말
노미영
슬픔과 물은 한몸이다
빛깔이 없고 향기가 없고 맛이 없는 몸
휘몰아치면 하늘과 땅을 호령하는 것도,
오래 고여 있다 보면 시큼씁쓸해지는 것도,
입술이 부르튼 슬픔이 강둑에 앉아
잠시 목을 축인다
목이 마르다
닻도 키도 필요 없는 이 여행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부유물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흐르다 보면
밑창은 저 하늘 멀리 물고기자리까지 흔들어
보이지 않는 것끼리, 어두운 것끼리
마음 포개고 숨을 고르면
부르르 떠오르는 영혼의 떡잎들
영혼에게도 우산은 필요하다
불어나는 슬픔을 걸러낼 수 없어
멍울처럼 퍼져 터지는 꽃잎들의 계이름을 받아쓰다 보면
향기로운 불행의 뒤태가 만져질 것 같아
물은 오늘도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고 또 빗으며
백야(白夜) 같은 슬픔의 뿌리들에게 입을 맞춘다
ㅡ 시집『슬픔은 귀가 없다』(문학의전당,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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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이희섭
연보랏빛 미소로 다가왔다가
서둘러 감춰버리는 꽃
빛나는 꿈을 가졌으면서도
수줍게 몸을 숨기는 잠
물에 뜨려면 물을 멀리해야 한다고
담근 발을 빼려하는 물 묻은 잠
뿌리를 땅속에 박는다는 것은
새로운 슬픔의 시작이라고
부레를 떼어내고 가라앉은 물고기를 찾아
떠다니는 잠
유랑이 곧
그의 서식지인 것을
물길의 끝에서 보니 알겠다
누구의 꽃으로도 불려지지 않는
단 하루만 피는 잠
―『다층』(2012년 겨울)
ㅡ김석환·이은봉·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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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이 핀다
손 영 희
1.
그 여자, 한 번도 수태하지 못한 여자
한 번도 가슴을 내 놓은 적 없는 여자
탕에서, 돌아앉아 오래
음부만 씻는 여자.
어디로 난 길을 더듬어 왔을까
등을 밀면 남루한 길 하나가 밀려온다
복지원 마당을 서성이는
뼈와 가죽 뿐인 시간들.
2.
부레옥잠이 꽃대를 밀어올리는 아침
물속의 여자가 여행을 떠난다
보송한 가슴을 가진 여자
잠행을 꿈꾸던 여자.
푸른 잠옷을 수의처럼 걸쳐 입고
제 몸속 생의 오독을 키우던 그 여자
누군가 딛고 일어서는
기우뚱한 생의 뿌리.
- 오늘의 젊은 시조시인상 공동 수상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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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김신용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 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개화]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시듬]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노추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욕망]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부평초같이 살아 온 인생]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화사함을 피우기 위해 난산의 고통이 어찌 없었으랴 ?]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평생을 밭을 매고 살아온 아낙]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죽을 힘을 다하여 피워올린 꽃,
살아온 날의 수의를 제 스스로 만든 꽃]
마로니에
from Cafe 마로니에 그늘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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