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자전-2
1986년 1월 15일 이병철 회장의 자전은 끝을 낸다. 대구에서 양조사업은 순조로웠다. 상경하여 본격적인 무역업을 시작한다. 1947년 5월 혜화동에 5만 원(30만 달러)의 집을 마련해 이사한다.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 간판을 건다. 홍콩, 싱가포르에 오징어 한천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1949년에 실적이 최선두에 선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을 맞이한다. 정부 발표를 믿고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다. 인민위원회에 불러 다닌다. 그리고 공산 치하의 암흑세계를 경험 한다. 삼성물산은 무로 돌아갔다.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트럭을 구하여 가족과 함께 서울 떠난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우선 가도록, 피난트럭은 길을 비켜주며 사흘을 결려 대구에 도착한다. 조선양조장에 가서, 김재명 사장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탁을 하니, “이병철 사장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3억 원을 비축해 두었으니 다시 사업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뜻밖의 구원이었다. 익자삼우요, 손자삼우라 했다. 정직한 자를 벗으로 하고, 미더운 자를 벗으로 하고, 견문이 많은 자를 벗으로 함은 익이요, 아첨하는 자를 벗으로 하고, 성실치 못한 자를 벗으로 하고, 말만 앞세우고 실이 없는 자를 벗으로 함은 손이라 했다. 선인의 가르침을 되씹게 했단다.
3억의 자금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삼성의 재건을 서둘렀다. 삼성물산의 초석을 마련하고 사업을 벌이니, 1년 만에 출자금 20배인 60억으로 늘었다. 사업을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결정하였다. 설탕은 국내 생산능력이 전혀 없어 긴요한 물자이다. 업종 선택을 놓고 제약. 제지. 제당에서 3개월 만에 가능한 제당을 선택했다. 정부는 1953년 2월 15일에 원을 환으로 바꾸면서 100대1로 명목 단위를 절하 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전포동에 ‘부산고무공업사’ 공지 1천 5백 평에 대지를 마련하고 국내기술로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기계는 미쓰이 물산과 다나카 기계에서 원심분리기 4기와 결정관 1기의 프랜트 등 18만 달러가 필요했다. 부족분은 은행 융자로 해결했다. 시험 운전 날이 오고, 총점검을 해도 고장이 난 곳을 찾지 못했다. 당황했다. 며칠 밤을 보냈다. 3일째 한 용접공이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어 균형을 잃은 것 같다. “말해 그의 말대로 균형을 맞추며 원당을 넣어보니 순백의 정제당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설탕 수입량은 1953년 23,800t이었다. 수입가 톤당 35달러, 100% 수입의존도가 제당의 가동으로 7%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제일제분’을 만들어 밀가루를 공급하고, ‘제일모직’을 설립하여 킹텍스로 히트한다.
1956~57년은 악성 인플레이션이 서서히 수습되고, 경제도 회복되어 갔다. 민간은행이 정부에 귀속되면서 정부 소유 국영이 된 것이다. 이에 재무부에서 금융기능의 정상화를 걸고, 은행주의 공매를 시행했다. 후에 ‘한일은행’으로 개칭된 ‘흥업은행’의 주에 응찰하여 불하받아 83%의 대주주가 된다. 4·19혁명과 5.16 군사혁명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격랑 속에 있었고, 이병철 회장은 부정 축재자란 낙인이 찍히고, 세금 추징이란 명목의 재산몰수도 경험한다. 실의와 재기의 갈등, 이 십 년은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군사혁명을 일본 도쿄 호텔에서 듣는다. 경제인 11명이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된다. 왜 부정 축재 1호는 도쿄에 있는데, 우리만 구속하느냔 소리가 나왔다. 6월 26일 귀국하니 군인이 트랩을 올라와 이병철을 불러, 지프에 태우고 내린 곳은 서대문 형무소가 아닌 명동의 ‘메리트 호텔’이었다. 박태준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 군인 몇 사람과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있었다.
나의 경우 탈세를 했다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습니다. 현 세제는 전시비상사태 아래의 세제 그대로이고, 그대로 납부하면, 기업은 모두 도산합니다. 따라서 사업가는 이윤을 올려 가입을 확장하려 합니다. 기업을 키운 사람은 누구나 부정 축재자가 되고 원조 달러를 받거나 융자를 받아 낭비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한다면 자유경쟁, 자유경제 원칙에 어긋납니다. 만일 부정 축재자라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고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으니 경제인이 국가건설에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말한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침묵에 빠진다. 그리고 다음 날 11명이 전원 석방되었다. 얼마 후 기업인들에 추징벌과금이 부과되었다.
울산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삼성 이병철 회장은 비료공장을 추진해 지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정부가 삼성에 대규모 비료공장의 건설을 일임했다. “생산설비를 낮은 가격에 좋은 기계를 구입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미국, 독일, 일본에 견적서를 받았다. 가장 싼 일본으로 건너가 가격을 협상했다. 미쓰이 물산과 교섭하여 실무 임원 ‘니시지마’상무가 건방을 떨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상사의 마진을 3%만 산정하려 하자, 10% 보장을 요구하며 거만을 떨자, 회담장을 막차고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나온다. 일본은 한국 같은 불안정한 나라에 프랜트 수출은 수익률이 높아야 한다는 견해를 건방을 떠는 것이다. 결국 그 임원이 6번 찾아와 애걸하자 만나주고 3%에 마진으로 결정한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귀국해 한국비료를 자본금 2억에 설립한다. 생산 규모 33만 톤, 공기 50개월이 세계표준이다. 그러나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공기 18개월에 완공 계획을 세운다. 공사는 순조롭게 이뤄져 거의 완공 단계에 들 때 사건이 터진다. 차관액 4,390만 달러 승인을 받고 1966년부터 기계류가 반입되기 시작한다. 총 30여만 종류에 무게가 18만 톤이고, 큰 프랜트트는 중량이 200톤이 된다. 보세창고에 있던 OTSA라는 약품을 정부의 허가 없이 시중에 매각하는 큰 소동이 얼었다는 것이다. 현장 담당자의 부주의로 6톤 (5만 달러) 상당을 처분했다는 것이다. 즉각 언론이 한국 제일의 재벌이 밀수했다고 연일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차남 이창희와 몇 사람의 삼성 관계자를 구속하였다. 몇몇 정치인의 공작으로 현재 이름을 밝힐 생각은 없다고 이 회장은 쓰고 있지만, 그들은 한국비료 삼성 지분 51% 중에서 30% 증여를 요구했다, 그의 건의가 묵살당하자 일을 크게 키운 것이다. 오랜 각고의 비원의 비료공장이 허사가 되고 있다. 선친이 늘 사필귀정의 뜻을 강조했던 것을 되세기며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공표했다. 그러나 한비는 준공을 하고 헌납하는 조건이었다. ( 이것이 이병철 사카린 밀수 사건의 경과인 듯싶다.)
이병철 회장은 1953년 동란의 포성 속에서 제일제당, 설립 결심으로 민족자본에 의한 최초 탄생한 근대산업시설이었음을 자부한다. 1964년의 한국비료는 경제개발에 착수한지, 불과 2년 만에 4,390만 달러의 거대한 차관을 민간차관으로 도입하여 세계 최대 단일비료공장으로 10년이란 세월을 두고 갖은 고생과 고초와 고역을 치른 끝에 건설해 모함 속에 국가에 헌납한다. 당시 쏘련 서기장 ‘흐르시초프’가 농업 증산을 위해 세계 최대 공장을 세운 것이 30만 톤이었는데 한국비료는 36만 톤이었다는 것이 이병철 회장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반도체 사업을 늦지만 적절한 시기에 착수한 것이 공로다. 21세기 최첨단 산업 분야인 반도체의 세계에 뛰어든 용기와 결단은 한국을 구한 것이다. 그동안 6,500억 원의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64KD램과 256KD램을 개발, 생산한 데 이어 이제 1메가 D램에 진출하고 있다. 일본 기업이 삼성반도체의 1/5 규모인 반도체 생산공장을 영국에 설립하니, 영국 ‘대처 수상’이 그 준공식에서 깊은 사의를 표했다고 덧붙인다. 이제 우리나라는 반도체에서 불과 1년여 차이로 미국과 일본에 접근하고 있다.
경제인이 얼마나 정치인에 구박받았을까 생각하면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와 TBC 방송 등은 그의 울분을 알만하다. 중앙일보 신사옥은 당시 매스컴 사옥 20년의 결정체로써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다. 그는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평생을 수많은 기복을 겪으면서도 국민의 성원을 잊지 않고 정신적 문화사업과 호암아트센터에 평생 모은 귀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인간 형성의 근원을 독서라 보고 난독을 했다. 가장 감명받은 책은 논어라 말한다. 법은 인간사회의 규범이긴 하나, 적대행위를 막는 것은 내면의 규범이다. 내적 규범을 상실한 인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어찌 될까? 함부로 법률만 발동하고 죄인만 늘어난다. 그 결과 사회는 불신감이 쌓이고 연대감은 희박해져 나약한 사회로 전략한다. 지금 말만 무성한 사회에 얼마나 내부총질이 많은가? 그리 보면 점점 이병철 회장의 철학이 대단하다 호암아트센터에 세워진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보러, 아들 초등 입학 때 간 ‘용인 에버렌드’를 이제는 작은 손주 입학 전에 데리고 가봐야겠다.
2022.08.17.
호암자전-2
이병철 지음
나남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