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와 떡볶이
류 근만
아내가 집을 비웠다. 아침에 집을 나가면서 ‘오늘 좀 늦을지 모르니, 점심은 찾아 드세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면서 아내를 배웅했다. 어딜 가려면 내 끼니를 꼭 챙긴다. 고맙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보호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어떤 집은 일식 님, 이식 남, 삼 식 x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나한테는 삼 식 님을 원하는 것이다.
아내가 외출하니 나 홀로 편한 세상이다. 커피 한 잔 먹으려고 주방엘 갔다. 식탁에는 반찬 그릇이 즐비하다. 정성껏 차린 밥상이다. 호기심에 밥상을 검열했다. 보온밥통에는 검정콩과 보리쌀이 듬성듬성한 잡곡밥이다. 온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전자레인지는 계란찜을 품었다. 가스레인지는 내가 좋아하는 뭇국을 안고 있다. 진수성찬이다.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못마땅하다. ‘자기가 없으면 내가 굶어 죽나?’ 하면서 중얼거린다. 내 딴에는 아내가 없을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 손으로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은퇴할 무렵 평생학습센터에서 ’아빠 요리 교실‘과정을 수료했다. 요리법을 꼼꼼히 정리하면서 정말로 열심히 배웠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실습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었다. 고작 농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은 것, 옻닭 백숙 몇 번 해 먹은 것이 전부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는 추억은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서인지? 진짜로 맛이 있었는지? 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는 보물처럼 아끼던 레시피(요리법)도 먼지에 싸이고 색도 누렇게 변했다.
오늘은 아내가 없는 시간, 한가할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손대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똑딱 똑딱’ 벽시계가 밥 먹을 시간을 알린다. ‘벌써 점심때가 다 됐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식탁 앞에 앉았다.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심통인지? 원망인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내려놓고 TV 앞에 앉았다. 살포시 잠이 들었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시간이 좀 흘렀다.
서재에서 레시피를 꺼냈다. 떡볶이와 전을 부쳐볼 심산이다. 아내가 깜짝 놀랄 솜씨를 보여주고 싶다. 아내와 함께 먹는 떡볶이 맛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아내가 오기 전에 끝내려니 마음이 급해진다. 필요한 재료를 찾아야 한다. 떡볶이용 흰 떡가래와 고추장, 고춧가루, 달걀, 어묵, 설탕 등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아내가 없는 틈에 냉장고를 뒤지려니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어느 가정이나 냉장고는 아내들만의 전유물이다. 자칫 냉장고를 열었다간 좀스러운 남편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남들은 냉장고를 뒤졌다가 부부싸움을 크게 했거나, 냉전이 오래갔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거사에 몰입했다. 떠복이요리는 뒤로 하고 말이다. 나는 아내가 잘 정리해 놓은 물건을 가급적 허트리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이다. 냉동실부터 살폈다. 칸칸이 무엇이 그리 많은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모두 만석이다. 필요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신문지에 쌓인 것이 보인다. 꽝꽝 얼었다. 꺼내려니 따끔한다. 독한 가시에 찔렸다. 정체가 궁금해서 신문지를 찢었다. 실한 꽃게다. 하얀 비닐봉지에 싸인 것도 보인다. 자세히 보니 물오징어다. 돌덩이 같다. 푸른빛이 나는 덩어리도 있다. 흰 봉지, 검은 봉지, 랩에 싸인 놈, 지퍼 달린 봉지, 모두가 아내만 아는 비밀 창고다. 나 혼자 아무리 중얼거려도 소용이 없다. 냉장실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그리 많은지 알 수가 없다. 신문지를 해체했더니 시금치가 다 죽어가는 시늉이다.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콩나물 대가리는 새까맣게 변심했다. 먹다 남은 묵은김치는 쉰 냄새가 진동한다. 반찬 뚜껑을 열어보니 아내의 정성이 가득하다. 하나하나 헤아려 보니 열 가지가 넘는다. 냉장고 안의 반찬을 골라 버릴 수도 없고, 못 본 체할 수도 없다. 차라리 안 본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싱싱한 것을 제하고 모조리 끄집어냈다. 깔끔하게 청소도 하고 정리했다. 냉장고가 텅 빈 듯하다. 내 속이 다 후련하다.
아내는 병원에 다니는 것이 일과다. 몸이 불편해도 먹고 싶거나, TV에서 요리하는 프로가 나오면 만들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런 아내가 가족을 위해 만든 반찬, 애지중지 여기는 보물창고를 해체했으니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걱정이 앞선다. 자칫 아내와의 결전이 예견된다. 아내가 화를 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맞서야 할까? 낮게 엎드려야 할까? 복잡한 셈법이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잽싸게 소파에 누워 잠든 척을 했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는 것 같다. 식탁을 둘러보는 것 같다. ‘왜 점심 안 먹었슈?’ ‘먹다 말았네!’. 아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가 아프냐? 왜 먹다 말았느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억지로 하품을 하면서 ‘입맛이 없어서’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식이다. 내 눈치를 살피던 아내가 냉장고를 연다. 기절초풍한다. 남들처럼 한바탕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나는 풍전등화 신세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아내는 의외의 반응이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싸울 기운이 쇠락한 탓인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일장 연설의 시작이다. ‘밥 굶기지 않으려면, 새로운 반찬 만드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주방에 들어가면 거저 나오는 줄 아느냐?’는 것이다. 백수 남편 챙기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식들 입맛 맞추랴!. 병원 다니랴, 전업주부의 심경을 그렇게도 몰라주냐’면서 넋두리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꽃게는 아들이 꽃게탕을 좋아해서 안 먹고, 오징어도, 모시 송편, 쑥송편 재료도 아들이 좋아해서 보관 중이란다. 냉장고 안의 반찬 그릇이 발가벗은 것을 보고는 밥을 굶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란다.
나는 변명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입을 굳게 닫았다. 말해 보았자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하다. 우리 집은 아내와 나 둘뿐이다. 아침 식사는 간편 영양식을 한다. 과일즙과 달걀부침에 식빵을 먹는다. 반면에 점심과 저녁은 밥을 먹는다. 밥반찬은 주로 그때그때 요리를 한다. 찬밥 안주고 반찬도 새로 만든다. 모두 나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이 남기 마련이다. 남는 음식을 버리기가 아까워 냉장고만 차지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한번 먹을 반찬만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아내의 지론이다. 대가족 집안의 맏딸, 맏며느리의 큰 손 체질이다.
맛있는 떡볶이 맛보려다가 아내의 일장 연설만 들었다. 아내는 ‘수강료 안 받을 테니 주방일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다.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혹시 요리하는 것 가르쳐 놓고, 날 부려먹으려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날 이후 냉장고 빈자리 채우기에 바빠졌다. 아내가 장롱면허 소지자이기 때문이다. 엄처 모시고 시장 다니기에 바쁘다. 밥할 때 아내를 도와 상도 차리고, 설거지도 한다. 가사 분담이다. 나이 들어 부부가 차리는 밥상이 어떤 맛일까?
꿀맛임이 틀림없다. 아내한테 배운 떡볶이 맛은 기가 차게 맛있다. 밥그릇 싹 싹 비우고, 반찬도 싹싹, 설거지하기 좋고, 냉장고도 다이어트 성공이다. 이만하면 냉장고 싸움치곤 대성공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