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사는 삶의 모습” 살후 3:1-18 종말이 왔다고 아무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얼마남지 않은 인생이니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내일이 마지막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에서의 삶이 죽지못해서 살아가는. 아무런 의미없는 시간의 연속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똑같은 인생이라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반복적인 패턴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너무나 살고 싶지 않은 삶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늘 반복되며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집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삶의 어려움을 우리가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종말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며 사신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종말의 시작속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완성은 분명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시작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하시며 종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나타난 종말의 중심엔 십자가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라도 그것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종말이라고 하여서 우리의 인생을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종말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이니 지긋지긋한 인생 아무렇게나 살자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않고 자기의 인생을 내팽겨쳐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권면이 그렇습니다. 게으르게 행하지 말고 무질서하게 행하지 말아라.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치루신 예수님의 죽음의 댓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찌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씻을 수 없는 문제를 대신 갚아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어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중3때 경험했던 지나가던 사람이 물에 빠졌던 아이를 건졌더니 결국 살아있는 아이가 죽은 아이를 건져서 그 자리를 떠나야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도움이 아니라 죄로 죽었던 사람을 살려낸.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의 역사로 우리의 인생은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은 더이상 나만의 인생이 아니라 그분이 함께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의 인생은 내가 피로 산 복된 인생이다. 그러니 너는 오늘을 살아라. 죽음을 가져다 주는 이 세상은 이제 더이상 너를 겁줄 수 없단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종말이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를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그분이 이루신 종말의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간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결코 헛되이 보낼 수 없는 그분이 책임지시는 삶을. 그분이 복되다 말씀하시며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오늘을 삽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을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