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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호2032 원문보기 글쓴이: 보호
법륭사 3-1 서원
1. 법륭사 서원
2. 법륭사의 가람배치
1) 가람배치에 대하여...
2) 삼국시대의 가람배치
3) 법륭사의 가라배치
4) 가람배치의 변화
5) 가람배치와 문명의 교류
3. 금당벽화
1) 금당에서 생각하는 그림
2) 채색벽화의 의의
3) 傳담징...
4. 법륭사 오중탑
1) 페놀로사
2) 그리피스의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
3) 우리나라의 탑과 일본 목탑의 비교
4) 석탑과 목탑의 비교
5) 일본 목탑들의 비교
6) 다시 생각하는 황룡사 목탑...
5. 법륭사를 정리하면서...
<법륭사... 여기에 올린 금당벽화와 일부 사진은 법륭사간 법륭사 책자에서 스캔하였다...>
1. 법륭사 서원...
법륭사를 시작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정리를 해야 한다. 올해가 넘어가기 전에...
(결국 지금은 2007년 1월이다...^^)
처음 백제관음에서 시작하여, 대보장전의 유물들을 살펴보고
몽전을 중심으로 쇼토쿠 태자를 통해
한일 고대사를 되돌아 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법륭사의 중심인 서원...
오중탑과 금당에 있는 유물들을 소개하지 못했다.
이제 서원을 중심으로 법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법륭사 가람배치를 통해
우리네 가람배치와 비교해 보고 의의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다음 금당벽화를 통해
벽화의 의의와 그림들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오중탑을 보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서원은 중문과 오중탑, 금당, 그리고 대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면을 둘러싼 회랑과 좌우로 종루와 경루가 있고
가운데는 청동등이 있으며
중문과 금당 사이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서있다.
<법륭사 서원 내부에는 소나무가 몇그루... 중문과의 거리가 짧고 강당과 금당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2. 법륭사의 가람배치
법륭사의 가람의 배치는 6~7세기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특이한 형식이다.
가람이란 산스크리트어 saghrma의 음역인 승가람마의 준말로
대중들이 불도를 닦기 위해 모인 숲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가람칠당이란 중문, 종루, 경루, 불탑, 금당, 강당, 승방을 일컫는다.
<법륭사 서원 전경... 이 사진도 스캔... 한 눈에 볼수 있는... 회랑 좌우로 경장이 있다...>
1) 가람배치에 대하여...
가람배치란 관념 혹은 이념을 현실에 구체화시키는 공간경영의 결과물이고
실재에 의해 사상을 존재하게 하는 공간형식이자 인위적 장치다.
이러한 이유로 한 문화와 문명의 성숙도와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흐름을 읽기 위한 건축적 장치이기도 하다.
<서원 들어가는 길... 중문... 좌우로 금강역사상이 있다...>
서양의 건축양식 변화를 추적하면서 구분하는
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고전주의-낭만, 사실, 인상주의 양식도
미술사와 건축적 흐름이 직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구별하는 과정이며
우리가 건축구조의 변화와 함께 가람배치를 뜯어보는 이유도
문화적 특성을 시대의 흐름 속에서 찾고자 하는 과정의 하나다.
<중문과 연결된 회랑... 동대사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회랑의 끝부분이 약간씩 올라가 있다...>
(*서양 건축양식 변화추적은 장식적 요소(기둥/아치의 형태나 문양 새김방식 등)와
건물자체의 볼륨(아치, 첨탑이나 종루, 돔 등의 결합성)을 준거로 구별하여
건축물 하나하나의 차이와 특성을 찾아가는
미술사적인 흐름에 종속되거나 편입되어 거론되는 게 일반적이나
이 잣대로 동양 건축양식을 구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강당을 바라보면서 좌측에 경루가 있다... 소박한 형태...>
물론 문명의 보편성을 기준으로 공통점과 차이성을 거론할 수는 있으나
동서양의 신화소가 다른 만큼의 차이 즉,
한중일 삼국을 비롯한 동양의 건축양식은 공간과 전체의 조화를 기준으로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회랑 우측에 배치된 종루... 불국사와 다르게 똑 같은 모습으로 경루와 종루가 배치되었다...>
아직 서양의 건축양식만큼 동양 건축양식이나 불교의 건축적 변화가
통일성과 개별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풍부하게 검토되어 있지는 않다고 생각되지만
가람배치라는 형식을 통해 시대변화를 읽어가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청동등과 대강당... 강당과 승방보다는 탑과 금당이 강조된 형태다...>
2) 삼국시대의 가람배치
법륭사와 동시대 한반도의 가람배치는 크게 삼국의 양식으로 구분된다.
평양 청암리 금강사지의 1탑 3금당 식을 고구려 양식으로,
백제의 양식을 1탑 1금당 식으로
쌍탑 1금당(불국사, 실상사, 감은사지, 보림사 등)식은 통일신라의 양식으로 부르는데
비단 삼국의 특성만이 아니라 불교 전파순서에 따른
가람배치의 시대적 변천과정이기도 하다.
참고로 우리나라 고유의 가람배치가 완성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보는데
가람칠당에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등이 가람 전면에 배치되고
극락전, 관음전, 응진전, 영산전, 산신각, 조사당, 나한전, 명부전등이 추가되며,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산지가람 위주로 정착하게 된다.
<여러형태의 가람배치...>
가람배치 연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통도사, 송광사, 대흥사, 봉정사, 용주사, 선운사, 선암사, 실상사, 금산사 등은
대체로 평지가람을 대표하고
산지와 평지의 중간 형태로 주변지세에 어울리는 곳으로는
불국사, 쌍계사, 범어사, 수덕사, 개심사, 전등사, 갑사 등을 생각할 수 있으며
부석사와 화엄사, 해인사 등은 대표적인 산지가람으로 꼽을 수 있다.
나에게 주변 공간과 충분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상적 체계를 기반으로 건물의 위계를 공간경영에 접목시키고
독창적인 특성을 발휘하면서 시대를 앞서나간
대표적인 한국적 가람배치를 꼽으라면
불국사와 부석사 그리고 화엄사를 꼽고 싶다...
평지가람을 대표하는 통도사나, 한국적 스케일로 꼽을만한 선암사도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람은 산지가람 형식이다.
<여기에는 빠져있지만 화엄사의 완성은 사사자석탑까지를 포함해야 완결된 모습을 그릴 수 있다...>
3) 법륭사의 가람배치
다시 법륭사로 돌아가 법륭사 창건당시 일본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문화적 경향이 고르게 유입되어 있었지만
비조사(아스카사) 상량식에서 소가씨 100여명이 백제 의복을 입고
백제식 의례와 춤으로 축원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강당 내부... 내부와 외부의 공간이 분명하지 않고, 배례도 외부에서 입식으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남아있지 않는 백제의 가람형식을 일본에서 찾곤 하는데
법륭사 서원도 그런 표본 중 하나다.
백제의 대표적인 가람배치는 1탑 1금당 식이었고
법륭사 창건 당시 대표적인 가람이었던
정림사지(백제), 황룡사지(신라), 사천왕사(일본)가 이런 형식이다.
다양한 형태의 가람배치와 고고학적 흔적, 그리고 기록을 근거로
백제식 운운하는 것은 비약의 의미가 없지 않지만
690년경 화재로 법륭사가 700년대 초에 재건되기 이전에는
1탑 1금당 식으로 조성되었었다는 조사(1926~39년)도 있었고,
현재 서탑, 동금당 배치도 당시 백제에서 일부 시도되었다는 양식중 하나로
고려시대 절터중 하나인 남원 만복사지 흔적을 통해
고대 백제식 가람배치의 유형을 찾아보고 변화를 추적한다.
<강당에서 바라본 모습... 법륭사 대부분의 사진은 항상 남쪽을 향해 역광으로 찍을 수밖에 없다...>
4) 가람배치의 변화
초기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가 고구려에 정착하면서 시도된 가람배치는
1탑 3금당식이다. 즉 상징적인 배치와 기념성에 치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건물의 기능과 공간성을 중시하여
중심 위치에 실제 유효한 기능을 가진 본당이나 금당이 배치되고
주위에 회랑을 두어 사방 부속건물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가람배치는 변한다.
<서월을 둘러싼 회랑...>
이러한 흐름은 궁궐의 조성에서도 비슷한 경로로 변화하는데
절집에서의 회랑과 건물군 양식변화는 궁궐에 비해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회랑의 권위와 폐쇄성은 점차 간소화 되면서 특정 건물군으로 한정되고
후대에는 상징성도 퇴색되면서 차츰 다양화, 분산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금당... 1층의 겹처마는 후대(에도시대)에 보강되었다...>
법륭사 가람배치는 초기 일본에 전래된 불교가
불상이나 경전 위주의 전파에서,
가람불교 = 사찰불교로 정착되는 과정을 나타내며
최초 고구려 양식인 비조사(아스카사)의 1탑 3금당식이
사천왕사 등 1탑 1금당으로 정착되기 전후의 과정을 보여준다.
1탑 1금당 식은 중국이나 인도의 전형적인 가람배치가 정착되면서
불탑이 불교 신앙의 대상인 불,법,승 삼보를 봉안 표시하는 기념 건물로
사리전신 시대에 한 개의 불탑을 중심으로 모든 가람이 계획되던 시기의 배치법이다.
그리고 이 중간에 법륭사의 서탑, 동금당이란 독특한 배치가 이루어졌다.
5) 가람배치와 문명의 교류
최근 일본우익에서는
(* 일본 우익의 특성은 신자유주의(네오콘)에 대한 합류 강도보다는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하고(천황과 일본기와 국가에 대한 상징 등...),
2차 대전 패전에 대한 상실감을 군국주의적 무장으로 대체하려하며
특히 문화형성 과정에서 독자성을 강조하여
한반도를 통한 문화전파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궁극적으로 메이지유신의 제국주의적 영광을 꿈꾼다는 점이다)
법륭사 등의 서탑, 동금당 배치를 가지고 한반도 도래설을 부정하고
일본의 독자적이거나 중국에서 직수입된 양식의 수용이라는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 자료에는 삼존불 왼쪽편에 백제관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대 아스카문명을 꽃피운 가람불교의 도입과 융성은
(비조사 창건부터 640년까지 60여년의 기간에 46개의 절을 건설)
초기 비조사의 1탑 3금당 - 법륭사, 사천왕사의 1탑 1금당, 백제가 멸망한 이후
남북국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동대사는 쌍탑 1금당 식으로
한반도내 삼국의 가람배치와 연관성을 가지고 변화 발전해갔다.
<삼존불의 얼굴이 백제인이 아니라 중국인에 가깝다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으로 벽화의 주인공이
담지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백제관음처럼 두상이 길어 고구려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주장은 결국 자생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엄밀히 문명교류의 접변과정 중
불교전파는 토착종교가 흡수되고 문명이 급격하게 변화된 동화의 형식이었고,
제3의 길로 정착한 융화의 단계는 메이지 유신 이후로, 나는 본다.
일본의 우익은 전말을 중시여기나, 편협하고 오만한 자기중심적 주장에 불과하다.
창조(자생)와 모방(전래)는 동전의 양면이며,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 한반도의 가람배치는
백제에 의해서 1탑 1금당 식으로 완성되며
이를 대표하는 곳이 익산의 미륵사지다.
고구려척이 사용되었고, 1:√2의 유기적이고 기하학적 비례로 설계되었다.
당대의 황룡사(신라)나, 사천왕사(일본)는 모두
백제 장인들이 관여한 것으로 보아
불교문화는 고구려를 통해 전래되었으나
백제에서 1단계 완성되고 꽃을 피웠다고
판단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법륭사 책자에서 스캔...>
3. 금당벽화
법륭사 금당에는 너무도 유명한 담징의 사불정토도가 그려져 있다.
중국의 운강석불, 한국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을 대표하는
담징의 벽화는 그림으로는 유일한 또한 그런 이유로 동양무비의 예술로 꼽힌다.
사상적 체계나 예술적 완성도, 그리고 1400여년의 보관까지 모든 게 완벽했으나
불행히도 현재 벽화는 비천상을 제외하면 1949년 화재 이후 복원된 그림이다.
<사불정토에 대해서 차례대로 소개한다... 석가정토도>
1) 금당에서 생각하는 그림...
문제는 내가 그림을 잘 모른다는 점...^^
게다가 불교의 이론적 사상적 깊이도 일천하다는 점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햇볕이 차단되고, 인위적 조명까지 배제되어 어둡고 침침한데다
사진 등으로만 남아있는 벽화를 보며 그림을 생각해 본다...
<아미타정토>
먼저 그림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말하라면, 좋아하는 화가로 대신하는데
한국화가 세명을 고르라면 김홍도, 정선, 그리고 청전 이상범...
서양의 미술가 세명은 고흐, 미켈란젤로, 피카소...
그리고 현대 한국화가로는 박수근, 이중섭, 김기창이다...
딱 이만한 눈높이이니 그림에 대해 깊이 논의한다는 것은 조금 어설프지?...^^
<미륵정토도>
사진으로나마 살펴보는 금당벽화는 ;
안정된 구도와 대소경중의 치밀한 배치는
사불정토의 권위를 장엄하게 살리고 있고,
화려하면서도 천박하거나 가볍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정교하게, 때로는 생동감이 넘치고
단순하면서도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놓치지 않는
웅장한 스케일에 흐트러지지 않는 벽화 하나하나는 정말 좋다...
<약사정토도>
불교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가 법륭사 벽화에 비교해
500여년 후대의 작품임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 완성도를 인정할 수 있다.
<십일면관음보살>
2) 채색벽화의 의의...
금당 벽화가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하나는 서양의 중세 르네상스 이전시기,
인류 문명을 통 털어 채색된 벽화를 가진 문화권은 별로 없다는 점.
그것도 기록을 위해 문자화된 상형이 아닌
예술적 완성도를 가진 채색된 그림을
공공의 목적으로 조성한 문화권은 손을 꼽을 정도로 드물다는 점이다.
<비천도1... 화재로 손실되지 않은 원본중 하나로 금당의 북면에 그려져 있다>
문자와 조각이 생성되기 이전, 인류의 첫 예술 활동이던 그림은
조각과 구조물, 시와 문학, 그리고 연극이나 음악과 함께
가장 고차원적인 혹은 발전된 문명의 지표가 되기도 하며
이런 이유로 우리는 도자기와 기왓장, 옷감에 그려진 그림들을 살펴본다.
가장 오래된 소통방식이기에 최초의 순수함과 고도의 예술성이 공존하는
예술분야가 회화이고 그림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1884년이다.
<비천도2... 역시 화재로 손실되지 않은 원본중 하나...>
일본 고고학계에서 20세기 최대의 성과로 알려진 것이 다카마쓰 고분벽화다.
손상된 부위가 작아 채색의 원형이 살아 있고
그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지만,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일본에도 고분벽화(!!!)가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1972년)...
<다카마쓰 고분벽화... 인터넷 자료에서 인용...>
처음 한반도를 뛰어넘는, 혹은 중국의 문명이 곧바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결국 고구려의 수산리 벽화와 거의 같은 양식의 벽화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거꾸로 일본은 잠잠해졌다(한반도 양식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신경질적인 반응...)
재미있는 사실은 고분의 주인공이 당대 세력가인 소가노우마코인 것으로 추정되었고
또 다른 고분벽화인 키토라 고분 천문도는 평양에서 관측된 별자리로 밝혀졌다...
<일광보살>
결국 일본에 남아있는 금당벽화나 고분 벽화는 대부분 고구려인들의 유산이다.
특히 고분에 남아있는 그림 속 인물모습과 복식, 고분의 형태,
천문도의 관측위치와 성좌 구성까지 고구려의 독자적 전통과 신앙을 따랐다.
(고분 중 천문도가 있는 것이 중국에는 16개뿐이지만, 고구려에는 24개가 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고 관리하고 총괄했던 것은 백제계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구성이다(백제의 고분벽화는 2기가 있다 ; 송산리고분, 능산리고분)...
<관음보살>
3) 傳담징...
<보현보살>
벽화와 관련하여 담징이 추앙받고 담징의 작품이라고 전해진 이유는
담징이 일본에 종이와 먹, 그리고 채색법과 연좌방아 등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지식 전수와 전파에 가장 결정적인 하드웨어인 종이와 먹을 전수했다는 것은
200여년전 일본에 천자문을 가져와 문자를 전파한 왕인만큼의 비중을 가질만 하다.
<세지보살>
최근 일본에서는 금당벽화가 담징의 작품이 아니라
중국인 얼굴을 모델로 삼은 중국인의 작품이라는 설이 부각되고 있다.
610년경에 일본에 건너가 630년대에 사망한 담징이
690년대 전후에 복원된 금당 벽화를 그릴 수 없다는 이유다.
<금당 삼존불... 뒷면에 지리불사란 이름이 새겨져 있고, 쇼토쿠 태자가 그는 백제인이라고 말했다...>
<백제금동방형대좌반가사유상... 중앙박물관에 있는 작은 불상으로 삼존불 본존과 비교해보면...>
또한 일본의 반구고사편람에는 백제계 지리불자(止利佛子)필(筆)이란 기록도 있고
담징의 주도하에 여러 화공들이 공동으로 작업하였다는 설과
담징作이 아니라 傳담징이라고 불리운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등
이론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지리불자는 금당의 삼존불을 만들었다는 백제인 3세로 그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월광보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징의 위상 때문인지, 당시에 회화분야가 가장 발전한 곳이
삼국중 고구려여서 인지 몰라도 여전히 傳담징설이 우세하다.
실제 그 당시 유물로 남아있는 회화는 고구려의 벽화를 제외하면
백제의 고분벽화 2기와 일본에서 발견된 몇 곳의 고구려식 고분 벽화,
그리고 신라 천마도와 각국의 도자기와 벽돌과 기와의 문양뿐이다.
<성관음보살>
아무튼 금당 벽화는 당대의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 예술적 역량이 총화 된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품으로 남아있다...
금당벽화도 비천상만 원본으로 남아있고
누구의 얼굴인지 누가 그렸는지도 말이 많지만 위대한 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