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거란은 고려를 세 차례 침공했다. 그 전쟁 하나하나에 나라의 존망이 걸렸다. 고려는 때로는 패하고 때로는 이기면서 끝내 자기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앙이 닥치면 절에 부처 그림을 바치고 국난 극복을 기원했다.
1000년 전 그 어느 때 한 절에서 관음보살도(圖)를 바치는 의식이 열렸다. 그곳에서 낭독된 축원문이 '동국이상국집'에 남아 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큰 음덕을 내리시고 이내 묘한 위력을 더하사, 지극히 인자하면서 무서운 광대천처럼 적의 무리를 통틀어 무찌르게 하고, 무의 신통으로써 그 나머지는 저절로 물러나 옛 소굴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고려불화대전·국립중앙박물관) 지금도 나라의 사정이 같아선지 그 간절함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려군은 퇴각하던 거란군을 압록강 근처에서 매복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고려군의 화살은 위력을 배가해 거란군 진영으로 쏟아졌다고 한다. 관음보살이 우리 선조의 애절한 기원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으로 믿고 싶다.
당시 내 가족과 우리나라를 지켜달라는 기원식이 열렸던 사찰마다 불화(佛畵)가 걸렸다. 고려 불화는 비단에 금을 포함한 광물질로 만든 안료로 그렸다. 뒷면에도 칠을 하여 안료가 배어 나오게 한 뒤 앞에서 색깔과 명암을 보완하는 배채법을 사용했다. 그 구도와 문양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한지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금으로 그린 문양 선 사이의 간격이 비단 올 간격과 같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구별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 불화가 세계 최고의 종교 미술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런 예술성과 기교 때문만이 아니라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전력을 다해 그렸던 그 절실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외국 여행을 하면서 문화적 열등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 불화와 우리 사찰을 알게 되면서 이를 극복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지금 고려 불화는 160여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못난 후손 탓에 이 땅엔 10점밖에 없다. 그 이유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고려 불화는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로 흩어졌다. 불교와 불화를 모르는 미국의 한 박물관은 전시 규격에 맞춘다고 이 보물의 한쪽 부분을 잘라내기도 했다.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돈 한 민족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그림을 그렸을 어느 조상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만 같다.
고려 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각국의 박물관들은 그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쉽게 대여하지 않는다. 일본에선 아예 전시조차 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래서 세계에 흩어진 고려 불화를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 일을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관들이 해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선 고려 불화 66점이 전시되는 대전(大展)이 열리고 있다. 고려 불화 특별전은 전 세계를 통틀어 몇 차례밖에 열리지 못했고, 그나마 소규모였다. 이 기회는 아마도 앞으로 수십년 내에는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다.
의무감 같은 것을 갖고서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니 일본에서 온 아미타불도가 맞는다. 고려의 어느 화사(畵師)가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와 한 후손을 인자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경이로운 표현, 기하학적인 문양, 따뜻한 색감을 통해서 우리 조상의 기원과 고난이 눈에 밟히는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 불화 특유의 온화한 붉은색이 인상적이었다. 중국 불화의 붉은색은 가볍고, 일본 불화의 붉은색은 강한데, 고려 불화는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 붉은색을 갖고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온 시왕도(十王圖)의 붉은색들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같다.
지금 남아 있는 고려 불화는 대부분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전시회에 '700년 만의 해후'라는 부제를 붙였다.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700년 만에 만난 연인과 내 생애엔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 연인들이 이제 얼마 안 있어 다시 이 땅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림과 불교를 알든 모르든 많은 분이 시간을 내어 우리 민족이 이룩한 최고의 예술품들을 만났으면 한다. (그림 보호 때문에 실내가 어두우니 공연 관람용 단안경을 갖고 가면 세밀한 표현들을 좀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유홍준 국보순례][81] 물방울 관음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11월 21일까지)에는 내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던 일본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사진>, 일명 물방울관음이 출품되어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일본에 고려불화가 많이 있다는 사실은 1967년 구마가이(熊谷宣夫)가 '조선불화징(朝鮮佛畵徵)'에서 그동안 막연히 송나라 불화라고 알려진 70여점이 고려와 조선 초기 불화라는 사실을 고증하고부터이지만 혜허(慧虛) 스님이 그린 이 수월관음도만은 일찍부터 알려진 고려불화 명작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1978년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에 52점이 선보인 것은 한국미술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 물방울관음은 출품되지 않았다. 그리고 1981년 아사히신문사에서 발간한 '고려불화'라는 초호화판 화집에서도 물방울관음은 촬영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도 처음에는 센소지가 출품을 거부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에 간신히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 왔을 때 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물방울관음은 과연 천하의 명작이다. 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선재동자(善財童子)를 수월관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그림으로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자세가 고아하기 그지없고 관음은 신비롭게도 물방울(혹은 버들잎)에 감싸여 있다. 본래 명작들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작품을 직접 보면 무덤덤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물방울관음은 달랐다. 작품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숭고하고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어가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박물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