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 설립을 주도한 범곡(凡谷)
(출처 : 보정 장흥위씨요람)
범곡은 아버지 죽헌공(竹軒公) 휘 경량(慶良)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의 4남 중 셋째로 1930년(庚午)에 순천시 황전면 죽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순천농업학교를 거쳐 입대한 후 국민대와 고려대 경영대학원, 미국 아메리칸대학 명예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는 범곡(汎谷)이다.
농업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선진 영농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졌다. 바로 부산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입대했다. 2개월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 전선에 투입돼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며 두 번이나 전상을 입었다. 그래서 대령으로 승진, 화랑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상했다.
그는 뜻한 바 있어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예편했다. 제대 후 국가 산업인력 양성에 나섰다. 범곡은 산업인력 양성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전국 7만2천개 학원의 모임체인 사단법인 한국학원총연합회 초대회장에 피선됐다.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연합회 발전에 역량을 보여줬다.
그가 종친회에 관여한 동기가 있다. 어릴 때는 물론 자라서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ʻ위씨도 있느냐ʼ며 조소하는 듯한 비아냥을 들었다. 매우 듣기 싫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ʻʻ위씨를 명문으로 발전시키는 길 밖에 없다ʼʼ고 판단한 것이 그 동기이다. 그런 일념이 그를 30년 넘게 종친회에 묶어둔 것이다.
1) 전국조직인 대종회(大宗會)를 만들다
(1) 종친회와의 인연
범곡은 1972년부터 재경종친회에 참여했다. 그때 서울에 살고 있던 위씨들이 모여 처음으로 ʻ재경장흥위씨종친회ʼ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관북출신 위영환씨, 부회장은 위상규박사(서울대 항공학), 감사 위재걸씨, 총무 위계신씨 등이 당시의 임원이었다. 이들이 4년간 종친회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3대 회장을 맡았다. 1976년부터 2년간을 마치고 연임 기간 중 총무의 부도, 범곡의 정치 참여 등으로 조직이 일시 중단됐다. 그러다 흐트러진 조직을 추스려 1983년 제4대 회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12년간 1990년에 출범한 대종회와 함께 1995년까지 재경종친회를 맡으니 전후 14년간 연임했다.
범곡은 대종회장 재임 중에 대충 다음과 같은 사업을 주도 했다. ① 하산사 대제의 전국 종인 참여 확대 독려 ② 종보 발행 ③ 청소년 하계수련회 ④ 장학재단 설립 ⑤ 씨족문화연구소 발족 ⑥ 장흥위씨 요람 등 실로 엄청난 업적을 거뒀다. 어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단 한 가지도 어려운 일이다.
(2) 대전에서 대종회 발족
재경종친회로는 장흥위씨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ʻʻ전국을 아우르는 조직이 아니고는 다람쥐 쳇바퀴만 도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 하겠다ʼʼ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 전부터 지역의 어른들과 협의를 거듭해서 1990년 11월 3일 대전 유성관광호텔에서 전국의 종친 대표 72명이 모인 자리에서 ʻ장흥위씨 대종회ʼ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사장에 고 위욱량씨, 회장에 범곡이 선출됐다.
대종회의 첫 번째 관심사는 조직이었다. 우리 위씨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 줄 알아야 서로 유기적인 연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대동보나 기타 문중 사업을 위해 그때그때 각 지역의 종친들을 찾아가는 일회성 조직에 그쳤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켜 종친 기피증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중앙과 지방을 네트워크화 하는 것이다. 조직과 조직이 연결되면 불신을 해소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서로의 신뢰는 곧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흥․광주․여천․여수․부산․경북․춘천․대전․전북․관북 등 지역종친회를 지부로 하는 망을 구성, 살아있는 조직으로 만들었다.
2) 회주대제 종친참배 독려
대종회를 발족시켜 조직을 정비했다. 우선 ʻ장흥위씨 대종회ʼ간판을 1993년 4월 12일 자신이 운영하는 을지로 6가 대한간호학원에 걸었다. 이어 학원을 용산구 동자동 43~59 금주빌딩으로 옮기면서 종친회사무실도 4층으로 옮겼다. 종인들이 마음 놓고 만나고 사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는 모임의 안정에 기여했다.
범곡은 대종회가 출범되기 이전부터 종친들의 회주사 대제 참배를 종용했다. 회주사는 우리를 있게 한 원조이신 시조공을 비롯해서 중시조공․충렬공․판사공․통선랑공 등 오현조를 모신 위씨의 유일한 성지이다. 자손이면 당연히 제사에 참여하는 게 도리이다. 전국의 지부에 제사 일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했다.
서울에서는 버스를 대절해서 해마다 연례행사의 하나로 참여했다. 사실 그동안의 대제는 장흥 종친만의 제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일부 외지의 종친들이 참여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종회가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비로소 전국의 종친들이 참여해서 실로 대제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행사가 될 수 있게 됐다.
다른 행사에도 마찬가지다. 가령 시조공 사적비 제막식 같은 행사에도 전국의 종친들로 하여금 참석하게 만든 것도 대종회다. 문중의 큰 행사에 참여해서 ʻʻ우리 모두가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느끼게 하는 동질성을 높이고 자긍심을 키워주기 위한 배려인 것ʼʼ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종친들도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유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 자체가 소득이기 때문이다.
3) 장흥위씨 장학재단 출범
대종회는 장흥위씨를 획기적으로 중흥시키겠다는 야심 찬 의도에서 발족됐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해야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역사는 인물이 발전시켰다. 우리 위씨의 발전도 인물의 양성에 있다. 인물을 양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재를 발굴해서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학재단이 필요하고, 장학재단을 만들려면 자금이 있어야 한다.
(1) 험난한 기금조성 모금운동
장학금을 지속적으로 지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장학재단을 인가받기 위해서는 3억원이 기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위씨 중에는 돈 많은 사람이 없다. 종업원 1만 명은 고사하고 50명 규모의 중소기업도 없다. 십시일반 적은 돈을 모으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 욱량이사장, 찬호회장, 갑종국장 등 3명은 1992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모금에 들어가 85명으로부터 2억5천만원을 약정 받았다.
약정된 금액 중 얼마가 현금화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전주․광주․장흥․부산 등 4개 지역에서 이루어진 실적이니만큼 일단은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93년 11월 30일까지 출연을 약속한 기금은 9천2백50만원만 입금됐다. 입금 실적이 부진하자 회장, 덕운 부회장, 갑종, 봉환씨 등 4명이 다시 전국 순회 모금에 나섰다.
2차 순회결과도 예상만큼 실적이 좋지는 않았다. 1994년 12월 31일까지 57명으로부터 1억4천7백만원이 입금됐다. 1995년 3월 31일 현재는 1억5천 2백만원이 들어왔다. 실적이 부진한 이유는 스스로 기금 출연을 약속한 종인들이 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사무국은 그 해 10월 2차에 걸쳐 약속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1998년 3월 25일부터 3일간 회장과 재형부회장, 태선사무국장이 추가 모금 활동에 나서 4천5백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3월 31일까지는 62명의 종원과 22개 문중 단체에서 2억3백90만원이 입금됐다. 5월 3일 하산사 대제 때는 기금을 희사한 78명의 종원과 8개 문중, 14개 지역종친회의 이름을 새긴 ʻ장학기금 헌성비ʼ를 사우 뜰에 세웠다.
그러나 기금 조성 운동은 부진했다. 대종회는 2000년 4월 22일 마지막카드를 뽑아들었다. 전국 모든 위씨 3천4백명의 종원에게 십시일반으로 기금조성에 동참을 호소한 것이다. 5만원 이상 능력에 따라 도와달라는 요지의 서신을 보냈다. 두 번에 걸쳐 호소한 결과 2003년 말까지 316명으로부터 2천8백80만원이 모아졌다. 목표액 1억원의 약 29%에 그쳤지만 장학재단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후의 카드에 기대했으나 법인 요건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해방직후 월남해서 어렵게 돈을 모은 위재석고문의 부인 이인숙(李仁淑)여사가 1998년도 하계수련회 등에 동참해보고 후진을 위해 보태라며 2001년 3월 19일 일금 1억원을 희사한 것이다. 이여사의 거액희사는 장학법인을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여건을 마련해준 동인이 됐던 것이다.
(2) 법인설립 이전의 장학금
비록 장학법인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인재의 학업 중단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는 당장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준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어떤 학생에게 얼마의 장학금을 지급할지 대상과 액수도 정해야 했다. 그래서 장학금 지급 규정을 제정하기로 했다.
1994년 12월 10일 대종회 사무실에 회장단 10명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전문 10조 부칙의 장학 운영 규정을 심의, 대학생은 60만원, 고교생은 30만원의 장학금지급액수를 확정했다. 10일후 운영위원회에서 규정의 일부를 수정하고, 이듬해인 1995년부터 지역별로 대상자를 엄선,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추천된 대상자를 심사했다. 그 결과 대학생 7명, 고교생 15명을 확정했다. 전달식은 1995년 5월 7일 하산사 대제를 지내고 백산재 강당에서 회장이 수여했다. 장학금을 시조공 제사 때에 전달한 것은 학생들에게 문중의 전통을 보여주고, 숭조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일깨워주자는 것이다.
장학금은 그 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급했다. 2004년까지 10년간 대학생 75명, 고교생 71명 등 146명에게 8천2백10만원을 지급했다. 물론 대 성씨의 경우와 비교하면 적은 혜택일 수 있다. 그러나 위씨의 처지는 그게 아니다. 대종회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통해서 만난을 무릅쓰며 인재양성을 위해 몸부림친 소득이 그것이다.
(3) 장학재단인가와 출범
대종회는 장학재단의 설립을 위해 행정절차를 밟아야 했다. 2003년 9월 17일 대종회와 지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장학회 기본재산 3억원 적립, 이사 15명․감사 2명의 임원구성, 장학회 정관 등을 확정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2003년 10월 16일 『재단법인 장흥위씨 장학회』설립신청서를 서울시 중부교육청에 제출했다.
교육청은 접수된 서류를 심의했다. 서류에 하자가 없자 2004년 1월 13일자로 서울특별시 교육감 명의의 재단법인 장흥위씨 장학회 법인설립 허가서( 792호)를 발행해 줬다. 허가서는 2004년 2월 3일 법무사를 통해 서울 서부지방법원 용산등기소에 제출, 등기부에 등록번호 274322 0027408호로 등록됐다. 용산세무서는 2004년 2월 9일자로 10682 12192호로 사업자등록증을 발부했다.
이로써 우리도 장학재단을 정식으로 출범하게 됐다. 기금 조성 운동을 벌인지 무려 12년 만에 거둔 장거인 것이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적지만 안정적인 재원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토대를 이루었다. 대종회장이 누가되더라도 기본 재산에는 손을 댈 수 없다. 다만 영재를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는 꾸준히 기본재산을 늘려나가 야 한다. 그 일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4) 위씨종보의 꾸준한 발행
현대를 가리켜 홍보시대라 한다. 정부는 업적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각종 홍보물을 양산한다. 크고 작은 기업들도 자사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TV와 신문에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내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전단지를 뿌리고, 스티커를 제작하여 집집마다 돌리고 있다. 홍보는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이다.
종친회라는 조직도 많은 종친들과 원만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집행부도 종인들에게 사업의 내용을 알려 협조를 받아야 한다. 종인들도 집행부에 자신의 의사를 개진해서 건의하고 시정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기록성과 홍보성을 동시에 수행하기에 어쩌면 필수불가결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던데 범곡은 비교적 일찍 종보를 발행하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95년에 창간호를 낸 ʻ장흥위씨 종보ʼ는 2018년 5월에 이미 24호 째를 발행했으니 다른 문중에 비해 비교적 발 빠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는 범곡의 종친회에 대한 신념과 사명감 그리고 애족관의 발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단행본인 종보를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발행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1년마다 발행하는데 뭐가 어려우냐고 할 수 있으나 막상 책임을 지고 해보면 애로가 많다. 책을 만들려면 원고 등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책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야 종합적인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종회는 그동안 1만3000부의 종보를 발행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간행물을 발행한 것은 조직이 그만큼 안정됐다는 얘기도 된다. 조직이 안정되지 않으면 일의 지속성도 발전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장흥위씨 종보는 위씨를 발전시키는데 음양으로 촉진제가 됐다.
5) 청소년 하계수련회 개최
대종회는 1996년부터 청소년 하계수련회를 개최하고 있다. 여름 방학 동안 장흥위씨 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상의 체취가 서려있는 유적지를 순례하는 행사이다. 이는 미래의 주역들에게 조상의 성지를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하고, 또래의 종친 간에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 주자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해마다 수련회 성지순례코스는 일정치 않다. 대개의 코스는 회주사․충렬공 묘소․경호정과 저존각․석천사․존재공동상․이필재․사월재․장천재․죽천사․방촌․송광사 원감국사의 유적 등을 돌아보는 것이다. 일정은 3박4일 이들 유적을 순례하는 것이 일쑤였다. 어른들로부터 유적의 유래를 듣고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다.
이 행사도 이미 22년째 계속되고 있다. 비록 청소년 수련회라는 명칭이 붙어있지만 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외지의 종친들이 많이 참여해서 평생 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1억원의 장학기금을 쾌척한 이인숙여사도 1998년도에 이 수련회에 참가한 후 기부 의사를 굳혔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장흥에 사는 종친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상들의 유적을 가보지 않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고작 자신의 직계조상 사우나 알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외지에서 살고 있는 종친들이 장흥관내에 있는 유적을 찾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의 기회가 없다
기성세대가 2세들에게 베푼 선물 중 가장 좋은 것은 자긍심을 심어 주는 것이다. 위씨라는 성씨로 인해 경험한 스트레스를 수련회를 통해 날려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수련회는 여건이 허락된다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할 문중 행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수련자를 동원하기가 어렵다.
위씨들의 수련회가 부러워 어느 문중이 따라 해봤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인가 3년인가 하다 그만 뒀다. 해보니 생각처럼 쉽지 않더란 것이다. 어렵사리 두어 번 하다가 도저히 안돼 중지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씨들은 어떻게 하기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사를 계속 하느냐며 부러워하더란다.
6) 문화연구소와 인터넷 홈페이지
21세기를 인터넷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옛날에는 오프라임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 그 세계가 곧 사이버 세계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는데 앞서가지는 못하지만 쳐져서 못 따라가면 낙오자가 되게 마련이다. 사이버 세계도 뒤지면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사이버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성씨들은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있다. 그것도 명문일수록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ʻ종이 세대ʼ와 ʻ인터넷 세대ʼ가 공존하고 있다. 종이 세대는 인터넷에 친숙하지 않지만 인터넷 세대는 모든 생활을 인터넷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세대를 위해 홈페이지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추세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우리만의 씨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2001년 4월 대의원총회에서 대종회 산하에 ʻ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ʼ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어 2002년 4월 총회에서 전문 7조의 ʻ씨족문화연구소 운영준칙ʼ을 의결했다.
막상 연구소가 출범됐으나 개점 휴업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진용을 새로 갖춰 2003년 6월 18일 대종회에서 첫 위원회를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협의한 결과 최우선 과제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기 위한 원고부터 작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과제는 세거지의 유래를 파악, 단행본을 발행해 보자고 결의했다.
홈페이지 원고는 이듬해인 2004년 4월 17일 대의원 총회에 초안이 공개됐다. 그 초안은 연구위원 10인 중 족보에 해박한 재형(載亨), 성호(聖浩), 계방(啓昉) 3인의 위원에게 감수토록 했다. 5월 21일에는 데이콤과 영문 및 한글 홈페이지 계약을 마쳤다. 3개월 후인 7월 13일 대종회 사무실에서 위원이 원고를 심의했다.
홈페이지 전문업체인 엑스메카에 위탁, 개설에 따른 준비에 들어갔다. 엑스메카는 완성된 원고를 2004년 5월 26일 등록했다. 그 결과 야후 코리아․네이버․다음에서 한글 ʻ장흥위씨ʼ나 영문 ʻjangheungwi.or.krʼ를 치면 바로 홈페이지가 뜨고 있다. 수정 작업도 7월 27일까지 마쳤다. 그래서 사이버 세계가 열렸다.
홈페이지에는 벌써 방문자가 쇄도하고 있다. 이미 미셀 위 코너에는 3백여명이 방문했고, 천관산 정보도 매우 인기 있는 메뉴의 하나가 되고 있다. 중학생은 자신의 선조에 대해 질문하고, 어떤 방문자는 족보에 남녀가 바꿔졌다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른 방문자는 없다. 그들은 컴퓨터를 모르기 때문이다.
7) ʻ장흥위씨 요람ʼ 출판
범곡이 이끈 대종회는 실로 많은 일을 했다. 유사 이래(有史以來)란 말이 지나치게 과장이라고 평할지 모르나 그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조상들이 이룬 업적과 여러 문중이 이룬 성과를 폄하하자는 것도 아니다. 지역 단위에서 할 수 없는 일을 그의 집념과 열정으로 이룬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ʻ장흥위씨 요람ʼ은 작은 대동보라고 할 수 있다. 책 내용은 우리 위씨의 유래에서부터 위대한 조상들의 이력(履歷)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게 한 것을 비롯하여 사우와 제각의 창설 및 중수 과정과 제향일, 위씨 족보의 역사와 족보에 대한 상식 등 위씨 성을 지닌 모든 종원이 필독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장흥위씨 세거지 유래도 담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대종회 부설 씨족문화연구위원들이 전국의 집성촌을 찾아가 그 마을에 위씨들이 살게 된 경위를 파악해서 싣고 있다. 물론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많다. 그런 곳은 대동보의 면주(面註)에서 조상들의 유택 자리를 찾아 거주의 시대를 확인해 기록하고 있다.
또 모선주역의 업적을 다루었다. 시조께서 동래하신 후 298년간 실계(失系)한 후 중시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조상들이 문중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정리했다. 대동보의 지장록에도 모선의 주역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개략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이를 보완한 것이다.
고인의명복을빕니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역량과 위문 사랑에 대하여 많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이제 피안에서 새로운 생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위문중 종친들의 친목과 대종회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 많은 종친분들께서 함께하셨군요.
종친 어르신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종친 어르신들 깊은뜻 잊지 않고 본받아 대종회 종친회 활동을 더 열심히 하여 길이 보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