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천왕(聖母天王). 천왕신령. 천왕할미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있는 성모상
옜날 천왕봉에 있던것을 여기에 안치하였다고 함
1938년 천왕봉을 올랐던 노산 이은상은 "세간의 모든 어리석은
해석과 그릇된 설법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산상에 올라와
비로소 자기를 구제 받고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니, 여기 이 봉정
(峰頂)에 세워놓은 성모사의유존은 그 증거, "라며 할매의 격을 높혔다, "조선의 여신 숭배에 대한 유일한 유존' 이라는 것이 할매에 대한 노산의 생각 이였다.
윤승일 백두대간 기행 한계례21 옮겨옴
지리산 산신령 중 천왕봉 신령으로서 무당들의 대모산신(代母山神)으로 추앙된다.
마고는 늙은 노파의 모습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하늘에 살던 선녀로서 당시 모습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고 살도 희었던 여장부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중국신선전(神仙傳)의 마고파양(痲姑播痒)이라는 고사성어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선녀 마고는 손톱이 갈고리처럼 매우 길다. 거인 족이며 세상의 창조에 관여했다는 등의 설도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 강림한 ‘우리’의 마고 여신은 인간과 다른 영적 세계를 이어줄 자를 만들기 위해 내려온 것이며, 도력이 높은 법사와 부부가 되며 살면서 여덟 자매를 낳아 무당수업을 시킨다. 바로 하늘의 술수를 딸에게 전수하는 작업이었다. 그 딸들은 팔도 각지 무당들의 원조가 된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마고에 대한 신앙은 광적이었다. 무당뿐만 아니라 청춘남녀들도 많이 천왕봉에 올라와 기도를 하는데 워낙 지대가 높아 춥고 비바람까지 심해서 서로 부둥켜안는 일이 잦았다. 혈기 왕성한 남녀들이 살이 닿고 보니 민망한 꼴이 많이 벌어졌다. 하니 사랑의 여신이기도 할 것이다.
천왕봉 성모상 출처_ 김명수 <지리산(돌베개출판사)> 44~45P.
하나의 신비로운 석상이 온갖 풍상을 다 견디며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천 년 동안을 있어 왔다. 그러나 지난 1970년대에 이 석상을 우상이라 간주한 모 종교 신자들이 두 동강을 내 천왕봉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었다. 그후로 이 석상은 아직까지도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만신창이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안치되어 있는 석상은 바로 천왕봉 성모상이다. 높이 약 1.2m 너비 50cm의 앉은 자세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 성모상은 검은 돌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특이한 돌로 만들어졌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성모상을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의 상이라고 적고 있다. 혹자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 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민간의 무속적 치성과 경배의 대상물이었던 점에서 삼신할미상, 마고할미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성모상의 실체를 둘러싼 설이 분분한데 이제는 대체로 '지리산신상'이라는 데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1472년 8월 김종직이 천왕봉에 올랐을 때 이 성모상은 천왕봉 정상 성모사라는 작은 사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다음날 일출이 좋기를 비는 김종직 일행의 고사 대상물이 되기도 했다. 1489년 4월 김일손도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본 후 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에 밥과 물 한 그릇을 올리며 집에 있는 노모의 안녕과 무사한 산행을 위해 제문을 지어 기도를 올린다. 물론 김종직과 김일손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성모상을 위숙왕후상이라 여겼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모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로 성모상의 목을 내리쳤다고 한다. 성모상의 두 번째 수난은 1558년(명종 13)에 있었다. 키가 8척이고 담력이 뛰어난 '천연'이라는 중이 천왕봉에 올라 성모사당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그 곳에 안치된 성모상을 밖으로 집어던졌다. 유교는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올리는 산신에 대한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고 매우 배격한다. 그래서 천연의 이런 행동은 결국 성리학자들에게는 극구 칭송할 만한 일대사건이었다. 남명 조식은 <용사천연전>을 지어 천연의 행동을 칭송하였고 송천 양응정도 역시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특히 32세의 나이로 당시 지리산을 유람 중이었던 고봉 기대승은 칠불암으로 직접 천연을 찾아가 그의 행동을 칭송하는 장편의 시를 지어줄 정도로 감격해 한다. 그때 기대승이 남긴 시를 통해 천연의 성모사 파괴의 변을 들어보면 대략 "목이나 귀, 겨드랑이에 달걀 만한 딴딴한 멍울이 생기는 나력환자와 문둥이, 벙어리, 귀머거리가 몰려와 정성을 바치고, 난잡하고 추잡하며 남녀의 외설도 많아서"라고 한다. 당시 성모상의 신통함과 영험함에 의탁하여 질병의 치유를 빌기 위해 여러 환자들이 천왕봉의 성모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원래 천연은 바로 그전 해에 성모사를 파괴하려 했지만 완력의 무리에 막혀 한 해 늦추었다고 하는데 이는 성모상을 신봉하는 그룹이 적지 않게 반발하고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86년 9월 2일 천왕봉에 오른 양대박이 성모상을 마야부인상이라 우기는 성모사 승려와 가벼운 입씨름을 벌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연에 의해 파괴된 성모사는 곧 복구된 것 같다. 이로부터 약 200년 후인 1751년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도 영호남 지방, 심지어 경기지방의 농부들이 한참 농번기인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농사도 포기한 채 천왕봉 성모사에 모여 법석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성모상은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했지만 다행히 인근 삼장면 내원리에서 발견되어 천왕봉에 다시 모셔졌다. 이처럼 온갖 수난으 겪으며 천 년 동안, 기록상에 의하더라도 최소한 500년 이상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상을 천왕봉 제자리에 다시 모셔야 한다는 당위론에도 불구하고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1986년부터 중산리 785번지 천왕사(주지 혜범)에 모셔져 일종의 피난살이와 연금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991년 12월 23일에는 비록 초라하지만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1988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천왕사 간에 성모상을 두고 공유물 부당 점유에 관한 법정 다툼이 있었지만 1996년 11월에 산청군과 천왕사 측이 천왕사에 보호각을 건립해 협의하에 관리한다는 일 종의 중재안으로 대략 마무리 된 듯싶다. 모 종교단체에 의해 미신 또는 우상물이라는 이유로 해코지 당할 가능성이 높아 천왕봉에 곧 오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성모상은 그 누구도 부당하게 점유할 수 없으며 또 천왕봉이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참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천왕봉에 모셔야 할 것이다. 옮겨운 글입니다, 참고하십시요.
아래의 성모사은 산청군에서 새로 제작하여
천왕사 건너편에 세워 신을 믿는분들이 많이 찾아와 자기의 소원을 비는곳이기도합니다 사진을 참조하십시요
역사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여 기술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이산 오시는걸음 있으시면 곡 천ㅎ왕사를 한번 들려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