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법문 2004년3월호
영적인 진보의 신호 Signs of Spiritual Progress
글/ Pema Chodron 폐마 쵸드론
폐마 쵸드론은 카나다 노바스코티아에 있는 삼발라 계열의 ‘감포 수도원장’이며 저서로는 <도망치지 않는 지혜 The Wisdom of No escape>, <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Start Where You are>, <모든 것이 무너질 때 When Things Fall Apart>가 있다.
Shambhlasun 지 1999년 3월호에 실린 글
"우리의 그 목표를 성공이나 완성에 두고 있는 한 우리 자신과의 무조건적인 우호 관계는 성립될 수 없으며 자비심을 알게 되는 길도 막히게 된다.
스스로 나는 영적인 진보가 이루고 있는가 라고 묻고 싶을대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전을 찾고자 하는 이 마음이야말로 자신이 지어 놓은 목표에 결코 미칠 수 없는 상태로 끌어가는 함정임을 주지해야 한다.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우리가 참선 수련을 함에 있어서 그 진보를 가름할 수 있는 표시는 우리 마음속의 애증(Kleshas)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애증이란 탐욕이나 매혹에 처해서 그 감정이 흐트러지고 고조되는 강렬한 괴로움 같은 느낌이다.
물론 이런 가르침에서 애증을 없애야 한다는 나가야 할 방향을 배우기는 하지만, 우리가 강한 애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 '나쁘다'고 낙인 찍어 버리는 것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부정적인 사고와 고통이 증가할 뿐이기에.
반면에 무엇이 실지로 도움이 되는가 하면, 스스로 그 애증을 말과 행동에 싣지 않으려고 반복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렇다고 그 감정을 억눌러 두지도 않는 것, 그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다.
전통적인 가르침은 양극의 탐닉하는 견해를 떠나 중도를 발견할 것을 권하다. 이런 극단의 마음가짐의 예로 올곧기만 하여 타인을 말로나 마음속에서 힐책하고 멀리 떠나 버리게 하는 것, 혀를 깨물 듯 참고서 스스로 나쁜 놈이라 자책하는 것이 있다.
중도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힘들지만 가치있는 도전이다. 어찌해야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란 말인가. 종종 우리는 한편의 극단을 선택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즉, 행위를 해버리든지 아니면 참아내든지 말이다. 이 둘사이에 있는 중도란 무엇인지 모두지 알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중도의 열린 공간이야 말로 지혜와 자비가 자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도를 발견해 감에 있어서 우리가 알게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진보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적인 해탈이나 점진적 공부등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점차적인 해탈이니, 점진적 공부등의 말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깊게 그리고 너그럽게 관찰을 계속해 보라. 천천이 스스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해 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혹간은 견해가 굳어져서 상황을 왜곡해 가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때 남탓을 하게 되며, 어떤 때 두려워져서 뒷걸음 치게 되는지, 어떤 때 긴장이 고조되어 부드러운 마음을 낼 수 없는지, 어떤 순간에 거친 말을 내뱉게 되는지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이런한 능력은 참선수행에서부터 키워진다.
즉, 참선수행을 함으로서 우리의 현 위치와 현재의 행동을 바로 알아채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알아 챈다는 것은 심판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비로운 이해심이라는 점을 명백히 이해하기 바란다. 자비로움을 바탕으로 스스로 알아보는 이 능력은 참선을 통해 길러진다.
참선을 하는 중에 스스로와 더불어 고요히 앉아 편견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채고 이것을 "생각"이라 이름 짓고는 바로 내 쉬는 호흡으로 돌아간다. 이 생각들을 나쁘거나 좋다고 정해버리지 않고 단순히 바라보는 법을 배워간다. 참선을 해 본 사람은 스스로나 타인을 심판하지 않고 그저 있는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은 서서히 길러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채기 시작하는 것은 영적진보의 한 신호이다. 매순간 이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나 때가 이르면 스스로 알아채는 훈련이 더 잘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이 알아채는 마음이 자비로운 가운데 심판하는 이나 혹은 권위를 가진 자들이 하는 판단이 아니고 이루어짐 또한 느낄 것이다.
그러면 무조건적인 자비(maitri) 라 불리는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발생하는 어떤 일에든 조건없이 열려있는 상태를 뜻한다. 생활속에서 거듭 조금씩 더 정직하게 조금씩 더 온유하게 일어나는 현상을 인지하고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 안의 반복적인 양상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진보의 신호이다. 발생하는 현상을 알아채고는 우리가 해온 것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은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의하면 스스로 행위를 인지하나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렇게 하게 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일어난 감정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남에게 소리지르게 되거나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것을 피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이렇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 원초적이고 스스로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무지에서 헤어나오는 큰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인지하지만 습관된 행동을 버릴 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때가 이르면 스스로 행동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언가 다르게 할 수 있다"로 발전하는 순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꽉 잡고 놓지 않아서 굳어져 버린 것을 알아채는 데서 비롯한다. 이때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상태를 감지하며 우리 몸 속에서 내가 꽉 잡고 있는 무엇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몸이 긴장 하는 것을 감지하며, 자신의 마음이 얼어 붙고 있음을 느낄 때, 이를 늦추어 주며 부드럽게 하는 작업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이 "무언가 다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마음은 매듭과 같아서 생각을 놓아버림으로서 그 꽉매인 응어리를 푸는 법을 배운다. 우리 몸 또한 매듭과 같아서 이 또한 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이 무소유 혹은 놓아버리기 혹은 고정과 집착에서 헤어나는 방법이다. 기초단계에서 우리는 굳어져 가는 자신을 알아채고 이 순간 그 상태를 부드럽게 하는 훈련을 시작할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알아채기는 하지만 이를 변화시킬 힘은 없을 수도 있고, 혹은 알아챔과 동시에 굳어진 매듭을 느슨히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두는 진행과정이다. 갑자기 해방되는 순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열리고자 하는 뜻이 삶의 태도가 되어가며, 점차 스스로의 삶의 방향이 이렇게 지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변화의 과정은 드러나보여 때로는 당혹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이 고조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두서가 없고 얼마나 질투심에 쌓여있으며 호전적이고 욕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게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친절한 마음을 내려고 할 때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자각하게 되어, 자신을 행하려는 순간 자신의 인색함이 드러나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 그대로는 자비로움과 정직함으로 바라보면서 생각을 놓아버리고 굳어버리는 것을 알게 되는 때에 이를 녹이는 법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애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인 근본적인 열린 상태와 자리로움에 대한 깊은 신뢰를 키워가는 (혹은 회복해 가는) 길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애증이 감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을 영적진보의 척도로 삼는다면 당신의 수행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이 강한 감정을 느끼는 한 --평화로움도 또한 느낄지라도- 당신은 스스로 실패자라 낙담할 것이기 때문에. 목표를 삼으러 거든 차라리 무엇이 자신안의 애증의 감정을 증가시키며 무엇이 이를 소멸하게 하는지 궁금해하는 편이 수행에는 보탬이 된다. 왜냐하면 이 목표는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실패라 부르는 현상까지 다 포괄하는 실제로는 목표가 없는 탐험이다.
우리가 그 목표를 성공이나 완성에 두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과의 무조건적인 우호관계를 열 수가 없으며 자비심을 배울 길도 요원하다. 이런 목료를 두고 간다면 옳고 그름으로 금 그어진 낡은 마음그릇에 스스로를 계속 더욱 굳게 가두어 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쉬지 말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생각을 놓아버리는 연습을 하라. 그러면 용서와 해학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하여 선과 악의 심판이 용해되어 버리는 자비의 공간으로 들어설 것이다.
"목표"라는 생각도, "진보"라는 생각도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바로 놓아버리는 그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거듭 열리고 순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