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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각/회화,작품 스크랩 眞境山水畵 3齋3園 실경산수화 대금산조 가야금산조 김죽파
청운 추천 0 조회 126 15.05.22 1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생강  
                                                                 

眞境山水畵

 

진경산수화란 진경이 들어있는 산수화를 말한다. 진경이란 진수진경(眞秀眞景)을 말하는데 진경은 본래 선경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깊숙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진경산수화란 말은 도교의 철학적인 이념이 들어 있는 자연 풍경화를 말한 것이다.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새로운 화풍을 창출.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한국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과 접목시키고자 한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野外雅集類)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이는 정선(鄭敾)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그는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그려 진경산수화풍의 정형(定型)을 수립한 것이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 등으로 계승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강세황(姜世晃) 등의 화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김홍도(金弘道)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이인문(李寅文)·이재관(李在寬) 등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정선과 김홍도파 이외에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하였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다시 근대 및 현대에 생긴 어떠한 특정 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석신(金碩臣)의 《도봉산도》, 이인상의 《구룡연도(九龍淵圖)》,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松都紀行名勝圖帖)》, 김홍도의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斷髮令金剛全圖)》, 조정규(趙廷奎)의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
                                                                                                                                                                                     출처:조선시대의 화풍|작성자 얼심뜰


3 齋   :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
3 園   :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정선(鄭?, 1676년 ~ 1759년) 조선 화가

                                        아호 : 겸재 (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본관은 광산,  자는 원백(元伯),

                                                   처음에는 중국南畵에서 출발 30세를 전후하여 한국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심사정(沈師正),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

                                                                               :    통천문암(通川門巖)  청간정  해산정   만폭동(萬瀑洞) 삼일포(三日浦)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  하경산수(夏景山水) ,명경대(明鏡臺)

조영석(?)           아호 : 관아재(觀我齋)                  :   송작도(松鵲圖)

 

김홍도(金弘道)           아호 : 단원(檀園)
                                     :  선인송하취생(仙人松下吹笙) 마상청앵(馬上聽鶯)  무이귀도(武夷歸圖) 사인암도(舍人巖圖)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무동(舞童)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장승업(張承業)          아호 :  (吾園)                               :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김두량(金斗樑)           아호 :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       :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                          :    수옥정도     夏景山水圖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

                                     

 

 

 

 

 

 

 

 

 

 

 

 

 

 

 

 

 

 

 

 

 

 

 

 

 

 

 

 

 

 

 

 

정선 - 불정대와 십이폭포(이백과 여산폭포)-통천문암(通川門巖)

 

 

 

 

 

 

 

 

 

 

       

 

 

 

 

 

 

 

 

 

 

 

 

 

 

 

 

 

 

 

 

 

 

 

 

 

 

 

 

 

 

 

 

 

 

 

 

 

 

 

 

 

 

 

 

 

 

 

 

   

 

 

   

 

 

 

 

 

 

 

 

 

 

 

申師任堂草蟲圖

 

 

 

 

 

 

 

 

 

 

 

 실경산수화

중국의 회화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인물화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부문은 산수화다. 그러나 양주팔괴 이후 화단의 주류를 이룬 것은 화조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인화였다. 크게 보아 사의화로 분류할 수 있는 이러한 그림들은 그 주제가 사군자, 초목, 새, 어류 등이었으며 커다란 나무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전체를 그리지 않고 일부만을 취하여 화가의 의경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웅대한 구도의 산수화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설령 산수화를 그려도 문인화풍의 음풍농월이나 고아한 정취의 풍경만을 표현하였다. 한마디로 작가의 의경意境을 강조하며 청미담원淸微澹遠의 세계를 중시한다. 서화동체書畵同體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화풍은 청조의 고증학과 맞물려 금석학이나 비학의 영향을 받아 20세기를 전후로 하여 오창석이나 제백석과 같은 대가들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며 문제점을 노출한다. 또한 동양화의 주종이라 할 수 있는 산수화부문에서 전혀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리커란의 산수화가 주목을 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리커란은 전통화의 이러한 한계점에 돌파구를 마련한다.

리커란은 먼저 그가 살아가고 있는 조국의 산천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본다. 먼 옛날 위대한 화가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산수화를 그렸음을 상기한다. 송대 곽희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를 그리는 데는 근본이 있으니 펼쳐냄에 있어 구도를 크게 하되 남음이 없고, 줄여서 작은 경치를 만들어도 작게 보이지 않아야 하며, 또한 산수를 바라보는 데도 근본이 있으니 자연의 마음으로 임하면 그 가치가 높을 것이요, 교사한 안목으로 임하면 그 가치가 낮을 것이다.” 畵山水有體, 鋪舒爲宏圖而無餘, 消縮爲小景而不少, 看山水亦有體, 以林泉之心臨之則價高, 以驕侈之目臨之則價低 라 말한 바 있다.

 

 리커란은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상으로의 자연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함을 깨닫는다. 또한 중국 산수화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장조張璪의 “겉으로는 자연을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얻는다 外師造化 中得心源”이라는 격언을 명심하였을 것이다.

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리커란도 고국산천을 여행한다. 과거의 유명 화가들은 장자의 소요유와 같은 자연합일의 경지를 꿈꾸며 산천을 유람하였지만 리커란은 또 다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여행을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초자료의 수집이다. 마음을 함양하여 높은 정신적 경계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의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1954년 봄에 그는 무석, 소주, 항주, 부춘강, 황산 등지를 석 달 동안 여행한다. 56년에는 강소, 절강, 안휘, 호남, 사천 등 오개의 성을 무려 여덟 달에 걸쳐 갖은 고생을 하며 돌아다닌다. 57년에는 넉 달 동안 유럽의 동독에서 체류하며 사생을 하고, 59년에는 학생들과 함께 남쪽 계림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완칭리의 리커란, 73, 79, 84쪽 그 이후에도 리커란은 틈만 나면 수시로 여행을 하며 기초 데상을 준비한다.

수많은 여행을 통하여 리커란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은 과거 전통적인 개념의 자연 즉 인간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거나 또는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으로서의 이상향적 자연만이 아니라 눈앞에 실경으로 보이는 자연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연은 숨김없이 인간의 눈앞에 사실적으로 펼쳐지며 인간은 그 부분으로서 현실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자연은 인간의 삶과 생활이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존재 가능할 수도 있다. 서구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대칭적 또는 적대적이며 분석적인 자연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 있어서 인간의 실제적인 생활이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없음을 리커란은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문인화풍의 그림이나 관념적 산수에서 대단히 진일보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리커란 자신은 “생활”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생활”이라는 화두를 꺼내게 된 것은 당시 모택동이 이끄는 사회주의 현실에서 비판 받을 지도 모르는 관념적 자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리커란이 이야기하는 “생활”이 무슨 사회주의 이념적인 요소와 연관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리커란이 이야기하는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수화란 지리책이 아니다. 중국의 산수화나 화조화란 모두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이른 바 경물을 보고 정을 느끼는 것이며, 경치를 그린다 함은 또한 정을 그려내는 것으로 사물을 빌미로 정을 기탁하는 것이다” 山水畵不是‘地理志’, 中國的山水, 花鳥畵都是表現人, 所爲‘見景生情’, 寫景亦卽寫情, 緣物以寄情. 리커란의 말이다. 즉 자연은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감정이 투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영은다좌靈隱茶座(1956년)”는 고즈넉한 오후의 풍경을 그린 것인데 숲속에서 탁자를 놓고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가방을 메거나 양산을 쓰고 숲길을 거니는 사람도 보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다. “가릉농사嘉陵農舍(1956)”은 내용이나 기법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그림이다. 강 또는 호숫가 숲속의 농가가 화제다. 골기와를 포개 놓은 중국의 전형적 지붕을 지닌 집의 문 앞에는 바구니를 옆에 낀 여인이 있고 마당에는 방육된 돼지 세 마리가 보인다. 꽉 찬 구도의 위쪽으로 호수가 보이는데 새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다. 얼른 보아 산수화에 틀림없지만 고답적인 그런 풍경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녹아들고 있다. 54년도에 그린 “가가도재화병중家家都在畵屛中”은 아름다운 그림이다. 산수화 같기도 하고 서양화의 수채화 같기도 하다. 굽어 흐르는 계곡의 강 양쪽으로 마을이 보이고 강에는 배들이 보인다. 어설프게 놓은 다리도 눈에 띈다. 후경으로는 숲이 우거진 산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리커란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스런 자연산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배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를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의 자연을 보여준다. 삶과 생활이 있는 그런 자연인 것이다. 물론 자연으로서의 아름다운 품위는 전혀 잃지 않고 정말 이런 곳이 있으면 여행을 가고 싶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또는 리커란의 말대로 리커란의 아름다운 정 즉 마음이 투영되어 그렇게 그림을 구성하였는지도 모른다.

 

리커란은 1950년대 이후로 관념적인 산수화에서 완전하게 탈피하게 된다. 문인화풍의 그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그리고, 인간이 생활하며 숨을 쉬는 공간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말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胸中丘壑의 산수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그림들도 대개는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부 평자들은 리커란의 산수화에는 문인화의 품격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오히려 리커란의 위대한 점은 상투적인 전통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외연을 내면 중심에서 밖으로, 그리고 사람의 실질적인 삶으로 적극 확대하였다는 사실이다.

 

 

 전통화법의 심화 1954년부터 1959까지 리커란의 그림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여러 실험을 통해 그가 궁극적인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흔적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귀한 것은 대담함이요, 필요한 것은 혼이다. 可貴者膽 所要者魂”라는 두 개의 인장까지 새긴다. 어떤 그림들은 같은 시기에 그린 같은 화가의 것일까 싶은 것들도 보인다. 이러한 작업 중에서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전통화법의 심화이다.

첫 번째로 그가 시도한 것은 수묵을 통한 표현가능성의 극대화다. 실경산수화 또는 풍경화의 대상들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필묵법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묵만이 지니고 있는 현묘한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거나 버릴 수는 없었다. 리커란은 산수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여러 가지 준법들을 시도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바로 황산의 “천도봉天都峰(1954), ”우역기雨亦奇(1956)“, “소주호구蘇州虎丘(1956)”, “만현양도교萬縣?渡橋(1956)”, “무산백보제巫山百步梯(1956)”, “약양성略陽城(1956)”, “석조약양성夕照略陽城(1956)” 등이다. 산이나 바위 등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준법인 소부벽준이나 절대준도 보이고 점을 사용하는 미점준도 엿보인다. 그리고 묵법으로는 옅은 선염의 바탕에 중묵을 가하는 적묵법도 보이고 또 파묵도 나타난다. ”우역기雨亦奇“는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그림인데 선염기법으로 배경의 먼 산과 강 한가운데 섬들, 그리고 그 그림자를 기묘할 정도로 잘 표현하였다. 근경의 구체적 대상들은 적묵으로 더 검게 칠하고 동시에 미세한 선을 사용하여 사물의 윤곽을 표현함으로써 빠지기 쉬운 수묵의 모호성을 벗어나 사실성을 획득한다. 또한 리커란은 과감하게 마른 붓을 사용하는데 갈필이다. 옅은 담갈색을 섞은 붓으로 대상의 바탕을 문지른다. 마른 붓이다. 일종의 준찰법?擦法이다. 부포석이 즐겨 사용한 산봉개화필散鋒開花筆 散鋒開花筆 - 붓을 흩어지게 하여 파묵의 효과를 내면서도 꽃이 피는 것과 같이 그리는 것 - “대륙을 품어 화폭에 담다”, 徐敬東, 장준석 옮김, 고래실, 250쪽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그런 다음에 다시 적묵을 가한다. “무산백보제巫山百步梯”, “약양성略陽城”, “석조약양성夕照略陽城” 등은 리커란이 이미 전통화법을 완전 터득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만현양도교萬縣?渡橋(1956)

 

 

 

 

 

 

 

 

 

 

 

 

 

 

 

 

 

중국 운남성 대리 - 사진 황병윤

 

 大?散調

1971년 3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로는 부산광역시부산진구강백천(1898∼1982년)이 지정되었다.

산조는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의 순으로 된 4~6개의 장단에 판소리형의 선율을 도입하여 만든 순수한 기악독주곡으로, 가야금산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대금산조는 조선 후기에 진도() 출신의 박종기()가 처음으로 만들어 연주하였고, 이어 강백천()·전추산()도 나름대로의 대금산조를 만들었으며, 한범수()가 다시 박종기의 산조를 토대로 만들어 전하였다.

박종기산조의 짜임새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의 장단 구성이며, 조의 구성은, 진양은 우조(調)·평조(調계면조(調)로, 중모리는 우조·평조·계면조·메나리조로, 자진모리는 우조·평조·설렁제·계면조로, 휘모리는 우조·평조·계면조·메나리조·계면조로 짜여 있다.

대금산조는 반드시 산조대금으로 연주하는데 이는 줄풍류3현6각()의 합주에 쓰이는 정악대금보다 짧고 취구()가 크기 때문이다. 

 

 

 

 

 

 

 

 

 

 

 

 

 

 

 

 

 

 

 

 

 

 

 

 

 

 

 

 

 

笛流  죽향 이생강의 120분 대금산조 

음원은 “笛流  신나라 레코드  2009” 2009년 2월 20일 녹음   총연주시간은 120분   장고 반주는 허봉수

참고로 이 연주에 대해서는 앞의 음반에 실린 해설 중의 하나를 옮긴다. 글쓴이는 유영대로 고려대 교수이며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유영대의 글 - 음반 해설에서 죽향 이생강 명인의 이번 음반 적류는 하나의 경이다. 지금까지 명인은 6천 회가 넘는 음악회를 하였고, 400 여종의 음반을 가지고 있다. 대금산조가 가장 많지만 민요나 무용 반주음악, 그리고 즉흥음악이나 시대의 흐름을 담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 음반 하나하나마다 명인의 삶의 과정이 굽이굽이 담겨 있어서, 그의 음반사를 써내는 일이 명인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과 꼭 닮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명인이 이번에 낸 두 시간짜리 대금산조는 한 예술가의 경지로 도달하기에는 상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생강 명인은 2 시간짜리 ‘이생강류 대금산조’를 한 호흡으로 불어내 이 음반을 완성하였다. 음악사적으로 처음 있는 사건이자 앞으로도 불가능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대금산조는 중간에 선율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기 때문에 호흡이 쉽지 않다. 연주하는 동안 내내 ‘도둑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여느 산조보다도 호흡법이 힘들고 체력적으로 쉽게 지치게 된다. 그래서 대금산조는 현악기 산조보다 길이가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두시간 내내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산조를 연주한 것은 명인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라면 이룰 수 없는 한계적 정황이다. 명인이 청년 시절부터 마라톤을 통하여 체득한 최고의 호흡법이 있어서 비로서 가능하였을까? 명인은 전인미답의 위대한 가능성에 도전하여 예술가로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이를 완성하였다.

이생강 명인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최고의 산조를 보유하고 있다. 스승인 한주환으로 비롯된 이 산조는, 지영희, 한일섭, 전추산, 방태진, 이충선 등 당대 최고의 스승을 만나면서 갈고 닦아졌다. 이생강 명인은 한번 들은 가락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여 재현해내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이생강 명인은 어떠한 감흥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그것을 즉흥적 가락으로 작곡해서 연주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훌륭한 스승들의 가름침과, 빼어난 기억력, 그리고 즉흥적 연주능력 등이 한데 어우러져 굽이굽이 흘러내려 이룩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경이로운 음반‘적류’를 만들어낸 기저가 되었다.

 

이 음반은 지난 2009년 2월 20일에 녹음된 음원이다. 이 음반은 처음에 2분 28초 동안 다스름이 불린다. 첫 내드름에서부터 명인은 이 산조를 호흡 길게 가져가겠노라고 의지를 내보인다. 그리고 43분 39초의 진양조가 마치 장강의 도저한 흐름처럼 흘러간다. 이 음반의 제목을 적류라고 붙인 이유도 이렇게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쳐내가면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긴산조 분량의 진양조 연주에 명인은 기존의 가락과 새로이 짜넣은 가락을 담아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중모리는 25분 55초 동안 연주된다. 26분 13초 동안 연주되는 중중모리 외에도 기왕의 가락에 명인의 작곡도 담겨있어서 다양한 감정을 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묻고 답하며, 어루만지며 쓰다듬고, 맺고 풀면서 진행되는 이 선율들은 적절하게 짝을 이루어 흘러간다. 그리고 호흡 빠른 자진모리가 13분 45초 동안 우리를 긴장시킨다. 대금선율로 그려내는, 대밭에 일렁이는 바람소리며, 뻐꾸기 우는 소리, 비 죽죽 내리는 소리는 우리들의 정서를 한순간에 그 정서의 한 가운데로 이끌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엇모리와 동살풀이, 그리고 휘모리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거의 숨너머갈 듯한 긴장감으로 우리 마음이 조여 온다. 대금으로 휘모리를 연주하는 것은 정말로 이 음반이 담고 있는 최고의 경이다.

 

대금산조 - 다스름 - 02:28

          진양조 - 43:39

                   중모리 - 25:54

                            중중모리 - 26:14

                                        자진굿거리 - 1:12

                                                 자진모리 - 13:45

                                           엇모리, 동살푸리, 휘모리 - 08:35

 

 

 伽倻琴散調

5∼6개의 장단구성에 의한 악장으로 구분되며,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산조보다 먼저 발생하였고, 또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19세기 말 고종 때 김창조()에 의하여 틀(型)이 짜여졌다고 하나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즉 김창조와 동년배인 한숙구()·심창래()·박팔괘() 등도 산조를 연주한 점으로 미루어 김창조산조를 효시로 볼 수 없다는 설이다.

그리고 산조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시나위(또는 심방곡)와 판소리가 연주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틀이 잡히기 전의 유사 산조는 김창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창조가 그 가락들의 틀을 짜서 오늘날과 같은 산조의 체계를 세웠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김창조 이후 많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 탄생하였는데,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가락을 지어서 보유자()의 이름을 붙여 ○○○제()·○○○류()로 가야금산조를 전하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야금산조의 계보를 보면, 이 중 널리 알려져 있는 한성기류()·최옥삼류()·김병호류()·강태홍류()·안기옥류()·김종기류()·박상근류()·심상건류() 등이 있다.

한성기류

김창조에 이어 김우식에게 사사한 한성기의 가야금 바디[]로 김죽파()가 이어받고 있어 김죽파산조라고도 한다. 장단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일명 단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調)·평조(調계면조(調)로, 중모리에서는 경드름[調]·평조·강산제()로, 자진모리에서는 계면조·강산제·우조·계면조로, 휘모리에서는 계면조로만, 세산조시에서도 역시 계면조로 일관된다. 다른 산조에 비하여 계면조·강산제가 많고 심오한 농현(), 다채로운 조의 구성이 특징이다. 

최옥산류

함동정월(:본명 )이 이어받고 있어 함동정월산조라고도 한다.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늦은자진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짜여 있다.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봉황조·계면조, 중모리는 우조·계면조·경드름, 중중모리는 우조, 늦은 자진모리는 우조·계면조 ·변조(변음), 자진모리와 휘모리는 계면조로 이루어져 있다. 진양에서의 봉황조는 다른 유의 평조의 선율과 비슷하나 함동정월은 이를 평조라 쓰지 않고 봉황조라고 한다. 또한 진양의 끝부분도 생삼청(계면조의 변청)이라 하고, 계면조도 진계면·단계면·평계면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무거운 농현을 주로 하며 중중모리에서의 우조로 일관되는 점과 자진모리 중간에 나오는 도섭(자유리듬)부분이 다른 유에 비하여 다채롭다. 

김병호류

장단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평조·계면조, 중모리는 계면조·경드름·강산제·계면조, 중중모리는 강산제, 엇모리는 계면조, 자진모리는 강산제·계면조, 휘모리와 단모리는 계면조로 구성되어 있다. 특징은 음폭이 넓은 농현으로 인하여 다른 유에 비해 진양의 맛이 깊다. 또한 다른 유에 없는 엇모리는 김병호가 후에 넣은 가락이다. 

강태홍류

장단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평조·계면조, 중모리는 강산제·경드름·평조·계면조·강산제·계면조, 중중모리는 강산제·평조·강산제, 자진모리는 강산제·계면조·강산제, 휘모리는 계면조·강산제로 구성되어 있다. 휘모리의 마지막이 강산제로 끝나고, 무장단이 다른 유와는 달리 휘모리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계면조가 적다. 또한 다른 유에 비해 단모리가 없는 것도 특이하나 초기의 산조에는 단모리가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강태홍이 단모리를 짓기 이전에 죽은 때문이라 생각된다.  

안기옥류

김윤덕()이 이어받고 있어 김윤덕류라고도 한다. 장단구성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단모리로 짜여 있다. 진양은 우조·평조·계면조, 중모리는 계면조·경드름·계면조·경드름·계면조, 중중모리는 계면조·평조·계면조, 자진모리는 강산제·평조·계면조·강산제, 휘모리와 단모리는 계면조로 구성되어 있다.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의 리듬이 다른 유에 비하여 복잡하고 다양하며 담백한 농현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김종기류

김삼태()가 이어받고 있어 김삼태류라고도 한다. 장단은 진양·중모리·자진중모리(중중모리)·늦은자진모리(굿거리)·자진모리·휘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평조·계면조, 중모리는 계면조, 자진중모리는 계면조·경드름, 늦은자진모리·자진모리·휘모리는 계면조로 짜여 있다. 다른 유에 비하여 계면조가 많은 편이다. 

성금연류

성금연산조라고도 하며, 가장 많이 연주되는 산조이다. 장단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굿거리·자진모리·휘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서는 우조·평조·계면조, 중모리는 계면조·경드름, 중중모리는 계면조, 굿거리는 계면조·평조, 자진모리는 계면조·강산제·계면조, 휘모리는 계면조로 짜여 있다. 장단 구분에서 굿거리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며 다른 유파()에 비하여 자진모리가 간결하고 경쾌하며 감칠맛이 있다. 

심상건류

장단은 진양·중모리·자진모리로 짜여 있고, 조는 진양에는 평조·계면조가 교대로 나오며, 중모리는 계면조·경드름, 자진모리는 계면조·평조로 짜여 있다. 심상건은 충청의 독특한 지방색을 자신의 산조에 도입하여 다른 산조에 비하여 우조가 없는 평조만으로 곡을 지었다. 조현(調)도 5괘로 조율하기 때문에 곡 전체가 낮은 음[]으로 가락을 이루어 심오한 맛을 내나 조의 변화가 적어 단조로운 편이다.

이상이 현존하여 널리 연주되는 산조로 한 바탕을 연주하는 데는 30~60분이 소요된다. 가야금산조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제23호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로는 성금연·김윤덕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보유자들의 해외 이주 및 사망으로 1979년에 김죽파와 김춘지()가 다시 지정되었으나, 1980년 김춘지의 사망으로 함동정월, 1988년에는 정재국()이 지정되었다.  

 

김창조(金昌祖)

한말·일제강점기때의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다. 본관은 김해이고, 전라남도영암(靈岩)에서 태어났다. 시나위가락에 판소리가락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산조의 틀을 만들었으며, 김창조가락의 가야금산조는 한성기(韓成基)·최옥산(崔玉山)·김병호(金炳昊) 등이 전수하여 그 맥을 잇고 있다. 또 해금을 비롯하여 대금·퉁소·단소·거문고 등 모든 악기에 능통하였다

 

김죽파(金竹坡)

본명은 난초(蘭草)이고, 전라남도영암(靈岩)에서 태어났다. 처음으로 가야금산조의 틀을 짰다고 하는 김창조(金昌祖)의 손녀이다. 8세 때 가야금을 시작하고, 11세부터 13세까지 한성기(韓成基)로부터 산조와 풍류·가야금병창을 배웠다. 또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활약하였고, 1926년 상경하여 여류 가야금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다. 가야금 이외에도 당시 내로라 하는 명인들로부터 판소리·병창·승무를 배웠다. 1932년 결혼한 후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1955년경부터 일반인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며 연주 활동을 재개하였다. 당시 널리 연주되던 산조에 단모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할아버지 김창조와 스승 한성기로부터 배운 산조에 176장단과 무장단의 세산조시를 작곡하여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의 틀을 완성하였다. 또 1979년에는 할아버지 김창조가락에 진양조7장단·중모리4장단·자진모리4장단·휘모리51장단과 무장단의 일부분, 그리고 세산조시7장단 등의 가락을 추가하여 약 55분에 이르는 김죽파산조를 완성하였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제23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산조는 이재숙(李在淑)·김정자(金靜子)·양승희(梁勝姬)·문재숙(文在淑) 등에게 전승되었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金竹坡(본명 金蘭草 1911~1989)선생님은 산조의 창시자인 金昌調(1865~1919)의 손녀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탓에 그의 제자인 韓成基(1899~1950)로부터 가야금을 전수받았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는 1979년 중요무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에는 전바탕의 연주가 50여분에 달하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선생님의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섬세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김죽파류 산조는 현재까지도 가장 즐겨 연주되는 가야금산조 중의 하나이다.
 
곽수은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다스름~세산조시 (전곡)
                   
                                                                              장단별
다스름~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세산조시
                    
(J Story) 김죽파류 가양금 산조 인간 문화재-양승희씨   중앙일보 2010.11.27 
'이젠 됐다' 스승 말씀 뒤 10년이 더 걸려서야 혼을 실어 탈 수 있었다

 

                                                

지난달 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공연이 하나 열렸다. ‘악성(樂聖) 김창조의 산조 탄생 120주년 기념’ 공연이었다. 안내책자 표지에는 세 명의 얼굴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그중 조선시대 복식인 정자관(程子冠)을 쓴 남성이 120년 전인 1890년에 산조(散調·기악독주곡)라는 국악 장르를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김창조(1856~1919년) 선생이었다. 그의 손녀이며 무형문화재 23호(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였던 죽파(竹坡) 김난초(1911~89년) 여사와 죽파의 후계자인 무형문화재 양승희(62)씨가 다른 두 사람이다. 이들의 음악 가문에는 전남 영암, 평양, 중국 옌볜, 서울을 넘나드는 기연(機緣)이 숨어 있다. j가 10일 서울 삼성동 양승희씨 집을 찾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글=성시윤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스승을 만나다, 득음하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친정엄마가 평양 분이셨는데, 고향을 못 잊고, 무용가 최승희(1911~67년)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제 이름도 ‘승희’로 지으셨죠. 네 살 때부터 (한국)무용을 배우게 하시고, 피아노랑 성악도 배우게 하셨어요.”

●그러다 어떻게 가야금은 하게 됐나요

 “원주에 있는 미군 캠프에서 제가 고등학교 때 성가대 활동을 했어요. 성가대 지휘자였던 미국인 선교사께서 ‘너에게는 가야금이 맞는 것 같다’는 얘길 하셨어요. 전라도·서울·원주 등지에 오래 계셨었나 봐요. 주말마다 기차 타고 서울 가서 김정자(전 서울대 국악과 교수)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어요. 서울 갔다 온 날이면 어머니가 성냥 50개비 놓고, 제가 진양조 한 번 할 때마다 하나씩 옮기며 연습을 하게 하셨어요. 어머니가 졸 때에 제가 슬쩍 몇 개 옮기면, 깨시고 나서 어찌 아셨는지 ‘처음부터 다시 해라’ 하셨죠. 성악이랑 가야금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1969년에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했어요.”

●그때 죽파 선생을 만나신 거군요.

1985년 일본 공연 당시 김죽파 선생이 양승희씨(왼쪽)의 옷고름을 매주고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김정자 선생님이 처음 저를 서울 사직동에 있는 죽파 선생님댁에 데려가셨어요. 남자처럼 무뚝뚝하고, 무섭게 생기셨었어요. 굉장히 위엄 있고, 근엄하셨죠.”(양승희씨가 죽파 문하에 들어갔을 때 죽파는 59세였다. 당시 죽파는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소일을 했다.)

●죽파 댁에서 기거하며 가야금을 배우셨더군요.

 “저를 예뻐하셔서 항상 옆에 두시려 했어요. ‘가야금을 제대로 하려면, 결혼을 하지 마라’는 말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하겠다’ 하니 시어머니 될 분을 보겠다고 자청하셨어요. 죽파 선생님이 ‘얘는 가야금을 해야 됩니다’ 하시니까, 시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4대 독자이니 아들만 하나 낳아주면 선생님께 이 아이를 내놓고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하셨어요. 76년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퇴원하면서 곧바로 죽파 댁으로 들어갔어요. 선생님이 제 산후조리를 해주셨죠.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 얼굴을 겨우 봤어요. 정말 피눈물 나는 시간이었어요.”

●죽파의 후계자로 선택을 받으셨죠.

 “선생님 댁에서 생활하다가 80년에 제 독주회를 하게 됐어요. 시댁에서 500만원짜리 수표를 하나 주셨어요. 선생님께 초연 작품도 받고 극장 계약할 때 낼 돈이었죠. 선생님께 드려, 선생님이 문갑에 넣어 놓으셨는데, 한 달쯤 지나 극장 계약하려고 ‘돈 주세요’ 하니까 ‘네가 돈 가져간 게 언제인데 지금 돈을 찾느냐’ 하시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돈을 잃지 않으면 선생님을 잃어버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 제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선생님’ 하고 나왔죠. 그러고 나서 얼마나 놀라고 울었는지…. 그런데 일주일 뒤에 선생님이 온 집을 뒤져서 쓰레기통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돈봉투를 찾으신 거예요. ‘너는 어린애가 왜 그렇게 통이 크냐. 500만원을 잃어버리고도 뭐 돈을 가져갔다고’ 하면서 굉장히 야단을 치셨어요.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잃어요. 돈을 잃고 독주회를 안 하는 게 낫지’ 하면서 울었죠. ‘내 후계자는 이 아이다’ 하는 마음을 그때 가지셨다고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어요.”

●스승께서 가야금 실력을 인정해 주셨나요.

 “늘 ‘호리(毫釐·매우 적은 분량) 차이로 내 소리가 아니다’ 하셨어요. ‘죽을 때에 내 손을 너에게 잘라주고 가고 싶다’는 말씀도 여러 번 하셨고요. 89년 돌아가시기 직전에 ‘됐다. 이제 여한이 없다’ 하셨는데, 선생님 돌아가시고 10년 넘게 지나서야 득음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89년 죽파는 직장암으로 타계했다. 슬하에 혈육이 없어 양승희씨가 상주를 맡아 상을 치렀다.)

●죽파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셨는데, 열 달 만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품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인 김창조 선생께 가야금을 배우셨대요. 여덟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친을 따라 황해도로 가셨어요. 아버지는 음악을 안 하고 공무원이 되셨어요. 재인(才人)이었던 자기 아버지(김창조)의 삶이 비참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딸이 가야금 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셨대요. 가야금을 하려면 꼭 기생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겠죠.

  죽파가 계속 가야금에 빠지니까, ‘다신 집에 들어오지 마라’ 한 거죠. 할머니가 죽파를 데리고 목포로 와서 양부모를 얻어주셨어요. 그게 죽파가 열 살 때예요. 양부모 배려 덕에 할아버지 제자 중 한 분이었던 한성기(1889~1950) 선생께 3년 동안 가야금을 배우셨어요.”

●결국 기생이 되셨나요

 “열두세 살 때인가 권번(일제 강점기의 기생 조합)에 들어가셨대요. 가야금을 기막히게 타셨는데, 하도 추녀라고 소문이 나서 발을 내리고 공연을 하셨어요. 그런데 손님 중에 선생님을 예쁘게 보신 분이 계셔서 그분께 시집을 가게 됐어요. 경성법대를 나오고 집안도 좋은 분이셨죠. 시집 가시고는 집에 들어앉으셔서 가야금을 타셨어요.”

● 김창조 선생에 대해선 뭐라 하셨나요.

 “생전에 ‘내 할아버지가 가야금 산조를 만든 분이다’라는 얘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타계하실 때까지도 ‘어딘가에 할아버지 악보가 있을 거다. 너는 대학도 나오고 했으니, 꼭 좀 밝혀 다오’ 하고 당부를 하셨어요. 그런데 김창조 선생의 수제자 대부분이 월북을 하신 바람에 (그분이) 산조 창시자인지, 아닌지가 (남한에서) 오락가락했던 거죠.”

●죽파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나요.

 “‘높이 나는 새는 명중을 당하지 않는다. 높이 비상(飛上)하라’ ‘적대감 가진 사람들에게 예술로 승리하라’ ‘네가 대학교수를 안 하고 (집에) 들어앉아서 예술을 해도 득음을 하면 예술의 향이 십리를 간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결국 득음을 하셨나요.

 “선생님 밑에서 20년 가까이 가야금을 했는데도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음악이 됐다, 안 됐다 하며 요동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악기들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가야금 외에 판소리, 병창, 무용, 아쟁, 거문고 이런 것들을 다 하셨어요. 김창조 선생도 가야금, 거문고, 해금, 피리, 단소, 판소리를 다 하셨고요. 그래서 저도 92년 판소리, 철금, 아쟁, 설장구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10년을 꼬박 학생처럼 생활했지요.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연습했어요. 아쟁을 배움으로써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저음, 슬픈 소리를 얻을 수 있었고요. 철금을 하면서는 높고 청아한 소리를 얻었어요. 음악 어법은 판소리를 통해 얻었고요. 이렇게 10년을 하고 나니까, 어느 날 가야금이 확 뚫리고, 선생님이 원하시던 소리가 자유자재로 나는 거예요. 가야금을 타고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운보 김기창 화백 그림책을 보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운보 그림 중에 금붕어 그림이 딱 하나 있는데, 제가 휘모리를 타니까 금붕어 꼬리가 순간 빨리 움직이는 거예요. 제가 천천히 하니까, 꼬리도 천천히 움직이고요. 금붕어 꼬리에서 찰라의 경험을 한 거죠. 선생님께서 ‘혼(魂)이 가야금 줄에 떨어져야, 네 마음이 움직이고 남의 마음도 움직인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알겠더라고요. 역시 가야금의 옳은 소리에 가려면 모든 것을 다 희생해야 하더라고요.”

●득음과 성공을 다 하기는 어려운 것인가요.

 “요즘 애들은 똑똑해요. 누구 뒤에 줄을 서야 성공하는 줄 다 알죠. 다들 빨리 강사 되고, 대학교수도 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득음은 인생을 걸어야 해요. 옳은 소리에 가려면 모든 걸 다 희생해야 해요. 김창조 선생님이나 죽파 선생님도, 현실이 어려우니까 그렇게 좋은 음악을 하실 수 있었던 거죠. 요즘 애들은 기본은 잘 쫓아 하지만 인내심이 부족한지, 하고 싶은 게 많아선지, 어느 정도만 하면 다 된 줄 알아요. 그에 비하면 저희 가문에 온 애들은 정말 예술을 사랑해서 가야금을 하는 애들인 거죠. 예술은, 예술 자체의 길을 지향해야 하는 게 마땅해요.”

스승의 유지를 받들다

●스승인 죽파가 ‘할아버지인 김창조 선생의 악보를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다는 게 무슨 뜻이죠.

 “김창조 선생 때만 해도 악보 없이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악기를 가르치셨어요. 선생의 제자가 몇 분 계셨는데, 그중 직계제자는 안기옥(1894~1974)이라는 분이셨어요. 이분이 김창조 선생으로부터 10년 넘게 가야금을 배우셨는데, 해방 뒤에 월북을 했어요. 그래서 김창조 선생의 산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한에선 정확히 알 수 없게 된 거죠.”

●그럼 어디에서 찾았나요.

 “죽파가 돌아가시고 나서 ‘중국 사람 중에 안기옥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운 사람이 혹시 있느냐’를 수소문했어요. 그러다 90년 김진(1926~2007) 옌볜예술학교 교장을 만나게 됐어요. 한·중 수교하기 2년 전이었네요. 김진 선생은 중국에서 태어나 원래는 바이올린을 하셨는데, 55년에 평양음대에 유학을 갔다가 57년부터 3년간 안기옥 선생한테 가야금을 배우셨어요. 이분이 안기옥 선생에 대해 제게 다 얘기해 주고, 두 트렁크나 되는 북한 논문도 주셨어요. 968편이나 되는데, 거기에 김창조에 대해 국내에서 긴가민가하던 게 다 정리돼 있더라고요. 우리는 ‘인민’이라는 글자만 있어도 기절하던 때잖아요. 그래서 10번쯤 중국을 들락날락하며 자료를 조금씩 감춰 가지고 들어왔죠.”

●거기에 김창조 산조 악보도 있었나요.

 “김진 선생이 하신 일 중에 놀라운 게 있었어요. 김창조 산조를 채보(採譜)하고 녹음을 하신 거죠. 안기옥 선생이 북한에서 1급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평양음대 교수를 하고 계실 때였어요. 하루는 안기옥 선생이 ‘자네는 바이올린 하는 학생이라 악보를 그릴 줄 알지’ 하고 묻고는 ‘내가 가야금 한 가락을 세 번 탈 테니 그대로 악보로 만들어봐’ 했대요. 그러고선 ‘자네가 그린 것을 가야금으로 타보라’면서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했고요.”

●그럼 북한에도 김창조 계보가 있는 것 아닌가요.

 “북한에서는 안기옥 선생 제자였던 정남희(1906~84년) 선생이 김창조 가락을 조금 했어요. 안기옥 선생의 손녀인 안화열씨가 지금 평양음대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는데 김창조 산조는 안 하고 자기 할아버지 산조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서는 산조가 부르주아 음악이라고 해서 잘 안하고, 현대창작곡을 주로 하고 있어요.”

●김창조 산조를 알리기 위해 어떤 작업을 해오셨나요.

 “김창조 산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유네스코에 등재되려면 학술적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음악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99년에 ‘김창조 산조’ CD를 출판하고, 2001년에 전남 영암에서 산조축제 및 학술대회를 시작해 10년째 하고 있어요. 2004년에는 국가에서 김창조 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고요. 내년에는 영암군 지원으로 기념관 착공식도 할 예정이에요.”

●스승의 유지를 이루신 건가요.

 “김창조 선생께서는 고향인 영암 월출산의 깨금바위(가야금바위) 속에서 가야금 산조를 지으셨대요. 제가 몇 년 전에 거기 앉아서 가야금을 하는데 온몸에 전율이 흐르더라고요. ‘죽파 선생님이 저를 아껴주시고 가문을 이루어달라고 소원하신 게 우연한 일이 아니구나’ 싶어요. 죽파도, 김창조도 육신은 가고 없는데, ‘나를 첩첩산중에 데려다가 이렇게 연주를 하게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대한 예술은 육체가 없어도 후손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죠. 김창조 선생은 남도 일대에서 순회 공연을 하셨고, 그 손녀인 죽파 선생은 일본 공연을 두 번 다녀오셨는데, 저는 이제 카네기홀·링컨센터 같은 데에 가서 산조를 연주하고 있잖아요.”

j 칵테일 >> 가야금 산조(散調)

국악의 한 장르인 산조(散調)는 ‘순수 기악독주곡’이라 할 만하다. 장구 장단과 판소리 음조를 기초로 하고 있다. 1890년 김창조 선생이 가야금 산조를 만들면서 산조의 틀이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산조가 생긴 지 올해 120주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기악 독주가 없었단 얘기인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국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가야금 비슷한 악기들이 출토된 것을 떠올리면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렇다’.

 산조가 생기기 전까지 가야금은 다른 악기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합주(풍류), 무용을 위한 반주, 그리고 무속음악 계통의 시나위를 연주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분량도 길어야 5분에서 10분 사이였다. 심방곡이라는 이름의 간단한 독주가 있긴 했지만, 그 길이가 5분을 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김창조가 만든 산조는 40분을 넘는 대곡(大曲)에 해당한다. 서양 음악으로 치면 소나타 같은 형식이라고 할까.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가 나온 이후 한국 음악사는 획기적 전환점을 맞는다. 논산 강경 출신인 백낙준이 김창조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고서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이후 대금(박종기·강백천), 해금(지용구), 단소(전용선), 퉁소(편재준), 피리(이충선), 새납(한일섭), 아쟁(정철호) 등 다른 악기에서도 산조 창작이 뒤를 이었다. 독주의 재발견, 아니 독주의 발견이 들불처럼 번졌던 것이다.

 

 

 

 

 

 

 

 

 

 

 아시아 민속음악
Thumri - Raga Bhairavi - Tala Dipachandi - 노래 Dipali Nag, Sarangi 연주 Sabri Khan, Tabla 연주 Zamir Ahmad Khan
                                                                                         음원 : Anthology of world music, North Indian classical music, disk 1, 연주시간 11:14
* 뚜무리(Thumri)에 대하여
뚜무리와 가잘은 북인도 지방의 대중음악이다. 이것은 도시풍의 음악으로 대중음악이기는 하지만 예술성이 있는 음악이어서 세미 클라식과 비교할 수 있는 음악이다. 또한 음악의 분위기는 매우 경쾌하고 내용은 낭만적이며 종교적인 사설로 노래한다. 노랫말은 힌디어를 쓰고 주제는 힌두교의 신비주의자들이 벌이는 바크티(bhakti 信愛- 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운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뚜무리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19세기 중엽 와지드 알리 샤 궁을 다스리던 오드Oudh가 만들었다고 한다. 뚜무리라는 말은 춤추는 사람이 발로 찍는 동작을 소리말로 나타낸 'thumuk'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북인도의 카탁춤을 보면 뚜무리와 관계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뚜무리의 노랫말 형식은 매우 자유롭다. 노래의 주제로 흔히 등장하는 것은 크리슈나의 전설이다. 크리슈나는 힌두신의 화신이다. 뚜무리의 주제는 크리슈나와 인척관계에 있는 라다와 다른 고피(우유를 짜는 처녀)와 관계가 있다. 이 노래는 라다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고통 또는 기다림 등을 노래하고 있다. 이 음악의 라사(rasa)는 사랑과 비탄이다. 바크티를 예찬하며 한편으로는 시과 인간과의 결합을 추구하는 내용이 많다. - 인도음악의 멋과 신비

 

 

탕현조  -  모란정  -  제 10 착 유원경몽  -  곡패 조라포           노래 - 梅蘭芳
                 梅蘭芳 : 메이란팡(梅蘭芳, Mei Lanfang) 1894 장쑤 성(江蘇省) 양저우(揚州)~1961. 8. 9 베이징(北京) 중국의 대표적 고전극인 경극(京劇)의 배우.

 

 

 

모란정  -  제 10 착 유원경몽에서 곡패   步步橋 醉扶歸         노래 장계청

 

 

 

한국의 3대 정원

한국 전통정원의 미와 풍취는 서울 종로의 석파정(),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 전남 완도의 부용동() 정원,담양의 소쇄원(), 대전의 남간정사(), 경남 함안의 무기연당(), 경북 영양의 서석지(), 월성의 독락당(), 봉화의 청암정(), 경주의 안압지()에 남아 있다. 

 
담양 소쇄원 (潭陽瀟灑園)http://www.soswaewon.co.kr/
소쇄원은 전라남도 담양군에 자리하고 있다. 남으로는 무등산이 있고 뒤로는 장원봉이 보인다. 소쇄원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별서란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된 정원으로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 한 공간이다. 이 정원은 조선조 조광조의 제자 인 홍문관(弘文館)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중앙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조성한 것이다.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전체 면적은 4,060㎡(지정구역), 118,866㎡(보호구역)이다.
전체 규모가 만평이니 꽤나 너른 정원이다. 평지에 만든 것이 아니라 산비탈에 흐르는 계곡을 중심으로 담을 두르고 건물을 조성한 것이다. 담이라 해도 폐쇄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의 공간 개념을 창출하는 데 불과해서 완전히 열려져 있는 담이다. 우리는 대나무숲을 따라 숲 속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원에 이르른다.
1755년 영조시대에 소쇄원을 그린 목판화가 현존한다. 목판화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기본구조를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목판화의 구도를 따라 정원으로 들어간다. 정원의 입구에는 계류를 가로질러 돌다리가 있다. 좁은 길 주위에 대숲이 울창하다. 협로수황夾路脩篁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소쇄원 사십팔영四十八詠에 나오는 이름이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에 이름이 난 유학자이다. 그가 이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정원의 48가지 소재를 주제로 시를 읊었으니 그 중의 하나다. 조금 더 위로 계류 양편에 석축이 있고 멀리 아름다운 폭포가 보인다. 석축위로는 다리가 있어 고암정사鼓岩精舍와 부훤당負喧堂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든다. 이 두 건물은 아쉽게도 사라지고 현재는 없다. 투죽위교透竹危橋다. 대숲사이로 위태로이 걸친 다리라는 뜻이다. 김인후의 48首중 9번째다.
 

큰 대숲을 뚫고 골짝에 걸쳐놓아
우뚝하기가 둥둥 떠 있는 듯
못은 워낙 아름답지만
다리가 놓이니 더욱 그윽해

다리는 남아있지만 건물들은 사라지고 없다. 옆에 배롱나무만 한가롭다. 길 한 편에는 연못이 있어 고기가 노닌다. 더 올라가면 우리는 곧바로 정원의 한 가운데에 도달하기 시작한다. 아름답다. 계곡을 건너 앞으로는 광풍각光風閣이 보이고 흐르는 계곡물은 폭포가 되어 바위틈을 굽이굽이 꺾이며 떨어진다. 곧바로 조그만 연못이 나오고 우리는 길가의 자그마한 초정草亭을 보며 앉을 곳을 찾는다. 대봉대待鳳臺이다. 봉황이 있으니 벽오동도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여기서 시를 남긴다.
 

我生之歲立斯亭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人去人存四十齡 사람이 오고 가고 마흔 해로세
溪水冷冷碧梧下 시냇물은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고
客來須醉不須醒 손님이 와서 취해도 깨지를 않네

소나무 가지 사이로 건너 기슭이 보인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은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인공적으로 돌로 만든 산이다. 널직한 상석床石도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초정의 옆길을 따라 담장이 기다랗다. 애양단愛陽壇이다. 바람막이 기능을 하고 있다지만 정원의 중심부에 있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구성요소들을 칸막이 해 줌으로서, 열려져 있지만 약간은 압축되고 긴장되는 아름다움을 살려준다. 한가로이 길을 더 올라간다. 담 따라 놓인 길이 수계산보脩階散步이다. 긴 계단을 산보한다는 의미이다. 하서는 다시 읊는다.
 

넓게 트인 마음 속세를 벗어나는 생각으로
자유로이 뜰 위를 거닐었다네
읊을 때는 그저 시를 짓는 뜻뿐이었으나
읊고 나니 또한 그마저 잊어

담장이 왼쪽으로 꺾이며 우리는 오동나무와 살구나무를 본다. 커다란 와송臥松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없다. 땅을 엎는 듯 펼쳐있는 노송이 얼마나 멋있었을까. 지금껏 보아온 담이 잘 가꾸어 진 것에 비해 윗쪽 담은 옛 맛이 한층 더하다. 돌과 흙이 어우러져 투박하다. 창덕궁의 잘 다듬어진 벽돌담이 시각을 즐겁게 할만큼 여러 가지 무늬와 색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런 담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친근하고 편안하다. 안동 하회마을의 담들도 다 돌과 흙이다. 흙내음이 물씬 풍기는 담 너머로 대숲이 보인다. 담을 따라 우리는 건너편으로 다리를 지난다. 계류가 다섯 번 휘이니 오곡수五曲水라 했던가. 커다란 돌받침 위에 담장은 계속 물위로 지나가고 그 곳에 오곡문五曲門라고 쓴 초서草書가 보인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_1689)의 글씨라는데 가운데 곡자가 내 실력 밖이다. 송시열의 글씨는 이것 말고도 몇 군데 더 있다. 귀한 유산이다. 괴석이 보이고 우리는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담을 따라 제월당 쪽으로 발을 옮긴다. 제월당에 미치기 전에 이층으로 된 매대梅臺가 나타난다. 옛날에는 매화와 난이 있었다는 데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산홍이 붉게 피어난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가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을 뜻하는 건물로 주인이 책을 읽으며 거처하는 곳이다. 중심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소쇄원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지붕의 보통양식이다. 앞마당에는 파초芭蕉가 커다란 잎을 너울거리며 서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없다. 계곡 방향으로 내려오면 다시 정원의 중심부이고 광풍각이 나타난다.
광풍각에서 보이는 경치는 정말로 아름답다. 옆의 돌담위로는 여름에 배롱나무꽃이 걸쳐지고 반대편으로는 봄에 복숭아꽃(현재는 없다)이 만발한다. 탁 트인 앞으로는 폭포소리가 요란하며 물이 하얗게 부서진다. 여름이라도 시원한 냉기가 돈다. 건너편에는 아까 앉아 쉬었던 오두막이 보인다. 아마도 이 곳에 머무른 적이 있는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이 곳의 아름다움을 위해 시를 짓는다. 고경명이 누구인가. 학교에서 배우기를 임진왜란 때 의병 육천명을 모아 금산에서 왜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산화한 의병장이 아니던가. 이 싸움으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아 큰공을 세운 것이다. 강인한 의병장의 얼굴 뒷면에 이런 아름다운 시와 서정이 숨어 있으니 우리 역사의 멋이요 자랑이다.
 

가을밤에 그대 생각 간절하다오
꿈결에도 그 곳 빗장 더듬었다네
손님의 옷자락은 대숲을 스치고
차가운 샘물소리 구름 밖까지 들리네
책방에 켜진 불빛 밝기도 하고
거문고 있는 처마엔 흰 이슬이 침노했다
신선과 그대는 서로 사귀는 듯해
그 모습 아름다워 옷깃이 여며지네

광풍각을 보노라면 우리의 심성이 보인다. 우선 둘러 싼 담이 ㄱ 자 부분에 불과하고 앞으로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툭 열려져 있다. 공간을 둘러막고 아름다운 괴석과 나무를 심어 공간 안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중국의 경우와 다르다. 집을 지으려고 쌓은 축석도 우리 식이다. 게으름(?)의 표본이다. 막돌을 주어다가 그 돌생김에 맞추어 축대를 쌓았다. 벽돌로 반듯하게 쌓은 것도 아니고 요즈음의 축대처럼 비슷한 규격으로 된 화강암을 쌓은 것도 아니다. 돌의 본성을 존중하여 그저 돌의 힘만을 빌려 위치만 옮겼다고나 할까. 우리는 이러한 석축형식을 불국사에서도 보고 부석사나 송광사 등 어디에서도 본다. 부석사의 석축을 보면 우리는 그 자연스러운 조형미에 빠져들면서도 역사의 오래된 이끼내음을 맡게 된다. 그리고 역학적으로도 이러한 형식은 깍아 맞춘 돌더미보다 더 견고하고 오랜 세월을 버틴다. 그 현명함과 멋이란 대단하다.
광풍각은 조그만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그러나 구조가 특이하다. 안에 한 칸을 온돌방으로 하여 손님이 기거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삼면을 막는 벽 대신에 들어열개문으로 구성하여 평소에는 문을 접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방을 둘러싸는 삼면이 모두 마루로 되어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교유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제공된다. 동시에 사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건축물이지만 그 건물은 열려져 있는 자연의 거대한 공간에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열려져 자연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언제나 자연과 합일하는 것이다.

보길도 세연정甫吉島 洗然亭  : 全羅南道 莞島郡 甫吉面
 
 
경북 영양의 서석지(瑞石池) :  경북 영양군 입맘면 연당리 394-1
 
 

일본 3대 정원( 日本三名園)이란 뛰어난 경승지인 세 개의 일본 정원, 가나자와 시겐로쿠엔, 오카야마 시고라쿠엔, 미토 시가이라쿠엔의 총칭이다.

세 정원 모두 에도 시대의 다이묘 정원이며 그러므로 모두 전략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중국 정원 :  소주, 양주, 상해, 남경 일원에 퍼져 있는 무수한 정원

창랑정滄浪亭

창랑정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더불어 쑤저우의 4대 정원이다. 쑤저우에서도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1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창랑정은 쑤저우고전원림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200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오대(五代)시대 오월국(?越國) 광릉왕(?陵王)의 개인정원이었으나 1044년 북송 시대에 시인 소순흠(蘇舜欽)이 이 곳을 사들여 물가에 창랑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면적은 1만㎡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체 분위기와 구조가 조화롭고 간결한 양식에 고풍스런 분위기를 보여 독특한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정원 안의 산과 정원 밖의 연못 사이에 세워진 복랑(?廊:양쪽 공간 사이에 벽이 위치한 복도)에서 보면 산과 호수가 일체가 되어 안에는 산이 있고 밖에는 물이 있는 것처럼 보여 풍치를 더해주고, 특히나 창랑정에는 108종에 달하는 창문 양식이 있고 그 디자인이 극히 다양해 쑤저우 정원 장식창문 양식의 전형이라고도 불릴 정도이다.

그 외에도 양 옆의 돌기둥에는 구양수, 소순흠의 시가 새겨져 있는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자향의 감동을 선사한다.

 

 이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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